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2016.12.12., 서울)
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 I
김세윤의 칭의론, 로마가톨릭교회 칭의론의 '짝퉁'
지난 12월 12일 리포르만다(기독교사상연구원) 주최 제6회 학술회 '종교개혁 칭의론인가, 새 관점 칭의론인가?'에서 발표된 최덕성 박사의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를 세 차례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최대의 신학적 화두는 칭의론이다. 종교개혁 칭의론과 바울에 대한 새관점 칭의론 사이 신학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를 앞둔 시점에 벌어진 칭의론 충돌의 중심에는,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 신약신학)의 '유보적 칭의론'이 자리잡고 있다.
새 관점 칭의론을 수용한 김세윤은 저서 <칭의와 성화(2013)>와 동영상 강의, 그리고 2016년 12월 5일과 6일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주제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의 6시간 칭의론 강연에서,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구원의 확실 불가능성을 역설했다. 윤리적 실천을 통한 칭의의 완성을 주창했다.
김세윤은 위 논의에서 "종교개혁 이후 500년 동안, 특히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어진 성경연구는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까?" 라는 말로 자신과 새 관점 칭의론을 강변한다. "칼빈이 신학을 완성했습니까?" 하고 항의한다. 500년 전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이 자신의 새 관점 칭의론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전통, 구도, 관점, 전제와 무관하지 않다. 새 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은 정통신학의 결과가 아니라 탈기독교적 자유주의 신학, 종교사학파, 유태인의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현대주의 신학자의 사상 등 불건전한 신학들의 결집이다. 역사적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백하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가르침이 아니다.
김세윤의 칭의론을 접하면, 두 개의 그림언어가 떠오른다. 첫째는 '짝퉁(imitation)'이고, 둘째는 '개악(Deformation)'이다.
수학에 '맞줄임', 즉 약분(約分)이라는 것이 있다.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사상을 축약하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 곧 행위구원에 이른다. 하나님 은혜로 칭의가 주입, 시작됐지만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완성해야 종말의 심판대에서 최종적인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칭의의 완성이라는 개념은 구원의 탈락 가능성, 구원의 확신 불가능성, 관계적 칭의론, 유보적 칭의론으로 연결된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현대 로마가톨릭교회가 교리로 공식 수납되는 트렌트공의회(1547)의 칭의론과 다르지 않다. 이 공의회는 루터와 루터파의 이신칭의를 정죄하고, 프로테스탄트들을 이단자로 간주하여 파문하려 회집됐다.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고, 물세례를 칭의의 도구인으로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주입된 의가 수평적 차원에서 계속 '의화(義化)'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 안에 주입되고 내재하는 능력으로 점진적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는 일종의 행위구원론을 천명했다.
필자의 논문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는 10가지 소제목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의 결과인가? ② '세례성사'는 칭의의 수단인가? ③ 칭의를 위한 인간의 준비가 필요한가? ④칭의는 성화에 포함되는가? ⑤ 행함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가? ⑥ 칭의는 윤리실천으로 완성되는가? ⑦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가? ⑧ 칭의가 계명준수, 윤리실천으로 성취되는가? ⑨ 인내가 우리를 칭의의 완성으로 인도하는가? ⑩ 고해성사가 상실한 칭의를 회복시키는가? 이 질문들은 새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이 지닌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트렌트공의회(1547)는 위 열 가지 질문들에 모두 "예"라고 답한다. 김세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나, 논리적으로 '아니오'라고 할 수 없는 구조를 유지한다. 구원과 칭의가 고해성사로 회복된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예"라는 답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마련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김세윤의 칭의론과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은 거의 일치한다. 칭의와 고해성사를 관련시키는 부분 외에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 신학자 칼빈은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에 대한 해독문을 신속히 저술하여 당대의 교회가 요구하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제공했다. 이신칭의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칭의론이 성경적이고 합리적임을 설파했다. 칼빈의 해독문은 김세윤을 포함한 새 관점 칭의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나 다름없다. 종교개혁 운동 당시의 칭의론은 그 위에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요체 조항으로 이해됐다. 프로테스탄트 그룹과 로마가톨릭을 첨예하게 가르는 대척점이며 양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 조항이었다.
김세윤은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라는 신학 공식을 동원하여 '유보적 칭의론'을 정당화한다. 신학자들이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 설명에 도입하는 이 개념을,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에 대입시켜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칭의와 성화의 동일성 주장에 적용한다.
이 신학 공식을 칭의론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칭의가 불완전한 것이 되고, 칭의를 윤리적 행위로 완성시켜야 얻어지는 무엇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칭의를 미완성의 불완전한 실체로 여기게 된다. '이미와 아직 아니'를 구원의 서정에 언급되는 무시간적 구원의 순서 모두에 적용하지 않고 칭의에만 적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효력 있는 부름, 회심, 중생, 양자됨도 심판대에서 최종 판결이 나는가? 왜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공식을 구원의 여러 국면들 가운데 칭의에만 적용하는가?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다.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칭의의 윤리적 완성 등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칭의가 단번에 이뤄지지 않고 선언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 아니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른다. 어린이는 성숙 과정을 거친 뒤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출생하면서 이미 완전한 사람이듯, 칭의도 이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김세윤은 성경을 윤리 실천의 결여라는 콘텍스트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다. 유보적 칭의론은 견해 차이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사안이다. 김세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론, 이신칭의, 종교개혁 칭의론은 미완성이며 불완전하다. 그는 구원과 칭의의 공로 일부를 인간에게 돌리고, 윤리 결핍의 원인과 해결책을 칭의론에서 찾는다.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완전성과 전능성에 대한 도전이다. 신성모독이다.
개혁신학은 성경, 합리성, 성령의 역사를 기본 축으로 수행된다, 신학은 성경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전체의 틀 안에서 부분을 이해하고, 부분을 전체와 관련지어 이해한다. 종교개혁 칭의론을 개혁하려는 김세윤의 시도는 성경에 충실한 듯 보인다. 그러나 치밀한 연구 속에 아름드리 논리적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논리를 뛰어넘어 역설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가 아니다. 이단 집단과 사이비 기독교 단체들도 성경에 호소한다. 나무는 보면서도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김세윤의 칭의론과 로마가톨릭 칭의론은 거의 같다. 짝퉁은, 같으면서도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새 관점은 프로테스탄트교회를, 김세윤은 한국교회를 로마가톨릭화하려고 한다. 김세윤의 칭의론이 1547년의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은 우연인가, 의도적인가? 새 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의 그릇됨은 로마가톨릭 칭의론과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나아가 기독교의 진리체계를 와해시키는 탓이다.
바울과 개혁신학 관점에서 보면 새 관점, 김세윤 그리고 로마가톨릭 칭의론은 '다른 복음'이다.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주권, 은혜, 구원의 위대성을 인간의 행위로 대체하려는 발상이다. 복음전도를 방해한다.
리포르만다(기독교사상연구원)가 주최한 '칭의론 학술회'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탈정통적 배경을 지녔고, 루터의 칭의론이 타당하며, 새 관점 칭의론을 수용하는 김세윤의 칭의론이 로마가톨릭 칭의론의 '짝퉁'임을 밝혔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반(反)종교개혁 사상이라는 것을 규명했다. 새 관점과 김세윤이 강조하는 개혁(Reformation)이 실상은 개악(Deformation)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트렌트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한 공의회로, 반종교개혁(反, Counter-Reformation)이라 일컬어진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대응과 가톨릭교회의 효과적인 쇄신 방법을 논의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신학적 주지들과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 파문했다. 칭의 논의는 1546년 6월 22일에 시작했고, 칭의교령은 1547년 1월 13일에 발표했다. 트렌트공의회 칭의로은 1547년에 채택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칭의(稱義)를 '의화(義化)'라고 일컫는다. 로마가톨릭교회 칭의 개념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드러내는 용어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사용하는 '칭의'는 하나님이 칭의의 주체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轉嫁)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천주교회가 사용하는 '의화'는 '의'가 인간 안에 주입되고 내재하는 능력으로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진행됨을 의미한다. '칭(稱)'은 실체의 변형이 전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고, '화(化)'는 성화를 포함하는 진행 과정을 의미한다.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독자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임을 고려하여, '칭의'로 변환하여 일관되게 표기한다. <계속>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 <신학충돌(2012)> 등 약 20권의 신학관련 학술서를 저술했다. 고신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리폼드신학교, 예일대학교,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수학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훼이트빌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사했고,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1989-2009)로, 현재는 브니엘신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교의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2017.01.04.) 기고문
참고: '칭의론 학술회' 행사 동영상은 6편으로 제작되어 BREADTV(www.breadtv.net)에 실려있다. 있다. 필자의 "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 동영상은 http://www.breadtv.net/btv04/353을 클릭하면 나타난다. 각주는 학술지 글에 담아 게재한다.
글쓴이는 기독교사상사 전공 신학자이다. 교의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회친일파전통>(2000), <신학충돌>(2012)을 포함하여 약 20권의 신학관련 학술서를 저술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 대상을 수상했(2001)다.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 예일대학교,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훼이트빌장로교회의 담임 목사로 봉사했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로 가르쳤고, 현재는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수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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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 <바른믿음>의 글 (2017.2.18.)
김세윤 박사는 유보적 중보기도는 믿지 않는가?
최근 한국교회는 플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힘을 소모하였다. 이제 최덕성 박사 등의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김세윤 교수가 퍼뜨린 비성경적인 유보적 칭의론이 다스려지고 있어 무척 다행이다.
나도 이제서야 김세윤 교수의 저서 <칭의와 성화>를 구입하여 읽고 있는 중이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의 김세윤 교수 비판의 글에서 보았던 김세윤 교수의 '완전한 칭의가 종말의 심판의 때로 유보'되었다는 주장을 실제로 그의 책에서 확인하고 있다. 김세윤 교수가 이미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칭의 선언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며 확정적인 칭의선언이 종말의 심판 때로 유보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 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 중의 몇 군데를 여기에 발췌하였다.
“또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었는 사실도 염두해 두워야 합니다. 칭의론도 신약 구원론의 보편적 구조, 즉 종말적 유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벌써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완성은 아직 받지 못하고, 재림 때에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신약 종말론의 보편적인 구도입니다. 칭의론도 그 구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pp.78-79)
“우리가 벌써 의인이라고 칭함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완성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유보되었다.”(김세윤, p. 79)
“그러므로 믿음으로 무죄 선언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 ‘의인’은 이제 그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 즉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기를 이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이 ‘의로운’ 삶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의인’이며, 그런 사람이 최후의 심판의 때에 ‘의인’으로 확인됩니다. 그것이 칭의의 완성입니다.”(김세윤 p. 79)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칭의선언이 확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인 것이라면, 그래서 종말의 심판의 때에 최종적으로 칭의선언을 다시 받아야 구원받는다면, 이는 현재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심각한 비성경적인 사상이 김세윤 교수의 책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있다. 김세윤 교수의 이러한 사상은 필연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다시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실제로 김세윤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보았다.
“한국 교회에서 흔히 듣는 복음은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라 칭함 받았고, 그것은 최후의 심판의 때에 확인되게 되어있다. (이것은 보통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결론을 함축한다. 그러니 그냥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구원파적 복음이 아닙니까? 구원파는 이것을 자기들의 신학적 확신으로 솔직히 말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구원파를 이단으로 부르는 대다수의 한국 교회도 사실상 이런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암암리에 구원파적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김세윤, pp. 79-80)
“우리의 구원이 종말의 최후 심판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연히 우리가 처음 복음을 믿음으로 칭의 된 순간부터 최후의 심판에서 칭의가 확인될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합니다.”(김세윤, pp. 80-81)
“그러기에 바울도 은혜로 주어진 칭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즉,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신자들에게 종말의 완성 때가지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서 있지’ 않는 자들은 ‘헛되이 믿는’ 자들로서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김세윤, pp. 82-83)
김세윤 교수의 말은 칭의를 받았을지라도 종말의 칭의 완성의 때까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뜰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엎드려져 죽을 것처럼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의 이런 말은 신자의 구원의 영속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조금도 염두하지 않고 하는 말이다.
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까?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히 변치 않는 구원일까? 과연 은혜로 구원얻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은 성경적 진리일까? 그렇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구원한 자들, 즉 그리스도의 피로 수림된 새 언약 백성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위해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김세윤 교수는 이미 칭의를 얻은 자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 있음’, 즉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아름답고 선한 행위와 삶의 열매가 있어야 처음에 얻은 칭의의 효력이 종말의 때까지 지속된다고 자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는 김세윤 교수가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복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성경 어디에 칭의를 얻은 사람이 최종 심판의 때까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계속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처음 얻은 칭의의 효력이 유지된다는 말이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칭의를 얻는 사람들에게 다 잘 알아서 잘 해 보라고 맡기고 뒤로 빠지시면, 과연 누가 끝까지 잘 하여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칭의를 입은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끝까지 올바르게 ‘서 있음’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자기 백성을 마귀에게 다시 빼앗기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우리가 얻은 칭의는 ‘법정적 칭의’이지 실제로 의로워서 얻은 '실질적 칭의'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어도 여전히 실질적으로 죄에 오염된 성품이 남아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타락하고 죄에 빠질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이 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던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만들어야 하고,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늘 기도하여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을 방임하여 죄의 종이 되어 다시 죄를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 변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이미 얻은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진정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로 마귀에서 구출한 자기의 백성이라면, 그를 돌이켜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죄의 쾌락과 불신앙의 늪에 빠진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손이 그 백성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는 역사를 일으키게 한다.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예측 할 수도 없다. 어떤 설교자는 이 부분을 "다리 몽뎅이리를 분지르기도 하시고, 교통사고로 거반 죽이시기도 하시고, 사업을 폭삭 망하게 만드시기도 하고" ...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듣기 좋은 말은 아지지만, 하나님의 믿음을 버리는 자기 백성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방법은 실로 무궁무무진하여 이 보다 더 한 일들도 많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있는 한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얻은 사람의 구원은 결코 다시 소실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로 살리신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버리시는 일이 없도록 그리스도가 영원히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새 언약의 효력에 동참한 백성이 다시 영구히 신앙을 잃고, 그래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피로 사신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김세윤 교수가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새 언약의 효력을 입은 백성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였다면, 절대로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서 있지 못하여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신학을 전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세윤 교수의 책을 보니 중보기도하시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는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최종 심판석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분으로만 묘사하였다. 지금 현재 우리의 신앙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지 않고, 훗날의 최종 심판석에서 우리에게 칭의를 확정하시기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분으로 설명되었다. 현재 <칭의와 성화>를 약 1/3가량 읽었는데, 김 교수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최종 심판의 자리와만 관련하여 이야기하였다. 두세 번 그런 내용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칭의의 완성,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때까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김세윤, p. 82)
“칭의의 완성은 종말까지 유보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의 최후 심판의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이미 의인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이 재판장이시므로 아무도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사탄을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중보(변호)하실 것이므로 어떤 사탄의 세력도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김세윤, p. 1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의 속죄 제사와 중보를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될 칭의의 완성을 하나님 나라의 사탄의 나라에 대한 최종적 승리라고 설명합니다.”(김세윤, p. 130)
중보자로 오시어 친히 자기의 피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되게 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면서 중보기도하고 계신다. 중보자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죄와 마귀에게 유혹받지 않고 승리하도록 지금 여전히 중보기도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금 현재 진행형의 중보기도를 믿는다면, 김세윤 교수는 절대로 우리가 얻은 칭의의 확실성을 흔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훗날의 최종 심판석에서만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새언약에 동참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성도의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도의 구원의 영속성이 그 자신의 각오와 노력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는 ‘성도의 견인’을 가르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