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표준'이라는 생각에 담긴 오류
로마가톨교회는 교회이나 공의회가 성경의 권위를 승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신교는 성령께서 성경의 권위를 성경 자체에 내적으로 부여한다고 본다. 이를 성경의 “자증”(Autopistia)이라고 한다.
성경의 자증성에 대한 논의에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자증성이 문자적이지 않은 점이다. 성경은 사고하는 과정 없이 그저 문자적으로 진리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의미와 해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해석과정을 거쳐 진리가 산출된다. 이 과정을 가리켜 “신학”(theology) 혹은 “교의”(Doctrine)라고 한다.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inspiration)되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진리를 단순히 명시하고 있지 않고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약시대의 신앙은 율법(성경)보다는 성전과 제의(제사)를 중심이었다.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성전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면서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회당 예배가 신앙 형태로 자리 잡았다. 바벨론 유수(exile) 이후 이스라엘의 종교는 정경(Canon)에 초점을 두었다. 교회는 주후 90년경에 열린 얌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구약 정경이 성경으로 수납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얌니아 회의가 구약 정경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 회의가 회의 자체의 권위에 의해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확정한 것은 아니다. 전승되어 온 구약 묶음들이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수납되고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했을 뿐 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구약성경은 이미 정경으로 확정된 채 묶여져(scroll) 회당에서 읽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구약정경 자체의 정경성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1세기 기독교가 태동했을 때 신약성경이 확정되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 이단설과 외경(Apocrypha) 혹은 위경(Pseudepigrapha)들이 등장하자, 교회와 교부들은 여러 사본들과 문서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일관되게 추려진 진리, 흔히 복음이라 불리는 것을 토대로 정경을 확정했다. 따라서 구약 정경과 달리 신약 정경은 처음부터 어떤 객관적인 출처나 근거보다 그 내용의 일관성과 맥락에 따라 곧 ‘신학적 기준(표준)’에 의해 판별되었다.
구약성경 시대에서부터 신약성경 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성전(제사)에서 경전(성경)으로, 다시 신학(진리)의 큰 틀로 이동하는 변화를 겪었다. 그 중심에 있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다름 아닌 “신학”이다.
기독교 신앙은 신약성경 시대 때부터 시련과 도전에 직면했다. 성경은 문자주의적인 율법주의의 도전 뿐 아니라 성전 혹은 제사 중심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유대주의의 도전에 직면했다. '히브리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유대교로 회귀하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인들을 권면하는 서신이다.
시련과 도전은 박해 가운데 있었던 1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공인된 이후, 교회는 형식주의와 공로주의의 우상종교로 서서히 변모했다. 16세기 무렵, 참된 기독교는 다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우상종교를 타파하고 원래의 순전한 기독교의 모습을 회복했다.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순전한 기독교 신학을 확립한 교부들과 신조들을 통해 1세기와 신약성경 시대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타락하기 전까지의 순전한 신조들은 이단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근거한 신앙 진리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규정하고 확정한 형태였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이단 사상들을 개혁하는 신학의 근거를 항상 온전한 신조와 그것을 확립하는 데 두었다. 프랑스신앙고백(1559)이나 벨기에신앙고백(1561) 등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은 그 서두에서 고대 정통교리와 신학자들의 신학적 견해를 재천명하며 고백을 시작한다.
프랑스신앙고백은 "우리가 세 가지 신조, 즉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이 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매우 일치하기 때문이다"(제5조)라고 한다. 벨기에 신앙고백도 “우리는 세 신조, 즉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고대의 교부들이 합의한 것 중에 이 세 신조에 일치하는 신조들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사도 신조와 니케아,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동일한 신앙의 골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장하여 고백하는 형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사도 신조에 담긴 신앙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조금씩 자세히 다루고 있이다. 벨기에 신앙고백이 귀도 드 브레(Guy de Bray, 1522-1567) 한 사람에 의해서 작성되었으나 안트베르펜 교회에서 최초로 승인되고, 여러 교회들에서도 받아들여졌다.
도르트신조는 나중에 이를 수정하여 도르트 총회(Synod of Dortrecht, 1618) 때에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공식 신조로 받아들인 것이다. 프랑스 신앙고백은 칼뱅이 초안했지만 베자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 프랑스 장로교회 총회의 공식적인 승인으로 채택된 신앙고백이다. 벨기에 신앙고백이 개인적으로 작성된 것이고, 프랑스신앙고백은 칼뱅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 교회 회의를 거쳐 채택되었다.
개신교 진영에서 도출한 여러 신앙고백들 가운데 도르트신조(1619)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7)은 각각 도르트 노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신학자들과 관리들이 함께 모여 도출시킨 범세계적 신앙고백들이라는 점에서 그 탁월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도르트 신조와 같이 제한적인 성격에서가 아니라 개혁신학의 전 영역들을 망라하여 작성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에서 그 탁월함의 정점에 있는 신앙고백서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7년판이 중요하다. 그 이후의 여러 차례의 수정된 것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같은 객관성과 범교회적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시대·지역적 특수성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조들은 저마다 독특한 특성들 가운데서 성경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그 의미들을 정리하여 요약한 것이라는 공통적 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런 신조(신앙고백)들은 성경과 분리하여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속적으로 다뤄야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신조들의 종속성은 성경에 비해 하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히 유기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과 신조들을 분리하려고 하는 발상(성경에 우선을 두고 신조들을 그보다 하등하게 다루려는 발상)은 신조가 갖는 유기적 종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이다.
신조는 시대나 지역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각각의 신조들과 신앙고백을 그 시대나 지역적 특성에 한정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신조들과 신앙고백들은 근거가 성경에 있음을 초두에 고백한다. 그처럼 신조나 신앙고백을 시대 혹은 지역에 한정하려고 함은 그 신조나 신앙고백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이탈하는 연구방식이다.
현대 신학은 경을 근거로 각자의 시각에 따라 신학적 프레임을 제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신조 혹은 신앙고백은 신학의 부산물이지, 신학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그리고 이후의 역사들을 통해 성전-제사 ▷ 경전(성경) ▷ 신학(진리)의 큰 틀을 확인한 바와 같이, 종교개혁 사건을 통 회복된 순수한 신앙은 성경 ▷ 신조라는 맥락이다.
신조를 배제하고 직접 성경에 들어가는 방식은 오히려 로마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의 맥락일 수는 있어도, 16세기 이후 개혁된 신학이 사용한 맥락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신학과 신앙의 표준일 수는 있어도, 신조-신앙고백이 표준일 수는 없다’는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공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큰 경륜을 간과하는 오류이다. 오히려 ‘성경과 신조는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유기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신학함이 마땅하다. 올바른 신학의 근거인 올바른 신조-신앙고백이 없이 올바른 성경의 이해와 그로 말미암는 신앙은 불가능하다.
장대선 목사 (홈페이지 글, 편집자가 의미변화 없는 범위 안에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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