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양민학살사건
다큐멘타리 영화 ‘건국전쟁’의 흥행과 함께 역사전쟁이 한창이다. 그 동안 폄훼되어 온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晚, Syngman Rhee, 1875-1965)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그의 공이 칭송되고 있다. 이승만기념관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한다. 역사교과서의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기록이 수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국전쟁'이 제기한 역사 논쟁이 이제부터라도 상호교차적 역사검증으로 이어져 진실을 밝히고 공정한 평가가 내려지기를 기대한다.
정치 지도자에게는 공과 과가 있게 마련이다. 필자는 이승만의 공과의 비율이 8:2 정도라고 봄이 타당해 보인다. 이승만의 가장 큰 공은 우리 민족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워준 것이다. 반공주의, 시장경제, 기독교입국론도 탁월한 정책이었다.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안팎으로 중요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했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공산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서, 38선 이남에 있는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단독 수립했다. 38선 이북의 비합법정부와 공산진영 지지자들을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이승만의 가장 큰 과오는 공산군 부역자, 내통자 처형 방침에 따라 전국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사건이다. 이승만의 통치 하에서 국군의 크고 국군의 미간인 학살, 양민학살은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거창사건’(居昌事件)은 대표적인 양민학살 사건이면서도 오래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일어났다. 국군이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을 죽였다. 김일성이 남침하여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에 대한민국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이곳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했다.
서부 경남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합쳐 ‘산청·함양·거창사건’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산청·함양·거창사건은 국군 11사단은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에서 395명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군인들은 이어 함양군 유림면으로 넘어가 310명을 학살했고, 이틀 뒤인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을 학살했다.
거창지역구 출신 국회의원 이강두는 1995년 12월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은 산청·함양을 뺀 ‘거창사건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발의했다. 이 법에는 당초 ‘거창’만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합천 지역구 국회의원 권해옥이 ‘거창사건’ 뒤에 ‘등’을 붙여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수정했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거창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이어진 군사정권 하에서 진상이 은폐된 채 묻혀 있었다. 거창지역 주민들은 전쟁 후 ‘쉬쉬’하면서도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 사건 소식을 들은 것은 1966년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지난 1987년에 민주화 운동 또는 좌파 운동이 일어나고 학살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로 기념관을 건립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은 공식적으로 조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25전쟁 중에 일어난 많은 민간인 학살처럼, 거창사건도 국군이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집단학살이었다. 대규모 인권침해 행위였다.
희생당한 자들은 모두 억울한 희생자들인지, 그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맥락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논의도 필요하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몇 명인지 조사하여 정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남노당과 더불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과 공산군 부역자(collaborators)를 제재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었을 것인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희생자 수를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모택통의 영도 하에 희생당한 중국인들의 수와 비교해 봄직하다. 김일성의 통치하에서 희생시킨 자들의 수와 비교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기독교인이다. 감리교회 출신이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에 편입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1905년 4월 23일 미국 수도 워싱턴의 커버넌트장로교회의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재학하면서 방학 때면 선교사들을 후원하던 오션 그로브에 위치한 보이드 부인 집에서 기거했다. 그 무렵, 기독교 잡지 『Christian Advocate』지의 주필 레오나드 씨의 연설 기사를 읽고 격분하여, 레오나드에게 장문의 항의서한을 보냈다. .레오나드는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통치할 것을 바란다'고 했다.
이승만은 1907년 9월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1년을 공부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전명운, 장인환의 더럼 스티븐스 암살 사건으로 친일적인 미국인 교수들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어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1910년 2월에야 석사(M.A.)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로 출발했지만, 당시의 학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이나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관했다.
1908년 9월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했다. 지도교수 우드로 윌슨 총장(나중의 대통령) 가족과 친밀한 관계 유지했다.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러소-일본 전쟁 중 미국의 영향 아래에서의 중립성"(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Russo-Japanese War)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미국의 중립 개념을 조명하고 미국이 러소-일본 전쟁 기간에 영향을 미쳤음을 논증했다. 미국이 중립을 유지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행동이나 정책이 러시아와 일본 간의 갈등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으며, 그 당시 국제 관계와 외교에 대한 보다 넓은 영향을 분석했다. 중립을 유지한 미국의 역할, 외교적 협상, 조약 의무, 국제 정치의 균형과 같은 다양한 측면을 다루었다.
이승만은 2년 만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그 과정을 최소한 5년 또는 약 8년 동안 연구해야 마칠 수 있고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재정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논문 출간 비용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를 지불할 수 없었던 탓으로 학위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되었다.
이승만은 프린스톤대학교와 같은 캠퍼스에 있는 장로교계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을 일부 수학했다. 장로교회에서 장로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여 줄곧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고 활동을 펼쳤다. 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한국YMCA)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했다. 1911년 5월 16일부터 6월 21일까지 37일 동안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에 들렀고, 그것을 계기로 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석했다. 윤치호는 에모리대학교 캔들러신학교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뒤이어 일제의 체포 위협이 있자, 이승만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기독교 감리회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여 체포를 면했다. 1912년에 미니애폴리스에서 4년마다 열리는 '국제기독교감리회총회'에 참석하였다. 1912년 4월 10일,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주로 갈 때 동행한 감리교 해리스 감독과 일본의 조선 통치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
해리스 : 이 선생! 당신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 해리스 씨! 본인은 결코 일본의 강도적 한국 강점을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본의 통치 하에서 신음하는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해리스 : 기독교의 박애 정신은 당신이 일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이승만 : 선진 강대국으로 자란 일본이 후진 약소국인 한국을 병탐하고 지배하는 것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피압박 민족의 참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의 고뇌를 벗기려고 노력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이 기독교 박애 정신에 어긋나는 비겁한 일인 줄로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의 한국 독립은 전 기독교인 양심의 발동으로서 원조되고 힘입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미국 감리교회 총회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침략지배 행위를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일본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분위기를 유지했다. 이승만은 1912년 5월 1일, 이 회의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존경하는 각국 대표 여러분! 기독교나 민주주의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함에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한국인을 노예와 같이 압박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약소 민족의 해방이 필요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자주 독립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와 교회의 정신은 이러한 평화 옹호에 있어야 할진대, 세계의 양심적인 기독교도들은 마땅히 이를 위하여 단결, 실천함으로서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륙하고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 유지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과 한국교회의 독립성을 호소했지만 그의 이러한 외침은 일본의 지배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감리교회의 선교 사업을 위태롭게 하는 발언이라고 하여 심한 비난을 받았다. 반면 동정과 격려도 받았다. 한 달 남짓된 감리교인들의 회의는 그의 희망과는 거리가 먼 일본인과 밀접하게 협력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고 그것에 의해서 일본과 한국의 선교 사업을 보호한다는 결론을 지은 채 폐회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반일적 언동을 서슴지 않았던 이승만으로 하여금 귀국 후에 효과적인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
'건국전쟁'을 만든 감독 김덕영 선생은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 행적을 다룬 '인간 이승만'을 곧 극장가에 내놓을 것이라고 한다. 이승만은 한국기독교인이었다. 이승만의 공로는 한국기독교 역사의 일부이고, 그의 과오는 한국교회의 흑역사의 일부이다.
국군의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장소를 표기한 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거창사건’의 개요, 배경, 경과, 결과를 간명하게 기록한다. 상당한 공신력를 가진 역사 기록이다.
개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국방부는 후방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제9연대와 제13연대·제2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었다. 제11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일부와 전라남도·전라북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거창사건은 토벌작전의 제4기에 해당하는 1951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창군 신원면은 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1개월이 지나서야 행정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거창경찰서는 1950년 9월 27일 수복되었지만 신원지서는 11월 5일이 되어서야 경찰이 복귀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해 정부가 1·4후퇴를 한 후 국군과 유엔군의 전면적 반격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창군 신원면 일대는 국군과 경찰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전개할 무렵이었다.
경과
제11사단의 토벌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인데, 이는 최덕신(崔德新) 사단장이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을 점령한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제9연대장 오익경(吳益慶)으로부터 사단의 작전개념을 구체화한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은 1951년 2월 5일 작전에 들어가 신원면 일대로 진격했다. 3대대는 별다른 저항없이 신원면을 수복한 후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 8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3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으로 들어와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와룡리·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 11일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성별: 남자 327명, 여자 392명)으로 총 719명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부산 피난 국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거창사건을 공개했다. 국회는 신중목 의원의 보고 이후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방·내무·법무장관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출석을 요청해 진상을 규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국내 제반사항에 대해 거창사건이 해외에 보도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해 시정케 해달라는 서한만을 보냈다. 다음날 제55차 본회의에 출석한 장면(張勉) 총리와 조병옥(趙炳玉) 내무장관, 김준연(金俊淵) 법무장관,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거창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각각 엇갈린 보고를 했다.
한편 거창사건이 국회에 알려지기 전인 2월 26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헌병사령관과 경남경찰국장 등을 이끌고 비공식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이와 별도로 내무부는 장영복(張永福) 경무관이, 법무부는 김준연 장관의 지시로 부장급 검사 2명이 각각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3부의 조사내용은 모두 달랐다. 국회는 각 부의 보고가 다르고 사안이 중요한 만큼 위원회를 구성해 현지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의안을 채택했고, 1951년 3월 30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와 내무·법무·국방부가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4월 1일 오후 3시 조사단은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이 내무부 차관실에서 위원회 조사단 활동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한 후 4월 3일 신원면 사건현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기 전 조사단은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사이 계곡에 공비를 가장한 군인들의 총격으로 거창경찰서로 되돌아왔다.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은 매복한 9연대 수색중대 40여 명의 병사들에게 공비로 가장해 국회조사단이 올라오면 사격은 하되 사람이 맞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조사단은 거창경찰서에서 행정부 조사관과 국회조사관이 선정한 한동석 대대장을 비롯한 거창경찰서장과 형사, 신원면장, 그리고 신원면 현지 주민 등 모두 12명에 대한 증언조사를 벌였으나 김종원 대령의 방해로 사건의 실체는 밝히지 못하였다.
이승만 정부와 국방부는 조사단에 대한 위장공비 사건으로 국회의 압력에 직면해 4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거창사건의 책임을 물어 국방·법무·내무장관을 사직토록 했다. 국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이승만은 결국 신성모의 사표를 수리하였고, 5월 7일 이기붕(李起鵬)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국방장관이 이기붕으로 바뀐 뒤 헌병사령부는 5월 하순경부터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했다. 대대장 한동석은 5월 28일 구속되었고, 이어서 오익경과 3대대 정보장교 이종대의 조사결과가 보고되어 수사가 계속되었다.
군 검찰은 오익경과 한동석, 3대대 정보장교 이종대(李鍾大)를 기소했고, 제1차 군법회의가 1951년 7월 28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개정하였다. 김종원은 군법회의가 진행 중이던 9월에 국회조사단 피습사건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수사와 기소를 거쳐 군법회의가 열렸고 심리 끝에 12월 16일 선고 공판을 열었다. 강영훈(姜英勳) 재판장은 김종원 피고의 문서위조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공무집행방해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징역 7년 구형)을 선고했다. 9연대장 오익경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무기(사형구형)를 선고받았다. 3대대장 한동석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0년(사형구형)을, 이종대는 무죄(징역 10년 구형)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을 1년도 되지 않은 다음해 모두 특별사면했고 특히 김종원은 경찰의 간부로 다시 등용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들은 1951년 2월 사건 발생 당시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족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1960년 4대 국회는 거창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형식적인 피해신고 접수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조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는데,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
결과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되고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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