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보다 삶이 더 중요한가?
그레이스앰 메이첸 교수 (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회 안의 자유주의 신학은, 더 이상 학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더 이상 신학교나 대학만의 문제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공격은 주일학교의 교사용 교제, 강단, 종교 언론에 의해서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공격이 정당하지 않다면, 그 해법은 신학교를 없애거나 과학적 신학 연구를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욱 진지하게 추구하고, 진리를 발견했다면 그 진리에 더욱 충실하게 헌신하는 데 있다.
신학교와 대학들에서는 이 큰 문제의 뿌리가 일반 세상에서보다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이 많이 사라졌으며, 새로운 종교를 옹호하는 자들도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며 과거의 형식에 순응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솔직함이 퍼져 나가야 한다. 종교 교육자들 사이에서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어느 것보다도 가장 해롭다. 그러한 바람은 너무나 자주, 위험할 정도로 부정직함에 가깝다. 종교 교육자들은 마음속 깊이에서는 자기 견해가 급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기의 마음을 전부 드러냄으로써 교회라는 거룩한 분위기 속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교리에 대항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들은 말한다. “가르침은 중요하지 않다. 신조들은 단일한 기독교적 경험을 시대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이며, 신조들이 그 단일 경험을 표현하는 한 모든 신조들은 똑같이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의 가르침들이 역사적 기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최대한으로 먼 거리에 있을 수 있지만, 그 근본은 같다.”
‘교리’에 대한 현대인의 적대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과연 교리 자체에 대한 반대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한 교리를 위해서 다른 특정한 교리를 반대하는 것인가? 많은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이 후자의 경우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도 교리가 있으며, 이 교리들은 역사적 신조들에서 발견되는 모든 교리들처럼 끈질기고도 배타적으로 주장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 인간의 보편적 형제애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것들도 전부 교리이므로, 역시 지적인 변호를 필요로 한다. 외적으로는 모든 신학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설교자들은 어떤 한 가지 체계를 위해서 다른 체계를 반대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도 신학적 논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신조들이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경험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50년 전에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적으로 간주되던 불가지론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 적이 진영 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유만으로 우군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신조에 대한 개념은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개념에 따르면, 신조는 단순한 기독교 경험의 표현이 아니라 경험의 기초가 되는 사실들을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는 주장이 이따끔 제기되는데, 겉으로는 경건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주장은 철저하게 거짓이며, 심지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 거짓을 탐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삶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의 영역에 속한 것에 대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이상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삶이라는 주장은 네로 치하의 로마 제국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였다는 주장과 똑같이 역사적 조사의 대상이 된다. 로마 제국이나 프러시아 왕국이나 미합중국처럼 기독교도 역사적 현상이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기독교는 역사적 증거를 기초로 조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는 말이 참인가? 이 질문은 기독교의 시작을 조사함으로써만이 확정될 수 있다. 모든 단체가 시작될 때에는 설립 문서가 있으며, 거기에는 단체의 목적들이 명기된다. 기독교의 시작은 상당히 분명한 역사적 현상이다. 기독교 운동은 나사렛 예수의 죽음 며칠 이후에 생겨났다. 예수의 죽음 이전에 기독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이전에 기독교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오직 예비적 단계였을 뿐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생겨났으며, 기독교 자체도 역시 새로운 어떤 것이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중요한 새 출발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에서 이방 세계로 퍼져 나가 기독교라고 불리게 된 괄목할 만한 현상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초기 단계에 대한 분명한 역사적 기록이 바울의 서신들에 보존되어 있다. 진지한 역사학자들은 모두 그 서신들을 기독교의 처음 세대가 실제로 생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서신들의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운동을 일으킨 예수의 친밀한 친구들과 직접 대화했으며, 그 운동의 근본 성격이 무엇이었는지를 서신들 속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를 근거로 하여 거기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초기 기독교 운동은 현대적 의미의 삶의 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어떤 메시지에 근거한 삶의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감정이나 활동 프로그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에 근거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교리에 근거했던 것이다.
바울은 교리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교리가 그의 삶의 기초였다. 교리에 대한 헌신 때문에 그가 놀라운 관용을 베풀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로마 수감 중 놀라운 관용의 예가 있었는데, 빌립보서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히고자 질투와 분쟁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한다. 전파되는 방식은 잘못 되었지만, 메시지 자체는 참이었다. 바울은 그 메시지가 제시되는 방식보다는 메시지의 내용에 훨씬 관심이 있었다. 이보다 더 훌륭한 관용의 예를 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무조건 관용을 베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에서는 전혀 관용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도 경쟁적인 전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갈1:8). 로마에서는 경쟁 전도자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참이었으므로 관용했으나, 갈라디아에서는 메시지가 거짓이었으므로 관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의 반대는 전적으로 그들의 교훈에 거짓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참 복음을 복음이 아닌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실용주의가 그의 영혼에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은 복음 메시지의 객관적 진리를 확신했으며, 그 진리에 대한 헌신이 그의 삶의 위대한 열정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리이기도 했으며, 논리적으로는 교리가 먼저였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과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 사이에 다른 점이 무엇이었는가? 갈라디아서의 엄청난 논쟁을 야기한 요소가 무엇인가? 그들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음도 믿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도 믿었다. 문제는 그들은 그 외에도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일이, 율법을 지키려는 신자 자신의 노력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차이가 극히 미세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유대주의자들뿐 아니라 바울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그 중요성의 깊이에 있어서 믿음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믿었다. 그 차이는 세 단계에 대한 논리적인- 시간적인 것도 아닌- 순서에 불과했다. 바울은 사람이 처음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럼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다음으로 즉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주의자들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믿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 다음에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차이는 극히 미묘하고 실체가 애매한 문제로서, 실천적인 영역에서 이룬 큰 합의에 비추어 보면 거의 문제 삼을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바울도 기독교의 연합이라는 큰 원칙에 동의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자신의 차이가 전혀 다른 종교 유형의 차이임을 분명히 이해했다. 그것은 공로의 종교와 은혜의 종교 사이의 차이였다.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일부만을 제공하고 나머지는 우리 자신이 채우도록 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절망적으로 죄의 짐을 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율법의 옛 굴레 아래서 신음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채우려는 시도가 바로 불신앙의 본질임을 바울은 분명히 보았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던지며, 모든 일에서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이 옳았다. 바울과 유대주의자를 갈라놓은 차이는 단순한 미묘한 신학적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바로 이것을 위해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싸웠다. 만약 유대주의자들이 승리했다면 이 찬송이 결코 쓰여질 수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비교리적인 종교를 옹호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메시지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중시했다. 현대 자유주의 설교자들은 때로 바울의 글을 문맥과 무관하게 인용하고, 그것을 원래의 의미와 전혀 다르게 해석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정반대의 인상을 심으려 한다. 바울은 예수의 윤리적 원리들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종교나 윤리의 보편적인 원리에만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기독교 교리였다. 그에게 교리란 기독교의 단순한 전제가 아니라 핵심이었다. 만약 기독교를 교리로부터 독립시킨다면, 바울의 사상은 기독교의 뿌리와 가지에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역사적 증거 앞에서 명백하게 무너진다. 바울의 종교를 초대 교회의 종교와 분명하게 구분하려는 많은 사도들이 있었다. 기독교 운동에 바울이 전혀 새로운 원리를 도입했다든지, 심지어 바울이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바울의 서신들 자체가 예수의 최초 무리들과 바울이 근본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이런 일치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초기 기독교 역사 전체가 미궁에 빠지고 만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관계가 전체적으로 어떤 성격이었는지 보여주는 서신들에 드러나 있으며, 또한 바울이 초대 교회로부터 받은 전승을 요약하는 귀중한 단락인 고린도전서 15:3-7에 놀라울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초의 제자들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기독교 복음은, “복음” 혹은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 실제로 의미하듯이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이었다. 처음부터 그 발생한 일의 의미가 제시되었고, 그에 따라 기독교 교리가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이것은 역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은 교리다. 결코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된 이 두 요소가 없다면 기독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그저 “나사렛 예수는 경건한 자녀로 훌륭한 삶을 살았으며, 우리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말을 듣는 여러분도 그런 매력적인 삶을 위해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권합니다”와 같은 권면을 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안에 큰 희망을 일으켰는데, 그 희망은 십자가 사건의 의해 깨졌다. 이런 상활에서 종교와 윤리의 일반 원리에 대한 반추는 그 희망을 되살릴 힘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연약하고 풀 죽었던 사람들이, 스승 사후 불과 몇 날이 못 되어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영적인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무엇이 이런 충격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었을까? 무엇이 이 연약하고 겁쟁이인 제자들을 변화시켜 세상을 영적으로 정복하게 만들었을까? 십자가 사건과 예루살렘 활동 개시 사이의 몇 날 동안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임무를 위한 새로운 장비를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 장비의 현저하게 눈에 띄는 요소만을 놓고 보아도(그리스도인들이 믿기에 오순절에 부여받은 것은 논외로 하고라도) 그 새 장비가 무엇이었는지는 자명하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을 정복하러 나갈 때 사용한 위대한 무기는 외적인 원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메시지, 최근에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 곧 “그가 부활하셨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부활의 메시지는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었으며,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로 이해되었다. 이제 그것은 예수가 지상에 있었던 전체 생애와 연결되었다. 예수의 오심은 이제 죄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말씀에만 주의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일차적으로 예수가 한 일에도 주의했다. 세상은 한 사건의 선언을 통해서 구속받아야 했고, 그 사건에는 의미가 덧붙여진다. 의미와 함께 그 사건을 제시하는 것이 교리였다.
기독교 메시지에는 항상 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한다. 사실을 서술하는 것은 역사다. 그 사실의 의미와 함께 사실을 서술하는 것은 교리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역사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교리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기독교였다.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1923), chapter 2 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