교회사산책

 2024-02-27.jpg프린스톤신학교 교사

 

미북장로교회 신학논쟁: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교회의 생명력은 신학에 달려 있는가?

 

 

신학은 교리논쟁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가? 신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생명력을 잃은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인가? 교파, 교단 간의 신학의 차이는 일치를 주저할 만큼 심각한 것은 못되는가?1 성경론이 연합일치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은가?

 

 

우리가 교회연합일치 활동에서 실제로 부딪치는 난관은 (1)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과 (2) 포용주의, 다원주의 태도를 가진 교단 또는 거짓 교사를 용납하는 교회와 일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교회의 공식 고백문서는 이단 고백을 담고 있지 않지만 실제에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향, 수용하거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자를 목사로 안수하거나 신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도록 하는 교회와 연합,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브래들리 롱필드 박사(Bradley Longfield)는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에피스코팔교회(성공회), 그리스도교회 등 프로테스탄트교회 주류 교단들이 사양 길로 접어든 원인을 분석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르러 생명이 위협당할 정도로 교인수가 엄청나게 줄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더 이상 교회다운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2 장로교회는 1966년부터 1987년 사이에 120만 명 이상의 교인을 잃었고, 감리교회는 1970년에 1,060만 명이던 교인 수가 1986년에 이르러 92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롱필드는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가 생명력을 잃은 것은 1920년대의 자유주의-근본주의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교단의 규모는 미국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아니지만 신학적, 사회적 영향력은 규모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이 포용주의 정책을 지지한 결과로 자유주의 기독교가 교회 안에 기틀을 마련했고, 교회의 신학이 좌경화되자 그 때부터 내리막길을 걸어왔다고 지적한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의 전신인 미국북장로교회(UPCUSA)1920년대와 1930년대에 겪은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의 대립은, 중도파가 정치적인 동기로 포용주의 태도를 보이면서 자유주의자들 그룹을 동조한 결과로 개혁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로 프린스톤신학교는 좌경화되고, 교단은 분열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정통장로교회(OPC)가 설립되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갈등과 분열은, 교단이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신앙하지 않는 자들을 목사로 장립하고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초자연적 능력을 부정하는 목사를 제재하지 않는 등 자유주의 기독교를 포용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 교회가 생명력을 잃은 것은 신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결과이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을 생명력을 상실한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라고 비난하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자고 하는 말이 어느 정도로 위험하고 해로운가를 말해준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 과정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변질 현상과 비슷한 점이 많다. 아래의 네 장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된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논쟁과 분열 사건을 한국교회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점들을 중심으로 간명하게 요약한 것이다. 브래들리 롱필드의 미국장로교회 논쟁(1991)과 네드 스톤하우스의 메이첸의 생애와 사상(1987)을 큰 폭으로 참고했다.

 

 

1. 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전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로 종결된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논쟁은 1922년부터 1936년까지 14년 동안 목사안수 자격, 프린스톤신학교의 사명, 외국선교부의 정통성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은 해리 포스딕(Harry E. Forstick)이었다. 침례교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편목제도에 따라 장로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그는 1922521일에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그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관용을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성경의 권위, 진화론, 외국선교에 대한 보수계 견해를 공박했다.

 

 

포스딕은 자유주의 신학이 현대 과학과 종교 지식을 옛 신앙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복음주의 기독교라고 변호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전통적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려는 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관용이 결여된 사람들이다.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죽음, 육체부활, 초자연적 이적능력과 같은 한낱 이론,’ ‘학설에 지나지 않는 교리에 연연한다. 교회가 분열을 방지하고 통일을 유지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하자면 특정 교리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정통신학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 걸맞게 변신해야 한다.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받아들여야 새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3

 

 

포스딕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통교리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성실하고 경건하다.’ 고대 세계가 영웅적인 인물의 우월성을 설명하려고 이례적인 신화를 동원한 것처럼, 동정녀 탄생은 그러한 방법에 익숙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위대한 인물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이다.4 생물학 지식을 가진 과학 시대의 지성인이 하나님의 인간됨과 남자와 무관한 처녀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포스딕의 설교가 인쇄물로 널리 알려지자 필라델피아 아치스트리트장로교회의 목사 클라렌스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불신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글로 응전했다. 자연주의(Naturalism)에 토대를 둔 자유주의 신학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조화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자유주의와 역사적인 기독교가 양립될 수 없다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전투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자유주의를 제재하지 않고 방치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5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뉴욕노회에 포스딕이 시무하는 교회의 설교와 교육이 교회의 신앙고백과 장로교 교리에 일치되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그 무렵 미국은 커다란 사회적·지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경제가 성장하고 철도와 비행기가 등장했다. 타자기와 전화기가 발명되고,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공동체 의식, 책임감, 동질감이 점점 사라지고 이질감과 익명성이 팽배했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신자들은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음주와 댄스에 대해 자유로운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생활의 세속화를 가속화시켰다. 여성들이 선거권을 획득하고,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가 개최되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성의 개방, 이혼율의 급증, 주일날의 골프대회 등으로 말미암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영적 가치와 청교도 전통이 도전을 받았다. 세속주의, 물질 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했다.6 찰스 다윈(Charles Darwin)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과 적자생존론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인류의 타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도전했다.

 

 

이러한 시류(時流)에 따라 미국교회 안에는 진화론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성경이 다윈주의(Darwinism)와 조화롭게 읽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시공(時空)과 물질과 자연법칙을 창조했고 그 뒤에는 진화 과정에 따라 세상과 인류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성경을 신화집으로 여기고 그 권위를 무시했다.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신앙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폄하했다.

 

 

그 무렵, 독일에서 유행하던 성경고등비평 추종자들은 복음서의 역사성과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 기적들은 부인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았다. 모세오경의 모세저작, 다니엘서의 저작 시기, 욥기서의 역사의 정확성을 의심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기적수행 능력을 부인했다. 그 시대에 등장한 비교종교학, 종교사회학, 종교심리학 또한 절대 진리라고 믿어온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거듭 공격했다.

 

 

이러한 풍토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교회가 현대 과학과 지성이 발견한 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시대정신에 호소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과학과 일치하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성의 선함, 종교경험, 윤리의 중요성, 비평주의, 진화론, 낙관주의 역사관 등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장미빛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가 주창한 사회복음주의는 지상천국의 진전을 격려했다. 남녀가 사회개량을 위해 함께 일하고 도덕사회를 건설하면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회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움직임에 걸맞게 미국 교회들은 기독교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를 설립했고, 노동과 산업시대의 윤리와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보였다.7

 

 

자유주의 기독교 추종자들은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프린스톤신학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수용하면서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니온신학교(뉴욕)의 성경신학자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는 프린스톤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성경고등비평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성경교리에 도전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창조에 관한 부분을 자연과학과 진화론에 어울리도록 개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19세기 말의 지식인들이 발견해 낸 것과 일치되도록 개정하려는 교회 안의 일련의 움직임을 반영했다.7 브릭스는 교수 취임 연설에서 성경원본에 오류가 없다는 것은 가정(假定)이며, 모세의 모세오경 저작설, 이사야서의 단일 저작설 등은 호교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장로교 총회는 브릭스의 교수직 중단을 결정했다. 당시의 신학교 교수직은 총회가 임명했다. 브릭스가 성경의 무오성 교리와 기타 교리들을 부인하는 것은 목사임직 서약 위반이며, 장로교회의 교리표준(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목사직을 정직시켰다. 그러나 학교는 총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그에게 새로운 직책을 맡겼다. 이 사건으로 유니온신학교와 장로교 총회의 공적인 관계는 단절되었다. 총회는 브릭스의 신학에 동조하는 헨리 스미스(Henry P. Smith)의 신학교수 신분도 박탈했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 기류는 한결같지 않았다. 신학사상 문제에 대한 총회의 결정은 점차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교리와 신학은 학문논쟁의 주제일 뿐 교회의 고백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미국북장로교회가 점차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교리에 대한 느슨한 태도를 보인 데는 세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첫째,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통합(1801)으로 펠라기우스주의 훈련을 받은 회중교회 목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다수 들어와서 반()정통 교리를 계속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했다. 둘째, 컴버랜드장로교회와 합동한 결과로 알미니우스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고, 신조에 대한 느슨한 태도로 칼빈주의 신학과 불일치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은 1813년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무제한적 사랑, 어린 아이로 죽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예정론을 거부하면서 장로교회를 떠났다가 1903년에 돌아왔다. 1920년대에 현대주의근본주의의 갈등이 노골화 되자 컴버랜드장로교회 출신 목회자들은 신조에 대해 느슨한 태도를 가진 자유주의자들을 후원했다. 교리가 신앙을 규제하는 규범이라고 보지 않고 단지 토론의 과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를 고무시켰다.8 셋째는 구학파(The Old School)와 신학파(The New School)의 합동으로 자유주의적 사고와 태도가 교회 안에 팽배하게 되었다. 두 학파는 1837년에 분열했다가 얼마 뒤 합동했다. 교회 합동은 바람직한 것이었지만, 신앙고백의 일치가 전제되지 않은 합동이었던 탓으로 미국장로교회의 신학의 변질과 좌경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2차 대각성운동기에 인기를 끌던 예일대학교 신학부의 나타니엘 테일러(Nathaniel Taylor)는 신학파 신학자였다. 그는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당대의 부흥운동 분위기에 어울리는 학설이었다. 신학파는 엄격한 신조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복음주의를 강조했다. 교리를 부흥운동에 어울리게 혁신시키고자 했다. 상세한 교리보다는 영혼구원과 올바른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경시했고, 폭넓은 교리와 자유로운 성경 해석을 주장했다. 초교파 활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연합활동을 지지했다.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부흥주의와 사회윤리와 사회참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신학파는 구학파와 합동한 뒤에도 계속 펠라기우주의적 신학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구학파는 경악했지만 교단 통합을 할 때 신학, 교리, 신앙고백 조건에 대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구학파 인사 가운데도 신학파의 거짓교리를 비판하고 정통교리의 선포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교단 통합은 그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제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엎질러진 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돌입했다.

 

 

2. 그레스앰 메이첸의 응전

 

 

자유주의 신학이 기승을 부리자, 장로교 총회는 1910년과 1916년에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다섯 가지 교리를 확정했다. 목사직임을 받는 사람들은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죽음, 육체부활, 초자연적 기적능력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총회가 장로교회의 교리 체계 전부를 안수 조건으로 제기하지 않고 5대 근본교리만을 요구한 것은 단순한 질문으로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를 발본색원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린스톤신학교의 그레스앰 메이첸(Gresham Machen, 1881-1937)10은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독소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뉴욕의 포스딕과 필라델피아의 매카트니 사이에 진행되는 신학논쟁을 주시하고 있었다. 192111월에 행한 자유주의와 기독교라는 설교에서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상이한 표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교라고 말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에서 그는 자연주의(Naturalism)에 뿌리를 박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모든 특징들을 희생시킨다고 지적했다.

 

 

메이첸은 중추 교리들을 포기하면 기독교가 소멸된다고 생각하여 성경에 입각한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1 메이첸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조 대부분을 부정한다. 신조를 특정 기독교인들의 경험의 산물로 본다. 역사적 신조들은 기독교 경험의 토대이다. 기독교 교리는 사실들(facts)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주의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내재한다는 점만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이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한다고 믿는다. 자유주의는 죄에 대한 인본주의 시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이론을 구축한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부활, 기적을 부정한다. 예수를 모범적인 도덕교사로 여긴다. 자유주의자들은 조만간에 이방주의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배교를 인정하고 스스로 교회와 신학교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교회에서 분리할 수밖에 없다. 포용주의와 화평주의는 이단보다 더 위험하다.

 

 

메이첸은 어릴 때부터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암송했다. 성경과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굳건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의 유산, 높은 성경관, 문화 속의 기독교의 역할, 상식철학(Common Sense Realism), 프랜시스 베이컨의 과학방법, 그리고 그것과 직결된 프린스톤 신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메이첸은 독일의 마르부르크와 괴팅겐에서 유학을 하면서 현대신학을 접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매력적인 인격과 성품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메이첸 자신이 기독교의 본질로 여기는 것들 대부분을 가르치지 않으며, 그들이 과학(학문)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것을 보았다.12

 

 

프린스톤신학교의 신약신학 교수로 부임한 메이첸은 변증학이 신학의 선두에 있다고 생각했다. 신학의 논증 사명이 기독교의 복음전파 사명을 담당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보았다. 다른 종교는 칼이나 감정에 호소하지만, 기독교는 이성의 논증(reasoning)에 호소한다. 기독교가 이성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능력, 곧 복음전파 사명에 대한 지적인 변호 능력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점은 신앙하는 바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신념을 진지하게 반영한 것이다.13

 

 

메이첸은 자유주의 성경관에 대항하여 성경무오성을 변증했다. 성경의 원래의 기록 그대로의 말’(ipsissima verba)은 어떤 오류도 없다고 했다.14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자연주의 전제(presupposition)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 벤자민 워필드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메이첸은 현대주의의 주요 공격 표적이 자연주의에 상반되는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라는 것을 알고서 이에 대해 방어 태도를 취했다. 예술·과학·문화·정치·사회 그 어느 것도 기독교의 영향권 밖에 있지 않다고 보는 개혁주의 세계관을 수호했다. 그는 문화가 하나님께 봉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당대의 기독교의 주된 전쟁터는 지성의 세계, 곧 대학-신학교라고 생각했다. 기독교를 살리는 일차 과업은 자유주의에 항거하여 지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날카로운 마음, 논리의 일관성, 교회의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 올바른 교리에 바탕을 둔 학문의 발전에 가치를 두었다.

 

 

그 무렵, 미국교회연합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가 조직되었다. 이 에큐메니칼 단체는 교회연합만이 아니라 교파통합을 추진했다. 19세기 부흥운동의 영향 아래서 교파들을 단일화 하려는 움직임이 교회의 행정관료, 교역자, 신도들을 휩쓸고 있었다. 장로교 총회는 1918년에 다른 교파와 연합을 위한 35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20년에 미국연합기독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in America)라고 하는 새로운 교단 출범에 가담하기로 했다.15 이 통합 안은 우여곡절 끝에 무산되었다.

 

 

메이첸은 교파통합을 순수한 교리와 교회에 대한 위협이라고 보았다. 자신이 속한 노회를 통해 이 계획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편지, 연설, 논문으로 교파통합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몇 가지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16

 

 

교회일치운동의 교리 경시 태도와 자유주의에 대한 교회의 개방 태도는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메이첸은 그러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신학논쟁은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정치적인 부담을 주는 고통스런 작업이지만,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신학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교회적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메이첸은 신앙고백과 교리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교회통합운동을 배격했다. 신앙고백 조건에 대한 논의가 없는 무조건적인 교회 연합과 일치가 교리의 순수성을 잃게 만든다고 보았다. 교리의 순수성을 상실한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영혼을 죽이는 그러한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이 장로교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에 일치하는 일이다. 성경 교리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동전의 양면이며,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연장이다. 교파를 단일화 하는 것과 교회 행정을 중앙집권화 하는 것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지향하는 집단주의의 연장이다.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동정하는 것은 온정주의이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논쟁을 해결하는 합법적인 길이라고 보았다.17 메이첸은 논리, 원칙, 자유를 존중했다.

 

 

신학논쟁에서 정통신학이 승리하자면 정통신앙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것이 유리했다. 교회의 영적 쇠퇴를 막으려면 자유주의자들이 신학을 정치의 힘에 입각하여 푸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메이첸은 신학과 정치의 함수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대통령 선거에 세 번 출마한 장로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 Bryan)이 총회장이 되기를 막연하게 바라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다윈주의(Darwinism)가 기독교의 원수라고 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출판한 바 있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으며, 과학자들이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을 사실처럼 믿는다고 지탄했다. 그러나 그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지 못했다.

 

 

3. 오번선언서(1924)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드러나지 않게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그 무렵, 뉴욕노회를 포함한 몇몇 노회들은 현대주의가 지향하는 신학적 가정(假定)들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 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목사로 안수했다. 장로교 총회는 1910년과 1916년에 이어 1923(인디애나폴리스)에도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근본 5대 도리들을 교단의 교리로 천명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총회가 교리를 공적으로 표방해도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총회가 근본 도리 다섯 가지를 천명한 것에 대해 총대 85명이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교회 안에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경계의 조짐이 강해지자 신속하게 지지자들을 동원했다. 자유주의 기독교 강령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계파개혁파를 결성했다. 신학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행동을 개시했다. ‘교인목회를 잘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목사목회도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동지를 확보하고 규합했다. 총회가 폐회하고 나면 따로 계파 모임을 가졌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북장로교회의 일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선언’(An Affirmation Designed to Safeguard the Unity and Liberty of the PCUSA)이라는 문서를 배포했다. 이 문서는 교묘하게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신념체계를 확정하는 서술로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 고백을 부정한다. 교회 안에 폭넓은 교리적 자유, 신학적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경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목사들은 오번(Auburn, NY)에 있는 오번신학교에 회집하여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를 발표했다. 기독교의 다섯 가지 근본 도리들(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초자연적 기적능력)이론에 불과하며, 총회가 그것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선언했다. 그것들을 신앙하지 않아도 교회의 유급 직원(목회자, 신학교수)로 재직할 수 있고 교제(fellowship)에 동참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우리 가운데 몇몇은 1923년 총회의 선언에 포함된 특별한 이론들(theories: 근본 5대 도리)을 이러한 사실과 교리의 만족한 설명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 종교의 이러한 사실들과 교리들에 대한 설명으로 성경에서 허용되는 유일한 이론과 교리들의 표준 설명이 아니라고 믿는 데 연합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실과 교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무슨 이론을 채택하든지 간에, 신뢰하고 교제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연합되어 있다.”18

 

 

오번선언서는 장로교회가 유지해 오던 칼빈주의 신앙고백과 교리를 전면 공격했다. 서명자들은 자신들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며, ‘사상의 자유를 수호한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교리 문제로 싸우고 있는 사태를 명분 없는 논쟁이라고 한탄하면서, 폭넓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범위 안에서 자유를 보존하고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교리의 다양성을 수용하면 외적인 통일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번선언서 초안자들은, 총회(1923)가 근본 5대 교리를 장로교회의 신학 입장으로 천명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회가 교리를 결정할 수는 있지만 노회들의 수의(隨意)를 거쳐야 교단의 공식으로 채택되는 바, 그러한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했다.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오번선언서 서명운동을 펼쳤다. 192311월에 시작하여 그 해 말에 174명이 서명했고, 19241월에는 150명이 추가로 서명했다. 그들은 그 결과를 신문지상에 공표했다.

 

 

장로교 신학논쟁에 가담한 자유주의자 신학 대변자는 헨리 코핀(Henry S. Coffin)이었다. 뉴욕노회의 목사회원이며, 유니온신학교 목회학 담당 조교수인 그는 유창한 언변가였다. 하인들을 거느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련된 도시 뉴욕에서 성장했다. 예일대학교에서 인문교육을 받았고,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성경고등비평을 지향하는 신학을 공부했다.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독일 마브르크대학교에서도 수학했다. 신학수업은 유니온신학교(뉴욕)에서 끝마쳤다.

 

 

코핀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이 담고 있는 신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도 장로교회의 목회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의중유보(意中留保)했다. 자신이 고백하지 않는 것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19 뉴욕노회는 철저한 심사를 거치지 않고 코핀을 목사로 안수했다.

 

 

코핀은 여러 권의 저서들을 출판했고 여러 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연과 글로 자유주의 기독교를 선전하고 변호했다. 그의 사상은 유니온신학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오번선언서의 핵심이 되었다. 코핀은 자유주의 기독교 강령을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는 자들에게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했고, 그 계파의 실질적인 수장 구실을 했다.

 

 

코핀은 자신을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Liberal Evangelical)로 여겼다.20 기독교가 현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지려면 고백하는 것과 전하는 메시지를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과학지식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신앙을 현대사상의 형식으로 재해석했다.

 

 

코핀에 따르면 종교의 본질은 경험(Experience)이다. 경험 속에 감정, 지성,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설교는 경험한 바를 전하는 것이다. 성경은 히브리 백성들의 진화하는 종교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최고 표준이 아니라 종교체험의 표준이다.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예수의 기원 문제(도성인신, 동정녀 탄생 등)는 기독교 신앙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예수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는 도덕의 모범이다. 속죄교리는 그의 인간성을 높이 평가하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교리의 불일치가 있었다. 교회의 정치제도, 교리, 예배는 항상 변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고정된 교리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교리와 신학의 다양성은 성령의 역사로 극복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

 

 

코핀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현하는 사회구원과 경제질서에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가 개인구원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코핀에 따르면 교회는 세계적 규모의 공동체를 구현하고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 예술, 과학, 산업, 교육, 정치 등 모든 세상의 왕국들을 정복하기 위해”21 존재한다.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의 자유와 세계의 장래를 위협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한다. 교회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역행한다. 통일은 교회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다. 구원은 공동체적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22 통합된 교회는 세계통합을 위한 필수적인 모델이다.23

 

 

코핀은 교회가 교리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고 연합일치를 도모해야 세계평화와 세계통합의 모델이 되고 화해자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합-일치된 교회만이 사람들에게, 가정, 직장, 나라 안에서 그리고 인류의 세계적 규모의 형제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살 것인가”24를 가르칠 수 있다. 교회는 세계를 통합시켜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폭을 넓히고 교제를 돈독히 하고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코핀은 뉴욕노회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총회(1923)가 자유주의자 포스딕을 제명하라고 명령했지만 뉴욕노회는 불복했다. 포스딕을 제재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총회에 올렸다. 이 노회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확언(確言)하기를 거부하는 유니온신학교 졸업생 헨리 반 듀센(Henry Van Dusen)과 세드릭 레만(Cedric Lehman)을 목사로 장립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신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노회가 장로교 질서에 역행하는 이러한 일을 한 배후에는 코핀과 개혁파자유주의자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 강령에 따라 교리에 대한 폭을 넓히도록 만들었다.

 

 

자유주의 추종자들은 오번선언서 서명운동을 펼쳐 1,274명의 서명자를 확보하는 쾌거를 올렸다. 명단과 함께 그것을 총회 전에 소책자로 출판하여 총대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총회에 앞서서 계파 대회를 가지고서 자신들의 노선을 지지할 자유주의 성향의 인물을 총회장에 추대하여 당선시키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들은 신학을 정치로 풀고, 힘의 논리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 당시에 뉴욕노회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4. 신학과 교회정치의 함수관계

 

 

상당수 장로교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는 크게 걱정하면서도 시종 침묵하고 있었다. 장로교회가 깃발을 내리고 신조 없는 교회들의 긴 행렬에 가담하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기만 한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위대한 신조와 고귀한 신앙역사를 유지하자면 이 위태로운 시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25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의 도발적인 정치행보를 경계하면서 신앙동맹(League of Faith)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정치적인 성격의 계파모임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복음전도 집회를 가지는 정도의 활동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하는 클라렌스 매카트니(Clarence Macartney)는 개혁파에 반대하는 보수파 그룹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화합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종교라고 확신하면서, 두 종교가 한 집단 안에 있는 한 서로 충돌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26 그는 오번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교회가 중추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는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고,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교리를 거부하는 자를 교회가 제재, 처벌하지 않는 것은 교리, 신조의 문제가 아니며, 교회헌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정성을 해치고 위협하는 행위라고 말했다.27

 

 

필라델피아노회는 기독교의 5대 근본 도리를 부정하는 사람이 장로교회의 급료를 받는 사역자(목사, 강도사, 신학교수)로 봉사할 수 없도록 하고 교회, 교단의 임원, 위원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안을 총회에 상정했다. 한편, 뉴욕노회 안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일부 장로교인들은 포스딕 건을 총회 법정에 상고했다. 그들은 클라렌스 매카트니를 총회장 후보자로 옹립했다.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모인 이듬해 총회(1924)는 매카트니와 프린스톤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 찰스 어드만(Charles Eerdman)을 총회장 후보자로 두고 대결을 벌였다. 어드만은 자유주의 신학에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개혁파(자유주의파)와 보수파(정통신앙파)는 서로 자기 편의 입장을 지지해 줄 사람을 총회장으로 밀었다. 총회장(總會場)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곳이 아니라 계파의 뜻을 헤아리는 장소가 되었다. 계파 힘겨루기 끝에 매카트니가 근소한 차이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싸움의 승리는 다수를 차지하는 중도파가 어느 편을 지지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교회의 생명을 좌우하는 신학노선 결정이 교회정치꾼들의 손에 달려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총회장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주의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정치적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 그들은 신학을 정치로 풀려고 했고, 힘의 논리로 접근하고 있었다. 교회의 신학적 노선이 결정되는 그 중요한 때에, 총회장 매카트니는 교회정치와 신학을 관련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매카트니는 개혁장로교회에서 자라면서 스코틀랜드 언약파 신앙을 전수받았다. 맹세, 악기사용, 비밀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잘못이며, 교회분열과 분파는 죄라고 배웠다.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자유주의 기독교와 좌파 성향의 교회를 접했다. 그의 신앙은 정통신학에서 점차 표류했다.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고 설교자로 헌신했다. 그는 진리가 성경의 영감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반면에 신앙은 성경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는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않으면 신학논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그 마당에, 총회장이 되었지만 화평주의 태도를 고수했다. 자신이 총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교회가 분리되었다고 하는 불명예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자유주의 기독교가 강세를 보이는 상태에서 그는 신학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교회의 외형적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 신학 때문에 교단이 분열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코핀은 교회가 분열될 것이라는 말을 내뱉았다. 분리해 나가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총회를 장악한 보수주의자들은 [교단분열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을 주저하고 움추러들었다.”28 소심한 매카트니의 지도하에서 총회는 오번선언서 서명자들을 제재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위원회(Bills and Overtures Committee)는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회는 뉴욕노회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거부하는 반 듀센과 레만의 목사자격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그 문제 처리를 뉴욕대회(New York Synod)에 위임했다. 총회는 필라델피아노회의 안을 부결시켰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목사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총회 임원이나 위원직을 가질 수 없도록 하자는 청원을 거부했다. 총회는 중도파의 지지 아래 자유주의파와 보수파 모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자 하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메이첸은 투쟁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로교의 특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복음의 위대한 사실들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총회장 매카트니는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총회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학노선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지지자들을 열심히 포섭했다. 소책자들을 발행하여 우송했다. 사려 깊은 사람들이 선택할 유일한 길은 교회가 신학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듬해 총회는 양 계파의 결투장이 되었고,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교회의 주도권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상황에서 보수파 인사들은 단호하게 접근하지 않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하다가 교회를 자유주의자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보수파는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사력을 다해 정치적으로 공략했다. 신조, 교리, 신앙고백보다 화평, 외형의 통일, 열린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긴 중도파는 자유주의파에 손을 들어주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이 글은 책은 최덕성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8)의 제12장을 옮겨 실은 것이다. 비평적 논의와 전거(典據)는 책을 참고하라. 필자가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의 동료 교수들을 독자로 설정하여 저술한 글이다.

 

 

최덕성은 예일대학교(STM)와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고신대학교, 하버드대학교, 스캐롤라이나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Ed.), 케임브리지대학교, 예루살렘대학교에서 철학, 역사, 신학을 공부했다.  약 20권의 학술서를 한글과 영어로 저술 출간했고, 약 200편의 신학 학술 논문들을 한글과 영어로 발표했다. 현재 브니엘신학교의 총장과 교의학 교수(2013-현재)로 봉사하고 있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의 역사신학 교수(1989-2009)로 재직했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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