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교회당(런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역사의 선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7년 무렵에 창의적으로 만들어진 고백문서이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여러 가지 신조문과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탁월성을 인정받고 있다. 여러 장로교회들이 이를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21세기에도 유익한 신앙고백문서이다.
신앙고백[서]는 개인, 단체, 교회, 종교회의 등이 교리와 신념을 공적으로 선언할 의도로 작성한 것이다. 신조(Creed, Symbol)와 신앙고백(Confession)은 비슷한 말이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더 포괄적이다. ‘언약’(Covenant)이라는 고백문서도 있다. 이것은 특정 신앙공동체가 맹약(盟約) 형태로 수납한 고백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분량은 방대하다. 이 고백문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더불어 장로교 권에서 널리 수납되어왔다. 스코틀랜드교회와 미국장로교회는 이것을 3백년 이상 유일한 교리표준으로 사용해 왔다. 전자는 1647년에, 후자는 1729년에 이를 채택했다. 미국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회중교회들은 1748년에 이 신앙고백서의 교회 정치에 관한 조항만을 바꾸어 채택하여 사용해 했다. 이것은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0년대의 영국이라고 하는 시대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기본 교리들을 그 어떤 신앙고백서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영적 갈급함을 가진 청교도―장로회 목회자들이 성경적 기독교를 정착시킬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에 여러 해 동안 기도하면서 애써 만든 것이다.
모든 신앙고백서들이 그러하듯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만든 신앙고백문헌이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는 점에서 그 가치는 다른 신앙고백서들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신앙고백의 기능에 대한 검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역사와 정치적 배경과 그 내용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 특히 에큐메니칼 시대의 교회에 시사(示唆)하는 바와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신조·신앙고백서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심령의 넘침으로 말미암아 나의 입은 말을 한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고백한다”(credo, ergo confiteor)는 고전적인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일 때 신앙을 고백해야 할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신조·신앙고백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신앙고백이 있다.
‘사도신경’은 영지주의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신조에서 칼케돈신조까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 만들어낸 신조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간단하던 신조가 점차 확대되어 전체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고백문헌들은 이단들의 도전이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교회가 신앙하는 바를 조리 있게 체계화 한 것이다. 교리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도 있고, 고백문서가 만들어지는 당시의 특별한 문제에 제한하여 작성한 것도 있다. 독일교회의 ‘바르멘신학선언’(1934), 한국교회의 ‘장로교인 언약’(1940) 등은 당시의 교회가 직면하고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신학적인 형식을 잘 갖춘 신조문·신앙고백서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교회의 일반적인 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전체 회의가 만든 것도 있다. 특정 교회의 공의회가 만든 고백문도 있고, 신학자들이 교회의 위탁을 받아 만든 것도 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이정표 또는 지계석(地界石) 기능을 갖고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적인 일치를 도모하려고, 거짓 교훈을 막아내는 ‘신앙의 규범’으로, 공적인 표준문서로 만들어졌다. 단일 고백을 표방하여 교회의 일치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신앙규제 기능은 가끔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고,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하게 하기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은 ‘신앙의 규범’이며 기독교 교육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공적인 교육에 적용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이단과 그릇된 사상과 오류를 막아냈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최종 규범이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에 종속된다. 성경과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진다. 신조·신앙고백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신조나 신앙고백서는 무슨 유래를 갖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생겨난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조나 신앙고백서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거나 절대화하면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와 교조주의(Dogmatism)에 빠진다.
소시니언과 퀘이커와 유니테리언 그리고 신학적 합리주의자들은 신조·신앙고백문의 권위와 용도를 부정한다. 신조·신앙고백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신앙을 구속하고 개인의 판단을 방해하며 독선, 위선, 고집을 조장하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본다. 종교적인 증오심을 조장하고 역작용을 일으켜 서로 험담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운동의 근거가 되고, 신자들을 그것에 종속시킨다고 본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어떤 지침(clue)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는 신자 개인과 교회에 의미 있는 안내를 제공하기에는 방대하다. 신앙고백이나 공식화 된 신조·신앙고백이 없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다. 근본주의 성격을 지닌 독립파 교인들, 오순절파 신자들, 일부 침례교인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 가운데도 신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조·신앙고백문을 배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형식화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름대로 어떤 전통이나 신념체계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추앙하고 있다. 신조 공식과 신앙고백을 담은 서술문을 소유하고 있다.
스위스종교개혁에서 출발한 개혁교회는 여러 개의 신조·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다. 제네바신앙고백서(1536).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 벨기에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1스위스신앙고백서(헬베틱신앙고백서), 제2스위스신앙고백서(1566), 도르트신경(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1648) 등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다.
그밖에도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이 채택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이 있다. 미국, 인도네시아, 일본, 대만,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들이 채택한 것들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새신앙고백서’(1967)와 미국장로교회의 ‘신앙선언’(1976) 그리고 미국개혁교회(RCA)의 ‘우리의 희망의 노래’(Our Song of Hope, 1978)라는 신앙고백서도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독자적인 ‘우리의 신앙고백’(1976)을 가지고 있고, 예장 통합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라는 독자적인 고백문서를 가지고 있다. 이 독자적인 신앙고백서와 더불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납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납, 고백하지 않는다. 예장 고신교단과 합동교단과 한국의 여러 군소 장로교단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서로 사용하고 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
런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웨스트민스터교회당은 중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1045-1050년에 건축했다. 1065년 12월 28일에 봉헌되었다.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참회의 표로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국왕이 건축한 본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현재의 고딕 교회당 건물은 1245-1517년에 재건되었다. 헨리 8세가 에드와드를 추모하는 동시에 그곳에 자신의 묘소로 만들고자 재건했다. 이 교회당에 붙은 두 개의 서편 종탑은 1722-1745년에 건축되었다. 이 교회당에서 킹 제임스 판 구약성경 4분의 3이 번역되었고, 신약성경의 뒷부분 절반이 번역되었다.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 고백문은 본래 영국국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1642년부터 3년여 동안의 수고를 거쳐 작성되었고, 1646년 12월에 영국 국회로 넘겼다. 영국 상원은 1647년 2월에 이를 통과시켰고, 하원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원은 이 고백문의 문장을 따지고 성경 참고본문을 추가하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이 첨가한 성경 근거 구절들의 정확도를 문제 삼았다.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은 완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교회 총회는 1647년 8월 27일에 이를 자신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기존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를 대체한 것이다.
하원이 이 고백문서를 즉각 통과시키지 않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는 국회가 그 거친 숨결을 느낄 정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 영향력은 국회로 하여금 장로교인들을 숙청하고 독립파 회중교도들을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하원의원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조차 크롬웰의 영향을 받는 독립파 신자들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장로회 특징을 가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영국교회와 무관하게 되었고, 영국국교회는 감독주의 교회 정치체제로 정착되었다.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영국국교회라고 하는 정치 기형아를 낳았다. 그가 죽은 뒤에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메리가 왕좌에 등극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몇 년 뒤에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등극하여 영국국교회를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1558-1603)는 군주의 권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정하심에 따라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는 형식으로 주어진다고 믿었다. 군주는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왕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반항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대죄라고 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를 절대 군주로 여기지 않았다. 왕권이 하나님의 뜻과 자연법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회의 권한을 확대했다. 그러나 국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국왕이 국회를 소집했다. 국회는 세금부과, 법률제정 등의 업무만을 다루었다. 외교, 종교, 국가기밀은 군주의 영역이었다. 영국은 이러한 제도로 정치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l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면서도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그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스코틀랜드 슈트워드 왕가의 메리 여왕의 독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는 1603년에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제임스를 외국인으로 여겼다. 스코틀랜드인이 국왕으로 등극하자 영국 국회 안의 장로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교도들 다수가 왕에게 기대를 걸고 영국국교회가 감독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장로교 정치를 도입하고 또 개혁주의 신학을 대폭 수용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왕권을 돈독히 하는 데는 장로회 정치보다는 감독주의 교회정치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유일한 법 제정자이며, 따라서 국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회 제도가 왕권 신장에 거침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청교도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양육을 받았다.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 아래서 자랐다. 그는 칼빈주의 교회관이 왕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확립된 교회 안의 왕권을 확고히 붙잡고자 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새 시대의 흐름은 옛날의 권력 구조의 문제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으로 탐험하면서 상업을 발달시켰다. 상권(商權)을 쥔 중간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헨리 8세는 수장권(The Act of Supremacy)을 선언하고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포했다. 이 때 영국교회는 국가교회가 되었다. 그 무렵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교황의 잔재들’을 제거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가 국왕이 되자 의기양양 청교도적인 개혁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영국이 장로회 정치와 개혁신학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주의와 장로회가 왕성한 스코틀랜드 출신인 국왕 제임스가 자기들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교회의 개혁이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장로회 정치와 왕정제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고 조만간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국교회가 감독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독 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생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국회의 기능을 과소평가했고,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만 그것을 소집했다.
1625년에 국왕으로 등극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감독주의 교회정치 제도에 연연했다. 청교도―장로교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국회의 권한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펼쳤다. 정치동맹 관계를 구실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프랑스의 마르 드 메디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찰스는 귀족들에게 과도한 대출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귀족 70명을 수감했다. 국회는 이에 항의했다. 이런 일로 왕권과 국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왕의 의사는 국회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격노한 국왕은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했다. 국회는 상원에 속한 영국국교회 소속 감독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맞섰다. 찰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10년 이상 혼자서 영국을 통치했다. 독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적(神的)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덕했던 반면에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러나 국회가 없는 이 나라에는 점차 정치 불균형이 나타나고, 청교도들과 의회주의자들의 분노가 커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의 자유의 상징이 된 국회가 유명무실하게 된 것에 분노했다.
국왕 찰스의 독주는 결국 재정 결핍을 초래했다. 국민은 극도의 내핍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왕실의 활동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군대는 축소되어 일부만 남았다. 1633년에 대주교가 된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는 영국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영국국교회에 출석하라고 강요했다. 제도를 강화하여 불만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장 앞에 붙들어 놓고 교회 공예배에 한 번 불참한 데 1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즉각 라우드의 조치를 공개적인 신앙박해로 간주했다. 의회주의자들은 군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대주교 라우드는 스코틀랜드교회가 예배의식서인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채택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같은 예전을 사용하여 왕국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서 그는 스코틀랜드에 장로회주의가 일방적으로 정착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기도서를 반대했다. 그것이 처음 낭독된 교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신앙 탄압에 반대하는 내란도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참된 개혁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 차원의 ‘언약’(Covenant)에 서명했다.
이렇게 되자 찰스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해산을 명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효력이 없었다. 명령이 거부당하자 왕은 군대를 보냈다. 그 동안 왕에게 충성을 바쳐오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때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언약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영국군과 맞붙어 싸웠고, 영국군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국왕은 항복하고 국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조문을 담은 항복서에 서명했다. 전쟁 관례에 따라 국왕은 영국 땅에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막대한 전비(戰費)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자면 국회를 열어야 했다. 국왕은 그 동안 소집을 거부해 오던 국회를 소집했다. 전비를 보상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40년에 ‘장기국회’(Long Parliament)로 알려진 국회가 소집되었다. 의원들은 11년 동안이나 회집하지 않은 국회가 다시 열리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임했다. 감독주의 국교회파, 의회주의 장로회파, 회중주의 독립파로 나뉘어졌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파 회중주의 지지자였다. 다수를 차지한 청교도 장로회주의자들은 감독주의 지지자들과 제휴를 하고 왕을 움직여 영국국교회가 장로회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하도록 일을 추진했다. 국회가 왕의 신하를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도록 했다. 찰스에게 영국국교회를 개혁하는 총회 소집을 청원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 대표는 영국 국회를 설득하여 모든 의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신앙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과 교리문답에 바탕을 둔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장로회 제도가 양심에 따른 개인 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대했다. 독립파 회중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신앙과 그것에 대한 관용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 희생될 위기에 처하자, 크롬웰은 왕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만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유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왕정파는 감독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영국국교회를 지지했다. 군주의 신적인 통치권과 감독주의 교회 형태가 왕정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신앙을 위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장로회주의를 따르는 청교도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국회의원 다수를 차지하던 그들은 그 동안 수난을 당해온 찰스를 동정하면서 왕과 국회와 교회가 나라의 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국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영국국교회를 보다 더 장로회다운 치리 형태로 바꾸고 신학을 개혁하고 교회를 정화하기 위한 교회 개혁 법안을 제정하자는 안을 결의했다. 국회는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성직자 총회를 소집하려고 다섯 번이나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찰스는 번번이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은 여섯 번째 그 법안을 통과시키고 발표했다. 상원도 1643년 6월 12일에 그것을 통과시켜 하원에 동조했다. 종교회의인 총회는 왕의 동의 없이 상원과 하원에 의해 1642년 7월 1일에 소집되었다.
국회는 총회를 국회를 돕는 자문기구로 여겼다. 그래서 국회가 총회의 회원을 선임하고, 책임자를 임명하고 토론의 주제를 제시하고 활동범위를 제약했다.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21명의 영국국교회의 청교도 목사들과 약간 명의 회중 교회 목사 그리고 두세 명의 감독제 선호자들로 구성되었다. 총대 대다수는 장로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총회에는 30명의 평신도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3명의 에라스티안(Erastian: 교회가 국가권력에 종속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과 스코틀랜드교회가 파송한 여섯 명의 대표(Commissioners)가 자문으로 참석했다.
국회는 총회를 소집하면서 영국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 식의 예배가 아닌 단순한 예배모범을, 감독제도가 아닌 장로회 정치를, 로마교 신조가 아닌 개혁주의 신조를 채택하여 모든 국민을 포용하는 국가교회로 개편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퀘이커와 재세례파 신자 등 과격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무정부주의를 야기하려는 자들이나 영국국교회를 갈라놓으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배격하기를 바랐다.
총회는 국회의 요청에 따라 먼저 영국국교회의 헌장인 ‘39개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신조가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잘못된 해석을 일부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니케아신조와 아타나시우스신조를 참고하여 그 교리가 철저히 성경에 바탕을 두게 했다. 난해하고 이론적인 것은 배제했다.
그런데 16번째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할 즈음에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국회와 찰스 l세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민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군은 퇴각해야 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이 필요했다. 스코틀랜드는 지원군 파병의 대가로 엄숙한 동맹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이며 영국국회에서 스코틀랜드 자문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토론의 권한은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상태로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의 장로교 목사들은 신앙고백 초안 작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때부터 신앙고백서 작성의 방향이 달라졌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기독교) 통일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향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은 영국 측의 4명의 의원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기초 위원으로 활약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강력한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전통 아래서 만들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차례의 회의와 수많은 소위원회로 모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작성하는 데는 별 논란이 없었으나, 장로회 정치가 과연 신적인 권위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장장 한 달 동안 논의했다. 총회는 기도, 예배, 금식으로 이어졌다. 중단 없이 여덟 시간이나 예배를 계속 드린 일도 있었다. 한 시간의 설교, 두 시간의 기도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1647년 11월, 회의를 마칠 무렵에 신앙고백서는 교리 지침서로, 나중에 완성한 소교리문답은 젊은이들의 교육교재로, 대교리문답은 설교자들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 시편찬송도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1647년 11월에 총회를 떠났다. 그들의 주도로 스코틀랜드교회는 기존의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국 하원은 고백서를 즉각 승인을 하지 않고 서술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첨가하라고 요구했다. 성경 참고본문을 찾아 기입하는 일로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렵 크롬웰 군대는 국회의 하수인이 아닌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는 국왕 찰스를 체포했고, ‘양심의 자유, 신앙의 관용’을 외쳤다. 크롬웰도 장로회 제도와 그러한 방향으로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추종했다. 그러나 독립파 사람들이 그를 옹립하고 점차 국회를 차지했다. 군주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묶였고, 교회는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 작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연되고 있었다.
하원은 상원이 이미 승인한 신앙고백서를 1648년 6월 2일에 이르러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가버린 탓으로 장로회주의자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장로회주의자들은 독립교회주의자들을 따돌리고 감독주의자들과 제휴하여 왕을 인정하면서 영국국교회에 장로회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했으나 장로회 제도의 꿈은 무산되고, 총회가 수고하여 만든 신앙고백서는 영국국교회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것들이 자리를 잡도록 만들기에는 그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크롬웰은 국회를 해산했다. 1653년에서 1658년까지 호민관으로 통치했다. 자신이 펼치는 공화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장로회주의자들은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크롬웰은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 회중교회 치리체제를 원했다.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국회가 복구되었다. 국회는 1660년 3월 14일에 장로회 제도를 영국국교회 정치제도로 공인한다고 하는 법을 선포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다시 채택하고, 그것을 인쇄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로회 제도와 감독제도가 갈등을 겪는 가운데서 찰스의 아들 찰스 2세가 감독주의 체제를 재정비하자, 장로회주자들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국회는 왕정 복귀를 공포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득세한 감독주의 감독들은 복수심에 가득 찬 상태로 통일법(The Act of Uniformity)을 통과시켰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구 밖으로 추방했다. 청교도들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장로회와 개혁신학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교구에서 축출된 비국교도 다수는 독립 침례교도로 자리를 잡았다.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일부 장로회주의 회원들은 영국국교회와 손을 잡았다.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사상
16세기의 종교개혁 직후 유럽 대륙에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한 편에서는 정통주의가 등장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기독교 신앙이 이성의 역할에 강조를 둘 것인가, 경험에 강조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주제로 대두되었다. 신학자들은 성경 진리를 새롭고 단순하게 이해하던 종교개혁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객관적’인 교리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정통주의 시대의 특징은 신학 이론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경향을 지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정통주의 시대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통신학, 개혁파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창조, 작정, 섭리에 대한 합리적 서술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성령과 선교는 다루지 않는다. 성령은 영국국교회의 ‘39개 신조’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그것을 다루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경건주의가 왕성하던 시기부터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특기할 만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운동 사건 이후 125년 동안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했다. 17세기의 신학과 신앙 명제들을 포함시켰다. 조리 있고 엄숙하며 명확한 언어로 서술했다. 완결성과 포괄성을 지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진리를 변호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진리의 원천인 성경을 다룬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전체 개요를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하나님의 작정, 섭리를 다룬다. 제6장에서 제20장까지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한다. 제21장에서 제26장까지는 기독교 삶의 윤리 차원을 다룬다. 하나님의 율법, 양심의 자유, 교회와 국가, 결혼과 이혼 등을 서술한다. 마지막 부분인 제27장에서 제33장까지는 교회, 성례, 마지막 일들을 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The Westminster Divines)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과 돌보심 아래에 있다고 확신했다.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에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이나 도르트총회(1619)가 확정한 교회법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탁월성과 중요성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예정론, 하나님의 미리 아심 등에 대한 서술은 당시에 유행하던 연역 사고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성경에서 진리를 도출하는 귀납 방법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어떻게 정경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교회에 의해 그것이 권위를 갖게 된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부정한다. 성경의 진실성과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내적 증거야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설득력을 갖는 토대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한 교리 다음으로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무게를 둔다.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언약신학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제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논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나눈다. 이러한 구분을 두는 언약사상을 연방신학(Federal Theology)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 가지 언약만 존재한다고 본다. 행위언약이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신학이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의 3분의 2 가량을 개인과 사회 차원의 기독교 삶과 관계된 실천적 주제에 할애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기독교인의 삶과 건덕(Edification)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학문이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순종의 삶이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인간의 자랑이나 권세나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기독교 신앙의 구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보다 분량이 더 많은 대교리문답을 작성했다. 묻고 답하는 형식의 이 고백문서는 설교자들을 위한 길라잡이이다. 신앙고백서를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소교리문답이다. 제1문에서 제38문까지는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제39문부터 제107문까지는 기독인의 삶의 의무를 다룬다. 성경이 가장 요긴하게 가르치는 두 가지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본분(duties)이 무엇인가로 나눈다.
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한국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열린 총회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목표로 삼아 교회정치 제도와 정화(淨化)에 초점을 맞추었다. 청교도 정신을 반영하여 교회나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구속할 권리가 없다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를 배격한다. 바울, 어거스틴, 위클리프로 이어지고 칼빈이 강화한 칼빈주의 신학을 담고 있다.
잎서 언급했듯이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산물이며,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 사회, 정치, 정신, 신앙을 반영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다른 고백서들과 마찬가지로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 도시화, 산업화, 직장, 민주화, 남녀평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복잡한 인간관계, 환경, 핵무기, 자본주의의 횡포 등은 당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사회 문제,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오늘날처럼 자각하지 못했다. 영국교회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법률조문 또는 헌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도 엿보인다. 하나님의 ‘구속’을 강조한 반면에 ‘이웃’에 대한 그다지 큰 관심은 표명하지 않는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회 첫 노회는 인도장로교회의 신조문을 본 떠 만든 신앙고백문을 채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는 흔히 ‘12신조’라고 불린다.
이 신조문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한다. “대한예수교회에서 이 아래에 기록한 몇 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 및 인허 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청종하게 하는 것은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혀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을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배위량 선교사가 1925년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이 고백문서가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예장 통합교단 제52회 총회(1967)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기존의 신조에 첨가하기로 결의했고, 제56회 총회(1971)가 이를 공포했다. 제58회 총회가 결의한 교회 정치와 권징조례 수정안은 통과시켜 1974년 6월에 출간한 헌법 수정판에 그것을 수록했다. 수록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903년 미국장로교회가 수정하고 보충한 제35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를 포함시켰다.
예장 고신교단 제22회 총회(1972)는 노회 수의(隨意) 결과를 보고 받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공식 신조문으로 채택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원본을 채택하여 사용하다가 ‘성령에 관하여’(제34장)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제35장)를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출범한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의 초기 지도자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수납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아빙돈단권주석 문제(1935),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 안의 여권 문제(1934), 신사참배 문제(1938-1945), 조선신학교 문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 문제 등으로 장로교는 갈등을 겪었고,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고신교단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출범하면서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가설(假說) 총회가 본[래의]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예수교장로회로 계승한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장로교 정신, 원리, 예배, 신앙고백에 충실한 ‘정통신학운동’을 천명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로 여길뿐 자신의 신앙고백서로 수납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교회들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뒤로 하고 조속히 기구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반응을 담은 고백서라는 사실은 신앙공동체가 다양한 고백서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과거에 만들어진 것보다 더 탁월한 고백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뒤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보라. 그 어느 것도 이를 능가할만한 신앙고백서가 못된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며 영적으로 깨어 있던 그 시대의 교회의 경건과 견줄만한 풍토가 쉽게 조성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교회는 옛날보다 훨씬 더 세상의 지혜와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신학사조는 기독교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다른 종교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선언한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1983년에 미국북장로교회(UPCUSA)와 미국남장로교회(PCUS)가 통합된 교단이다. 바르트주의(신신학)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신앙고백서’(1967)를 수용하고 있다. 바르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주관적 차원으로 격하시킨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크다.
미합중국장로교회는 이러한 고백서를 가진 이 교회의 성경관은 목사·장로·집사 임직 때 임직자가 피임직자에게 묻는 질문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은 신구약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받아들이십니까?”
위 질문은 유서 깊은 기독교를 지향하는 장로교단들, 예컨대 한국의 예장 고신, 개혁, 합동 교단과 미국장로교회(PCA), 미국정통장로교회(OPC) 등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최종적 규범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대조적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신학의 마지막 보루이다. 예장 통합의 자매교단인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성경이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고 묻는다. 성경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말씀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바르트주의 성경관을 반영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은 항상 존재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단들과 이데올로기들은 고풍스럽고 부적절한 논쟁적 외침을 내뱉는 것으로는 결코 효과적으로 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새 신앙고백서를 만든다고 하여 새 것이 옛 것보다 더 탁월하고 창의적인 것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현대 신앙고백서들은 대체로 핵심 교리들를 지나치게 일방적이거나 빈약하게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은 개혁주의 공동체들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최덕성,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에서 옮김
웨스트민스신앙고백 전문 http://reformanda.co.kr/xe/index.php?mid=Archive&document_srl=46520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뒤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보라. 그 어느 것도 이를 능가할만한 신앙고백서가 못된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며 영적으로 깨어 있던 그 시대의 교회의 경건과 견줄만한 풍토가 쉽게 조성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이 크게 와닿습니다. 상담자의 자격을 말할 때, 험한 인생을 거친 사람보다 오히려 환경적으로 편한 가운데서 부드럽게 자란 사람이 어렴을 안고온 내담자에게 적합하다고 배우던 때를 기억합니다. 교회사회의 풍토가 나빠진 이런 상태에서는 바른 교훈도 공유하기 힘들다는 뜻으로도 이해됩니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가 탄생하기까지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와 많은 종들의 수고의 땀이 있었다는 사실들을 알게되고, 찬찬히 읽으면서 바른 교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함을 크게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