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경적 진리 고백자조차 ‘이단자’로 정죄했다
이단판별의 정당한 기준·주체는 무엇인가? 3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지난 달 말에 종교개혁운동 505주년을 기념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이단자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지어진 ‘장려한 건축물’이다. 중세 ‘이단운동’의 열매이다. 용감한 ‘위대한 이단자들’은 교회나 교황보다 성경이 우위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중세교회의 이단 정죄는 자가당착과 적반하장으로 이어져 왔다. 중세 초기의 성상숭배 논쟁기의 이단정죄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서로를 향한 이단정죄는 자가당착이었다.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이단정죄와 저주(anathema)는 적반하장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라는 조직체를 이단 판별과 정죄의 기준으로 삼는다.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여기며, 효력 있는 성례를 가진 교회, 참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교황 중심의 계급 조직과 그것의 결정을 절대시하는 관점으로 판별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회 조직을 이단판별과 정죄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교황, 교회, 전통 모두가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믿었다. 피터 왈도, 왈도파 사람들, 존 위클리프, 롤라즈운동, 얀 후스, 후스파와 타볼파 등 기라성 같은 ‘위대한 이단자들’은 이 점에 일치했다. 성경번역자 윌리엄 틴데일과 재정 후원을 했다가 참형을 당한 기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세기의 교회개혁가들의 용기와 희생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을 유럽 전역에 확산시켰다. 교회라는 조직체가 기독교 신앙의 최종, 최고 권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더 높은 종교적 권위가 있음을 널리 알렸다.
중세기의 ‘위대한 이단자들’은 종교적 ‘권위’의 축을 교황에서 성경으로 이동시켰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성공은 종교 권위의 전이(轉移)에 기초해 있다.
중세교회의 이단들은 특성에 따라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문화적·감정적·정치적 동기로 정죄된 이단이다. 동·서방 교회가 서로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기독교회 전체를 이단 범주에 함몰시킨 경우이다.
둘째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이단이다. 바울당원주의자들, 보고밀주의자들, 카타리파 이단 등이다.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극단적인 종말론을 펼친 피오르의 요아킴 무리들도 이 그룹에 해당한다.
셋째는 신앙과 행위의 ‘권위’에 직결된 이단이다. 희생과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중세 교회의 개혁가들은 성경이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믿었던 ‘이단 아닌 이단들‘이다. 중세교회의 이단 판별과 정죄에는 ‘교회교’(Churchanity) 관점이 크게 작용했다. 교회 기구나 제도를 절대시하여 이단 판별과 정죄의 주체와 기준으로 여겼다. 교회는 힘으로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새로운 모든 세력을 이단으로 몰아 징치(懲治)했다.
‘교회교’의 이단 판별과 정죄에 무지, 오해, 적대감, 기존체제 보호, 괘씸죄 등이 가세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진짜 이단’만이 아니라 무죄한 이들과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기독인들까지 이단자로 정죄하고 죽이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스도를 앞세운 중세교회의 잔혹성과 마성(魔性)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은 기독교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교회는 이단을 교화하려는 순전한 기독교인들까지 박해했다.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며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교회는 당대 최대의 살인집단이었다.
교회가 강력한 이단 박멸정책을 펼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단을 징치하면서도 이단이 번성하는 까닭을 간파하지 못했다.
중세 이단사상들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이단의 번성은 교황좌를 두고 연출되는 유혈극, 성직 매매, 진리 부재, 영적 허기, 성직자들의 사리사욕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교회는 자신의 부패와 부조리를 개혁하지 않았고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지 못한 채 오로지 힘으로 이단을 징치하려고 했다.
중세교회의 이단자들은 자신들이 기존세력과 충돌을 일으키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존 교회의 제도와 교리에 저항했다. 진리와 경건한 삶에 목말랐기 때문이다.
중세기 교회가 이단판별과 정죄에 실패한 경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을 제공하고 몇 가지 올바른 관점을 일깨운다.
첫째, 이단 문제 해결의 최선의 방법이 교회권력, 기득권 보호, 다수의 힘이나 무력이 아니다. 경건한 삶과 영혼의 갈망을 채우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교육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중세교회의 이단 판별과 정죄의 역사는 교회가 이단이라 단죄했다고 하여 반드시 이단인 것은 아니다. ‘교회’라는 조직체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됐다고 하여 진정한 의미의 이단, 이단자라고 할 수 없다. 이단정죄의 주체와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비평적 검토를 촉구한다.
셋째, 성경과 진리성이 참 교회와 거짓교회, 정통과 이단의 판별 기준이다. 이단 판별과 정죄가 성경과 진리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질 때만 호소력을 지닌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성경적 진리에 목숨을 건 ‘용감한 이단자들’의 소모와 희생 위에서 초대교회의 신앙을 재현해 왔다.
넷째, 교회라는 조직체가 이단이라고 판별, 정죄했다고 하여 그 결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과 진리성에 기초한 교회의 이단 판별과 정죄만이 정당하다. 힘의 논리, 기득권 보호, 다수 판단, 정치 폭력, 무지, 사소한 허물 침소봉대, 괘씸죄 처벌 등이 목적인 이단 판별과 정죄는 무효이다. 교회의 ‘갑질’은 약자 배려의 원칙에 어긋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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