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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보다 더 유해한 복음주의자들

에큐메니칼운동 신학자들에게 고함


한국개신교를 대변하는 교회연합단체들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합동, 고신, 합신, 순복음 등 몇 개의 큰 교단들은 최근 독자적인 연합기구를 만들려고 뜻을 모았다가 추진을 일시 중지하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기조(基調)에서 출반한다. 신학부재의 교회일치연합운동은 순수하지 않다. 세속적 행태와 인본주의 동기와 정신이 앞선다. 세계 최대의 에큐메니칼 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부산에서 총회를 치른 뒤인데도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신학적 기초가 분명하지 않다.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학자들은 침묵하거나 이것도저것도 아닌 목소리를 낸다. 나팔 소리가 분명하지 않다.


한국장로교연합회라는  에큐메니칼 단체는 한국의 모든 장로교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다. “한 교단 다 체제”를 표방하면서 “한국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문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종윤 목사(전 서울교회)와 오덕교 박사(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주도하고 있다. 과연 이 움직임은 성경적 진리성에 충실한 장로교회 연합운동인가?


장로교 가운데 하나인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고백문서로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개정판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신앙고백서”라는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다. 두 고백서의 신학은 상반된다. 예장 통합 교단의 신학적 성격은 양두구육(羊頭狗肉)과 같다. 한국장로교 교단들은 하나 될 수 없는 신앙고백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다. 위 신학자들은 이 사실을 무시한다. 물과 기름을 섞으려 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지부격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신학적 바탕은 2013년 정초에 화두가 된 ‘4대 신학 조항’(종교다원주의, 용공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성경불신주의)과 더불어 확실해 졌다. 위 조항들은 WCC의 신학적 기초이다. 예장 통합은 WCC의 적극적인 지지 그룹이다. WCC 부산총회를 계기로 기독교라고 하여 다 똑같지 않음이 드러났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여기서 갈라진 한국교회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양다리 걸치고 있는 예장 통합은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신학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음이 확고히 드러냈다.


교회가 하나 되고, 교회연합기구가 하나 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라는 말씀이 교단통합, 교파통합, 연합기구의 통합을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인들과 기독교 단체들이 통합하는 것은 공동의 선교, 대사회적 신인도제고, 성도의 교제 등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평안하다고 하는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성경적 기초가 확실하지 않은 교회일치운동에큐메니칼운동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간다. 적군에게 아군의 성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다.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추종해 오던 유럽, 북미, 대양주의 주류 교회들은 추풍 낙엽처럼 쇠락하고 있다. WCC 부산총회가 논의없이 선포한 “선교와 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가 강조하는 지형변화(Changing Landscape)는 진리성에서 이탈한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칼운동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 이대로 좋은가? 필자는 WCC 부산총회가 계획되기 전인 2004년에, 고려신학회 기조연설에서 "보수와 자유를 아우르고, 양극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하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 중심의 교회연합 일치운동을 비판한 적이 있다. “진리 안에서 일치”를  간과하는 무조건적인 연합일치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동침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증후군처럼 일어나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했다.


필자는 WCC 부산총회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참석했다.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을 다룬 <신학충돌>(2012), <신학충돌 II>(2013)의 학문적 판단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4)는 WCC 부산총회가 계획되기 전에 출간된 책이다. 교회연합일치운동(에큐메니칼운동)이라는 주제에 대한 신학적 지침을 제공한다. 자유주의 진영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위험성과 성경적인 교회연합운동의 길을 제시한다. 아래의 글은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의 서문과 결론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성공적인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을 위한 간명한 길라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1. 북소리


한국교회 안에 증후군처럼 일어나고 있는 교회연합일치운동, 에큐메니칼운동은 그 북소리가 너무나 강하여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제1계명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그 행진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이단처럼 취급되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면 진리에 반항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국교회가 보이고 있는 극심한 분열 상태는 어떤 형태로든 개혁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분파 상태는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방해하고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信認度)를 떨어뜨린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내적 하나됨은 외적 일치로 드러남이 옳다. 신자들의 친교와 유대는 기독교 생활에 부합하며 소외되거나 선교가 어려운 상황 또는 혹독한 환경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무적인 힘을 준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타교파, 교단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마지막 분단민족 사회에 교회가 하나 되는 모범을 보임도 매우 중요하므로 감정의 예각(銳角)을 무디게 하여 조속히 하나 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위험천만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로 흐르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심의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그 궤(軌)를 같이 한다. ‘교회화합과 일치를 위한 신학을 수립한다’는 미명 하에 다양한 신학사상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 제조를 모색하고 있다.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아우르고, 사도적 신앙과 탈사도적 신앙을 동시에 포용하려고 한다.


교회연합일치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가 연합과 일치를 거부할 만큼 본질적이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의 신학이 교리논쟁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학문활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이 복음의 해석 작업이므로 항상 새롭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함께 부름을 입었으므로 홀로 옳음을 주장하거나 남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학의 미진한 부분을 창조적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정박지(碇泊地)를 버리고 새로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나설 것을 재촉한다.


대사회·대정부 활동과 구제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회 연합기구는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합일치운동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궁극의 목표는 교단통합이다. 다양한 교리와 신학을 용납하는 연합활동을 하다가 종국에 단일 교단으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신학을 수용하고, 모든 종류의 종교이론을 포괄하는 단일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긴 교회의 표지(標識)인 하나님의 말씀(성경, 교리)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친교, 성찬, 사회참여 성격의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개인구원, 사회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진보교회와 보수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계 교회들이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이다’고 하는 태도와 성경이 무오하다고 하는 문자주의 시각을 버려야 일치가 가능하다고 본다.


2. 조종(弔鐘)


자유주의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에 열성을 보여 온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은 극도로 쇠락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교회연합일치운동에 무조건 동참하는 것이 죽음과 키스하는 것과 같으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당분간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됨을 보여 준다. 신조, 신앙고백, 신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교회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생명을 앗아가며 교리를 소홀히 하는 무분별한 교회연합일치운동은 복으로 위장된 저주임을 가르쳐 준다.


한국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리, 교리교육에 대한 무관심이다. 설교는 진리체계를 제시하기보다는 축복, 평안, 윤리, 인간관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풍토에서 진행되는 교회연합일치운동은 교리무관심주의를 조장하고, 교파 간에 신앙고백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신앙무차별주의를 심는다. 성경에 토대를 둔 ‘역사적 기독교’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기독교’가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은 둔화되고, 교회의 생명을 앗아가는 해독과 위험에 대한 경계심은 허물어지고 있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운동 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장로교연합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연합일치운동을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무조건 추종할 것인가? 화이부동(和而不同)―신학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안별로 협조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분열된 교회, 교단의 하나 됨을 위한 선결 과제는 무엇인가?


3. 지향(指向), 지양(止揚)


우리는 지향(指向)해야 할 교회연합 일치운동과 지양(止揚)해야 할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의 일치와 ‘진리 안에서 일치’가 전제된 교회연합일치운동만이 정당하다.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보낸 교회들이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생명력을 잃고 추락하고 있다. 에큐메니칼운동, 종교 간의 대화, 자유주의 신학 때문이다. 우리는 한 세기 뒤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생명력 있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교회, 믿고 고백하는 바가 분명한 교회를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역사신학자 존 리이스(John Leith)는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을 신약성경처럼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 교단의 목사로, 유니온신학교(리치몬드) 교수로 봉사하다가 은퇴했다. 그가 말년에 저술한 책에서 자신이 지켜본 미합중국장로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토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시행해 온 신학교육이 낳은 재앙이라고 지적한다.


리이스는 미국합중국장로교회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미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듣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신학교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복음선포의 열정을 회복하면, 교회의 부흥은 시작될 것이다”고 말한다.


리이스의 이러한 판단은 브래들리 롱필드의 견해와 일치한다. 롱필드는 미국북장로교회와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 과정을 “되돌아보면… 확실한 교리적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지 않고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을 수 없다고 본 메이첸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말한다. 영국·독일·미국·캐나다·호주의 교회들은 교회의 생명력이 신학에 달려 있다는 것과,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과 포용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하면 생명력을 잃고 추락하게 됨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단과 일치하는 것은 죽음과 키스하는 것과 같고,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동침함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고 화려한 주택에 살고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죽은 목숨’에 지나지 않다. 당분간 생명은 지연되고 밀월을 즐길 수 있으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추풍낙엽처럼 쇠락하는 유럽과 미국의 주류 교회들의 실패는 한국교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역사 교훈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원수를 대적하고 진리로 허리를 동이지 않으면 추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4. 단일성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상 하나이다. 하나님이 부여한 지상 교회의 영적, 내적 통일성은 외적 하나 됨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이 다르지 않은 교단들의 단일화는 시급한 과제이다. 편파심·파당·배타의식·독선·완전주의·우월감·장자논리·외형주의·지방주의·기복주의·물량주의·교권주의·교회교(Churchanity) 습성은 교회의 발전과 하나 됨을 해친다. 분열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여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신앙고백적으로 일치하는 점을 먼저 신학적으로 확인하고, 서로의 ‘삶의 세계’를 이해, 존중하면서 신학, 교리, 생활이 같은 교회들끼리 먼저 합하고, 차츰 그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독교인들의 교제와 연합과 일치 활동은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해 언제나 환영할 만하다. 초교파 학생단체와 선교단체의 연합활동이나 ‘성서기드온’이나 기독교남자청년회(YMCA)나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와 같은 연합단체는 다양한 교파, 교단에 속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큰 규모의 선교사역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경우 무조건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 교리, 말씀에는 등을 지고 거짓교사, 세상지혜, 이단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있다. 교파 통합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지극히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고백의 일치(Confessional Unity)를 조건으로 삼는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교회 외형의 일치(Ecclesiastical Unity)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결합될 수 없는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펼쳤고, 로마가톨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 등은 교회 외형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일치가 교회의 외형의 단일화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 안에서 일치가 선행되지 않는 에큐메니칼 활동은 위험천만하다. 다원주의적인 하나 됨은 그리스도 교회의 내적 통일을 해친다. 정체성과 생명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된다.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부정하거나 고백하지 않는 자들을 제재하지 않는 교회나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회와 외형적으로 일치함은 유럽과 미국 교회들의 실패를 답습하는 것이다. 이 교회들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5. 최소 조건


에큐메니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 됨의 토대인 ‘최소 조건’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말씀―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의 일치가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다. 교회의 신앙고백적 통일성을 보전하는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순수한 신앙에 대한 공적인 증거이다. 바울이 가르치고, 어거스틴이 강조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진리 안에서 일치’를 도모하는 것만이 정당하다. 교회의 연합일치 활동도 성경이 제시하는 만큼 생각하고, 말하는 데까지 걸어가며, 제한하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교회, 교단은 각각의 고유한 신학노선을 지향하고 있다. 나름의 신학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각 교회는 세계교회의 관계 속에서 활동과 교제를 가진다. 자유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바르트주의,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등 각각의 신학 노선을 따른다. 신학 노선과 전통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으며 갑자기 바뀌지도 않는다. 설정된 신학노선과 전통을 변경하는 것은 어렵다. 만약 진보계 교회들이 기존의 신학 입장을 포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신학을 지향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주저하지 않고 수용한다면 그러한 연합과 일치는 순풍을 만난 배처럼 나아갈 수 있다. 성경무오성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진다면 성공적인 일치를 기대할 수 있다.


교회의 연합일치는 성경적 신앙고백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가 무엇인가 대한 이해는 교회전통과 신학유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기독교강요』 IV.1.12.)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바울이 가르쳤고, 어거스틴이 확신했고,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주의 5대 교리’로 간명하게 표현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선포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했다. 은혜로만 얻는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가 인간 공로(Works)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하나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한 신학적 논의가 앞서 이루어지고 교리 지침이 만들어지면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한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된다.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합하면 자유주의 기독교가 된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강과 탁류가 흐르는 강이 합쳐지면 탁류의 강이 된다. 탁류의 강에 뛰어들어 물을 정화하면 될 게 아닌가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합일치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주도하고 교회가 정통신앙으로 선회하도록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이상이다. 미국과 유럽의 교회들이 좌경화의 길을 들어설 때만 해도 절대 다수의 신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복음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매카트니처럼 자기 교단의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좌경화를 걱정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달았다. 다수의 신자들이 복음적,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좌경화 흐름을 중단시키는 데 이바지 하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교단, 교파를 막론하고 복음주의 신앙을 보이고 있다. 유서 깊은 기독교의 모습을 띄고 있다. 자유주의 기독교를 따르는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교회 현장의 신앙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 교단의 신학의 변질과 모호한 신학적 정체성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은 순수한 교리를 고백하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 곧 교회, 교단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개인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을 성경적으로 변경시키는 일에 기여하지 못했다. 교회의 신학은 그것을 주도하는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교회의 신학전통이 무엇을 고백하는가에 크게 좌우된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 과정이 보여준 것처럼 교회의 신앙노선을 결정하는 신학논쟁은 ‘별들의 전쟁’이다. 일반 신자들이 고백하는 것은 교단 신학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6. 진리 안에서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에 앞장서는 복음주의계, 개혁주의계 목회자들이 ‘진리 안에서 연합’을 도모해야 한다고 하는 단순한 조건조차 고려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탁류의 강을 정화하기는커녕 그 오염된 물결에 휩쓸리는 경향을 보인다. 변하는 것은 보수계 교회들뿐이다. 한국교회는 점차 자유주의 기독교를 따라가고 있다.


교회연합기구가 대정부·대사회 활동·구제 등의 일을 하는 것이 목표라면 화이부동(和而不同: 어울리면서도 동화되지 않음)의 자세로 협조하고 동참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공동으로 번역하는 등, 신앙고백, 교리,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안별로 협력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불교 승려와 손을 맞잡고 남북통일, 민족문제, 사회정의를 논해야 하며, 이슬람교 사제와 머리를 맞대고 종교 간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대화를 해야 하는 마당에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선한 일 함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는 교회연합일치운동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한국교회의 교회연합 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교단 통합, 곧 기구 단일화이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는 “분열된 교회들의 연합[은]… 한국교회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고 천명한다. 교회 외형의 획일성(Uniformity)을 추구하고 있다. 신학은 교회의 생명이며 신앙공동체의 신앙을 결정짓는다. 상대주의와 종교혼합주의로 치닫는 이른바 ‘세계교회’의 흐름에 따라가는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진리에 역행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종교 간의 긴장과 불화를 극소화하기 위해 타종교 지도자들을 만나고 협력해야 한다. 기독교는 아직도 이 땅의 ‘나그네’이며 ‘이방종교’이다. 기독교가 한국인의 ‘민족종교’로 정착하려면 타종교와 갈등을 줄여나가야 한다. 3·1운동 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불교·천도교 지도자들이 함께 협력했다. 기아대책·환경개선·빈곤퇴치·전쟁억제 등 일반은총의 영역 문제는 상호협력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타종교와의 만남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대화’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반 행위이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번성한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도 없어졌다. 기독교의 고유한 복음을 양보하고 토착화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많고 기독교인들이 많던 소아시아 지역은 현재 기독교 신앙의 불모지가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교리와 신앙고백에 무관한 상태가 계속되면, 경교나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된다.


유서 깊은 기독교 신학과 자유주의 기독교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가 아니다. 두 그룹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상반되는 신념체계·사고 패러다임·신앙이해를 가지고 있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를 위협하는 어두운 세력에 대한 경계심과 저항력을 앗아간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의 신앙고백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하는 발상을 심는다.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함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기독교의 핵심진리조차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를 조성한다.


천둥이 치면 만물이 응하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다보면 남의 의견을 무의식 중에 따라갈 수 있다.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을 주도하는 복음주의계 에큐메니스트들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자고 주창하는 반면에 자신들이 받은 신앙고백적 바탕에 대한 확신은 포기한 듯하다. 장로교 대신과 합동정통이 한국장로교연합회 활동에서 기장과 통합 인사들과 어울리다가 진보계 에큐메니칼 단체인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가입했다. 화이부동이 부화뇌동(附和雷同)으로 발전할 수 있고,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적인 언동으로 종교의 도를 어지럽힘)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7. 주어진 일치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교회라면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이다.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 됨’을 조직체의 단일화로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몸을 구성하고 있어도 외견상으로는 하나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위해 각기 다른 길을 따랐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였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부득이한 사정과 견해의 차이로 의견대립을 보이다가 나누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유지해야 하는 일치는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의 하나 됨이다. 이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외형적인 교회일치를 도모할 필요는 없다. 교회는 사회기관이나 일반 세상 조직과 다르다. 힘의 논리나 조직에 전적인 신뢰를 두는 교회연합과 일치는 성공할 수 없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신앙공동체의 일치성을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반(反)기독교 신학, 자유주의 신학, 거짓교사의 가르침이다. 이것들은 화평, 연합, 일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교회 안에 갈등을 낳고 분열을 조장한다.


교회연합과 일치 활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장이다. 교회의 본질은 믿고,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하는 바에 대해 무엇으로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 신학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연합단체는 인간 패거리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바벨탑 아래 뭉쳐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결하여 자신의 힘을 세상에 과시하려고 하는 운동은 그리스도적 동기(진리 안에서 일치)가 아니라 아볼로적 동기(인본주의,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별(聖別)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는 문제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 방책이다. 거짓교회와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거나 반(反)기독교 사상을 선전하거나 복음에 충실한 신자들을 핍박하는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진리에 역행한다. 칼빈, 루터, 나치 치하의 독일고백교회,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는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거부하는 집단에서 떠나 참된 가견적 신앙공동체를 건설함이 가능하며, 그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보편성과 통일성에 부합함을 말해준다.


공적인 고백문서의 내용과 실제 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단이나 고백문서에서는 건전한 교리를 표방하면서도 이단보다 더 교묘한 거짓교사를 제재하지 않고 묵인, 방조, 수용하는 교회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규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교단과 일치함은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 곧 보편성·사도성·통일성에 역행한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는 자들을 목사나 감독으로 세우거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경우, 그러한 집단에서 성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교회와 일치하는 일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신학자 칼빈과 루터가 추구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기본 원리이다.


8. 현주소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하는 발상에 바탕을 두고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여러 면에서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를 연상시킨다. 신도이데올로기와 타협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열성을 올리던 것처럼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일장기 걸어놓고 황민화 정책에 열성을 다하며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각을 일삼던 것처럼, 태극기 걸어놓고 사회참여, 민주화, 민족문제 외치고 있다. 그때의 교회가 신도주의(神道主義)와 종교혼합주의 아래서 교파 통합을 완성한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일치에 열성을 보인다.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이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신이라고 하는 ‘이명동일신설’을 말하는 자를 묵인한 것처럼 ‘여호와,’ ‘알라,’ ‘하늘님’이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신이며, 모든 종교가 다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자를 용납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자고 한다. 물과 기름을 섞으려고 한다.


어느 특정 교단이 포용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배격하면서 성경에 충실한 신앙고백과 신학과 역사적 독특성을 고유하게 유지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내적, 영적 통일성 유지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뚜렷한 신학적 정체성을 가지고 성경대로 믿고 고백하고 살고자 하는 교회, 교단이 있다면 그러한 신앙고백공동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자체가 다른 교회들로 하여금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자극을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고무한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정통적, 복음적 교회로 자리 잡고 있음은 그 안에 자유주의 기독교를 경계하고 성경적 진리를 고집스럽게 고수하면서 역사적 기독교를 변호, 선전, 교육하는 ‘파수꾼’ 교단들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미국북장로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간 신학적 좌경화는 교회가 총회의 결정과 지시에 불응한 뉴욕노회를 제재하지 않은 결과이다. 총회는 뉴욕노회로 하여금 자유주의자들을 제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뉴욕노회는 총회의 지시를 무시했고, 자유주의 신학 강령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던 자들은 신학을 정치적으로 접근하여 풀기 위해 계파활동을 강화했다. 보수파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높은 학식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한 정치활동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결과로 교회의 신앙고백에 충실한 사람들은 징계를 받거나 공동체를 떠났고, 상반되는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차지했다.


이 교단이 자신의 신학, 교리, 신앙고백 전통에 역행하는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을 제재하지 않고 포용한 것이 엄청난 비극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은 상당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정체성을 잃고 추풍낙엽처럼 교인 수가 감소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 그때 비로소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가 ‘죽음과의 키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9. 별들의 전쟁


교회의 신학적 변질은 교회 안의 극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다.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교회연합운동에 저지하는 신학논쟁은 별들의 전쟁이다. 초기에는 소수이다가 점차 인간적인 매력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교회의 전체 분위기를 반(反)정통 노선으로 끌고 간다. 신학적으로 온건한 인사들은 대체로 정치적인 순발력이 약하고 신학적인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중도파는 계파 간의 화합, 교회 안의 화평, 교단 분리 방지를 위해, 그리고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자유주의 기독교에 열린 태도를 보인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은 하나 됨을 최대의 덕목으로 가진 우리 사회의 풍토에 걸맞은 것이므로 한동안 상당한 환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은 교단, 교파의 벽을 없애자는 흐름과 결합하고 있다. 일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면에서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의 과정을 답습하고 있는 점에서 걱정이 앞선다. 한국교회가 쇠락해 가는 유럽과 미국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고,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의 번영에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참으로 걱정된다.


프린스톤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치성은 신자들의 공통의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치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단순히 하나의 외형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맺음말: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내야


엘리야, 아모스, 예레미야, 요한, 바울, 어거스틴, 존 위클리프, 마틴 루터, 존 칼빈은 진리파수의 사명에 목숨을 걸었다. 진리가 공격을 받고, 교회가 죽음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활이 걸린 중대한 신학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신학자들이 교회 권력자들의 비호를 기대하면서 침묵하는 것은 진리를 팔아 화평이라는 팥죽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낼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 침묵은 인정, 동의를 뜻한다. “공중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의 목표는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고 생명력을 상실하도록 하는 데 있다. 대적 마귀는 교회를 삼키려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고 있다(벧전 5:8-9). 연합일치운동에 무조건 따라가는 복음주의 에큐메니스트들과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에 속한 지도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칼빈의 아래의 말이 떠오른다.


"개는 그 주인이 공격을 받을 때 짖는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데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한다면 나는 개만도 못한 겁쟁이가 될 것이다." ―나바르의 마가렛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 시대의 개는 양호한 편이다. 오늘날의 개는 적과 합세하여 주인을 향하여 짖고 물어뜯고 해친다.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을 부정하는 신학자들, 종교다원주의, 용공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성경불신주의가 옳다고 말하거나 WCC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러한 반기독교적 사상들과 무관하다고 거짓증거 하는 신학자들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모든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고백서로 가지고 있다고 기만하는 말로 장로교 통합을 추구해 온 사이비 에큐메니칼운동가들도 이 범주에 해당한다.


신학자는 "교회의 교사"이다. 오늘의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답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신학자들을 가진 나라이다. 그러나 WCC 부산총회와 관련하여 분명한 어조로 말을 하는 신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다원주의, 혼합주의, 신앙무차별주의에 무감각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에큐메니칼운동에 앞장서는 자칭 복음주의자들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고, 전신갑주를 입지 못하게 한다.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번영을 돕거나 WCC 신학운동을 강변하고 활동에 가담한다.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은 이단자보다 더 위험하다. 적과 내통하는 아군의 병사는 적진의 장수보다 더 유해하다. 성문을 열어주면 적이 쳐들어와 분탕질하기 때문이다.


최덕성,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4)의 머리말과 맺음말을 간추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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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yful 2014.02.28 20:07

    나팔이 소리를 내어야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나팔이 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처지 또한 참으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 ?
    강종수 2014.03.01 18:42


    귀한 글 읽고 또 다시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날 나팔은 있는데, 불지를 않고, 불어도 소리가 옳게 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악기를 남달리 빨리 배웁니다.
    그래서 절대음정의 청음능력이 뛰어난 편입니다.
    특히 독창하는 목소리 듣기에 더 예민합니다.

    성령 안에서 복음을 이해하려 할 때, 도움되는 듯 합니다.
    비슷한 소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본적으로 혼합하다 유렵과 서구교회가 몰락해서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한국인의 기질, 은근과 끈긴지 뭔지 하는 것이 유학사상에서 훈련된 것같은데,
    끊고 맺는 것이 잘 안되는 민족성입니다.
    그래서 앞서 나서서 바르게 끌고 가려면 비아냥거리는 습성이 있는 것도 같아요.
    가령, '선생질'이란 어투도 옳지 못한 표현인데 오래 전부터 생겨진
    그런 말투를 보면 한국인은 개혁이나 판단에 약한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도 유럽에서 일어 났으니 다행이지 여기에서 일어나려면,
    개혁을 동의할 수 있는 습관을 작은 일에서부터 훈련이 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교회의 기본적 질서나 작은 사안에서도 딱 짤라 반듯하게 하는 태도부터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기도로 한 방에 터지고 개혁되기는 체질적으로 한국인으로서 어려운 실정 같아요.
    그래도 과거엔(1907) 양심이라도 부드러웠는데,
    이젠 온갖 세속적 경험의 누적으로 더 힘들게 되었습니다.

    개교회적으로 어떤 교육의 영적 가르침을 순차적으로 발휘하고 운동해 나갈지
    그 교육의 사안을 숙고해서 잘 마련하여 초교파적으로 조금씩 체질 변화를
    기대할 묘안을 머리 맛대어 연구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냥 교단 교회 숫자나 늘이는데 전심할 시대가 아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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