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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목사 안수김세윤과 이광호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다는 말이 있다. 쬐끄마한 교단 '네덜란드 개혁교회 31조파' 총회가 여성목사 안수 제도를 시행하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이 한국의 복음적인 교회 안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예장 고신은 한 동안 정통신학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괄목할만하게 여성 목사 안수여성 장로 안수 주제에 학문적으로 대응하는 신학자가 없다오히려 상당수 신학 교수들이 내심 찬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여성목사 안수, 여성장로 안수 건은 성경관과 성경해석에 직결되어 있다.  예장 고신 신학자들의 시각의 변화는 성경관과 에큐메니즘과 관련하여자유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목소리를 내던 2004년경부터  표면화 되었다.


고신 교단 출신 이광호 목사는 2014년초, 미국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가 성경편집성을 주창하면서 여성 목사 안수를 찬성하고 나섰을 때, 여성목사 안수에 관한 글을 썼다.  "여자목사 제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김세윤 교수의 '여자여 잠잠하라' 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란 주장을 우려하며"라는 글이다. "오직성경" 원리를 여성목사 안수 반대의 근거로 천명한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여성 목사 안수, 여성 장로 안수는 교회의 현안이다. 교회가 알고 싶어 하는 주제에 대해 신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현 상태에서, 고신계 목회자-신학자 이광호의 주장을 들어본다. <리포르만다 >( 2014.4.23.)의 글을 옮긴다.



1.


지난해 말 합동 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인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됐다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자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이르렀다.


기저귀 발언 이후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를 나열하며 여자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902004.7.8, 참조).


그러나 나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이 사실이다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나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2.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교회의 직분은 필수요건이다즉 교회의 목사장로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다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써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과 직책이 있다목사장로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여전도회장선교부장구제부장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에서 맡긴 일을 능률있게 하기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한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해야 한다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에서 세워졌다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여기서 나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갖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다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를 본다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긴 역사를 걸쳐 이어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것을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세상에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하는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깊게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지난해 말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제 256호 2003년 10월 14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 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구약성경을 보면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 개념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개념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교회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3.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다시 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바울의 기록은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즉 목사의 직분을 갖고 있는 것을 금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에 들어와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다나아가 그들은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다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 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자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여자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다드보라기생 라합마리아엘리사벳한나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나의 이런 말에 대해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4.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라기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주님의 몸 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된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또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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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3
    "여성 안수는 창조질서 위배"/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여성 안수 문제를 다룰 때에는 매우 조심스럽다. 자칫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대결이나 한 편의 폄하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 문제는 그런 차원에서 접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연약한 여성을 더욱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필자는 기독교가 여성의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복음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차별이 없다. 나아가서 필자는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봉사와 활동을 귀하게 여기며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많은 여성들이 기여했으며 초대교회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봉사한 것처럼, 한국교회에서도 여성들이 많은 봉사와 기여를 했다. 여성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없었더라면 한국교회는 오늘날 이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은 없지만, 성경은 또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을 가르치고 있다. 중요한 두 곳은 고린도전서 14장 34-36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이다. 고린도전서의 본문에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친다(34절). 디모데전서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고 말한다(12절).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옛날의 시대 상황에 주어진 시대제약적인 말씀으로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러한 금지의 이유로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3,14절). 곧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주후 1세기의 ‘문화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창 3:16 참조).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이유로서 ‘율법’의 가르침을 들고 있다(34절).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의 이유를 고린도 교회의 특수 사정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이러한 바울의 교훈은 여성을 무시하거나 차별해서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음을 이미 분명히 밝혔다(갈 3:28; 고전 12:13, 11:11, 롬 3:22).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정하신 남성과 여성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가정을 보호하고 가정에 평화를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성에게 금지되는 것은 남성(성인 남자를 의미함)을 ‘주관’하는 의미에서의 ‘가르침’이나 ‘말함’에 한정된다. 어린아이들이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며,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여전도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안 된다. 나아가서 말씀의 은사를 가진 여성이 여전도회의 초청으로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해방 후에 더러 있었던 것처럼, 특별한 은사를 지닌 여성의 경우에 특별 집회를 개최하는 것도 특별한 경우로 허용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선교지의 경우에서는 선교지의 특수 상황을 고려하여 여성 선교사에게 많은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금하는 것은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상적이고 정규적인, 남자를 주관하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성에게 목사나 장로 안수를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성향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과 구원은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됨을 믿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서 과도하게 나아갈 때에는 가정과 교회에 불행이 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시대조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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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3
    해외 형제자매 교회들의 질의에 대한 캄펀신학교수회의 대답

    화란개혁교회(해방파, 31조파)의 해외 형제자매교회들은 캄펀신학교 교수들의 저서에 관해 화란개혁교회 총회에 질의한 바 있다. 총회는 총회 산하 캄펀신학교의 해당 교수들에게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고, 동료 교수들의 견해도 취합하여, 호주 자유개혁교회(2012-2013년)와 캐나다 개혁교회(2011년)의 질의에 답했다.

    2011년 총회에서 캄펀의 교수로 인준을 받은 S. Paas교수는 종교사학파에 근거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는 역사적 기원에 관한 고등비평적 견해를 평가하여 유트레흐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1998년). 캄펀의 구약 교수 G. Kwakkel은 Paas교수가 종교사학파의 틀과 방법론 안에서 논문을 썼지만, 개인의 신앙고백은 명시하지 않았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캄펀교수회는 Paas교수가 고등비평을 수용하지 않고, 출애굽과 같은 역사성을 지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Paas교수는 종교사학파적 방법론에 근거하여 야웨는 가나안의 왕-신 El로부터 나온 것으로 사료된다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상충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형제자매 교회의 우려는 Paas교수가 개혁주의 신학자라면, 본인이 종교사학파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것의 전제에 근거하여 오히려 창조 신앙을 변호한다고 분명하게 밝혀야 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보조를 맞추어 Paas교수는 2003년에 자신의 논문을 개정하여, 고등비평 방법을 강하게 비판했다.

    호주 자유개혁교회는 캄펀의 K. van Bekkum교수가 ‘주장된 진리’(truth claim)와 ‘진리값’(truth value)을 구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캄펀의 구약교수 G. Kwakkel은 학문 세계에서는 연구자가 사용하는 가정과 모델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기에, 예를 들어, 성경의 주장된 진리를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와 비교하여 진리값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함으로 van Bekkum을 다소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로 Bekkum교수는 해와 달이 멈춘 사건(수 10:12-14)의 역사성(주장된 진리)을 부인하지 않았다.

    또한 형제자매교회는 캄펀의 G. Harinck교수가 동성애에 관해 했던 라디오 인터뷰(2008년)에 의문을 제기했다. Harinck교수가 남자 동성애자를 친구로 두는 것은 반대할만한 일이 아니라 말할 때, 그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Harinck교수는 성경의 규범적 특성을 인정했으며, 성경은 동성애를 배격한다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Harinck교수는 불가피하게 다른 교회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가톨릭의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Harinck교수는 그것은 가톨릭의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의 미사를 방문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위의 논란을 통해 배우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신학교수가 학문적 토론과 성과를 내려할 때, 사용하는 방법론과 용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신앙고백과 학문적 진술은 일치해야 하며, 신앙의 전제 위에 엄밀한 학문성을 추구해야 한다. 지면이나 시간의 제약이 있더라도, 독자와 청자의 오해를 예방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송영목 교수, 고신대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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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4
    여성안수 문제: 이번주 설교의 일부분입니다.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곳에서 사도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욕구와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속하지 않습니까? 어린이도 다른 어린이에게 가르쳐주며, 잘못한 경우에는 정정해줍니다. 두 살짜리 어린이는 한 살짜리 어린이를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가르칩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일상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여자들이 예언했습니다. 예언이란 성령님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 말씀을 각 상황에 맞도록 적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주는 성령님은 “자기가 한 말씀, 즉 이미 주어진 말씀을 “기억나게” 하신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요 14:26; 16:14). 또한 사도 바울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4:6; 참조: 계 22:18). 그리고 우리는 초대교회 시절 자매들도 이러한 예언의 은사를 받아 사용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사이자 전도사인 빌립의 네 딸이 “처녀이며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행 21:8-9). 그리고 바울도 여자들이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예언을 말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명했습니다(고전 11:4-5). 예언도 가르침의 일종이므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 금지 명령은 자매가 교회에서 가르치면 안 된다는 일률적인 금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옛언약 시절에는 미리암(출 15:20)과 훌다가 여선지자로 있었습니다. 훌다는 이스라엘 지도자를 통해 겸손한 왕 요시아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회개와 부흥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왕하 22:12-20).

    그러면 바울이 이곳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12)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르치다”는 말은 당시 그리스어로, 그리고 예수님의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볍게는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설명해 주어, 그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의 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동사(디다스코)로는 신약에서 97회, 명사로는 59번 나옵니다 복음서에서는 대부분 예수님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사도에게 사용되었으며, 명사로는 교회를 대표할만한 책임 있고 권위 있는 중요한 직책(디다스칼로스; 교사)을 나타냅니다. 이는 오늘날의 목사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금하는 자리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즉, 자매에게 가르치는 것은 허락하되 목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금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사는 다스리는(주관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임무상 주님을 대신해서 주님의 양을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을 억압하거나 군림한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일이며,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주는 임무입니다. 이 일은 큰 책임을 지는 일이며 그만큼 권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자리를 자매에게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그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13). 그는 이곳에서 먼저 창조질서와 연관시킵니다: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고 그다음에 여자가 창조된 것은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사이의 질서를 말해줍니다. 남자를 머리로 해서 가정과 사회를 이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며, 그에 따라 임무가 다름을 말합니다. 성 구분을 없애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서, 오늘날 세상에 편만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 질서도 무너집니다.

    바울은 그다음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와가 남편을 조력하라는 그의 존재 규정을 어기고 오히려 남편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거역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들고 있는 것은, 자매가 어떠한 사명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것을 어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기억시키며 무섭게 경고합니다. 죄의 유혹이 거의 없었던 첫 사람인 하와도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갔다면, 온통 죄로 물든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위험이 크겠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자매가 교회에서 앞에 나서고 싶어하는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자매를 목사로 안수하면, 자칫하면 해당 자매를 영원한 죽음에 내어주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고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는 매우 어렵고 고난에 찬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기도 힘이 드는데, 쓸데없이 더 어려운 짐까지 지고 간다면,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는 사도 바울의 지적은, 자매를 형제보다 열등한 존재로 본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여자는 이러한 약점과 위험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는 다른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매가 형제를 옆에서 잘 보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뛰어난 자매들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으며, 더욱이 구속사의 중요한 순간에 형제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 구속사적으로 결정적인 발걸음을 디디려고 하셨을 때, 이것을 첫 번째 깨달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기고 있던 영적으로 성숙한 제사장 스가랴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작은 도시인 나사렛의 젊은 소녀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으며, 짧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입니다”(눅 1:38). 2) 우리를 위해 십자가 길로 가신 우리 주님의 전적인 한신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우리가 이 은혜에 대응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요 12:3). 3) 예수님의 부활의 이적을 체험하고 이 이적을 처음으로 선포한 사람들도 자매였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10). 그러므로 자매는 형제에게 복음 사역에 있어서 꼭 필요한 베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매가 가르치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12절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연결해서 말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이해할 때 본질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파생적인 것이란, 그 계명의 본질을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8절에서 형제는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것과, 자매는 “땋은 머리”를 하지 말라(9)는 것입니다. 혹은 자매가 교회에서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전 11:4-5)는 것입니다. 또한, 자매는 교회에서 “오직 조용할지니라”(12), “가르치지 말라”(12)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독일에는 아직도 형제교회에서는 자매가 예배 때와 심지어 성경공부 때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들어야 합니다. 머리를 길게 하거나 작은 모자를 써야 하고, 바지를 입지 못합니다. 러시아에서 넘어온 독일 교회와 보수적 교회에서도 이렇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규정은 이와 관련된 계명들이 파생적인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매가 공공장소에서 큰 역할(예언과 기도)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전도를 받아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이 이러한 것을 보았다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당국에 고발하여 교회가 폐쇄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도덕관념에 맞추어 자매는 교회에서 조용해야 하고, 예언과 기도를 할 때에는 남자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이것을 그대로 할 필요는 없고 “형제가 머리”라는 그 계명들의 본질을 깨닫고 이것을 시대 감각에 맞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자매가 교회에서 발언하고 질문한다고 해서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은 자매에게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지 자매가 교회에서 큰 책임을 맡고 다스리는 것은 분명히 금지된 것입니다. 목사가 안 된다고 할지라도 다른 방법으로 자매가 큰 영향을 가지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매의 권한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매가 예언이나 기도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즉 “형제의 권위를 인정하고”라는 명령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파생적 계명을 현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즉 여성이 계명의 한도 내에서 교회에서 어느 정도까지 중직에 이를 수 있는가입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데에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점은,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고, 이들의 교육수준이 남성과 똑같아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기회와 동시에 위기를 가져옵니다.

    기회란, 여성이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에서 온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성이 발언하거나 어느 정도 책임성 있는 일을 맡았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형제들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전파를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자매들만 있는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을 올가을 쯤에 전도사가 임명하여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교사로 봉직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들이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배운 것을 교안대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이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에 허용하는 한, 그리고 교회에 도움이 되는 한, 여성들의 활동 폭을 넓히는 것이 좋습니다.

    위기란, 남성과 여성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계몽주의 원산지인 유럽을 마르크스 공산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성 구분은 더욱 엷어졌습니다. 성전환자들의 사회적 활동이 매스컴을 타고 선전됩니다. 여장하고 다니는 유명한 남자 Olivia Jones는 2미터 7센치미터의 거인인데, 쉬타인마이어 대통령 선거에 선거인단으로 당선될 만큼 사회적 지위가 있습니다. 좌파와 녹색정당은 정책적으로 이러한 작업을 촉진합니다. 성 타락은 이루 말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가정도 파괴됩니다. 가장의 권위도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로 들어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부분 여성안수 찬성자들은 성경이 여성안수를 금하기 때문에, 성경비판에서 나온 논거로 이것을 옹호합니다.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글들은 논리에도 맞지 않고 조야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본질에서 파생된 것, 즉 시대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매여서 여성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금하는 것은 해석학적 오류이며, 반대로 모든 성경 가르침을 상황화하려는 시도는 계명의 본질을 파괴하는 상대주의입니다. 우리는 이 양 극단을 피해서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이러한 논의에서 우리의 성경 이해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항상 뒤돌아보면서 정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여성이 지도자가 되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은 십계명의 수상숭배, 간음과 살인 금지 계명과 같은 절대 금지 계명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법과는 달리, 하나의 큰 원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이 무능하고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성 사사 드보라를 세우신 것과 같이 상황에 따라 여성도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도할만한 마땅한 남성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목사로 안수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식적인 안수는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할 수 없이 여성 지도자가 섰을 경우에는 속히 남성 지도자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성 지도자는 임시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 구분 자체가 임시적이며,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만 유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과 같이, 천국에서는 남녀의 구분과 목사 평신도의 구분도 없이, 우리 모두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이 될 것입니다(마 22:30).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성 구분은 결코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차별로 느끼는 자는 복음의 귀중함과 영생의 가치를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생 추구할 것은, 복음 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영생을 추구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어서 바울은 자매의 독특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해산하고 아이를 기르는 것 외에는 형제들의 임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매뿐만 아니라 형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정숙함이란 그리스인의 4대 덕인 절제(소프로쉬네; 소프로슈네는 미국인 발음)라는 말입니다. 소프로쉬네의 기본 의미는 어디에도 쉽게 빠지지 않는 “건전한 이성”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형제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개역 개정에서는 “정숙함”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이 말을 자매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도 자매 성품에 맞게 약간 의미가 변형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자매가 구원받는 길은 형제와 같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되 정숙함으로, 혹은 사리분별력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건전한 이성, 상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이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오히려 이것을 떠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것을 정말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상식적이 되어야 합니다.

    자매 임무가 독특한 점은 여기에다 추가로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가 할 수 없는 자매들의 고유한 사명이자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믿는 자매 사이에서, 자기들은 이미 높은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뿐 아니라 아내나 어머니로서 집안일을 꾸리는 것은 너무 낮은 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매에게 말합니다: 천만에! 바로 여기에 당신의 매우 중요한 자리가 있다. 당신에게 이 자리가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당신은 숭고한 목적인 영혼 구원에 도달한다!!! 사도는 여성의 자리를 분명히 정해 줍니다.

    15절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자매가 구원을 받는 길은,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서” 살림을 이루어나가고 아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꼭 아이를 낳으라는 말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주어진 본분을 다하되, 이것을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서”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라는 말은 매일 해야 하는 살림 속에서도 주님을 위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 모든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께 하듯이 함으로써라는 의미입니다(참조: 골 3:23). 형제가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러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자매가 자기 가족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먼저 아내와 어머니가 되어야 하며, 가족을 사랑하고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거룩함에(성화에)”: 이러한 아내와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그의 작은 세계에서, 비록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거룩함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사를 돌보는 일인데,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함으로써, 특히 아이들을 돌보는 일, 그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처리함으로써, 일터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인상 쓰고 들어오는 남편을 돌보는 일 등입니다. 아내와 어머니에게는 가정이 이렇게 매우 중요한 선교 장소요 수확하는 밭입니다! 이 긴 기간에 아무런 소리 없이 많은 것이 하나님을 위한 사역으로서 이루어진다(참조: 벧전 3:1).

    바울은 “정숙함으로”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자매는 모든 면에서 정숙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주님께 집중해야 하고, 기도할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맞춤으로써, 순수하게 그분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매일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에 의해 “가르침”을 익히게 됩니다: 이들은 믿음에, 사랑에, 그리고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성 구분이 엷어지는 등, 말세의 유혹이 특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점차로 말씀을 버리고 편한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여성 안수에 손을 듭니다. 여기에 대한 반대 작용으로 지나치게 보수로 향하려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여성의 활동을 상당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잘 연구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가 극도로 타락해서 대내외적으로 비판받는 이때에, 목사가 되어 타락한 기독교를 더욱 타락으로 치닫게 하려는 자매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자매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목사가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목사가 되려면, 정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내적, 외적, 그리고 객관적 검증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목사의 수는 매우 적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녀 구분 없이 먼저 성경을 잘 배워서 교리문답 교사나 성경교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Daniel Song/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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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4
    여성안수와 성경해석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개혁정론> (2017.06.30).

    고신교회와 자매관계에 있는 화란개혁교회가 최근 여성안수(보다 정확한 용어로는 여성임직)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였던 이 교회의 이탈로 인하여 이제 고신교회는 이전 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보다도 훨씬 더 진리에 민감했던 교회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고신교회도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토론할 필요가 없다. 이미 토론할 수 있는 내용들은 다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단지 어느 해석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성안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여성안수를 받아들였던 신학적 논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이다.

    여성안수는 결국 성경해석의 문제이고 성경해석의 문제는 성경해석 방법의 문제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로마교회와는 달리 성경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성경해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 해석의 방법이 달라지면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성경해석 방법을 취할 것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 2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의 명료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성에 관한 것인데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항목은 다음과 같다.

    7항.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자체로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으며 만인에게 똑같이 분명하지도 않다. 그러나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바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공표되었고 열려 있기 때문에 배운 자든 못 배운 자든 통상적인 방편을 합당하게 사용하여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9항. 성경을 해석하는 정확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여럿이 아니고 하나이다)에 대하여 의문이 있다면, 보다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을 가지고 살피고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본래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함부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읽지 못하도록 성경 번역을 원천봉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짓된 로마교회의 교리에 반하여 종교개혁가들은 목숨을 걸고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는 시대를 열었다. 성경이 어렵다는 로마교리에 대항하여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7항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성경의 명료성은 모든 성경의 내용이 이해하기에 쉽다는 말은 아니다. 7항이 분명히 언급하듯이 성령의 명료성은 구원을 위하여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에 한정된다. 이것들은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알 수 있다. 이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신학 공부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시골 할머니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데 고대근동 문화에 대해서 10년을 넘게 연구한 학자가 그것을 모를 수도 있다. “인자(人子)”를 그냥 단순히 인간의 아들로만 이해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안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하는 항목이기 때문에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그렇게 많은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성안수 문제를 문화적/역사적 해석을 통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성안수와 같은 중요한 교리적 문제가 문화적, 역사적 해석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때로는 전문 분야의 연구자들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그렇다면 성경은 중세 기간처럼 전문가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것이다. 또한 문화적 해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나중에 새로운 사료가 발견된다면 성경 해석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성경해석이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믿고 준수해야” 하는 내용은 오직 성경의 명료한 가르침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명료성과 더불어 일치성도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원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저자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 안에 상호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여성안수를 찬성하였고 바울은 반대하였다는 식의 해석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상호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그러한 것뿐이다.

    성경을 보면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여자 사사 드보라의 예)도 있고 반대하는 구절(여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노니)도 있다. 아마도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보다 분명하고 명료한 구절에 근거하여 그렇지 않은 것들을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분명하고 명료한 구절은 무엇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성안수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명료한 성경구절은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9절이다. 그곳에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은 “한 아내의 남편”이다. 본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구절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동성결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남편”은 남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구절들은 가장 명백한 이 구절에 비추어서 해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안수에 대한 논의는 결국 어떤 성경해석 방법론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모두가 저마다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다. 어떤 시각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른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성경의 명료성과 일치성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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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4
    화란자유 개혁교회 여성안수 결정, 성경해석의 결과이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코람데오닷컴> 2017.7.9.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31조파)에서?최근에?여성안수를?총회에서?원칙적으로?전면적?허용하고,?개교회?차원에서?실천을?결의했다.?고신?교회는?이를?어떻게?수용하고?대처해야?하는가??박윤선?이후?보수적인?장로교회들은?네덜란드?개혁파?신학을?신학적?표준으로?여겨왔기에?이번?결정은?놀라운?것이다.?성장이란?프레임에?갇혀있으면서도?신학적?반성의?참조점은?네덜란드?개혁파?신학이었던?사실을?부인할?수?없을?것이다.
    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의?신학?풍토의?한?단면:?성경해석?발전의?수용
    필자는?네덜란드에서?13년을?보냈다.?신학?공부도?하면서?네덜란드?신학적?풍토를?익히기도?했다.?로테르담?사랑의?교회를?목회하기?전에는?우리?가정은?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에?소속해서?신앙생활을?했다.?그?때?한?가지?놀랬던?점이?장로들이?목사들의?설교문을?대독하고,?마지막에?축도를?하는?장면이었다.?이?교회는?어떤?과정을?거쳐서?장로들이?축도를?하게?되었을까??결론부터?말하면?성경해석의?발전을?교회?질서?속에?수용했기?때문에?가능했던?일이었다.
    필자가?신학?부전공으로?교회?성장학을?선택해서?공부를?하는?중에?화란?자유개혁교회가?장로들의?축도를?허용한?과정을?이해하게?되었다.?트림프?교수의?실천신학?책?중에?교회의?직분을?논하는?자리로?기억한다.?장로에?대한?부분에서?한국의?허순길?목사를?언급했다.?허?목사님은?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에?유학하면서?“장로의?완전한?권리”라는?논문을?작성하였다.?그는?미국?남북?장로교회의?논쟁을?적으면서?하지와?쏜웰의?논쟁을?정리했고,?쏜웰의?입장이?성경적인?지지를?받는?내용이라고?했다.?쏜웰의?입장은?우리?헌법에도?언급되었듯이?장로와?목사직의?동등이었다.
    트림프?교수는?자신의?책에?허?교수의?논문이?학문적으로?우수하다고?언급하며,?허?교수의?지적을?적극적으로?수용했다.?트림프?교수는?장로들이?예배를?인도할?때,?십계명을?선포하는데,?이?선포가?바로?설교와?다름없다고?했다.?그래서?설교의?대독과?함께?설교자가?하는?축도의?권리가?장로에게?있음을?주장했다.
    장로의?축도권이?한국교회?허순길?목사의?논문과?관련됨을?밝히면서,?바른?성경?해석의?결과를?교회?질서에서?수용하는?것이?말씀?앞에?서는?오직?성경의?태도라고?트림프?교수는?밝혔다.?트림프?교수는?이어서?장로의?(가르치는?장로와?다스리는?장로)?두?가지?직을?설명하는?디모데전서5:17절을?기존과?달리?해석했다.?잘?다스리는?장로를?배나?존경해야?하는데,?그들은?특히?‘말씀과?가르침’(‘복음과?교리’)으로?다스리기?때문이다.?이렇게?번역을?함으로?장로들과?목사의?동등권이?확보되었다.?이외에도?필자가?모르는?논의들이?있었을?것이다.?그러나?이런?해석의?결과들이?축적되었고?그것이?주요?원인이?되어?장로의?축도권은?교회의?질서로?인정되었다.


    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로고

    여성?안수에?대한?해석학적?난제?극복
    이제?여성?안수?결정?과정으로?가보자.?역사적인?과정은?이미?코닷을?비롯한?여러?매체에서?밝혔다.?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에서?분리가?된?교회와?합동을?하는?과정에서?그?교회는?여성?집사를?두고?있었기?때문에?합동을?위해서?신학적?연구의?필요가?생겼다.?그래서?남성/여성?직분위원회가?구성되었고?이미?3년?전에?보고서에서?여성?안수?허용이라는?입장을?내었지만,?저항이?거세서?결정을?미루었다.?3년?동안?위원회가?지역을?돌면서?설명회를?가지면서?분위기가?전환되었고?이번?결정에?이르렀다.
    이번?결정의?기초가?되는?“함께?섬기기”란?보고서가?있다.?그리고?그?보고서의?요약?판도?나와서?그?요약?판을?검토해?보았다.?거기서의?필자의?주된?관심은?‘성경적?난제를?어떻게?극복하고?여성?안수를?허용하게?되었는가?’?이었다.
    기본적으로?성경해석을?통해?직분을?어떻게?이해하는가에?대한?변화가?있었다.?직분을?다스림이?아니라?섬김으로?보는?관점의?변화이다.?그?결과?보고서의?제목이?함께?섬기기(Serving?together)가?되었다.?이렇게?직분을?정의하면서?여성에?관련된?난해한?본문?해석을?쉽게?극복하는?길이?열렸다.
    여성?안수와?관련해서?전통적인?중요한?본문들이?있다.?여자는?잠잠?하라는?고린도서의?말씀과?디모데전서의?창조의?순서에?따른?권면이다.?위원회는?창조의?질서가?지금도?있어서?남자가?여자를?인도해야?할?의무가?있다고?인정한다.?그러나?그것이?다스리라는?의미는?아니라고?규정한다.?그리고?여자가?잠잠?하라는?말은?여자가?남자를?지배하려고?덤벼들지?말라는?뜻이고,?이는?남자나?여자가?상호?지배하면?안?된다는?뜻으로?해석한다.
    아래는?보고서의?요약판중에서?성경해석에?대한?부분들이다.?독자의?이해를?위해서?번역해서?전재한다.


    성경적인?디딤돌들
    우리?보고서의?제?2장에서,?여성들의?직분에?대해?성경이?말하는?바를?제시한다.?여성들이?직분으로?섬길?수?있는가에?대해서?성경은?직접적인?답을?분명히?제시하지?않는다.?또한?교회에서?직분들의?사역을?조직하는?방식도?성경에서?직접적으로?찾을?수?없다.?다른?한편으로?성경에서?여성들이?봉사할?수?있는?방식에?대한?명백한?지침들을?발견한다.?여선지자로서,?사도로서,?집사로서?그리고?사사로서?역할을?한?여성들의?은사들을?찾을?수?있다.?성경에서?남성과?여성은?동등한?가치를?가지나,?동일시되지는?않는다.?하나님께서?남자와?여자를?다르게?창조하셨고,?그들을?서로에게?주셨다.?그들은?함께?세상을?돌보고?발전시키는?임무를?부여?받았다.?이렇게?공유된?책임성?안에서?먼저?이끄는?것이?남자의?역할이다.?이것이?그리스도?안에서?권위를?담는?것이며,?온전한?순종으로?섬기는?것이다.?이것은?남자가?여자?위에?주가?되어야?한다는?것을?의미하지?않는다.?남자의?머리됨을?언급하는?본문들은?남자와?여자로서?각기?독특함을?가지고?상호?섬기기를?바란다.?여기서?성경은?두?가지의?입장을?보여준다.?자유롭게?말하는?여성들을?말함과?동시에?여성들이?침묵하여야?한다고?가리키는?본문들도?있다.?이?본문들은?남자나?여자가?서로를?지배함으로?각기?가진?공유된?책임을?왜곡하는?것을?금하고?있음이?분명하다.?그러므로?성경은?우리에게?남성과?여성의?역할이나?임무의?분리에?대해서?그때나?지금이나?직접적인?교훈을?주지?않는다.
    회중에?대한?지도력과?누가?인도하여야?하는가에?관해서?성경이?말하는?바는?명백히?떠오르는?상이?없다.?성경에서?우리는?다양한?임무와?역할을?볼?수?있는데,?그?중에서?장로의?역할은?일관되게?교회의?지도력에?있어서?중요하다.?교회?회중을?위해서?하나님이?주신?특별한?직분들이?있다는?것은?분명하다.?특별한?직분을?가진?사람들이?하나님?나라를?향하는?길에?있는?교회?공동체를?인도?한다.
    정리하면?직분의?개념을?다스림에서?섬김으로?바꾸었다는?것이다.?그리고?성경해석을?통해?교회를?섬기기?위한?직분과?그?구성에?여성을?배제해야?한다는?성경의?명확한?가르침이?없다는?것을?확인하였다.?이것으로?여성안수에?대한?성경해석적인?난제를?극복하고?그?길을?열었다.
    고신?교회의?과제
    학문과?경건,?교회와?세상에?대한?균형을?가진?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가?성경에?근거하여?여성안수를?결정한?것은?결국?직분에?대한?전통적인?성경적?이해와?남녀?관계에?대한?전통적?성경적?이해를?극복하면서?이루어진?것이다.?물론?자체?내에서?반발과?앞으로?많은?논의가?생산될?것이다.?심하면?교회?분리도?일어날?것이다.?하나와?통합하기?위해서?다른?한쪽이?깨지는?일반적인?현상을?반복할?것이다.
    한국의?고신?교회를?비롯해서?합동과?여러?장로교회들,?그리고?소위?몇몇?개혁교회들은?여기에?응답해야?한다.?저들이?가진?해석적?지평의?이동을?수용할?것인가?아니면?이전의?입장을?고수할?것인가를?결정해야?한다.?개혁파?성경해석은?문자주의가?아니고?문법적이고?역사적이며?신학적인?해석이다.?개혁주의?신학은?신학적?정당성이?있는?성경?해석의?발전을?늘?수용해?왔기에?이번?결정에?대해서도?이런?성경해석학적?차원의?검토가?선행되어야만?한다.
    이?문제에?대해서?올해?총회에서는?다루어지지?않겠지만,?내년?총회에서는?각?노회가?상정?안건으로?제시하게?되어?결국?다루게?될?것?같다.?이에?앞서?“함께?섬기기”란?보고서에?대한?번역이?필요하다.?그리고?우리도?논의를?시작해야?한다.?먼저?네덜란드?개혁파?신학의?현장에서?공부한?이들은?정확한?상황?설명과?분석을?내놓아야?한다.?이번?일은?신학자들만의?일이?아니다.?교회의?일이다.?교회의?일은?교회가?결정한다는?마음으로?대응해야?한다.
    글을?정리하면서?드는?질문이다.?한국교회가?과연?신학적?독립을?할?수?있을까??신학적?독립은?어떤?의미일까??이번?사건을?겪으면서?가지는?필자의?큰?질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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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령 기자??leesr6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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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5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하여/ 송영목 교수, 고신대 (개혁정론, 2017.07.17.)



    한글 요약



    2003년경부터 여자 집사를 허용하는 남아공 개혁교회(GKSA)는 2016년 1월 12일부터 열린 특별 총회에서 여성 목사 안수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올 해 6월 중순에는 화란개혁교회(해방파)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인 여성 안수에 대한 올바른 결정은 교단의 전통이나 상황적 필요가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주석적 연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를 차례로 다룬다. 이 글에서 “여성 안수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을 논증할 것이다.



    들어가면서



    앞으로 교회 사역은 목회자(klerikos)와 일반 성도(anthropos laikos) 간의 이분법적 구도가 아닌 열린 유기적 협업, 기계적 조직화보다는 건덕과 인격적 관계의 강화, 그리고 주종관계가 아닌 종의 리더십을 통한 역동적 제자화를 요청한다.1) 이를 위해 무엇보다 여성도의 재능과 역할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2003년경부터 여자 집사를 허용하는 남아공 개혁교회(GKSA)는 2016년 1월 12일부터 열린 특별 총회에서 여성 목사 안수건(이하 ‘여성 안수’)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2)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인3) 여성 안수에 대한 올바른 결정은 교단의 전통이나 상황적 필요가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주석적 연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4) 특히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를 차례로 다룬다. 이 글에서 “여성 안수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을 논증할 것이다.



    1.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유니테리언파(Unitarian)는 물론, 중앙집권화된 교회정치 체제 대신 개교회의 결정을 중요시하는 회중교회에서 여성 안수가 일찍 시행되었다.5) 20세기에 들어와서 스위스 개혁교회(1918), 프랑스 개혁교회(1949), 미국 장로교회(PCUSA, 1956), 화란 개혁교회(NHK[국가개혁교회], 1966; GKN[개혁교회], 1969; 해방파, 2017), 남아공 화란개혁교회(NHKA, 1976; NGK, 1990), 미국 기독개혁교회(CRC, 1995)6) 등 개혁파와 장로파에서도 여성 안수가 허용됐다.7) 한국의 경우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 목사와 장로는 남성으로 제한됐다. 장로교 22회 총회(1933)에서 성진중앙교회 김춘배목사가 여성 안수를 청원했다가 철회한 사건이 있었다. 장로교 24회 총회에서 박형룡박사는 김춘배목사가 남성 안수를 2천 년 전의 특정 풍습으로 본 것은 잘못이며, 남성 안수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했다.8) 1930년에 감리교회가 여성 안수를 허용한 이래, 재건교회가 최덕지 여전도사를 (명예) 목사로 인정했다(1951).9) 감리교(1930), 기장(1974), 예장 통합(1994), 예수교성결교(2003), 침례교(2013), 성공회, 루터교, 예장 대신(백석, 2009),10) 기하성(교단 설립 때부터),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교단 설립 때부터), 구세군, 브니엘교회, 독립교회 등이 여성 안수를 시행 중이다.11) 이들 교회는 여목사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 총대의 비율을 높이려고 노력 중이다. 기독교연합신문의 여론조사(2016년 7월)에 의하면, 전국 신대원생 85%가 여성 안수를 지지하며, 여성 안수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의 신대원생들의 찬성 비율도 과반이었다(참고. 고신대 신대원생 100%, 총신대 신대원생 52.5%, 합동신대원생 56.3%).12) 따라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에서 허용하는 것은 시간상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특별히 여성 안수를 불허하는 교회의 신학생들이 관련 본문에 대한 심도 깊은 주석적 연구를 접해봤는지 의문이다.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유교문화의 양존음비(陽尊陰卑)에 근거하여 가부장적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근본주의 교회에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13) 그리고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요인으로 ‘NCC여성위원회’와 같은 여권(女權)신장 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WCC의 결정을 드는 경우도 있다.14) 여권신장과 상관없이, 미국의 경우 신식민지 지역에 여성의 선교 목회활동을 허락하게 된 것을 여성 안수의 계기라는 주장도 있다.15) 신앙과 세속 문화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선 이들이 방어적인 전통적 신앙고백주의와 카이퍼의 반명제적(antithetical) 사상에 근거한 반(反)문화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분석도 있다.16) 최근에는 여성 안수를 넘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LGBT)에게도 목사직을 허용한 장로교회도 있다.17) 종합하면, 여성 안수를 찬성 혹은 반대한 배경에는 유교사상, 여권신장 운동, 성경해석방법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18)



    2.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창 1:26-28은 남녀의 평등성을 강조하기에 여성 안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19)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녀평등이 여성 안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남녀는 동등하지만 상이한게 사실이며, 이것은 성 차별(sexism)이 아니라 성 구별이다.20)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으므로(창 2:18),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 차원으로 열등하다고 볼 수 있는가? ‘돕는 자’(히. 에제르; 헬. 보에쏘스)는 이스라엘을 돕는 분이신 하나님에게도 적용되므로(참고. 출 18:4; 히 13:6), 여자의 열등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21)

    여사사 드보라(삿 4-5), 여선지자 훌다(왕하 22:14), 여선지자 노아댜(느 6:14),22) 지혜로운 여인들(삼하 14:2; 20:16-22)을 통해서 볼 때, 비록 여성은 공직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신적 권위와 지혜로 의미 있는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23) 그리고 구약에서 여자는 회막에서 섬길 수 있었기에 제사장을 보조하는 역할도 감당했다(출 38:8; 삼상 2:22; 참고. 대상 25:5-6).

    구약에서 여자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허용되지 않은 세 가지 이유는 짐승을 죽이고 제사를 드리는 고된 노동, 부정한 월경 기간, 그리고 이방 신전의 창기를 닮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4) 여성 안수 지지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용납하셨고(막 5:25-34),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요람에서부터 월경하는 여인처럼 부정하다고 사마리아 여인을 간주했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요 4:1-42), 현대 목사의 직무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수행하는 힘든 노동과 다르며, 신약에는 신전 창기(娼妓)의 문제가 사라졌기에 신약의 변화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일부 특별한 경우에 여성이 활동한 것을 보편화시킬 수 없으며,25) 여성은 왕과 제사장같은 공적 사역에 종사할 수 없었다.26) 제사장은 선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선지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제사장이 되려면 여성이 아니라 완전한 남성이어야 했다(레 21:17-21). 이 원칙에 근거하여 신약의 목사도 남성 가운데 선발되어야 한다고 적용하는 이가 있다.27) 이렇게 구약의 여성의 역할을 살펴본 것으로는 여성 안수의 성경적 의미를 결정하는데 여전히 역부족이다.



    3.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교회의 필요에 따라 여성 안수를 허용하거나 불허할 수 없다. 더구나 여성 안수는 페미니즘 운동에 좌우될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에 근거한 결정이어야 한다. 복음서의 1차 삶의 정황인 AD 30년대에는 여성 안수에 관한 논쟁이 없었지만, 신약의 지역 교회가 설립된 이후 상활을 염두에 둔 바울 서신에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교훈이 몇 번 나타난다. 신약 서신서에 의하면, 여성 안수는 구원론과 직결되지 않는 교회의 직제문제로 보인다.28) 그럼에도 여성 안수가 가볍게 취급될 주제가 아님은 이 주제는 성경관 및 성경해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3.1. 누가복음 8:1-3



    눅 8장의 여성들(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은 소위 ‘정착 제자’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다닌 제자들이었는가?29) 과연 이 여성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신 주님과 동행했는가는 분명치 않다.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1절의 12제자는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로, 2-3절의 여인들은 정착 제자들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1세기에 여성이 남성 스승을 장기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숙박을 같이했다며 큰 스캔들이기 때문이다.30) 누가는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사역을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펼치시는 동안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무렵 한시적으로 동행했던 것 같다(눅 23:49).31) 그 당시 유대 랍비들은 여자를 제자로 삼지 않았지만(참고. 요 4:27) 여성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참고. 유대고대사 17:33-45),32) 랍비와 달리 예수님은 측근의 여성을 훈련시키셨다. 그렇다고 하여 이 사실이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12제자들은 모두 남성인데, 구약의 남성 제사장의 역할과 유사하다(참고. 롬 15:16).33) 주님이 남자 제자들만 선택하신 것을 1세기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양보’ 곧 여자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다니면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아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 일시적인 현상인가?34) 물론 주님이 제자 선택 시에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신 것은 옳지만, 이런 특수 상황에 사도의 남성성이라는 규범성이 있지 않는가? 주님의 승천 이후, 복음을 공적으로 증거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한 것은 남성에게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구약의 선지자직은 일시적이었지만 남성이 담당한 제사장직은 종신직이었듯이, 남성 목사직도 종신직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가? 하지만 구약 제사장직이 아니라 선지자직이 신약의 목사직에 더 직결된다.



    3.2. 사도행전 18장과 로마서 16:1



    롬 16:3에 의하면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동역자’(쉬네르고스)인데, 이 명사는 목사였던 디모데(롬 16:21)와 디도(고후 8:23)에게도 적용되었다(참고. 빌 4:3의 유오디아와 순두게). 더욱이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쳤기에(행 18:26) 여성이 공적 직분을 맡아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가?35)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차원이지 공적 설교가 아니다.36)

    여성신학자들 가운데 겐그레아교회의 뵈뵈(롬 16:1-2)를 ‘사도’ 혹은 ‘교회의 대표자’(프로스타티스)로 보는 이가 많다.37) 그녀가 여자 감독이나 여집사(RSV, AEB, NEB)라는 주장도 있지만,38) 여집사인지 확실치 않으며 여사도로 보기는 더 어렵다. 그런데 슈라이너(T.S. Schreiner)에 의하면, 뵈뵈를 여집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딤전 3:11의 여집사 제도와 일치하고, 롬 16:1은 디아코노스가 하나의 특정 교회와 연결된 유일한 경우이며, 그리고 여성이 아니라 남성 명사(디아코노스)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39) 하지만 딤전 3:11이 여집사를 지지하는 구절인지 여전히 논란 중이며, 뵈뵈는 겐그레아교회에서 비공식적인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쳤다고 볼 수 있으며, 헬라어 어법상 남성 명사가 여성을 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뵈뵈를 베드로의 장모처럼 사도를 ‘섬기는 자/일꾼’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참고. 마 8:15). 덧붙여 바울과 아볼로가 ‘일꾼’(디아코노스, 고전 3:5)으로 불리기에, 디아코노스라 불린 뵈뵈도 사도들과 동급의 사역자로 보아야 한다고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한다.40) 왜냐하면 헬라어의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 문맥 속에서 적절한 한 가지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3.3. 고린도전서 11:2-16



    고전 11장에서 여성이 예언과 기도하는 시간을 공예배 때로 볼 수 있지만(참고. 뒤따르는 11:17-34의 애찬/성찬),41)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기에 바울이 공적 모임을 염두에 둔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에 숄을 쓰는 것은(11:5) 바울 당시 (기혼 여성임을 표시하는) 로마 사회와 고린도에 국한되는 특수한 실재이지만, 여자(아내)가 자신의 머리(케팔레)인 권위와 지도력을 부여받은 남자(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영원한 원칙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11;3; 참고. 엡 5:23).42)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머리’를 ‘근원’(source)으로 본다면, 남자가 여자 존재의 근원이다(창 2:18-23). 하지만 성부께서 성자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43) 성부와 성자는 동등하시지만, 성부가 성자에 대해서 권위와 리더십을 가지시므로 역할의 차이가 있다. 머리를 ‘권위’로 보면, 그 권위는 상대편의 필요를 섬기고 돌보는 것을 의미하지, 자기중심적인 권력의 남용은 아니다. 따라서 아내의 머리인 남편은 아내의 영적, 육적, 정서적 필요를 발견하고 돌보는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44) 참고로 로마의 남성들은 종종 토가(toga)의 느슨한 주름 잡힌 부분을 당겨 머리를 감쌈으로써 신들에게 경건한 제의적 예를 갖추었기에, 바울은 고린도의 남자 성도가 이런 이방 제의적 관습을 따르지 못하도록 머리 덮개를 사용하지 말라고 권면한다(고전 11:4).45) 물론 이 권면도 바울 당시에 국한 된 현상이다.

    고린도의 미혼 여성의 표지로서 혹은 특별히 창녀들이 머리를 풀고 다닌 바울 당시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런 문화적 상황 속에/위에 영구한 규범과 원칙이 있을 것이다.46) 마치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시지만 성부가 성자의 머리이신 것처럼(11:3), 존재적으로 남여는 동등하지만, 역할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바울이 고전 11:9에서 타락 이전의 창조 질서를 언급한 것은 문화에 제약되지 않는 어떤 규범을 제시하기 원했기 때문이다.47) 그리고 신약에서 여성이 예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언자직과 목사/교사의 직분은 구분된다(엡 4:11).48) 즉 예언하는 이들 모두가 목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4. 고린도전서 14:34-3549)



    고전 14:26-40의 요점은 고린도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방언과 예언을 질서있게 사용하라는 목회적 권면이다. 여성 안수 논의에 있어서 중요하게 취급된 “(결혼한) 여자들은 교회들에서 계속 잠잠하라”를 포함하는 고전 14:34-35는 몇몇 서방계열 사본들(D, E, F, G, 88)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고대 사본들이 이 구절을 현재의 위치에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 구절의 표현들(예. 말하다[14:14-32], 잠잠하다[14:28, 30, 34], 교회 안에서[14:28, 35])은 전후 문맥에 등장하기에 사본상 별 문제는 없다.50) 따라서 34-35절을 40절 뒤에 배치한 일부 사본들을 근거로 하여 후대의 첨가로 볼 이유는 없다.51) 참고로 GNT5의 고전 14:34-35의 본문 비평등급은 {B}다.

    34-35절을 바울이 쓴 원본이라 결론을 내리더라도, “고전 11:5의 여자가 할 수 있는 기도나 예언과 14:34의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는 명령은 상호 모순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는다.52) 이 구절을 통해서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의 다양한 근거와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공예배에서(고전 14:26) 예언과 방언하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여성도에게 허락되었지만(참고. 고전 11:5), 바울은 은사가 풍성한 예배의 질서 유지와 같은 특수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를 원했다.53) (2) 34절의 여성은 정관사를 동반하기에(αἱ γυναῖκες) 모든 여성이 아니라 특정 여성에게 권면하는 것인데, 어떤 모임에서 일부 여성이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마음대로 내뱉음으로써 분위기를 주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참고. 고전 14:36).54) (3) 따라서 바울은 그 당시에 지배적인 남성 우월적 사회 규범을 의식하면서, 교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초래할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을 구실을 제공할 수 있기에 문화에 일시적으로 순응할 필요를 느껴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명했다.55) 더불어 바울은 난잡하고 사교(邪敎)적인 동방 제의에서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공적 질서와 품위를 손상시킨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56) 그리고 (4) 고전 14:26-33에 의하면, 여자만 잠잠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배의 질서를 깰 가능성이 있는 경우 즉 계시를 받은 자가 말할 경우 예언하는 자는 잠잠해야 했고(14:30), 통역이 없는 경우에 방언하는 자들도 잠잠해야 했다(14:28).57) 따라서 (5) 여자의 침묵은 고린도교회의 특수 상황에서 기인한 시간 제약적 교훈이기에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침묵 명령이 아니며, 여성의 예언이나 방언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세우기 위한 ‘긍정적 참여’이고,58) 더욱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14:34-35)은 여성의 열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59)

    이런 특수한 상황이 초래한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아내)의 예언이나 발언이 재개될 수 있었는가? 바울의 논지는 여성이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방언이나 예언 혹은 교회의 쟁점에 대해 큰 소리로 토론하지 말라는 의미로 본다면, 특별히 남편이 방언을 통역하거나 예언을 분별할 때 아내가 오류를 큰 소리로 지적하는 것은 공동체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60) 바울이 여성의 잠잠함을 수치와 연결하기에(35절), 여성이 분별없이 말하는 것은 파격적 행위였다.61) 혹은 여자가 고린도교회의 예배 중에 수행된 예언의 진정성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일(고전 14:29)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의 남성 장로들이 예언의 진위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62) 또는 교육에서 배제되어 배움의 욕구가 컸던 여성이 지식의 은사를 받아 교만해진 것을 바울이 지적했을 수 있다.63)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지배하는 공적 교훈을 항시(恒時)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64) 첫째, 율법이 말하는 것같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34절; 참고. 창 2:20-24; 3:16). 현재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 언급된 ‘율법이 말하는 것같이’는 바울의 권면이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근거한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도출된 계시임을 가리킨다.65) 따라서 신약 목사직은 구약의 성전 제사와 제사장 직분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33절의 ‘교회들’은 복수 명사이므로, 바울의 논의가 특수한 교회의 관습이 아니라 교회의 일반적 관습에 근거하고 있다.66) 따라서 바울 당시의 문화적 관습에서 볼 때, 아내가 남편에게 배우지 않고 교회와 교회 밖의 공적 모임에서 어리석게 말하는 것은 수치였고(고전 14:35), 지금도 원칙상 그러하다.67) 여성이 오늘 날 교회당에서 드리는 공예배 때보다 가정에서 모인 예배에서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 그리고 예언을 분별하는 것은 친밀한 분위기상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고전 14:34-35는 여자의 공적 사역이나 안수를 위한 근거 구절로 보기 어렵다.68)



    3.5. 갈라디아서 3:28



    예수님이 성취하신 새 시대 곧 성령님이 임하신 종말의 빛에서 구약과 신약을 파악해야 한다면,69) 성령께서 임하셔서 여성의 신분을 남성과 동등하게 성령의 전으로 회복하신 것은 직무의 회복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70) 즉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이해를 지지하는가?(갈 3:28; 참고. 롬 10:12; 고전 12:13; 골 3:11).71) 그리고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다”라는 바울의 교훈을 따라서, 현대 교회가 노예 제도를 철폐했다면, 목사직에서 있어서 여성 차별도 철폐해야 하는가?72) 따라서 오순절은 남녀 역할의 차별이 철폐된 전환점인가?73)

    성경은 성령강림이라는 종말적 사건의 빛에서 해석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창조 질서의 빛에서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초론의 사상이 종말론으로 만개(滿開)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예수님 안에서 동등하지만, 타락 이전에 주어진 창조 질서(즉 남편을 돕는 아내; 창 2:20)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여자에게 임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74) 그리고 갈 3:28은 여성 안수의 맥락 혹은 교회에서 남녀평등을 소개하는 구절이 아니다.75) 창조 질서를 따라 여성이 남성에 복종해야 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남녀의 동등성은 파괴되지 않으며, 동등성만 강조하다보면 창조 질서는 파괴될 수 있다.”76) 바울이 남녀의 동등성을 주장했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든 면에서 관령성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동성애를 반대했고(참고. 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결혼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된 역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엡 5:22-33; 골 3:18-19; 딛 2:4-5).77) 그렇다면 남성성(maleness)과 여성성이 교회의 공적 직무와도 연관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전 11:2-16; 14:33-36; 딤전 2:9-15).78) 주님께서 우월성과 열등성을 결정짓던 잘못된 옛 관행은 폐지하셨지만, 남성과 여성 그리고 종과 주인의 역할조차 폐지된 것은 아니다(참고. 엡 5:22-33; 6:5-9).79) 따라서 무(D.J. Moo)가 지적하듯이, 교회 안에서 차이의 아디아포라화(adiaphorizing)는 차이를 제거하거나 역할의 차이를 제거할 수 없다.80) 백인이 흑인을 인종차별적으로 억압한 죄와 남성이 여성을 무시한 것은 회개해야할 죄다. 하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의도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존재와 직무에 있어 평등하다는 신앙 그리고 유대와 로마의 남녀 차별적 문화적 상황 사이의 긴장과 투쟁했는가?81) 바울은 남녀의 평등과 구별성을 동시에 견지하는 창조 질서와 복음의 관점에서 그 당시 세상 문화를 비판했다. 바울은 노예제도를 비판하지만 그것의 철폐를 급진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남성에 종속된 여성의 상황을 그 당시 문화적 규범을 파기하고 혁명적으로 개선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바울이 사회 규범을 무시하는 혁명적 사회 변혁을 교훈했다면 교회는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사도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 당시 문화나 윤리적 상황과 규범을 고려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대안을 제시했다.



    3.6. 디모데전서 2:8-15



    예루살렘 탈무드는 “토라의 말씀이 여자에게 주어지는 것보다는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함으로써, 여자가 학습하는 것은 시간낭비였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여성 열등성을 반대한다.82)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교회의 여성도가 거짓 선생의 가르침(딤전 1:3)에 미혹되어서 잘못된 내용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 쉬웠음을 알고 있었다(딤전 5:13, 15; 딤후 3:6-7). 바울 당시의 이런 특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현대에는 다르게 적용하면 되는가?83) 그런데 딤전 2:12는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기에, 여성이 배워도 가르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84) 즉 여자가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면(11절) 목사가 되어 공적으로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85) 따라서 나이트(G.W. Knight III)는 바울이 교회에서 남자에게 주어진 권위있는 역할을 여성이 배움으로써 전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본다.86) 여성은 하나님이 남성 목사와 장로에게 주신 권위와 리더십에 순종해야 한다(참고. 눅 10:39-40).87) 사족을 달면, 이 사실은 남성 장로가 여성도를 무시하거나 학대할 폭군과 같은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은 여성이 여성이나 아이를 가르치는 일, 그리고 사업이나 정부 기관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이 단락에서 주석상 논란이 된 몇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88) (1) 11절의 명사 ἡσυχία는 여성 안수 찬성자들이 지지하는 ‘조용함’(quietness; 혹은 침착함)인가?(NASB; NIV; 살후 3:12; 딤전 2:2).89) 아니면 여성 안수 반대자가 선호하는 ‘침묵’(silence)인가?(KJV; RSV). 바울 서신의 용례, 배움의 자세로는 부적절한 침묵보다는 조용히 수용하여 배우려는 자세, 그리고 주요 영어 성경의 번역을 고려하면 ‘조용함’이 적절해 보인다.90) (2) 12절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 에피트레포(허락하다)는 개인적 충고나 권면인가? 아니면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주는 명령의 뉘앙스를 가지는가? 바울의 권면의 엄중성을 고려한다면 후자가 더 적절하다.91) (3) 12절의 부정사 디다스케이은 예수님이나 사도처럼 권위를 가진 이의 가르침이라는 협의적 의미인가?(참고. 마 5:2; 7:29; 9:35; 11:1; 행 4:2; 엡 4:11). 아니면 일반적 가르침을 가리키는가?(참고. 골 3:16; 딛 2:3-5). 여성이 조용해야 한다는 문맥을 고려하면, 권위있는 가르침이 더 적절하다. (4) 12절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 ‘아우쎈테인’은 ‘전적인 권위를 가지다’(have total authority)인가? 아니면 ‘주관하다’(domineer over)라는 뜻인가? 11절의 ‘순종’과 연결하면 둘 다 가능하다. (5) 13절의 접속사 ‘가르’는 11-12절의 이유를 소개하는가? 아니면 이유가 아니라 예증이라는 설명을 의미하는가? 비록 ‘가르’가 ‘예를 들어’ 혹은 ‘이제’로 번역되거나, 번역이 안 되어도 무방한 경우가 있지만(참고. 롬 8:18-24), 『개역개정』과 NIV가 번역하듯이 13절에서는 이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참고. 고전 14:34와 딤전 2:13의 이유의 ‘가르’). 따라서 13절 이하의 창조 질서(creation order)는 12절의 여성의 침묵을 위한 적절한 이유이다.

    AD 1세기의 여성 전부가 문맹자가 아니었는데(참고. 행 18:2-3),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배운 여자를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 그리고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교회에서는 창조 질서를 따라 여자는 남자의 헤드쉽 아래 존재하는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하며(딤전 2:13-14), 공예배와 일상에서도 남자의 헤드십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92) 그런데 바울의 논의에서 창조 질서는 결정적이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있어서 선한 것이지만(창 2:18),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인 독신(ἄγαμος)도 권장할 만한 선한 것이라고 본다(고전 7:7-8).93) 왜냐하면 이 세상의 현재 외형은 다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31).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창조 사역은 창조 질서를 단순히 회복시킨 차원인가, 아니면 창조적으로 변혁시킨 것인가?94) 이 질문에 대한 일정 부분의 답은 딤전 2:11-14는 물론 15절까지 포함시켜 주해할 때 찾을 수 있다. 딤전 2:13는 창조, 24절은 타락, 15절은 창조 질서의 회복을 다룬다. 그러므로 문맥상 여성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역할을 벗어난다면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95) 그리고 딤전 2:13의 ‘창조되다’(formed)는 창 2:7-8 LXX에서 아담의 창조에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성 역할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타락의 결과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 설정된 창조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모든 문화와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96) 12절의 가르침은 교회의 교사인 목사의 가르치는 사역을, 주관하는 것은 감독 곧 목회사역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97) 갈 3:28과 딤전 2:11-15는 한편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지배하지 말고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는 동등하지만 역할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참고로 딤전 2:15의 “여자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를 남존여비라는 유교적 관습에 근거하여,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집안에서 안전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신분이 불안하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98) 그러나 이 해석은 오늘 날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여자의 몸에서 구주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구원할 것이라는 해석도 남녀의 역할을 다루는 문맥에 맞지 않다. 오히려 여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특유하게 부여하신 역할인 출산을 믿음으로써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99) 또한 1세기 출산 시 산모의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공적 예배와 사적 생활에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을 실천하는 여자는 출산과 같은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구원을 경험할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100)



    3.7. 디모데전서 3:1-7, 11



    딛 1:5-9와 더불어 딤전 3:1-7은 감독의 자격을 다룬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여성 안수를 연구한 논문에 고전 11:3-16과 14:34-36에 밀려서, 딤전 3:1-7은 목사직이라는 ‘교리의 좌소’(sedes doctrinae)라 불릴 정도로 주요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간과되거나 부차적으로 취급된다.101) 바울에 의하면, 결혼을 했던 하지 않았던, 그리고 아내의 사별로 재혼을 했던 하지 않았던, 감독의 자격은 남성이다(3:2).102) 바로 앞 딤전 2:12-15에 언급된 남녀 사이의 창조 질서는 특정 시간과 문화에 제한되거나 매이지(bound) 않기에, 딤전 3:4-5에서 동사 프로이스테미(to manage, 참고. 살전 5:12)를 통해서 바울은 가정에서 헤드십을 수행하지 못하는 여성은 교회에서도 못한다고 말한다(참고. 고전 11:3; 엡 5:22; 골 3:18; 벧전 3:1-6).103)

    11절의 ‘여자들’은 접속사 ‘이와 같이’를 고려하여 많은 이들이 해석하듯이 여자 집사를 가리킬 수 있지만,104) 11절 전후 구절에 등장하는 ‘집사’의 아내를 자연스럽게 가리킬 수 있다.105) 만약 바울이 11절에서 여집사를 의도했다면, 그 직분에 맞는 자격이나 의무를 상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11절의 유동적 해석 때문에 여성 목사는 인정치 않더라도 여자 집사는 안수 없이 허용하는 교회가 적지 않다.

    참고로 역사비평가들은 디모데전서를 ‘제 2 바울 서신’으로 간주하면서 초기 가톨릭주의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재림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던 상황에서 가부장적 교회질서의 형태를 채택하여 세상과 공존하고 합법적 종교로 생존할 수 있도록 모색했다고 본다.106) 이런 잘못된 주장은 디모데전서의 바울 저작을 믿지 않고(참고. 딤전 1:1), 기록 연대를 바울의 말년이 아니라 지나치게 후대로 본 가설에서 기인한 것이다.



    3.7. 기타: 행 9:36-43의 다비다, 행 21:9의 빌립의 세 딸, 그리고 벧전 2:9의 왕같은 제사장



    욥바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라는 집사의 역할을 했지만(행 9:36), 여성 목회자는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위로와 돌봄과 치유에 있어 더 적극적이거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107)

    사마리아의 집사 빌립의 세 딸은 처녀로서 예언을 했는데(행 21:9), 성령님이 종말의 은사를 여성에게도 주신 결과다. 그러나 빌립의 딸들은 개인적으로 예언을 했지만, 지도자 역할이나 공적 예배에서의 예언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108)

    ‘제사장 나라’는 구약 이스라엘의 별명인데 그럼에도 제사장 직무를 감당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약 교회가 왕같은 제사장이지만(벧전 2:9; 계 1:6) 따로 목사직이 필요하다(딤전 3:1-7).109)

    참고로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인 여인들은 부활의 소식을 전했지만, 그것이 여성 안수와 설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110) 그리고 루디아(행 16:14-15)가 빌립보교회 설립은 물론 예배 처소를 제공한 봉사를 했기에 여성 안수의 모델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과 의도를 넘어서는 주장이다.111)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엡 5:24)은 항시적 원리이다.112)



    4. 한국교회에 적용



    교회에 여전도사가 활동 중이지만, 그들이 강도권을 가지지 못하기에 설교가 아니라 ‘권면의 말’을 한다. 여전도사는 물론 남전도사와 교회학교 교사는 목사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참고로 2016년 9월에 열린 제 101회 고신총회에서, 신대원을 졸업한 여성 사역자에게 강도사에 준하는 ‘권도사’(勸道師, exhorter)라는 호칭을 허용하자는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학교에 여교사들이 봉사 중이지만, 주일학교는 설교와 성례가 시행되는 교회가 아니다. 물론 남자건 여자건 복음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참고. 골 3:16). 따라서 교회학교의 여교사를 여성 안수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교회(교단)는 이 문제로 조만간 큰 홍역을 치를 수 있다.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주석적, 실천적 연구를 위한 전문가 그룹을 영역별로 나누어 체계적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며, 연구발표회를 통한 공청회를 통해서 준비해야 한다. 화란 국가개혁교회(NHK)가 여성 안수를 두고 85년 동안(1892-1977) 씨름했듯이,113) 한국교회도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를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선악과처럼 금기시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



    나오면서



    성경에 여성이 안수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고, 여성 목사가 언급되지 않기에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를 하는 자체가 소모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이라는 극단적 주장이 있다.114) 마치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논의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볼 이유는 없듯이, 여성 안수도 마찬가지다. 여성 안수를 결정지을 요소는 전통이나 교회의 필요가 아니라 성경해석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논의한 관련 신약 구절들은 시간 제약적인가(time-bound), 아니면 시간 오리엔트적(time-oriented) 혹은 시간 초월적인가?(time-transcended). 즉 본문의 가르침은 AD 1세기에 한정된 규범이기에 현대 교회에서는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영구적 진리인가? 시간 제약적으로 보는 이는 다음 질문들을 계속 던질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 남성 12명만 제자로 삼으신 것을 현대에도 문자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가?115) 이방인, 종, 사마리아인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가? 주님이 베푸신 최후 만찬에 유대인 남자 제자 12명이 참석했기에, 오늘날 성찬식에 유대인 12명만 참석해야 하는가? 1세기에 여자가 남성을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스캔들이라면, 현대는 여자를 특정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이 스캔들이지 않는가?”116) 하지만 1세기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 안에도 규범이 있다. 즉 1세기에 국한되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안에도 타락 이전에 규정된 창조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 따라 남성에게 제한된 구약의 제사장직과 신약의 사도직과 장로직에 근거한 영구적 규범을 동시에 찾아야 한다.117) 신약 본문을 1세기에 국한되는 내용으로 보는 해석을 쉽게 허용한다면, 신약 본문의 규범성이 약화되고, 더 나아가 현대에 적용할 때 큰 혼동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여성 안수를 허용할 경우에 제기될 실제적 문제들도(예. 사모의 역할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고려해야 한다.118)



    A Short Thought about the Ordination of Women

    Youngmog Song(Prof. of Department of Theology)



    Abstract



    The aim of this paper is to delve into the biblical perspective about women ordination from historical and exegetical studies. Every research on this issue claiming ‘biblical’ makes readers much more confusing. Since the 1930’s, major denominations of Korean church including Methodist church and Assembly of God have been approving women ordination. Even though the real concern for this issue must be the process of the decision whether accepting it or not, not a few denominations accredited women pastor due to their practical necessity. In other words, biblical exegesis on the related passages in the New Testament matters. Keeping in mind these phenomena and principle, the Korean churches which do not allow women ordination have to prepare this issue because some day it will cause a serious debate or conflict among their community. This paper explores this issue from four steps: (1) the historical argument on the women ordination, (2) women ordination from the Old Testament perspective, (3) women ordination from New Testament exegesis, and (4) application of this issue to Korean Church. Finally the four steps lead to the conclusion that women ordination is not clearly confirmed by the New Testament exegesis. It is neither recommendable nor wise to escape open discussions on this issue by regarding it like a fruit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Key Words



    Ordination of women, biblical hermeneutics, the New Testament, time-bound, time-transcended



    주제어



    여성 목사 임직, 성경 해석, 신약, 시간 제한적, 시간 초월적




















    1) 옥스퍼드대의 S. Pickard, “A Christian Future for the Church’s Ministry: Some Critical Moves”, Ecclesiology 8 (2012), 52.



    2) GKSA, Acts of the Extraordinary General Synod (Potchefstroom, 12 January 2016), 1-142. 참고로 이 글에서 종종 등장하는 표현인 ‘안수’(按手)는 ‘임직’이라는 의미이다. 안수는 구약에서 25회 사용되는데, 주로 제물이나 제사장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등장하여, 전가, 인정, 혹은 동일시를 함의한다. 참고. 베일러대학교의 T. Brisco, “Old Testament Antecedents to Ordination”, Perspectives in Religious Studies 29 (2002, 2), 162.



    3) 미국의 경우 1987년에 창조와 구원에 있어 성의 평등에 근거하여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Christians for Biblical Equality(CEB)와 전통적 남성 헤드십이라는 성(性) 인식에 근거하여 남성 안수만 고수하는 The Council on Biblical Manhood and Womanhood(CBMW) 사이에 의견이 나뉘었다. 칼빈신학교의 J. Bolt, “Eschatological Hermeneutics, Women’s Ordination, and the Reformed Tradition”, CTJ 26 (1991), 370.



    4) 압뻘도른신학대에서 화란교회의 여성 안수 논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2001)를 받은 임경근,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여자 직분 문제와 한국 교회의 과제”, 『진리와 학문의 세계』 11 (2004), 82, 84.



    5) 참고. 한신대의 김애영, “여성안수와 참된 교회 공동체”,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7 (2005, 1), 302; 백석대의 조기연, “여성안수: 찬성과 반대”, 『신학과 선교』 38 (2010), 3.



    6) CRC는 1984년에 여집사를 허용했으며, 1997년에 북미 장로교회-개혁교회 연합회(NAPARC)는 여성 목사안수를 허용한 CRC의 회원자격을 박탈했고 그 결정은 현재도 유효하다. 또한 NAPARC는 CRC가 1973년에 공포한 성경관이 역사적 개혁주의 견해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성경관이 여성 안수와 직결됨을 보여준다. T.J. Van Dyken, “Reformed Orthodoxy and Gendered Authority: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1945-1984”, CTJ 51 (2016), 77. 1973년에 PCA가 남부장로교회(SPC)에서 분리할 때 비성경적 결혼과 이혼 및 여성안수 반대가 중요 명분이었다. 역시 성경관의 차이가 교회 분열을 낳았다. 참고. WTS출신인 F.J. Smith, “Petticoat Presbyterianism: A Century of Debate in American Presbyterianism on the Issue of the Ordination of Women”, WTJ 51 (1989, 1), 67, 72-73. Contra 성경관에 있어 보수적인 오순절 교회가 여성 안수를 쉽게 허용한 것을 예로 들면서, 성경관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노스 파크신학교의 K.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Covenant Quarterly 67 (2009, 2), 27.



    7) 전 세계 교회들의 여성 안수 현황은 에큐메니칼적 단체인 세계 개혁주의 교회 연맹(WARC) 소속의 U. Rosenhäger and S.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한 개혁신학의 이해』 (Walk, My Sister-The Ordination of Women: Reformed Perspective, 장상 역, 서울: 이화여대 출판부, 1995), 199-205를 참고하라.



    8) 이혜정,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교단정체성 연구”, 209.



    9) 조윤희, “한국교회의 여성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46.



    10) 2011년 11월 8일, 백석대 교수 79인은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하여 여성 안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1) 2013년 기준으로 여목사의 비율은 기장은 14.79%, 통합은 5%, 감리교는 5.4%이다. 참고. 윤소정, “오늘날 한국교회 여성목사 안수와 교회 현장에서의 문제들”, 『기독교사상』 (2013년 3월호), 49.



    12) 참고.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0251(2016년 10월 16일 접속).



    13)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한 개혁신학의 이해』, 28, 67; 경성대의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인문학논총』 15 (2010, 1), 176; 조윤희, “한국교회의 여성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한국여성신학』 19 (1994), 36, 39, 44,



    14) 예장(통합) 전국 여교역자연합회 총무인 고애신, “예장(통합) 여성안수 활동사”, 『한국여성신학』 28 (1996), 31; 대한신학교의 김성봉, “마지막 방파제”, 『교회와 문화』 28 (2014?), 10-11. 참고. WCC, Concerning the Ordination of Women (Geneva: WCC, 1964).



    15) 총신대의 심창섭, “여성 안수에 대한 소고”, 『신학지남』 64 (1997), 193. 참고로 진보적인 가톨릭 수녀들은 1976년에 시카고에서 ‘여성 성직 수임 회의’(Women’s Ordination Conference)를 설립했다. 남성 사제 지원자의 급감으로 인해 여성 사제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 거세게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김영애, “로마가톨릭교회 개혁의 주체, 여성 사제직”, 『신학연구』 63 (2013), 104, 112.



    16) Van Dyken은 미국 루터교 미주리노회, OPC, PCA, 그리고 일부 CRC교회를 예로 든다. Van Dyken, “Reformed Orthodoxy and Gendered Authority”, 61. 참고로 미국 안식교는 2015년 60회 총회에서 여성 안수를 부결했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총회 결정을 무시하고 여성 안수를 시행했다.



    17) 샌프란시스코신학교 교수이자, PCUSA 213대 총회장(2001)인 J.B. Rogers, “Culture vs. Revelation: Women’s Ordination and LGBT Ordination as Parallel Struggles”, Church & Society 96 (2006, 3), 98, 107.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G.C. Berkouwer를 박사과정에서 사사했고 죽기 전에 영국 청교도 Edward Reynolds(d. 1676)의 전기를 연구를 Rogers는 여성 안수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은 선택적인 문자주의에 빠져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성경의 교훈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PCUSA는 1921년 총회에서 여집사를 승인했고, 2011년 5월 10일에 LGBT의 목사 안수를 승인했으며, 2015년 3월 17일에는 동성애자의 결혼을 승인했다.



    18) 20세기 중반까지 여성안수에 대한 연구 목록과 요약은 R.T. Barnhouse et al, “The Ordination of Women to the Priesthood: An Annotated Bibliography”, Anglican Theological Review 6 (1976), 81-106을 보라.



    19) 신선, “여성 안수 왜 안 되는가?”, 『새가정』 4 (1984), 46.



    20) 계신대원의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서울: 큰샘출판사, 2004), 16.



    21)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58.



    22) 흥미롭게도 LXX와 Vulgate에 ‘노아댜’(느 6:14)는 남성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의 지위와 동등하게 만들려는 시도인지, 아니면 여성의 이름에 구약의 번역 시기 당시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지 논란이 된다. 전자를 지지하는 입장은 프린스턴신학교의 G.A. Barrois, “Women and the Priestly Office according to the Scriptures”, St. Valdmir’s Theological Quarterly 19 (1975, 3), 178을 보라.



    23) 위클리프홀의 R.T. France, “여성 안수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 연속성과 발전”,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호), 192.



    24) 노틀담대학교의 J.M.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10 (1973, 4), 690. 이방 종교의 성창들의 영향을 거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여자 제사장이 없었다는 방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이방 종교의 영향 이전에 노아(창 8:20-21), 욥(욥 1:5), 그리고 족장들은 가족을 대표하여 제사를 드렸다(창 12:7-8).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28.



    25) 참고. 칼빈의 딤전 2:12 주석을 소개하는 심창섭, “여성 안수에 대한 소고”, 197.



    26) G. Wenham, “여성 안수: 왜 이렇게 분열을 일으키나”,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205.



    27) Wenham, “여성 안수: 왜 이렇게 분열을 일으키나”, 210.



    28) 심창섭, “여성 안수에 대한 소고”, 194.



    29) 장로회신대의 박수암, “여성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견해”, 『장신논단』 5 (1989), 65; France, “여성 안수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 193.



    30) 참고. 댈러스신학교의 D.L. Bock, Luke 1:1-9:50 (BECNT; Grand Rapids: Baker, 1994), 713.



    31) Contra 여제자들이 주님의 갈릴리 사역부터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녔다고 보는 베일러대학교의 D.E. Garland, Luke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1), 341.



    32) 참고. 상당한 규모의 여성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비평적으로 확증된 사실’(critically assured fact)이라고 보는 Whitworth대학교의 J.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NTC; Grand Rapids: Eerdmans, 2015), 233.



    33) 손석태, “여성 안수 성경적인가?”, 『개신논집』 9 (2009), 251.



    34)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63.



    35) 긍정적으로 보는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77; France, “여성 안수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 196;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9; 더반-웨스트빌대학교의 D.S. Watson, “The Mutual Recognition of Ordained Ministries”, Journal of Theology for Southern Africa 23 (1978, 1), 67; Smith, “Women’s Human, Ecclesial and Missionary Identity”, 155;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32.



    36) 합신대의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신학정론』 8 (1990, 2), 317.



    37) 웨신대의 최영숙,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교회 여성들: 고린도전서 14:34-35 해석”, 『신약논단』 22 (2015, 3), 751.



    38)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34;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70.



    39) 남침례신학교의 T.S. Schreiner, Romans (BECNT; Grand Rapids: Baker, 1998), 787.



    40) Contra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33.



    41)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79.



    42)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319.



    43) ‘머리’를 ‘뛰어난’ 혹은 ‘첫째가는’이라는 의미로 본다면(참고. 신 28:44; 사 7:8-9; 애 1:5 LXX), 남성이 여성보다 앞과 위라는 지도자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여성의 남성을 향한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D.E. Garland, 1 Corinthians (BECNT; Grand Rapids: Baker, 2003), 516.



    44) ESV Study Bible (Wheaton: Crossway, 2008), 2206.



    45) ESV Study Bible, 2207.



    46)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22; 총신대의 김정우, “여성 안수에 대한 논평”,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9 (2005), 109.



    47) ESV Study Bible, 2207.



    48) 총신대의 이관직,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 『신학지남』 64 (1997, 3), 297.



    49) 고전 14장과 딤전 2장은 남아공 개혁교회 특별 총회에서 가장 논쟁이 된 구절이다. GKSA, Acts of the Extraordinary General Synod, 19.



    50) 참고.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34; 백석대의 최갑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목회와 신학』 (2005년 7월호), 170; 노팅엄대학교의 A.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0), 1152. Contra 한국여신학자 협의회의 김상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에 관하여”, 『기독교사상』 28 (1984), 231;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81;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66. 참고로 34절의 “여자는 교회들에서 계속 잠잠하라”를 고린도에 유행하던 슬로건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형식이 격언적(proverbial)이지 않고, 교회의 자유방임파의 성격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 덴버신학교의 C.L. Blomberg, 1 Corinthians (Grand Rapids: Zondervan, 1994), 280.



    51) 백석대의 이경석, “고린도전서 14:33b-36의 진정성과 주해”, 『신약연구』 7 (2008, 4), 683. 참고로 고전 14:36의 접속사(ἤ)는 34-35절의 내용을 부정하고, 36절의 형용사 ‘유일한 자들’(μόνους)이 ‘남성’ 복수 대격이므로, 바울은 여자의 침묵을 강요한 고린도교회의 남성 예언자들을 비판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접속사 ἤ는 앞의 진술이 참됨을 증명하는 뜻을 가질 수 있는데, 바울은 여성을 포함할 때에 남성 단어으로 종종 표현한다(참고. 고전 1:2; 16:1, 15). 참고. 최영숙,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교회 여성들: 고린도전서 14:34-35 해석”, 755-56.



    52) 상호 모순된다고 보는 예는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78;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68. 김세윤의 이 입장은 고전 14:34를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후대의 첨가로 본 결과다.



    53) Garland, 1 Corinthians, 672; Wenham, “여성 안수: 왜 이렇게 분열을 일으키나”, 207; 박수암, “여성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견해”, 79;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3.



    54)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와 The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를 창간한 주역이자 Bard대학교의 B.D. Chilton, “Opening the Book: Biblical Warrants for the Ordination of Women”, Modern Churchman 20 (1977, 1-2), 34.



    55) Colby대학교의 T.R. Longstaff, “The Ordination of Women: A Biblical Perspective”, Anglican Theological Review 57 (1975, 3), 324.



    56) Garland, 1 Corinthians, 673.



    57)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35.



    58) 최영숙,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교회 여성들: 고린도전서 14:34-35 해석”, 766.



    59) 참고로 고전 14:34의 여자가 ‘복종해야하는’(혹은 ‘서로[ὑπο] 질서 가운데 행해야하는[τάσσω]’, 참고. 고전 14:32의 ‘절제/통제하다’) 대상을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교회(교회의 질서)로 보는 경우는 최영숙,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교회 여성들: 고린도전서 14:34-35 해석”, 767-68.



    60) 김상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에 관하여”, 233.



    61) 이경석, “고린도전서 14:33b-36의 진정성과 주해”, 694.



    62) Blomberg, 1 Corinthians (Grand Rapids: Zondervan, 1994), 280; ESV Study Bible, 2213.



    63) 이경석, “고린도전서 14:33b-36의 진정성과 주해”, 695, 697. 따라서 이경석은 고전 14:34-35는 여성 안수의 찬성이나 반대에 사용할 수 있는 구절이 아니라고 본다.



    64) 참고. 박윤선의 고전 14:34-36 주석과 권성수의 해석을 인용하는 이관직,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 298-99.



    65) 참고. 실로암교회 이광호, “여자목사 제도에 대한 비판적 논의”(2009년 9월 14일. 예장 브니엘총회 공청회. 브니엘교회당).



    66) 이경석, “고린도전서 14:33b-36의 진정성과 주해”, 689.



    67) Garland, 1 Corinthians, 668.



    68) Garland, 1 Corinthians, 669. 고전 14:31에 의하면, 고린도의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배 중에 질서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배워야 했다.



    69) 최갑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173; 박수암, “여성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견해”, 74. 미국 CRC의 경우, 바울 서신에 영구한 원칙의 시간-문화 제한적 적용이 많지만, 현대에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변혁적 사역(갈 3:28)이 창조 질서를 초월-회복하기에 여성 안수를 긍정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은 1990년경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Bolt, “Eschatological Hermeneutics”, 373.



    70)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5; 박수암, “여성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견해”, 63.



    71) 오클랜드대학교의 S. Smith, “Women’s Human, Ecclesial and Missionary Identity: What Insights does the Pauline Correspondence offer the Contemporary Woman?”, Mission Studies 27 (2010), 149.



    72)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88. 참고로 유대인 회당의 기도인 18축도문의 제 2, 3, 4번은 이방인, 종, 여자로 창조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73)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31.



    74) 참고로 타락 후에 주어진 창 3:16의 남편이 아내를 다스린다는 말씀은 영원한 규범인가, 아니면 타락한 본성을 가진 남편이 아내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는 일종의 저주의 선포인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Barrois, “Women and the Priestly Office according to the Scriptures”, 182.



    75)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342; 이관직,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 301.



    76) 남침례교 여신자인 D.K. Patterson, “ Why I believe Southern Baptist Churches should not ordain Women” Baptist History and Heritage 23 (1988, 3), 61. 참고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제 2 바울 서신’으로 간주하는 역사비평가들에게 그런 서신에 담긴 바울의 권면은 의미가 없다.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44.



    77) T.R. Schreiner, Galatians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0), 259.



    78) 여기에 동의하는 입장은 Schreiner, Galatians, 259를 참고하라.



    79) ESV Study Bible, 2251.



    80) 위튼대학교의 D.J. Moo, Galatians (BECNT; Grand Rapids: Baker, 2013), 255.



    81)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62.



    82) 필라델피아 10장로교(PCA) 목사인 P.G. Ryken, 1 Timothy: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y (Phillipsburg: P&R, 2007), 89.



    83)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4; 최갑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176.



    84) Ryken, 1 Timothy, 93.



    85)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336.



    86) 그린빌장교회신학교의 G.W. Knight III, The Pastoral Epistle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92), 139.



    87) Ryken, 1 Timothy, 90.



    88) 참고, 일본 교토의 선교사 P.B. Payne, “Libertarian Women in Ephesus”, Trinity Journal 2 (1981), 169-77.



    89) 선교단체 ‘중보의 용사들’ 대표인 C. Jacobs, 『여자여, 내가 너를 불러 세웠노라』 (Women of Destiny, 이숙희 역,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9), 282.



    90) Contra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51-52, 56. 조영엽은 심지어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와 생리 중의 심리적인 기복도 여성 안수에 적절치 않은 요인으로 본다.



    91) ESV Study Bible, 2328;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58.



    92) 참고. 계명대의 이혜정,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교단정체성 연구”, 『종교연구』 58 (2010), 210.



    93) 캄펀신학대학의 R. van Houwelingen,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Instruction about Women in 1 Timothy 2:12-15”, Särospataki Füzetek 19 (2015, 4), 68; Snodgrass, “A Case for the Unrestricted Ministry of Women”, 28-29.



    94)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당하던 성과 민족에 기초한 차별을 없애주셨다는 빛에서 딤후 2:11-15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흑인 여성학자인 D.C. Inyamah, “Contrasting Perspectives on the Role of the Feminine in Ministry and Leadership Roles in John 4 and 1 Timothy 2:11-15”, Journal of Religious Thought 60-63 (2008-2010), 104-105.



    95) 남동침례신학교의 A.J. Köstenberger, “Ascertaining Women’s God-Ordained Roles: An Interpretation of 1 Timothy 2:15”,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7 (1997), 142-44.



    96) ESV Study Bible, 2328.



    97) 참고. 이광호, “여자목사 제도에 대한 비판적 논의.”



    98)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68.



    99) ESV Study Bible, 2328.



    100) 송영목, 『신약주석』 (서울: 쿰란출판사, 2011), 1024.



    101) 시애틀의 메시아루터교회의 E. Lassman, “1 Timothy 3:1-7 and Titus 1:5-9 and the Ordination of Women”,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56 (1992, 4), 291.



    102) 조영엽, 『여성안수, 성경적인가?』, 70. 참고로 교부들은 ‘한 아내의 남편’(딤전 3:2; 딘 1:6)을 한 번만 결혼한 사람으로 주로 이해하여, 재혼한 사람(digamist)을 감독으로 안수하지 말라고 이해했다(참고. NRSV: “married only once”). 하지만 적법한 이혼의 경우에 재혼은 허용된다(마 19:9). 참고. Knight III, The Pastoral Epistles, 158.



    103) Lassman, “1 Timothy 3:1-7 and Titus 1:5-9 and the Ordination of Women”, 293. 더불어Lassman에 의하면, 딤전 3:1의 ‘미쁘다 이 말이여’는 예수님이 구원하시러 세상이 들어오신 것을 언급하는 1:15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는 권면인 4:9에도 나타난다. 이 세 구절은 시간을 초월한 진리를 강조하는 신뢰할만한 말씀이다.



    104) 세인트 앤드류스대학교 명예 강사 및 UBS 성경번역 서비서실의 책임자인 P.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06), 266.



    105) Ryken, 1 Timothy, 133; Knight III, The Pastoral Epistles, 172; 고든-콘웰신학교의 W.D. Mounce, Pastoral Epistles (WBC; Waco: Word, 2000), 204;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340.



    106)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65.



    107)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7.



    108) Wenham, “여성 안수: 왜 이렇게 분열을 일으키나”, 206



    109)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311. Contra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105;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87; 조기연, “여성안수: 찬성과 반대”, 7.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약은 만인제사장 시대이므로 ‘평신도 목회’도 가능하다고 보는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6; Watson, “The Mutual Recognition of Ordained Ministries”, 69.



    110) Contra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61.



    111) Contra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88. 참고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것(막 14:3)을 여성 안수의 근거로 제시하는 경우는 P. Anderson, “Mark 14:3-9 and the Ordination of Women”, Currents in Theology and Mission 22 (1995, 6), 453.



    112) 참고로 엡 5:24-25는 아내가 남편에 복종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남편은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라고 보는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81. 더 나아가 Ford는 딛 2:3의 ‘늙은 여자’를 가르치는 여장로로 본다.



    113) 임경근,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여자 직분 문제와 한국 교회의 과제”, 63.



    114) 심창섭, “여성 안수에 대한 소고”, 196.



    115) 행 1:21에서 가롯 유다 대신에 사도를 보충할 때 조건 중 하나는 남자(ἀνήρ)였다. 참고로 눅 10:1의 제자 70명에 여성이 포함되었다는 주장은 Ford, “Biblical Material Relevant to the Ordination of Women”, 673.



    116) 예를 들어, 미국 가톨릭대학교 박사과정의 A.A. Hutchinson, “Women and Ordination: Introduction to the Biblical Context”, Dialogue 14 (1981, 4), 65.



    117) 페미니스트는 남녀의 역할 구분을 타락 이후의 죄성의 결과로 보면서, 목회적 은사와 소명을 여성 안수의 중요 요소들로 간주한다. Rosenhäger and Stephens, 『함께 걷자, 나의 자매여』, 116, 118, 195.



    118) 더불어 구원계시사적으로 볼 때, 여성 안수를 다룰 때, 바울 서신이 기록될 당시의 신구약 중첩기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바울 당시에 구약의 남성 중심적 제사장 제도가 돌 성전을 중심으로 존속되고 있었지만 성령 강림이라는 종말 사건으로 인해 점차 쇠하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을 취하면, 여성 안수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새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구약의 중첩과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이 여성 안수의 정당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제기가 가능하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30여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여전히 신구약 중첩기간 동안에 기록된 목회서신이 밝히는 신약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 구분은 사도시대로 한정되고 오늘날은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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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9.11.21 19:55
    아래는 최갑종 교수의 여성안수 찬성 글 (브니엘총회 교단이 오래 전에 개최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최갑종(찬성)의 글입니다. 이광호 목사의 반대의 글과 함께 발표되었습니다.

    바울과 여성

    -여성 안수문제를 중심으로-

    최갑종(백석대학교 총장, 바울신학전공)


    1. 서론

    기독교가 태동된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사회는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이 팽배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였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종교,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남성이 주도하였으며, 여성들은 이들 영역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여성들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남성들보다 하위급에 속한 자로 간주되어 성차별이 당연시되었으며, 남성이 있는 대중 앞에 나설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거리를 나설 때는 얼굴조차 함부로 노출하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운동이 시작되면서 남성위주의 헬라-로마-유대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여성들을 찾아갔고, 여성들을 만났으며, 여성들에게 이적을 베풀었고, 여성의 질병을 고쳐주셨으며, 그들을 자신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시켰으며, 그들을 부활의 첫 증인들로 삼았다. 예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운동을 헬라-로마사회에까지 확장시킨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이 있을 수 없다”(갈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면서, 당시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을 초기 기독교운동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였으며, 여성들을 교회의 지도자나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 여성에 대한 예수와 바울의 자세와 가르침을 그 당대사회구조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놀랍고 혁명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는 초기 시절부터 당대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를 뛰어 넘어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인격으로 간주하였으며, 여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구원의 은총과 은사와 교회의 제반사역에 있어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남성들과 함께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으며,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말씀을 가르쳤다. 하지만,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구조가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어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차별의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시킴으로 인해 가정과 교회에 무질서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와 선교의 장애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경우에는 그들의 자유가 일시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고전 14:34-35; 딤전 2:11-15). 그렇지만 남녀의 동등한 인격과 역할을 지향하고 있는 기독교복음자체가 축소되거나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복음은 가는 곳마다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기인식과 자유와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오늘의 평등과 민주사회가 형성되기까지 기독교의 지대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사회만 하더라도 일백여년 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근세기 한국 기독교지도자들은, 당시 유교의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선교사들과 함께 여성을 교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여성을 교육시키고 개화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이화학당, 호수돈 여고, 정신여고, 배재학당 등은 여성 교육과 여성 지도자 배출의 산실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남녀평등과 여성들의 인권이 법으로 보장되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교육, 예술 등 사회전반에 걸쳐 여성들의 진출과 활동은 과히 놀랄만하다. 여성과학자, 교수, 정치인, 기업인, 기술자, 교사, 군인, 의사, 법조인 등 남성이 관여하는 모든 영역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여성 장관, 여성 국회의원은 물론,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초기의 한국교회가, 주후 1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의 인권과 자유와 역할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사회보다 항상 앞장을 섰었던 것에 반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 한국사회를 선도해가고 있기보다도, 오히려 사회보다 뒤떨어져 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예를 들면, 여성목사와 장로직분)를 비롯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문제이다.

    여성의 성직 안수문제는 이미 지난 반세기 이후부터 한국 기독교 안에서 가장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어떤 교단 교회들은 이 기간 동안 교단의 금기사항으로 간주되어 왔던 여성안수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한 반면에, 어떤 교단 교회들은 여성안수문제를 교단의 신학 및 정체성과 결부시켜 계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왜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문제를 두고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안수문제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더욱 확대하려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성의 안수 문제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고 하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까지도, 똑같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초대 기독교 공동체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이든, 찬성하는 교단이든,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다 같이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의 신학적 근거를 주로 바울서신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수들은 고린도전서 11:3의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가리키는 본문, 고린도전서 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가르침, 디모데전서 2:12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가르침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는 교수들은, 갈라디아서 3:28의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하나이라는 가르침, 고린도전서 11:1-12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가르침, 바울이 자신의 선교와 목회현장에 브리스길라, 뵈뵈, 순두게 등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참여시킨 점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동일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을 두고 이처럼 서로 상반된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 자체가 이중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동일한 공동체나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가? 만일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주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도 바울의 교회 안에서 여성 위치와 역할에 관한 주요 가르침을 헬라-로마-유대사회의 문맥과 관련하여 살펴봄으로써,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토론되어 온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 문제, 특별히 여성의 성직안수문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있다.

    어떠한 연구도 전제와 방법론 없이 시작할 수는 없다. 여성의 안수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접근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둘째, 바울의 서신들은,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았던 저자가, 그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독특하고 개별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을 향해 예배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한 교훈이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한 교훈이나,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아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부탁이나, 빌레몬에게 “나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라”는 부탁 등은,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살던 사람들이나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들 본문들은 “서로 사랑하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는 본문처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직접 적용되어야 하는 규범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셋째, 바울 서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해석자가 자신의 어떤 주장을 전제한 다음, 특정한 본문에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가서 그 본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본문으로부터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본래 의도나 메시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특정한 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 본문의 상황적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2. 바울의 콘텍스트(Context)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 사회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신약성경,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에 살고 있는 헬라-로마-유대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초대 기독교와 신약성경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수와 바울도 유대인으로 출생하여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문화의 틀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였으며, 동일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예수와 바울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1) 헬라 사회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 있어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자유롭게 관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여성은 이와 같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주로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들이 공회에 참석하여 투표를 하거나 말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주전 4세기의 아덴에서 여자들은 자신의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했다. 심지어 처녀는 결혼하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만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 그는 바로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는 경우, 그 여자는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되어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리고 결혼 한 후에는 자기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일체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정숙한 여자들의 경우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서든 집을 나설 때 따라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이 참석한 파티장소에 동행하여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다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면서 생활하여야 했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여야 했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여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서도 외부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으로 불리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주전 4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폴로도루스(Apollodorus)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그 당시 사회 구조가 얼마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남성]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젊은 여인들과, 매일 매일 몸을 돌보아 줄 하녀들과, 그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가사 일을 맡길 수 있는 아내를 두고 있다.” 일종의 고급 창녀로 불리어질 수 있는 ‘젊은 여인들’은 남자들의 저녁 파티에 참석하여 남자들을 시중들고 성적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이러한 파티에 아내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하녀들은 집안에서 주인 남자와 주인 여자를 시중들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가사 일을 담당하였으며, 그리고 아내들은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남편의 부재중에도 집안에서 가사 일을 전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체 말을 하지 않아야만 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혹은 여성]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자, 특별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고 있을 경우,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여자나 창녀로 취급될 수 있었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여자가 밖에서 묻거나 말을 하고 싶을 경우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하여 말을 하여야 하며, 직접 밖에서 말을 하는 경우 그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것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2세기 초엽에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은 거리를 나설 때 얼굴은 물론 몸 전체를 가리고 나서는 여인들을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정숙한 여인으로 칭찬을 하고 있다. 이처럼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인들의 언행은 자신들은 물론 자기 남편들의 수치/체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게도니야의 여성들은, 우리가 사도행전 16:14-15과 빌립보서 4:2-3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렸으며, 집안일은 물론 장사를 포함하여 시의 관리나 중요한 민중제사와 국가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종들이나 여자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들을 대신하여 외부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기 남편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난한 농부들의 아내들에게도 이와 같은 규범들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자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자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다.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거의 사라진다. 여 사제들은 남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모든 여성들은,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기도와 제사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 사제들은 국가적인 제사를 직접 집전하였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하였다. 그래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가운데 종교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자들도 있었다.



    (2) 로마 사회

    고대 로마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은 헬라사회의 여성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사는 여성들은 자기 남편들과 함께 극장과 서커스단에 갈 수도 있었고, 남편들과 함께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여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있었고, 서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자유롭게 시장에 갈 수도 있었고, 신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신전을 찾아가거나 야외공연장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교육받은 상류층의 여인들은 자기 가족들이 아닌 남자들과 지적인 담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 밖에 부동산을 세를 주거나 사고팔기도 하였고, 시(市)의 여사제나 고급관리인이 될 수도 있었고, 유력한 정치인의 후원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법정에 나가 자신들에 관한 문제를 청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전통과 관습을 따라야만 하는 대다수의 일반 여성들은 헬라 사회의 여성들처럼 남성에게 의존적이었으며, 그들의 활동도 남성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들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나 시민권자가 될 수 없었다.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덕목 중의 하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었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 대한 복종이었다. 따라서 로마 사회의 여성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아버지와 남편이 사망하는 것도 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상실로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자기 딸의 결혼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고, 남편은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전적인 헬라사회의 여인들처럼 로마사회에서도 정숙한 여자들은 집안에서 가사 일을 하고, 남편의 재산과 하인들을 관리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헬라의 여성들처럼 집을 나설 때는 자신들의 정숙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설사 여인들 중에 사회적인 활동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주로 남편들의 힘이나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때때로 여자들도 시(市)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은 할 수 있었지만, 여자들의 자리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도 제일 마지막에 배정되었다. 물론 시골의 여인들이나 여 노예들은 헬라의 경우처럼 남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헬라의 여성들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지 못했다. 사실상 종교의 영역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그들이 시민사회에서의 영역에서 누렸던 자유와 비교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제한을 받았다. 헬라의 여성들과 달리 로마의 여성들은 종교적 영역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여인들은, 심지어 여 사제들도, 동물들을 도살하여 드리는 희생제사에의 참여가 배제되었다. 간혹 모든 여성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종교축제들이 열리곤 했지만 여성들의 축제에서는 짐승의 희생제사가 배제되었다. 그러나 헬라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로마의 종교에서도 헬라종교에서처럼 여 사제들과 여신들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3) 유대 사회

    바울 당대 유대 여인들도 헬라-로마의 여인들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헬라 여인들처럼 유대 여성들이 철저히 가정 일에만 매여 있지는 않았지만, 로마 여인들만큼 자유를 누리지는 못했다. 마카비 문서(4 Macc 18:6-7)에 따르면, 정숙한 유대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자신이 결혼하기 전까지 집 외부 출입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순수한 처녀의 상태로 있었음을 깨우쳐 주어야만 했다. 헬라-로마사회에서처럼 유대 사회에서도 자신의 아내가 대중 앞에 얼굴을 노출하였을 경우 그 남편은 그 여자와 이혼하여야만 했다. 유대 여인들은, 집안에서는 안주인 역할을 하였지만,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었으며, 율법 공부와 하루 세 번씩의 공식적인 기도와 정결 의무도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을 뿐, 여자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유대 여인들도 헬라-로마의 여인들처럼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의무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출산하여 양육하고 남편을 대신해서 가사 일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가 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여 매일의 기도에서 이 일을 하나님께 감사하곤 하였다. 유대 여인들이 집안에서 담당하여야 할 가사 일은 밀을 갈고, 요리를 하고, 빨래와 의복을 만드는 일 등이었다. 이 밖에 여인들은 남편을 위해 잠자리를 준비하여야 하며, 남편에게 매력적이어야만 했다. 이와 비례해서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 음식과 의복을 공급하여야만 했고, 규칙적인 부부생활의 의무를 감당하여야만 했다.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 대체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존중되었지만, 그러나 남자들은 결혼생활 중에도 자신의 아내 이외의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나, 여자들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일세기의 헬라-로마 사회에서 이혼의 권리는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주어졌으나 유대 사회에서는 남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주전 180년 경 시락에 의해 기록된 지혜서에 따르면, 당대 유대사회에서 여인들은 두 종류로, (1) 착하고, 복종적이고, 겸손하고, 금욕적인 여성과 (2) 악하고, 비복종적이고, 부끄러움이 없고,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여인으로 나누어졌다(9:3-4, 6-7). 아내 역시 두 종류로, 즉 착한 아내와 악한 여자로 나누어졌다. 착한 아내는 이해심이 깊고, 조용하고, 금욕적이고, 겸손하고, 어질고, 집안일을 잘 돌보고, 자기 남편을 존경하고, 행복하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지혜로운 자로 나타나는 여인이다(25:8; 26:1-4, 13-18, 26). 이런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복 받은 자이며, “최상의 소유물”을 가진 자이다. 반면에 사악한 여인을 만난 자는 마치 전갈을 만난 자와 같다(26:7). 이런 여인에게는 권세를 주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한 멀리하여야 한다(25:26). 죄가 여자[이브]로부터 들어왔고, 여자로부터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여자는 본성적으로 악에 빠질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시락서는 아내들을 둘로 나눌 뿐만 아니라 또한 딸들도 둘로 나눈다: 영리하고 겸손한 딸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에게 보화가 되지만(22:4), 거만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딸은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수치가 된다(22:5; 42:11). 이처럼 시락서에 따르면, 착한 아내와 영리한 딸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남자의 권위를 도전하는 자가 아니라, 항상 모든 면에서 남자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이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복종은, 근본적으로 남자가 여자 위에 있다는 유대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울 당대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유대인 철학자이며, 구약 성경을 헬라 철학, 특별히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사상의 범주로 해석한 사람인 필로도, 헬라-로마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여성관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사회의 사상적, 종교적 체계의 바탕을 제공하였던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적인 사상 구조에 따라,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자로 분류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덜 지성적이며, 남자보다 더 쉽게 유혹을 받으며, 도덕적으로도 남자보다 열등하다. 따라서 여자는 가사 일에, 반면에 남자는 사회나 국가 일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낮은 영역에 속한 자이며, 남자는 여자보다 더 높은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아내는 마땅히 그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하지만, 필로도 플라톤의 사상 구조에 따라, 여자가 특별한 경우에 남자와 같이 됨으로써 자신의 열등성을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자가 더 높은 영역, 곧 남자의 영역에 속하기 위하여서는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하여야만 한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성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난 다음에도 남아서 기도에 전념하여야 하며, 감각적이고 육적인 여자의 영역을 벗어나서 영적인 영역인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힘써야 한다. 이처럼 필로는 전형적인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상구조에 따라 높고, 적극적이고, 이성적이고, 영적인 높은 영역과 낮고, 소극적이고 육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나누어 전자는 남자의 영역으로, 반면에 후자는 여자의 영역으로 분류한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여자의 역할은 더 제한되었다. 여성들에게는 결코 사제직이 허용되지 않았다. 쿰란에서 발견된 성전문서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여인들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까지 제한을 받아 여인의 뜰 이상을 넘어갈 수 없었다. 2세기의 자료에 따르면(미쉬나, 탈무드), 회당 예배에서 여자들은 리더가 될 수 없었으며,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일도 금지되었다. 회당예배에서 일반 여성들의 역할은 그저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었다. 물론 헬라-로마 사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디아스포라 여성들 중에 회당 운영의 재정적인 후원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하여 가끔 성경봉독이나 권면도 할 수 있었다.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이런 여성들을 가리켜, “장로,” “회당의 어머니,” “리더,” “회당의 수장”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팔레스틴 본토의 여성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허용되지 않았다.



    (4)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

    고대-헬라-로마 유대사회로부터 복음서가 보여주고 있는 예수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면 여성의 위치와 역할과 관련하여 일종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태도를 보면, 당시 유대사회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가르침과는 놀랄만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당대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에게는 토오라의 공개적인 가르침과 선포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예수는 각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선포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도래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고 선언하시면서, 여성을 단순히 성적 대상인 아닌 남자와 동등한 인격으로 보아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소외와 멸시를 받고 있던 세리와 죄인들과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에게 주어질 것을 선언하셨다(마 11:19; 눅 7:34-50).

    예수는 자기 당대 유대 랍비들과 달리 남성들과 똑같이 여성들을 찾아갔고,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를 하였고, 그들을 대상으로 이적과 치유를 베풀었다(막 12:40; 13:17). 예수 당대 사회에서 남자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자를 만나거나 대화를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예수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예수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각각 5천명과 4천명을 먹인 이적에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시켰으며(마 14:21; 15:38),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과(눅 7:11-17), 회당장의 딸(막 5:35-43)을 살리셨으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셨다(막 5:25-34). 이방여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셨다(막 7:24-30). 메시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을 처녀들로 묘사할 만큼 예수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마 25:1-13). 예수는 이혼문제에 있어서 남녀의 동등권을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당시 여성에게 불리했던 이혼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천명하셨다(막 10:11-12; 마 19:9).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처형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을 구하셨다(요 8:3-11).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초청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마리아에게 직접 말씀을 가르쳤고(눅 10:38-42), 그들의 오빠가 병들어 죽었을 때 직접 무덤까지 찾아가서 다시 살리셨다(요 11:1-44). 그리고 자신의 발에 기름을 부은 마리아의 봉사를 비판하는 가룟 유다를 향해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옹호하셨으며(요12:1-8),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 헌금을 그 어떤 헌금보다도 기한 것으로 칭찬하셨다(막 12:41-44).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치 않는 사마리아 여인을 직접 만나 가르쳤고, 그 사마리아 여인을 사마리아선교의 증인으로 삼았다(요 4:39-42). 예수는 여성들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제자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 여러 여인들을 자신의 선교사역에 동참시켰으며(눅 8:2-3), 이들을 12제자보다 넓은 제자의 범주에는 포함시켰다(마 12:49-50). 사실상 12제자와 함께 예수님을 따랐던 이와 같은 여인들의 헌신 봉사가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의 순회선교 사역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남자들로 구성된 12제자들은 예수가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배반하고 모두 도망갔지만, 이들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를 따라가서 예수 곁을 지켰다(요 18:15-18; 25-27; 19:25-27).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자도 이들 여인들이었고(막 14:3-9), 예수의 처형현장을 지켰던 자들도 이들 여성들이었고(요 19:25-27), 예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자들도 여성들이었고(막 15:47; 16:1), 그리고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알린 자들도 이들 여성들이었다(막 16:5-8; 마 28:8-9). 당대 유대사회에서 여성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실로 여성을 자신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눅 24:1-10). 바로 이 여성들이 예수의 승천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행 1:14). 우리가 예수를 당시 유대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한 사회혁명가로 볼 수는 없지만, 여성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인 자세와 교훈은 예수 당대 그 어떤 유대 랍비들의 교훈과 언행으로부터도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예수의 여성에 대한 적극적인 교훈과 언행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3. 바울의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들

    예수 이후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철저한 바리새파 출신의 유대교 학자로서 초기 기독교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한 박해자였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회심하여 기독교복음을 열심히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목회하다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으며,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해 지중해 연안의 각 지역을 다니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들 교회에 목회적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들이 신약성경의 중요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알기 위해서는 여성과 관련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 반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안수 논의는, 주로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된 바울의 가르침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은 자기 당대 주후 1세기의 가부장적 사회 문화 구조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과감하게 남성의 영역에 까지 확대한 일종의 여성 해방론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은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 당대의 헬라-로마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와 유대교의 유산에 따라 교회와 가정은 물론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여전히 여성의 위치와 활동영역을 제한하고 여성을 남성에게 복종시킨 자인가? 동일한 바울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왜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제시되고 있는가?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반된 주장이 제시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바울은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들을 접근하고 해석하는 학자들의 선입견과 해석의 차이 때문인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바울 서신을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다양하다. 어떤 교훈들은 마치 상반되거나 서로 모순과 긴장을 가지고 있는 교훈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35과 디모데전서 2:10,11 등에서는 교회에서 여자들이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강하게 금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1:3-10에서 바울은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머리됨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5:22-24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7:1-7에서는 부부생활의 동등성을, 고린도전서 11:11-12, 갈라디아서 3:28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동등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와 목회사역에 나타나 있는 여러 여성 사역자들, 이를테면, 바울 자신이 자기의 동역자로 부른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의 브리스가(롬 16:3), 겐거리아교회의 목회자로 간주되는 뵈뵈(롬16:1), 빌립보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의 멍에를 함께 진 유오디아와 순두게(빌 4:2-3),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도자 눔바(골 4:15)등은, 바울이 이미 그의 선교와 목회사역에 여성사역자들을 적극적으로 동참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롬 16:1-12). 아마도 당시 남성이 여성을 접근하기가 힘든 사회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이 선교사역을 하면서 이들 여성사역자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바울을 대신하여 남녀로 구성된 가정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간 지도자역할을 감당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바울 서신에 나타나 있는 이와 같은 다양한 교훈들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전자의 교훈만을 보고 후자의 교훈을 보지 못한다면, 바울을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여성관을 강하게 견지한 자로 볼 수 있는 반면에, 또 반대로 후자만을 보고 전자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바울을 주후 1세기의 여성해방론자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이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성 있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특정한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아 바울은 이렇다, 저렇다고 쉽게 단정을 내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중에 누가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의 본문에 근거하여,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임직 등을 포함하여 여성의 역할을 가급적 제한하려고 시도하려 한다면, 그는 바울이 그 어떤 서신에서보다도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체계적으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로마서에서는 왜 그와 같은 교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지를,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여성에 대한 그와 같은 강한 부정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지를, 왜 바울이 로마서 16장과 갈라디아서 3:28, 고린도전서 7장과 11장 10-11에서 주안에서 남녀의 동등성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반대로 누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임직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여성의 역할을 확대하려고 한다면, 그는 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서 교회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본문들이 주어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황은 물론 이러한 본문들이 위치하고 있는 전후 문맥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요청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왜 디모데전서 2장에서, 그와 같은 교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본문을 오늘 우리교회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논란이 되고 있는 몇몇 핵심적인 본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4. 본문 주석

    여성의 안수문제와 관련해서 바울 서신에서 주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본문은, 여성 안수반대자들이 성경적 근거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1:2-16, 고린도전서 14:34-35, 디모데전서 2:8-15과, 여성 안수 지지자들이 성경적 근거로 삼는 갈라디아서 3:28, 고린도전서 11:11-12과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여성사역자들에 관한 본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 본문에 대한 간략한 주석을 먼저 제시하고자 한다.



    (1) 고린도전서 11:2-16

    고린도전서 11:2-16의 본문은 공 예배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차이가 있다거나, 교회 안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 계급에 속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은 남자나 여자가 예배에 참여하여 다 같이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지만(14:23, 26, 29절 참조)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당대 사회나 문화에 비추어 수치스럽지 않는 적절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참석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즉 여자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긴 머리를, 반면에 남자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이 남자는 여자의 지배자(“ruler”)라는 것을 뜻하는지, 남자는 여자의 근원(“source”)임을 뜻하는지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 안수 반대자들은 전자를, 여성 안수 지지자들은 후자를 지지하고 있지만, 본문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종속관계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머리”라는 말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남녀가 다 같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주안에서 남자나 여자는 서로 동등하다는 것과, 다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근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로부터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우선권이나 지배권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바울이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서 남녀가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여자 교우들이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 정숙한 여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헤어스타일까지도 포기하고, 남자와 같은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져 여자의 신분을 떠나 남성화함으로써, 예배의 정숙성과 질서를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 스타일, 복장문제 등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전체가 지역사회로부터 부끄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공예배시에 남자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에 참여하려고 하였는가?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기 전까지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의 이원론적인 여성관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당시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 남성들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한 신분을 벗어나서 남성처럼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영적인 신분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플라톤의 사상도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고린도 여성들 중에 신전에 헌신한 여자들은 남성화된 것으로 간주되어, 남자들처럼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쓰지 않는 관습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다수(多數)를 접하고 있었던 이들 여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인 차이도, 종과 자유인의 신분상의 차이도 없이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다는 자유의 복음을 받았을 때(갈 3:28; 4:4-7; 고전 12:13; 고후 5:17), 그리고 그 복음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살고 있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 구조를 뛰어넘어 모든 면에서 남자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통해 헬라 여인들의 최고 이상인 남성과 같은 영적인 존재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공예배시에 여성들의 표시인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을 거부하고, 남자들과 꼭 같이 짧은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와 예언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여성들이 바울의 복음과 성령 체험을 헬라의 플라톤적 이원론의 구조에 따라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려 할 때, 그래서 그들의 행동이 당시의 사회구조나 문화에서 부끄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16을 통해 이를 시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고린도 여성 교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행동 배후에 있는 동기일 것이다. 즉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여 지켜져야 할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주신 여자의 신분 그 자체를 외면하고 남자와 같이 되려고 하는 비 복음적인 동기와 그로 인한 교회 공동체의 수치와 선교장애 때문일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4:34-35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35의 핵심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성경구절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안수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데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2004년 『목회와 신학』지에 여성안수문제와 관련된 글이 여러 차례에 걸쳐 실렸었는데, 고린도전서 14:34-35의 해석문제는 늘 논쟁의 한 축을 차지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확대와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미국 풀러 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는 같은 책 5월호에 실린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pp. 56-71)와 11월호에 실린 “서창원 목사의 ‘여성안수 허용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pp. 186-199)에서 사본학적인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34-35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아킬레스건을 피해갔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인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들을 볼 때 그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인 증거들은 34-35이 본문의 진정성(眞正性)을 옹호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무런 조건을 제시함 없이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시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뿐만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체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이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또한 이 구절로부터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인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아서도 아니 된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선을 긋거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조건 없이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이 구절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여 성도들, 특별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보고자 한다. 바울이 여기서 여성 일반 전체를 두고 말하고 있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로마-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영역은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28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이와 같은 바울의 복음은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사회와 가정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고, 부부생활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을 때(고전 7:2-6), 그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여의 차이는 물론 결혼과 부부생활까지 거부하고,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하여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꼭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즉 그들에 의해 가정과 교회에서, 특별히 가정 교회의 공예배 때에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바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고,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34-35의 본문을, 바울이 모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떠날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규범적인 명령으로 주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머리 문제나 입맞춤의 문제처럼 특수한 문화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교회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 몇몇 기혼 여 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34-35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하는 14:26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예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아무리 예배시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교회 회중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그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할 때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으며(14:27-28),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그는 잠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14:30). 그런 다음 그 구체적인 실례로써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하여야 할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이 14:34-35에서 교회에서 여 성도들, 특별히 결혼한 여 성도들은 공예배시에 잠잠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여성들은 자신들의 성령 체험을 통해서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교인들이 교회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이러한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 성도들이 전혀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바울이 마치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무조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14:35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부터,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 성도들이라는 것과, 이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놓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것을, 교회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다 같이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하여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아마도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 혹은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이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여 성도들이 제기한 질문은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물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도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여야 할 것은 예배 중에, 왜 남자들이 아닌, 여인들이 질문을 제기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점을 보아, 우리는 적어도 이들 여교우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여인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유대여인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되어 있었다. 유대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의 교육도 일반적으로 여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고대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오늘 현대사회의 여성들과 달리 남자들에 비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 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그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자신들의 남편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여 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는 가정에 돌아가서 자신들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서 볼 때, 교회 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만큼 자신은 물론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하여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여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추어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한편으로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의 동등성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신자들이 살고 있는 당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는, 그래서 가정과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될 때는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안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3) 디모데전서 2:12-15

    바울은 디모데전서 2:12-15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12절의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의 정확한 문법적인 의미는 바울이 언제 어디서든 항구적으로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여성 일반 전체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정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기혼여성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여성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 “구내”가 일반적으로 기혼여성을 가리키고 있으며(딛 1:6; 딤전 3:2,12; 5:19),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혼여성에게 직접 관련된 해산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왜 에베소교회의 기혼여성들에게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울 것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가? 본문에 대한 일종의 거울독법(Mirror-Reading)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서처럼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에게도 어떤 문제들이 있었으며, 그래서 바울이 이와 같은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에게 있었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임을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여 성도들로 하여금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도록 할 것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에베소교회의 여성들 가운데 거짓된 교훈에 빠져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를 잘 못 가르치려고 하거나 남자를 주관하려는 자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에 거짓된 교훈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타나고 있고(딤전 1:3-7, 19-20; 4:1-3; 6:3-5,20), 그리고 여자에 대한 교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도행전 19:28-37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에베소 지역의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여신 아데미 제식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에베소교회의 기혼 여성들이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여자는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울 것과 남자를 가르치는 일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사실이, 여자가 남자 일반 전체에게 일절 순종하여야 하는 것과 남자를 일체 가르치거나 주관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결혼한 여성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편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교훈의 근거로서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를 실례로 들고, 해산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직접적인 대상이 일반여성 전체나 일반남성 전체를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결혼한 여성, 혹은 과부가 된 여성이, 마치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그릇되게 아담을 인도한 것처럼, 잘못된 교훈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가르치려고 하거나 주관하려고 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바울이 여기서 여자들은 남자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경우에서처럼,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남자를 가르치고 지도한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 중에, 고린도교회의 여 성도들처럼, 복음이 가져다 준 자유를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운 부부관계의 질서까지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자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과 교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났고, 급기야 이 문제는 교회의 당면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바울이 볼 때 이들 여 성도들이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남편이나 다른 남자들을 잘못 가르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기 남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남편보다 이해력과 판단력이 더 정확하였으며, 그래서 선한 목적으로 자기 남편이나 다른 남자의 이해를 도와주려고 시도하였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바울이 이들의 행동을 잘못된 행동으로 금지하였을까? 바울이 12절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한 다음, 13절 이하에서 이유 접속사와 함께 구약 창세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담이 아닌 여자 이브가 꾀임을 받고 죄에 빠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당시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이, 마치 이브가 아담을 가르칠 위치와 능력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먼저 유혹을 받아 아담을 죄에 빠지게 한 것처럼,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가르칠 위치와 능력도 받지 못했으면서도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본문이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 중에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교육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그릇된 길로 오도하려고 하는 여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디모데전서 2:12-15의 본문을 에베소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여 성도들에게도 바울이 그와 꼭 같이 적용을 시켜서,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할 것이다.



    (4) 갈라디아서 3:28

    갈라디아 3:28은 갈라디아서 3장의 결론적인 구절인 동시에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를 천명하는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바울 당대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세 가지 장벽, 곧 인종적, 신분적, 성적(性的) 장벽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복음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온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해소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동등권을 회복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옛 사회나 문화의 구조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의 구조(갈 6:15, 고후 5:17)에서 서로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구절이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의 관계를 포함하여 남녀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져다주는 본문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구원문제에 있어서 바울이 인종적, 신분적, 성적 장벽과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물론 구원문제가 이 본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수직적 관계에만 국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새로운 수평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영혼 구원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신분과 삶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하는 전인적(全人的)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갈라디아교회의 근본 문제는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의 삶의 정체성과 삶의 스타일인 율법, 할례, 유대인의 절기, 음식법 등을 따를 것을 요구한 데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요구를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과 장벽을 철폐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 단적인 실례가 갈라디아서 2:11-21에 나타나 있는 안디옥사건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 교회였던 안디옥교회에서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음식 먹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것을 대수롭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공중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안디옥 사건은 복음은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남녀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차원에서만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한정되지 않고, 남녀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제거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소한 음식 먹는 문제를 포함하여, 이방인에게 그 어떤 불리한 조건을 가져다주는 일체의 차별을 없애는 전반적인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여성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여하한 차별도 배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가져다주는 복음의 축복과 은사들을 남녀가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옛 언약시대에서도 복음의 축복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임이 약속되어졌으며, 그 실례로 몇몇 이방인이 이미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긴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옛 언약시대에서는 구원의 축복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오심을 통하여 새 언약 시대가 도래 한 이후 유대인에게 한정되었던 장벽이 철폐되고 모든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복음의 축복이 제시되었다(마 28:18-20; 행 1:8; 롬 1:16-17). 그리하여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었던 마지막 때, 새 시대, 새로운 창조가 실현되게 되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주심의 축복이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시대에 있어서 성령주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선물이 아니고 왕, 선지자, 제사장 등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다(민 11:17; 27:18; 삿 14:6; 삼상 11:6; 16:13; 사 42:1-2; 59:21; 61:1). 그러나 구약성경 자체가 마지막 때에 이 성령의 축복이 인종과 신분과 성의 장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요엘 2: 28-29이다: “그때에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누가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행 2:16-21). 요엘이 성령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준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누가는 사도행전 2:18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 추가하여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사실은 성령의 선물과 그 은사면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갈라디아서 3:28은 사실상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바의 성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 3:28의 근거를 갈라디아 교인들이 남녀의 차별 없이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실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갈 3:2-5; 3:13-14). 이 구절은 사실상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옛 사회나 문화의 구조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의 구조(갈 6:15, 고후 5:17)에서 서로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제거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소한 음식 먹는 문제를 포함하여, 이방인에게 그 어떤 불리한 조건을 가져다주는 일체의 차별을 없애는 전반적인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여성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여하한 차별도 배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가져다주는 복음의 축복과 은사들을 남녀가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5)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여성 사역자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16:1-2에서 그는 겐거리아교회의 일꾼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하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뵈뵈가 여성인 점은 뵈뵈를 가리켜 “우리 자매”라고 부르고 이는 점에서 분명하다. 우리말로 뵈뵈에게 붙여진 “겐거리아 교회의 일꾼”이란 호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말 “디아코노스”는 일꾼(servant), 조력자(helper), 집사(deacon), 사역자(minister)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디아코노스”라는 호칭을 “사역자”가 아닌 “집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 집사는 오늘 우리 교회에서 통용되는 집사는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일곱 집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데반, 빌립 등 일곱 집사들은, 헬라인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단순히 봉사의 직무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도직 사역도 하였다. 바울은 이 말을 자신의 호칭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전 3:5; 고후 3:6; 6:4; 11:23; 엡 3:7; 골 1:23-25). 뵈뵈가 일반인이 아닌 바울과 같은 목회자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말 성경에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가 본문에서 여성명사가 아닌 특수한 사역자를 지칭하는 남성명사로 사용된 점에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1세기 말엽에 익나티우스(Ignatius) 감독은 그의 필라델피아 서신에서 이 말을 교회의 대표자를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다(10:1; 11:1). 따라서 뵈뵈를 동일한 명칭이 붙여진 남성사역자들과 구별하여야 할 언어학적, 신학적 이유가 없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뵈뵈를 겐거리아 교회의 대표자나 목회자로 간주해도 결코 무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고대 사회에서 편지의 전달자는, 때때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발신자를 대신하여 편지의 내용까지 설명해 주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편지 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보낼 때 뵈뵈를 자신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선정하였다고 하는 것은, 뵈뵈가 로마서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 목회적 훈련을 받았거나 아니면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준비하는 특별한 사명을 맡겼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 16:3-5에서 브리스가와 그녀의 남편 아굴라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브리스가를 그녀의 남편보다 먼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브리스가가 자기 남편인 아굴라보다도 더 적극적인 혹은 더 중요한 사역을 하였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바울이 브리스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와(롬 16:20), 디도(고후 8:23)에게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브리스가가 사실상 바울과 함께 전도, 가르침, 설교, 예언 등의 복음 사역자로 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들의 가정에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는 점은(롬 16:5; 고전 16:19) 사실상 브리스가가 목회사역을 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누가가 사도행전 18:26절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로가 아블로를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도 브리스가가 복음전파 및 목회사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바울은 로마서 16:7에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 부부가 다 같이 “사도”로 호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말 개역판 성경은 “저희는 사도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이들 부부가 사도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헬라어 본문은 분명히 이들이 사도들 중에 탁월한 자들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러 영어 번역 성경도 이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들 부부를 사도로 보아야 한다는 점은 바울이 바로 이어 이들이 자신보다 먼저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아마도 그들은 12사도 반열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사도급 인물이겠다. 그들은 본래 사도들처럼 많은 교회에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여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회심 연대를 주후 32-34년경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미 예수 생전에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며,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참여한 120명의 성도들 중에 포함되었거나,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500여 성도들 중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한 사도라는 말이 열두 사도보다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행 14:4,14; 고전 12:28; 엡 4:11; 살전 2:7). 그렇다고 해서 이 사도라는 호칭은 일반 신자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복음전파 사역에 동참하는 전문적인 사역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여성인 유니아가 평신도가 아닌 사도라는 특별한 직책을 가진 자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이 구절이 여성의 안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고 하더라도, 초대교회 안에 이미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 여성 사역자가 있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바울 당대 헬라-로마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접촉하기가 힘들었던 사회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부부선교사는 때때로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5. 주석의 적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의 서신에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와 관련하여 소극적인 교훈과 적극적인 교훈 등 양면의 교훈이 있다. 그렇지만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직접적으로 부인하거나 찬성하고 있는 본문은 없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직안수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하든, 찬송하든, 그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그것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에 근거하기보다 여러 성경 구절로부터 유추해 낸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해석학적인 귀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해석학적 귀결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신약성경은 어느 쪽을 더 지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

    나는 관련된 본문의 주석에 근거하여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이 여성의 성직안수를 지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보다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여성 안수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11:2-15, 고전 14:34-36, 디모데전서 2:8-15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가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이들 교훈으로부터 바울이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을 유추해 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예배에서 이미 기도나 예언에 참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되거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고전 11:2-15, 고전 14:34-36, 딤전 2:8-15의 본문들을 여성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하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함은 물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가져오고 있는 자들에게 준 바울의 특별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들 구절들을, 예배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혹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처럼(롬 16:16; 고전 16:20절),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에 비추어 해석하여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날 적용시키려하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사실상 오늘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은 일체 중지되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여주일학교교사, 여전도사들을 일체 세우지 않아야 할 것이며, 신학교는 여신학도를 입학시키지 않아야 함은 물론, 목사 후보생을 가르쳐야 하는 여성신학교수들을 세워서도 아니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하여야 하며,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여자들은 예배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처럼, 오늘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켜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우리가 이들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서도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으로부터 예배시에 여자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으로부터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고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부터도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은, 마치 우리가 어떤 성경구절은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곡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예수의 메시야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인 관점과 함께 우리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어떤 특수한 서신의 구절들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점에서는 바울의 문제이라기보다도,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필자는 바울신학을 제시하면서 전체 바울신학을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이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의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였고, 죄로 오염되었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이전으로 복귀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6:15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 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갈라디아서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아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사실상 바울은 그의 목회와 선교사역에 있어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만 있어야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옛 창조의 관점이 아닌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은 비단 사도 바울만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저자와 계시록저자와 히브리서저자로부터도 동일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구약에서는 모든 제사직분이 남성인 제사장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제사직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남자나 여자의 구분 없이 이제 모든 사람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저자도 “우리[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계 1:5, 5:10),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다”(계 20:6)라고 말하고 있으며, 역시 베드로전서 저자도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12: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할 때도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전제하고 있다. 루터를 위시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한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 역시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새 창조세계)와 “아직”(옛 창조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때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해 있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 교회의 선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여성교우들에게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관련된 교훈과 “아직”과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가 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시하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과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28절, 고후 5:17절, 고린도전서 12:13절의 긍정적 본문에 비추어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수적 교훈이 보편적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가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의 헬라-로마-유대의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하여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앞서 나갔다고 한다면, 이미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6. 결론

    우리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지난 90년 대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로 부각되었던 여성안수문제를 취급하였다. 이 글의 목적은 여성 안수와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은 여성안수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된 우리의 연구는 바울의 서신 안에 여성과 그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양면의 교훈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들은 여성안수문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사실 바울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시기가 주후 46년에서 주후 65년까지였고, 그의 서신들도 이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다면, 바울의 교회들은 제도적으로 아직 충분하게 정착되어 있지 않은 개척교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바울 자신과 그의 교회들이 서 있었던 당시 사회문화와 구조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다. 따라서 바울 자신과 그의 교회에서 있어서 여성안수는 전혀 이슈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슈가 될 상황도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바울의 교회 안에 여성에 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안수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바울의 서신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본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자신의 주장만이 성경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주장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매도하거나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 논문이 여성의 안수문제에 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 글은, 한편으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했던 내용들이 편협 되거나 부적절한 성경해석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밝힘과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서신들은 바울의 교회 안에 여성의 사역자와 지도자를 세움을 받아 활동한 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여성안수의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적어도 타락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남자와 여자를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똑같은 사명과 책임을 주셨다(창 1:26-28; 2:18-25).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등 관계가 시작되고,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구조가 형성된 것은 어디까지나 창세기 3장 이후의 타락에 기인한다. 그럼으로 남자와 여자의 갈등과 여성의 성차별 등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죄의 문제와 함께 극복되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새 창조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단순히 창세기 1-2장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새 창조는, 비록 그 완성은 미래적이라 할지라도, 창세기 1,2장의 첫 창조보다 더 새롭고 더 우월하고, 더 완전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창조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첫 창조 안에서의 관계보다 더 새롭고, 더 우월하고, 더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첫 창조 안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완적이고, 서로 동등하였고, 서로 협력적이었다고 한다면, 새 창조 안에서는 더 그러하여야 함이 당연하다. 오늘 날 교회 안에서 직분과 그 사역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할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이미 새 창조사역의 동반자로 세워졌다. 새 창조 사역의 원천으로 보내진 성령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성령은 남자든 여자든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그를 세웠고,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 그렇다면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죄와 타락으로부터 온 모든 남녀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모든 문제를 혁명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혁명적인 방법의 동원은 오히려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깨뜨릴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의 평화와 덕에 걸림돌이 될 경우에는 참고 기다리는 자세도 필요하다. 물론 이 말이 교회가 노상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만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새 창조사역은 이미 시작되었고, 계속 확산되어야 하고, 그리고 완성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현으로서 이 새 창조사역을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여성의 성직안수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이 없는 새 창조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갑종 gabsamchoi@hotmail.com
  • ?
    dschoiword 2019.11.21 19:55
    코람데오닷컴과 최갑종의 서면인터뷰

    여성목사 안수에 대하여

    질문 1: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와 디모데전서 2:12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여성도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데 어떻게 교회에서 남녀성도들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당회를 인도하여야 하는 여성목사가 가능한가?

    답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바울의 교훈으로부터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을 유추해 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예배에서 이미 기도나 예언에 참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고전 11:5)과,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롬 16:3,7; 행 18:26)과 정면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되거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엄밀하게 말해서 고린도전서 14:34-36, 디모데전서 2:8-15의 본문들은 여성안수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이 아니다. 다만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하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함은 물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가져오고 있는 자들에게 준 바울의 특별한 교훈이다.

    우리가 이들 본문들을, “예배 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전 11:3-16)는 권면이나, 혹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롬 16:16; 고전 16:20)는 권면처럼,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에 비추어 해석하여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날 적용시키려하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사실상 오늘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은 일체 중지되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여주일학교교사, 여전도사들을 일체 세우지 않아야 할 것이며, 신학교는 여신학도를 입학시키지 않아야 함은 물론, 목사 후보생을 가르쳐야 하는 여성신학교수들을 세워서도 아니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하여야 하며,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질문 2. 구약에서 제사장은 오직 남자에게만 주어졌고, 목사는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제사장직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여성이 제사장직인 목사가 될 수 있는가?

    답변: 구약에서 선지자가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변자이라고 한다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의 대변자였다. 그들의 주된 사역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적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약의 중보자적 제사장 사역은, 마치 구약의 모든 속죄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화목적, 속죄적 죽음을 예표하였던 것처럼, 장차 이스라엘백성은 물론, 전 인류를 대변하는 대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잠정적 사역이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직을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사실상 성취되고 종결되었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시고 있으며,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히 10:19-22). 그래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가리켜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계 1:6; 5:10; 벧전 2:9).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카톨릭 교회의 사제직을 반대하여 “만인제사장직”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남성목회자만이 제사장직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질문 3. 예수 그리스도는 공사역 기간 동안 남자만을 12제자로 선발하였으며, 이들이 나중에 신약교회의 기초를 마련한 “사도들”이 되었기 때문에, 사도직을 계승하고 있는 목사는 당연히 남자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답변: 예수 그리스도가 왜 남자만을 12제자로 뽑았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신약성경은 이점과 관련하여 어느 곳에서도 명쾌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예수님 자신이 남자이므로 3년 동안 늘 함께 동고동락하며 순회전도사역을 감당하여야 할 제자 중에 여성을 포함시킬 경우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당대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성들도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처형을 당할 때 남성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지만 몇몇 여성들이 십자가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으며,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여성들이었고, 부활한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목도한 자도 여성이었고,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워진 자들도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의 목격자와 증인으로 세워진 사도직은 그 후대에 계승되지 않고, 제일 마지막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로 종결되었다(고전 15:8-9). 그럼으로 예수님 당시 사도직은 오직 남자에게만 주어졌고, 목사가 사도직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만이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한 주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질문 4. 남자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여자인 이브가 나중에 아담의 배필로 지음을 받았으며, 여자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브의 후손인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부당하지 않는가?

    답변: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이브가 아담을 통해 배필로 지음을 받은 것이 분명하고,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이브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창세기 1:26-28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똑같은 권한과 사명을 받았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이새의 아들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먼저 난 것이 필연적으로 축복의 우선권과 지배권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남자에 대한 여자의 피종속권(被從屬權)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종종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배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9:25; 출 18:4; 신 33:7,26,29). 그리고 창세기 3장에 나타나 있는 여자에 대한 뱀의 유혹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남자인 아담의 권위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유혹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타락이전에는 이브가 아담에게 종속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타락이 아담과 이브 사이에 있었던 사랑과 조화의 관계를 갈등과 불평등의 종속관계로 바꾸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이브를 가리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하였지만, 범죄한 이후에는 선악과를 먹게 된 책임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창 3:12)에게 돌렸다. 이브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남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더 많은 해산의 고통을 지게 되었다(창 3:16). 이처럼 아담과 이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평등과 갈등 및 종속관계는 하나님이 세우신 본래의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인간의 타락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갈등과 종속관계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타락의 문제가 해결될 경우 언제든지 해소될 수 있는 잠정적인 것을 뜻한다. 그럼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 여자의 차별 없이 “새로운 창조”가 되었고(고후 5:17),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차이가 없는 새 창조시대, 새 언약시대가 도래한 상황에서, 여전히 옛 창조 시대에 타락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근거로 하여 여성의 사역을 제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질문 5.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심으로써, 설사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본질과 신분에 있어서 남녀가 서로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기능에 있어서는 이미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따라서 남자에게 주어지는 목사의 역할을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답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가 되려고 하거나, 여자가 남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목사의 직분이 남자에게만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 옛 창조질서에서는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질서에서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목사의 주된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와 교회의 권징과 성찬의 집례 및 봉사와 선교와 교육 등이라고 할 때, 이들이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창조질서에 속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본질(신분)과 직능은, 나무와 열매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엄격하게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신분과 대통령의 직능이 어떻게 서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대통령의 신분이 없으면 대통령의 직능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한편으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의 신분으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떤 직능은 남자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여자의 신분을 제한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약성경은 오순절 성령이 남녀의 구분 없이 꼭 같이 주어졌고, 남녀가 꼭 같이 예언하고, 기도하고, 꼭 같이 복음전파사역에 참여하였다고 말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남녀의 직능상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 교회 밖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과학, 군사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남녀의 직능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있다. 그런데 남녀의 차별을 철폐하는데 사회보다 더 앞장을 서서 선도해 나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도 않는 성직에 있어서 남녀의 직능상의 차별을 계속 두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질문 6: 디모데전서 3:2에서 감독의 자격을 “한 아내의 남편”으로, 디도서 1:6에서는 장로의 자격을 “한 아내의 남편”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감독과 장로와 같은 성직은 초대교회에서 남자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목사와 같은 성직은 당연히 남자에게만 허락되어야 하지 않는가?

    답변: 디모데와 디도가 목회하였던 당시 사회는 모든 것을 남자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문화사회였다. 그래서 건덕상, 혹은 선교적 동기에서 디모데와 디도가 목회하였던 교회에서는 감독과 장로를 남자들에게만 허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시대의 모든 초대교회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고린도와 로마교회에서는 여성인 브리스길라가 감독이나 장로이상의 교회지도자로 있었고, 뵈뵈는 겐그리아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의 지도자였다. 더구나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감독이나 장로의 자격을 “한 아내의 남편”뿐만 아니라, 각각 자녀를 두고 있는 자로 말하고 있는데(딤 3:4; 딛 1:6), 이것이 자녀가 없는 자는 감독이나 장로가 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만일 이들 본문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자녀가 없는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 나서지 않아야하며, 오늘 날 자녀가 없는 목사와 장로는 모두 교회에서 사표를 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으로 이들 본문에 근거해서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는 것은 성경본문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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