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어느 중세 수도원
칭의와 열매
인생을 살다 보면 문득 우리는 왜 살려고 노력하며 애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성공하고 싶어서든지 삶의 본능적인 행동이든지 간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기독인들은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교회생활이 인생의 핵심활동이다. 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일까? 기독인들에게 왜 교회를 다니는지 물어보면 여러 종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답은 ‘구원’을 받을 목적이라는 것과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의무이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다운 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구원은 곤경에 빠진 상태에서 구조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움 상태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행복으로 바뀌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기독교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 곧 천국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영역이므로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인정을 받지 못하면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마련한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어린 시절에 나는 구원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국 가는 표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과정 2020학년도 가을 학기 구원론 수업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깊고 폭넓은 신학적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구원은 죄, 죽음, 마귀로부터 해방되고 영생의 선물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한다. 창조자 하나님의 활동과 섭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희생당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곧 대속사역을 통해 주어진다. 성령은 이 구원의 길을 사람의 마음속에 적용시킨다. 구원론이 다루는 ‘구원의 서정’은 구원의 전 과정을 시간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구분하여 따져본다.
최덕성 교수(브니엘신학교 총장)는 구원론 강의에서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이 강의를 들었을 때 한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면 인간의 책임은 필요 없는가? 다시 말하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구원에 쓸모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이다. 한문의 써 이, 믿을 신, 일컬을 칭, 옳을 의가 합성된 단어이다.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신칭의는 기독교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신학적 용어이다. 죄인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무죄 곧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신학은 믿음과 행위를 동등하게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이 옳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거룩한 하나님의 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 오로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며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서정에 나오는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분이 바뀌어 법적으로 의인으로 변경된 것을 말한다.
저명한 신학자 김세윤 교수는 ‘유보적 칭의론’을 펼치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칭의론 곧 ‘유보적 칭의론’이 종교개혁 신학 특히 구원론을 완성할 복음이며, 기독인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진리라고 한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 기독교인, 교회 구성원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즉 자신이 칭의를 완성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다.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칭의 또는 구원을 받았더라도, 자신의 착한 행실과 율법 준수로 그것을 완성하지 않으면, 종말의 심판대에서 섰을 때 구원에서 탈락된다고 주장한다.
어릴 때부터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이해한 ‘구원’ 개념은 김세윤의 주장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브니엘신학교에서 성경을 근거로 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것이 옳지 않다.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자기의 어떠한 선행이나 기여할 만 노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다. 의의 토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고 대속제물로 자신을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 향해 의롭다고 선언해주신다.
구원론 강의에서 나는 칭의가 장래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믿을 때 발생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라는 것을 배웠다. 칭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거나 착한 일을 많이 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에 대하여 의롭다고 선언한다. 죄 짓고, 정죄 받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타락한 상태의 인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구원을 수 있다. 그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다. 칭의의 근거는 죄인을 대신하여 그 죄과를 담당하고 죄에 합당한 형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삽자가 죽음 곧 속량제물이다.
성령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택하고 사랑받는 죄인들에게 칭의를 적용한다. 칭의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음이고 나아가 기독인답게 성화되고 성령께서 구원을 마지막까지 보존한다. 성화는 의인이 변화된 육체로 부활하여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경험할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고 그 가족이 믿으면 그 가족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회개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구원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그 분께로 돌아오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따르면 곧 구원의 복음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인간의 죄악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의를 선언하신다.
우리에게 선언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인류 최대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대속자로 도성인신하신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인간은 자신의 의와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김세윤은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진 칭의를 우리가 실천적 행위로 완성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성경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라고 말한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가지 구절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면 인간의 책임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 구원을 위해 선택받은 사람은 결코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다. 최덕성 교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신다. 이 경우의 인간의 책임은 인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함을 의미한다. 성령께서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결국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 구원체계를 반대하는 네덜란드 신학자 알미니우스의 학설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만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한다.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 이외의 것을 지키는데 실패하면 얻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본다.
칼빈주의 구원체계는 기독인의 삶의 열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칭의에 걸맞는 열매를 맺는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칭한 자들은 동시에 성화로 인도된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됨으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진정으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은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진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기독인에게 윤리적 열매가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형식적인 신자이거나 명목상의 기독인이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 행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나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당연히 합당한 의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구원 판결은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주어지거나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행위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주권자 하나님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부르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 믿는 자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믿음, 회개, 칭의, 양자삼음, 그리스도와 연합 등 구원의 서정에 등장하는 영적인 것들을 선물한다. 인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지 않는다. 구원받을 목적으로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거나 윤리적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구원 진리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때문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 활동을 하고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바르게 살려고 애쓴다.
김염미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1학년)
편집자 주: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목회학 석사(M.Div.) 과정 <구원론>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하나의 명료한 주장-논지를 가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차례차례 제시한다. 최덕성 교수에게 사사하는 신학도들의 비평적 사고훈련, 학술 에세이 쓰기, 목사후보생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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