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석불과 십일면관음상(경주, 8세기). 페르시아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주의 기독교가 '땅 끝' 신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석굴암에서 만난 예수
원제: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석굴암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자랑스러운 인류문화유산이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불국사를 재건한 김대성이 지휘하여 만들었다. 굴 안에는 둥근 평면에 3.26미터 높이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석가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뒷벽에는 반육각(半肉刻)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한국인 조상들의 비범한 예술세계를 드러낸 걸작품이다.
뒷 벽면에 부조(浮彫)된 남자들은 오늘날의 여자용 잠옷과 비슷한 것을 입고 있다. 통고무신을 신고, 손에는 감로수병―유리병을 들고 있다. 입구에 새겨진 무인상은 당시 풍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도(지금의 파키스탄) 간다라지방의 문화가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다라문화는 1500년 전의 페르시아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신라는 ‘땅 끝’이다. 1956년에 신라 땅 불국사 경내에서 돌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구리로 만들어진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석굴암은 1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 페르시아의 문물과 이미지가 해상루트를 거쳐 신라와 페르시아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온 것인지, 통일신라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한 당나라를 거쳐 들어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석굴암을 건축할 무렵, 당나라에는 경교(景敎)라고 불리는 네스토리우스주의 기독교가 유행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크게 번성하던 이 종교는 635년에 태종이 지배하던 시대에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개시했다. 그로부터 약 3백 년 동안 영화를 누리고, 경교문화를 형성했다. 멀고도 먼 동양으로 진출한 그 종교는 대진교(大秦敎)라고 불렸다. 대진사라고 하는 교회당과 대진승이라는 성직자를 두고 있었다. ‘대진’(大秦)이란 진시황제가 통치하던 진(秦)나라처럼 번영한 로마제국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교회당은 파사사(波斯寺)라고 불렀다. ‘경교’는 ‘광명의 종교’(Luminous Religion)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혼의 태양이며,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이 영원한 진리는 신기하고 오묘하여 그 이름을 감히 붙이기 어려우나 그 공덕과 효용이 너무나 밝고 크게 나타남으로 자연히 경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35년에 페르시아인 알로펜(아브라함) 등 21명이 당나라 수도 장안성(현 산시성 서안)에서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주의를 포교했다. 당 태종이 그의 설교를 듣고서 신앙의 열정에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약 300명의 선교사들이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왔으며, 그 종교가 그 나라 전역에 퍼졌고, 각 성읍에 교회당이 들어섰다. 신민과 조정, 저명인사들과 대현(大賢)들이 그 종교를 독실하게 신앙했다. 경교는 덕종이 통치하던 780년 무렵에 최고조로 달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세울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중국 서안, 9세기). 1625년에 발견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 신학과 중국 전래사를 기록한 비석의 머리 부분이다.
이 비석에는 경교의 중국선교와 전교 현황이 한자 736자로 새겨져 있다.2 여호와의 천지창조,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타락,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심, 세례, 성령의 힘이 죄를 씻을 수 있음과 구원받은 사람은 중생 전체를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이 조석으로 예배를 드리며, 아침 7시에 성경을 읽고 영생을 기원하며, 7일에 한 번씩 예배와 성찬예식을 가졌고, 이 예식을 행할 때 회중이 동쪽을 향해 경례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시리아어로 기록된 부분은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이다.
그 무렵, 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가지면서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다. 최치원(857년 출생)을 비롯한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과학서와 천문도 등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이 때 페르시아의 문화가 중국을 거쳐 서라벌까지 전래되었을 수도 있다.
최근의 역사연구는 그 무렵의 신라가 해상 루트를 거쳐 페르시아와 직접 상업과 문화의 교류를 가졌음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그 시대의 화려한 양탄자에는 신라 상표가 붙어 있다. 신라는 그 무렵에 많은 양을 키웠고, 페르시아의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양탄자를 생산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문물이 장보고(846년 사망)의 활동과 더불어 해상 루트를 거쳐 직접 도입되었다면 우리 조상들은 이런 저런 형태로 페르시아에서 강세를 보인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는 서기 3년 10월에 도읍지를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제2대 유리왕이 집권한 지 22년째 되던 해였다.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행정구역으로 요녕성 환인(桓仁)이란 곳에서 압록강 뗏목도시인 평안북도 만포 대안의 집안(集安)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무려 424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자리 잡은 집안에는 지금도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군총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이 얼마나 씩씩했는가를 한 눈에 보여준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집권하던 427년에 도읍지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그 때, 로마제국에서는 기독론 논쟁이 극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독교회는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출범하여 로마제국 치하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다가 콘스탄틴의 개종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신학논쟁을 전개했다. 기독론 논쟁은 5세기에 이르러 점차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의 갈등으로 발전했다. 신학논쟁은 정치적 이해관계, 기득권, 지역성 등이 작용하여 더욱 가열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 c. 381-c. 451)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는 안디옥학파의 대변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키릴(Cyril, c. 315-386)은 그를 정죄하려고 정략을 세우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직에 취임했다. 그가 목회를 하던 콘스탄티노플은 강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도시였다. 로마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 곳이었다. 그 도시와 교구의 정치적인 중요성과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감독들은 그곳의 총대감독직을 차지하려고 이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네스토리우스가 감독직에 부임했다. 그가 당도했을 때 그곳에는 기독론 논쟁이 한창이었다.
에베소 야외극장(1세기) 약 2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던 곳(행 19:23-24)이다. 에베소 항구에 내려 시내로 가는 길목에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길 끝에 있던 항구는 퇴적작용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평야가 되었다.
에베소공의회 참석자들이 이곳을 방문했거나 바라보면서 지나갔음이 분명하다.
에베소공의회(431)로 이어진 논쟁의 불씨는 네스토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임신자’(Theotokos: Bearer of God) 또는 ‘하나님의 어머니’(神母)라고 일컫는 것을 반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3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선호한 ‘하니님의 어머니’는 공의회가 열린 에베소 지역의 이교인들 사이에 만연한 모신(母神) 숭배 풍토에 부합했다.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교구의 사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가 그러한 명칭 사용을 반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자 감독들은 그를 정죄하고 출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 까닭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일원인 아폴리나리스가 주장한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또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그의 신성과 인성을 혼동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그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임신자’(Theotokos)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임신자’(Christotokos)라고 일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본성의 통일성을 희생시킬 정도로 그 차이를 강조했다. 인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났으며 하나님과 연합되었다. 출생하신 로고스, 곧 하나님과 연합된 인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아들은 어머니와 동일본질을 지녔다. 인간 마리아에게서 난 것은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이다. 마리아가 낳은 것은 인성이지 신성이 아니다. 신성과 인성은 나누어진다. 이 둘은 결합되어 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론은 플라톤의 이원론 사고양식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온전하지 않다. 칼케돈공의회(451)는 그 주장의 일부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는다는 이론을 채택했다.
한편,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키릴(Cyril of Alexandria, d. 444)은 네스토리우스가 ‘하나님의 임신자’라는 명칭에 반대하는 설교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정죄할 지략을 동원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키릴을 황제의 법정에 고소하는 일로 말미암아 그는 일찍부터 네스토리우스를 견제했다.5
키릴은 정략가였다. 황실을 움직여 돈을 마음대로 얻어 썼다. 그의 교구가 확보하고 있는 많은 재원을 네스토리우스를 공략하는 데 사용했다. 키릴은 신학보다는 재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을 이용하여 고위 관직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키릴은 네스토리우스를 제거하려면 로마의 환심(歡心)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서 그 목적을 성취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드디어 돈으로 로마교구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의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그 무렵, 네스토리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키릴은 이 소문을 이용하여 로마감독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어지도록 만들었다. 이집트사막의 수도사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수도사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와 깊은 인연을 가졌으며,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주장이 정통이라고 믿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정통교리’를 지키는 활동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로마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불신앙적이라고 간주했다. 그렇게 생각한 근본 이유는 그의 이론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430년에 로마에서 모인 대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그의 주장을 취소하도록 종용하기로 하고, 키릴에게 그 일을 맡겼다. 키릴은 성명서를 만들어 네스토리우스에게 주장을 취소하라고 했다. 다소 과격한 용어로 쓴 편지들을 보냈다.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12개의 저주(Anathema)가 담긴 서신도 보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학이 정통이라는 신념을 깔고 있었다. 키릴은 이 편지들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승리가 보장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도 키릴에게 12개의 저주문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상호간 주고받은 서신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전체에 알려졌고, 전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황제는 이 문제를 종결짓기 위해 431년 6월에 에베소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의 환심을 산 키릴은 종의회 개최의 주도권을 받아냈다. 회의 날짜를 자가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안디옥학파의 신학자들이 에베소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한 촉박한 시일에 공의회 날짜를 잡았다. 회의장에는 키릴을 지지하는 감독들과 수도사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에베소의 감독 멤논(Memnon)은 그 행사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키릴의 지지자인 그는 대중을 선동하는 집회를 주도하고, 무장한 사람들을 회의장에 배치하여 공의회의 분위기를 자기편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서 개회되어 회무를 진행했다. 소수의 반대를 무시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저주’(Anathema)를 결정, 선언했다. 청문회를 거치거나 연구문서를 채택하지도 않은 채 그를 이단으로 단정했다.
한편, 안디옥의 대감독 요한은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했다. 에베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요한과 그의 일행은 네스토리우스에게 저주가 선언된 4일 뒤에 에베소 가까운 곳에 도착했다. 키릴이 주도한 공의회의 결정 소식을 듣고서 그들은 숙소에서 곧장 ‘에베소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정당하다고 선언하고, 키릴과 멤논을 이단자로 정죄했다. 두 개의 에베소공의회가 각각 정통성을 주창했다.
기독론 문제가 그 지경에 이르자 로마감독은 대표단을 에베소에 파송했다. 로마감독이 어느 편을 인정하는가에 따라 정통과 이단이 결정될 판이었다. 싸우는 자들 곁에는 언제나 칼을 갈아주고 이득을 챙기는 자가 있다. 로마 교황청은 동방교회의 교회·신학 논쟁에 항상 변수로 작용하면서 이득을 챙겼다. 정략가인 키릴은 신속하게 교황청이 보낸 대표단을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자신의 이야기만 청취하도록 하고 네스토리우스 일파의 주장을 접하지 못하게 했다.
로마는 평소에 동방교회의 총사령관격인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네스토리우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교황청 사절단은 키릴이 주재한 에베소공회의의 결정사항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요한이 주재한 에베소공의회를 정죄했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이단재판은 공정한 신학 논의 과정을 거쳐 내린 결론이 아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결정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총대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안디옥으로 추방되었다. 칼케돈공의회가 그의 주장 일부를 수납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 때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는 우여곡절 끝에 리비아 사막의 조그마한 오아시스 곁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안디옥의 대감독 요한과 시리아의 감독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방교회와의 교제를 단절하고,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견지했다. 시리아는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관할밖에 있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점차 발전하여 시리아와 인도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서라벌 석굴암에까지 그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위 글은 최덕성, <쌍두마차시대>(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2), 제8장 "에베소-칼케돈공의회," (183-193쪽)의 글과 사진이다. 칼러 사진과 내용관련 그림들을 곁들인 중세기독교를 소개하고 학문적으로 논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책은 이와 같은 진귀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이 글은 <열방뉴스레터>(2016 가을호)에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석굴암"이란 제목으로 기고를 했다.
최덕성
글쓴이는 신학자이다. <한국교회친일파전통>(2000) <신학충돌>(2012)을 포함하여 약 20권의 신학관련 학술서를 저술했다. 고신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리폼드신학교, 예일대학교,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수학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훼이트빌장로교회의 담임 목사로 봉사했고,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1989-2009)로 가르쳤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기독교사상사 전공자이며, 교의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