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지켜야 하는가? (글)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켜야 하는가? 사순절을 영어로 렌트(Lent)라고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lencte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사순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40일 동안의 절기이다. 교회는 이 절기에 세례 후보자들로 하여금 세례 준비를 하게 한다.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하게 한다.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 교회의 공동체성, 인류와 사회의 죄와 악에 공동책임을 생각하게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사순절 금식 규정을 유지해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철폐했다. 금식은 ‘재의 수요일’(Ash Wendsday)과 ‘수난주간 금요일’만 하게 한다.
사순절 행사는 재를 이마에 바르는 ‘재의 수요일’ 미사로 시작한다. 인간은 한낱 재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재로 돌아가며, 재를 뒤집어 써야 하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는 상징적인 미사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게으르다. 분주한 세상사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자기를 살피하고 반성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365일 중 40일 동안이라도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슴에 검정 리본을 달고, 고난당하고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간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도 권해 볼만하다.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고 과감히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절기로 지켜봄직 하다.
칼빈파 종교개혁운동은 화가 부뤼겔의 출생지 네덜란드로 확산되었다. 네덜란드는 상당히 오랫동안 개혁교회의 요람이었다. 개혁신학이 발다란 곳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이슬람 신도가 그 나라의 종교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칼빈파는 루터파조차 괴리감을 가질 정도로 교회의 개혁에 철저했다. 교회의 절기를 폐지했다.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지 않는 까닭은 세 가지이다.
첫째, 성경이 사순절을 지키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모범적인 사례도 없다.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성경이 규정한 것만을 따라야 한다.
둘째, 인간적으로 고안한 교회절기이며, 미신적이며, 방탕을 조장하는 등 폐해가 크다.
셋째, 기독인은 매일매일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365일이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날들이다.
개혁교회, 칼빈파는 중세교회가 교회 규례로 지켜 오던 모든 절기를 폐지했다. 성탄절, 고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은 기념일로 간주한다. 기념일이지 교회규례로 정한 절기가 아니다. 주일(主日) 이외의 날을 절기로 지키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09문답은 “제2계명이 금지하는 죄들”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답한다.
“제2계명이 금지하는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 인정하는 것들이며...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고 취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명목으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케 하는 미신적 고안,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 방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절기를 고안하여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인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아래에서 산다.’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부활을 생각하며 산다. 그리스도가 구원자, 구속자이며, 우리가 그분의 대속사역으로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진실하게 믿으며, 그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정상적인 기독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 그의 부활이 주는 생명이 약동하는 삶을 산다. 사순절만 아니라 항상 그러하다. 이것이 칼빈과 청교도들 그리고 개혁교회가 사순절을 지키지 않은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 개혁교회 구성원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여러분은 정말 매일매일 십자가의 빛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과 죽음, 부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매일매일을, 365일을 지내는가?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일 년에 40일만이라도 자기를 통절하게 살피고, 반성,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를 가지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지 않은가?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 구성인 형제자매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형식적인 기독인, 명목상의 기독인들에게 생명의 빵, 하늘의 빵, 영생의 빵인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예수 복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기회로 삼으면 유익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영혼과 삶이 신앙의 정박지, 만세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가?
사순절은 그것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교회의 절기를 고안하여 사육제와 함께 방탕, 방종을 그리고 외식을 조장하는 점에서 사육제와 일맥상통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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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
누군가에겐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기도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회에 오랜 기간 동안 소속되어 있던 나에겐 매년 주어지는 미션이 하나 있었다. 40일간의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 동안 출석부에 40개의 도장을 받는 것. 그 특별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면 40개의 도장을 받은 사람들에겐 예배시간 사람들 앞에 나아가 꽤나 컸던 상품과 함께 모든 이들이 우러러 바라보는 것 같은 영광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상품을 받기 위해서든, 남들에게 40일간의 특별 새벽기도회를 완료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든, 하나님 앞에 특별히 새벽의 시간 경건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보내기 위함이든 이 기도회는 거의 전교인 행사 수준의 기도회 기간이다.
첫 일주일간은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새벽 발걸음을 교회로 옮긴다. 그 후 한주가 지나면 처음 인원의 사분의 일 이상이 나오지 않기 시작한다. 그 후 또 한주가 지나면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줄어든다. 그 당시 교회에서 나름 ‘믿음이 좋은 자매’로 인정을 받고 있던 나는 단 하루라도 새벽 기도회를 빠짐으로 인해 출석 도장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나갔다.
그 당시 옆에 있던 두 청년이 나눴던 대화가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 출석도장은 왜 찍어주는 건지 모르겠어. 목사님들한테 눈도장 찍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상품을 받으려고 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오는 거 아니야?” 다른 청년이 대답했다 “아니 뭘 그렇게 억울해해? 그럼 너는 기도회는 나오되 출석도장은 안 받으면 되잖아?” 다른 청년은 대답이 없었다.
그 두 청년의 말을 듣고 난 다음날부터 나는 그 특별 새벽기도회에 나가지 않았다. 마치 내 안에 숨은 동기가 들켜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나의 첫 마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하나님께 그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 동안에 더 열심을 내어 기도하며 간구하고 싶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새벽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샌가 출석 도장에 연연하며 단 하루도 빠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누가 이 특별새벽기도회로부터 낙오되었고, 누가 여전히 잘 나오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너무나도 바리새인과 같던 내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또한 출석 도장이 하나하나 채워져 갈 때 느꼈던 그 뿌듯함조차 너무 수치스러웠다. 이왕이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도 하고 출석도장 40개를 다 받아서 사람들에게 믿음이 좋은 자로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기도와 금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 마태복음 6장 16절, 17절, 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특별 새벽기도회를 나가지 않는 기간 동안 나는, 사순절 절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완주하지 못한 것)에 있어서 믿음이 작은 자가 된 것 같은 마음과 함께 하나님 앞에 이것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는 패배감, 반면에 나의 기도와 금식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께 은밀히 보이기 위함이며, 나의 믿음은 새벽기도회를 몇 번이나 나왔는지를 나타내는 도장의 개수,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 평가된다는 이 두 마음이 내 안에서 얼마나 나를 괴롭히며 싸웠는지 모른다.
교회 전통에 따라 이 사순절을 절기로 명명하여 특별하게 이 기간을 기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따르는 것인지 진심으로 의문스럽다. 교회가 이 절기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신 구제함, 기도, 금식과 같은 것들을 공적으로 행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은밀하게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로채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절기를 지킴으로써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지킴으로 성화되어 간다. 절기를 지키지는 않지만, 영상에서 나온 물음과 같이 나는 매일 매일의 십자가의 빛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절기에만 하나님 앞에 반짝 거룩하며 반짝 동행하는 삶이 아닌, 에녹과 같이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