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의 공산주의자였다
아래는 장신대 김철홍 교수의 의미심장한 역사항변의 글이다. 자신이 운동권 출신의 공산주의자였다고 하면서, 공산주의를 버린 이유를 소개한다. 신학교수 사회도 일반 대학 교수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수 교수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의 주장을 명확하게 천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어지간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장신대에 이 정도의 용기, 통찰력, 비판정신을 가진 교수가 있다니 놀랍다. 장신대의 날조된 역사도 고쳐 기록하고, 친일파 시각으로 기술된 한국교회사도 바로 잡아 고쳐 쓸 날이 올리라 기대된다.
아래 글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제쳐두고라도, 신학교수들이 세속사회의 논쟁적인 주제에 관해서 섣불리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은 돋보인다. 목회자 후보생을 교육하는 신학교 교수들은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므로 세속사에 대한 성명서 발표가 일반대학교의 교수들의 성명서를 발표와 질적으로 다른 행동이라는 말은 타당하다. 신학교 교수의 모든 주장은 기독교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과 부교수 김철홍 교수의 ‘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글
김철홍 (장신대 신약학과 부교수)
지난 10월 23일 장로회신학대학교 홈페이지(www.puts.ac.kr) 일반게시판에 본교의 역사신학교수 7분 공동의 이름으로(임희국, 서원모, 박경수, 안교성, 이치만, 김석주, 손은실) 작성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들은 이 성명서에서 자신을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신학교수로 소개하면서 “정부가 역사를 독점하거나 미화하거나 왜곡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고, “신앙인으로서,” “학자로서,” “국민으로서”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으로 이 성명서를 마무리하였다.
이 성명서를 읽은 후 국정화에 찬성하고 있던 나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성명서에 의하면 나는 “역사를 독점하고,” “미화하고,” “왜곡하는” 시도에 동조하는 공범(共犯)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나는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갖고 있고,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장로교 소속 교단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찬성하는 나는 신앙도 없고 양심의 자유도 없는 교수인 셈이다.
더욱 큰 고민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이다. 선언문 말미의 이 성경인용문을 놓고 추론하건데 역사신학교수들은 진리를 인식하고 있고 진리로 자유롭게 된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진리에 무지하고 그리스도의 자유가 없는 사람인 건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느냐 아니면 마느냐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고 정말 어느 한쪽의 입장은 “진리,” 반대편의 입장은 “거짓”인가? 나는 이 성명서에 역사신학교수들이 갖고 있는 독단적인 입장, 즉 ‘나의 입장’은 옳고 ‘너의 입장’은 틀렸고 ‘나의 입장’은 진리고, ‘너의 입장’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보는 독단적인 입장,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독단적인 입장이 여과 없이 노출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의 독단적인 태도는 “우리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바로잡는 일임을 깊이 인식한다”는 말에서 그 절정(climax)에 도달한다.
마치 한 장의 성명서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런 환상을 본교 역사신학교수님들만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장신대 교수회가 성명서를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처방해온 선례가 지난 “세월호 성명서”와 “광복 70주년 신학성명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성명서들이 지금 우리 교단 안에서 얼마나 “사태”를 바로 잡고 있고, “개혁을 이루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이들은 “일방적인 진리주장이 얼마나 위험하며 자기혁신에 무능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금 그 위험한 “일방적인 진리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차치하고, 이 성명서가 더욱 더 비난 받아야 마땅한 이유는 성경말씀을 자신들의 주장을 위한 치장물(embellishment)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으로 자신들의 주장에 세례를 행하고(baptize) 자신들의 주장을 거룩한 진리(sanctified truth)의 수준으로 고양시킴으로 국사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를 진리의 문제로 둔갑시켰다.
나는 성서신학교수로서 이 구절을 아무리 읽고 주석을 참고하여 보아도 왜 이 대목에서 이 성경구절이 등장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 구절이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어떤 구체적 관련이 있는지 나의 무지(無知)를 깨우쳐줄 역사신학교수님들의 친절한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이와 유사한 성명서를 기독공보에서 읽었다. 본교단 총회장이 발표하여 기독공보에 게제된 성명서, “역사교과서 논의에 대한 본 교단의 입장: 역사 해석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제한”은 국정화를 반대하고 있다. 내가 총회 사무총장실에 직접 전화하여 총회장(채영남 목사)이 어떤 경로로 총회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 성명서를 발표했는지를 문의하였더니 임원회에서 논의하여 발표하였다고 한다. 우리 교단 내에 이 문제에 관하여 성도들 사이에도 의견이 다르고, 목회자들도 마찬가지고, 신학교 교수인 나부터 총회장과 의견이 다르다. 임원회는 어떻게 본교단의 입장을 수렴했는지 묻고 싶다. 총회장은 개인이 아니라 교단을 대표한다. 공인이다. 공인은 자신의 사견(私見)이 과연 자신이 대표하는 전체의 의견인지 분간하여야 한다. 임원회의 결의로 “본교단의 입장”을 발표하였다면 총회장과 임원회는 자신의 권한을 남용한 것이 아닌가? 그 성명서는 총회장이란 직함을 빼고 차라리 “역사교과서 논의에 대한 나의 입장”으로 혹은 “역사교과서 논의에 대한 본교단 임원회의 입장”으로 발표했어야 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고,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한 쪽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논쟁적 주제(controversial issue)에 관해 총회장이 제대로 된 의견수렴 과정도 없이 이렇게 간단히 임원회의 결정만으로 교단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월권(越權)이다. 왜 자신들의 사견이 교단의 입장인가? 역사신학교수들의 독단적인 주장은 반대의견과의 의미 있는 토론을 처음부터 봉쇄한다. 원래 성명서가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지만, 지금 이 성명서는 그 도가 지나치다. 이 성명서는 처음부터 교조적인 태도로 독자의 투항과 복종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리를 모르는 자”로 깔끔하게 분류해버린다.
특이한 점은 역사신학교수답지 않게 이 성명서 안에는 역사교과서 문제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진행되었고 현재 무엇이 문제인가에 관한 분석과 구체적인 문제 지적도 없다. 그런 점에서 총회장의 성명서는 역사신학교수들의 성명서보다 훨씬 더 실증적(實證的)이다. 총회장의 성명서는 그런 문제에 관해 양질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고, 왜 본인이 개인적으로 국정화에 반대하는지 독자의 이해를 돕는 설명도 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같은 학교의 교수로서 이 성명서가 더욱 더 부끄럽다.
그렇다면 내가 “신앙인으로서,” “학자로서,” “국민으로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의 언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현재 사용중인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의 한국 근현대사 부분이 대한민국의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가진 저자들의 견해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고, 전체주의적 “사고의 획일화를 초래할 전근대적인” 내용이며,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 깨어져 있고, 어린 학생들의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국민통합과 창조성을 실현하는 일에” 역행하는 시민들을 이미 양산(量産)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절실한 이유는 나는 “한국 학계의 문제해결 능력 및 자정능력을 불신하는 입장”이기 때문이고, 내가 이미 본교에서 교수 집단이 얼마나 “자기혁신에 무능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였”기 때문이고, “역사가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맡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이미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들을 통해 똑똑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교과서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뉴스나 인터넷 기사들을 최근에 보고 사실 교과서 내용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었다.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누락되고 없다든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든지, 이런 문제 지적들이었다. 혹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타종교에 관한 서술이 많고 기독교에 관한 서술이 적다는 문제 지적이었다.
나는 정말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내가 직접 확인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며칠 전 중고등학교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를 구입하기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아쉽게도 검인정 교과서는 모두 출판사에서 다 회수해 가고 없었다.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엔 출판사에서 간행한 『고등학교 한국사 자습서』(대표저자 한철호)와 비상 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 완벽한 자율학습을 위한 완벽한 자율학습서』(저자: 이건홍 외 4인 공저)였다(물론 다른 것들도 있었지만 비싸서 모두 다 구입할 수 없었다). 이 책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교과서의 내용을 잘 요약, 분석하고 있고, 저자의 친절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어 어떤 면에서는 교과서보다 저자의 의도를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학습진단평가를 위해 문제풀이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그 중 책이 많이 사용된다는 미래엔 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자습서』 중 근현대사 부분인 186-311쪽의 내용을 그 밤 새벽까지 직접 읽었다. 다 읽고 난 뒤의 소감은 한 마디로 말해 ‘놀라움’이었다. 나는 1981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하였다. 3학년 때인 83년 8월에 일종의 강제징집제도인 지도휴학을 받고 군대에 갔고, 85년 제대하고 다시 복학하여 88년에 졸업했다. 사실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깊이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학내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읽던 각종 이념서적들을 읽었다.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저작들은 물론 러시아, 중국, 베트남, 쿠바혁명사,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론 철학, 경제사(經濟史), 경제이론인 정치경제학, 종속이론, 사회주의 사상사, 사회주의 예술론, 한국근현대사, 반봉건식민지론, 조선 공산주의 운동사, 사회구성체론 논쟁, 등 오늘 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무식한(?) 좌파들이 읽지 않는 다양한 좌파 이론들을 공부한 적이 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나에게 성경보다 더 중요한 책이었다. 수 백 페이지에 걸쳐 작은 글씨로 프린트 된 영어로 번역된 자본론을 두 번 통독하면서 나는 영어를 깨우쳤다. 제대한 뒤에 나는 더욱 더 이념서적에 심취했고, 어느 날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나는 공산주의 이념을 위해 내가 갈 수 있는 길의 끝까지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지금 되돌아보면) 그 길에서 다시 돌아왔고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신학교 시절에도 나는 이념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를 안고 많은 고민을 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좌파 이념을 버리게 된 것은 미국에 유학 가서 바울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다. 바울의 복음은 나를 완전히 사상적으로 전향하게 했고, 복음의 세계관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가 갑자기 나의 전기(autobiography)를 말하는 것은 미래엔 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자습서』 중 근현대사 부분인 186-311쪽의 내용을 읽은 뒤의 나의 소감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이며 다른 뜻은 없다. 그 한국사 자습서에는 놀랍게도 내가 대학교 때 의식화학습에서 공부했던 내용 중 한국근현대사와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 학습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요약되어 있었다. 81-82년도에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좌파서적에서 읽고 학습했던 내용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잘 정리되어 있는 내용들이 그 동안 일반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이 일종의 도제(徒弟)시스템을 사용하여 선배가 후배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가르치고 배워서 “의식화된 (좌파) 지성인”으로 만들던 그 과정 중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사항이 이제는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공개적으로 교사들에 의해 실시되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통해 12년 동안 교육받으면서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개념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자본가, 지주, 대지주, 독점자본, 도시빈민, 노동력 수탈, 수탈에 의한 계층분해, 민족운동의 주체로서 학생, 농민, 노동자, 사회주의, 노동쟁의, 농민조합, 혁명적 농민, 계급해방을 내세우는 혁명운동, 토지혁명, 봉건잔재의 파괴, 부르조아 민족주의 혁명, 반제항일투쟁, 신간회의 해소(解消), 사회주의 진영의 합법적 공간 상실, 기회주의, 중세봉건사회 부재론, 사회경제사학(史學), 유물사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정체성론, 유심론, 유물론, 계급갈등, 반제국주의 투쟁, 소작투쟁, 쟁의, 계급적 교육, 지주에 대한 투쟁, 계급투쟁, 토지집중, 예속 자본가, 프로 문학, 보천보 전투, 반혁명 세력, 토지국유화, 주요산업의 국유화, 사회주의적 개혁, 통일전선, 노농 대중의 해방, 무장봉기, 무상 의무 교육, 무상몰수 무상분배, 등 사회주의 이론 학습에서 사용되던 용어들이 186-273쪽에서 등장하며 다수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내가 이런 개념들을 대학시절 의식화 교육에서 사용되는 책들을 통해 배웠다면, 오늘 날에는 본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포함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모든 학생들이 수년간 정규교육과정을 통해 이것들을 배우고 있다.
2007년도 미국에서 귀국하여 장신대에서 여름방학 중 하루 4시간씩 수업하는 헬라어 강의를 하는 중에 신대원 학생들이 결석한 적이 있다. 다음 날 결석한 이유를 물으니 광우병 시위를 가기 위해 수업을 빠졌다는 대답이었다. 16년간 미국에서 미국산 소고기만 먹다 온 나에게는 광우병 시위 자체도 이상하게 보였고,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두뇌 속에 구멍이 ‘송송송’ 생겨 죽게 된다는 언론의 보도는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 최고의 농담(joke)로 기억된다. 내 눈에 그것은 ‘집단적 광기(狂氣)’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학부도 아니고 신대원 학생들이 이런 비이성적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당시 나에게는 미스터리(mystery)였다.
그러나 그 미스터리는 이제 검인정 한국사 자습서를 읽고 쉽게 풀렸다.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시대와 독립운동 역사를 좌파가 역사를 읽는 방식으로 배우고, 거기서 배운 개념으로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이해하고 있다. 해방 후 미군정은 또 다른 제국주의 침략으로 보고, 그래서 대한민국을 여전히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본다. 우리는 여전히 미제국주의와 자본가들의 수탈을 당하고 있고, 여기에서 민중(인민)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의 주체(主体)가 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미국산 소고기의 문제는 ‘소’의 문제가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문제다. 소를 수입하는 것을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진정으로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광우병에 걸려서 내 두뇌에 구멍이 송송송 뚫리는 것이 아니라, 미제국주의가 소고기 수입을 통해 민중을 계속해서 수탈하는 것이다(나의 분석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당시 촛불을 든 사람들이 국내의 먹거리 문제 혹은 건강에 문제 있는 식품을 수입하는 것에 관해서는 그 동안 아무도 한 번도 촛불을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가 갖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어떤 특정 부분의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부분의 정보가 누락된 것도 아니다. 그 책들이 문제가 되는 진정한 이유는 그 책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열거한 수많은 단어들, 즉 미래엔 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자습서』 중 근현대사 부분인 186-311쪽의 내용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중립적인 용어들이 아니다. 그 단어들은 이념적으로 그 알맹이가 가득 차 있는 용어들(ideologically loaded terms)이다. 그 단어들은 유물사관(唯物史觀)의 용어들이고,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교사 개인이 그 역사관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을 정규학교 과정 속에서 자유롭게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자료가 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은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사회에 도달할 것이며,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과정은 사회의 토대(basis)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사회변화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이것을 막을 수도 없으면서, 동시에 공산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갖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투쟁에 의해 완성된다. 이론 뒤에는 반드시 행동가들(activists)이 있으며 이들 중에는 이미 남조선 인민해방혁명을 위해 오래 전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바로 이런 공산주의 역사이론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그 전제 위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유관순 열사가 그 책에서 빠진 것이 문제가 아니다. 교과서 전체의 틀, 구조(structure)가 문제다. 그 구조가 전달하고 있는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 바로 공산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상이란 점이 문제다. 이 교과서는 사회주의 사상 그 자체를 민중사학(民衆私學)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그 책에 추가할 것을 요구하여, 비록 그것이 포함된다 해도 여전히 교과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할 책이지 수정 혹은 개정되어야 할 책이 아니다. 개정은 해결책이 아니고, 폐기하고 새로 쓰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국정화에 찬성한다. 현재의 검인정 체제를 일단 그대로 유지하고 검인정 체제 안에서 이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매우 낙관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국정화를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짧은 성명서에서 모두 다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라면 현재의 검인정 제도 안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명서에서 “한국 학계의 문제해결 능력 및 자정능력을 불신”하지 말고 이 문제를 “역사가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맡기”고 조용히 각자의 삶을 살 것을 설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매우 합리적이며, 상식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 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이 교과를 만들고 앞으로 계속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지(高地)를 선점(先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전쟁을 하지 않고도 현재의 검인정 제도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들은 애써 점령한 고지를 쉽게 내어주는 바보들이 아니며, 그들은 노련한 싸움꾼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본교 역사신학교수들 중에는 그들에게 싸움을 걸 사람도 없고, 그들과 맞붙어 싸워 이길 수 있는 분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고쳐달라고 호소하는 것 정도다. 그러나 역사신학교수들이 아무리 눈물로 개정을 호소하고, 그래서 그들이 우리 교수님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이곳, 저곳을 부분적으로 고쳐준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개정을 거친 그 책은 여전히 유물론적 역사관, 계급투쟁론, 제국주의와의 투쟁과 해방을 강력하게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 역사해석의 문제는 전쟁이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학계 내부의 학자들 간의 논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이념문제 때문에 전쟁을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고, 경제제도로 자유시장경제를 선택하였다. 북한은 정치제도로 인민민주주의, 즉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경제제도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책임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제도를 선택했다. 사실 조선왕조가 망한 뒤 우리의 선조들은 미래에 세워질 독립국가에서 어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부터 논쟁하였다. 이 두 상반된 입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 오래전부터, 좌-우 양편, 즉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싸워왔다. 그 논쟁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양쪽이 서로 죽이고 죽는 무력충돌로 이어져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21년 6월에 중국에서 일어난 “자유시 참변”이다. 무장 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이 함께 모여 통합하려던 와중에 좌-우파 독립군들끼리 서로 총을 들고 싸운 사건이다. 그 이념적 전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어 터진 것이 바로 6.25 전쟁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우리민족이 싸운 것이 아니다. 6.25는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지금 그 전쟁은 대한민국 안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지금 좌우 이념 대립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중 상당수가 관련된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서 만들어 유포한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는 물론 그 내용이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그 제목은 매우 정직하고 정확하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다! 백년간에 걸친,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未完)의 전쟁이다. 그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쟁터로 인식하고, 지금까지 충실하게 전쟁을 수행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이것을 전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한국 학계의 문제해결 능력 및 자정능력을 불신”하지 말고 학자들에게 맡겨놓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국 학계”가 이미 이런 민중사학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다수가 되어 이미 역사학계는 이들에게 평정되었다. 왜냐하면 한국 근현대사 해석의 문제를 놓고 지금 일개 신학교 바울신학 전공교수인 내가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할 정도로 현 역사학계에서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민중사학에 반대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책임을 방기(放棄)한 것이고,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침묵을 민중사학에 대한 동의(同意)로 간주한다.
그리고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이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단 한 페이지짜리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이 지금까지 침묵한 것은 그들이 민중사학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만약 아니라면 소리를 크게 내어 외쳐야 할 것이다. 장신대 교수들이 좋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교과서가 있어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나도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역사신학교수들은 “최선의 해결책은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를 통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다”고 성명서에서 주장했다. 검인정 교과서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보다 더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기 위해 지난해에 교학사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출판했을 때 전국의 초중고 학교 중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일부 학교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전교조와 언론 각종 시민단체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전교조에서는 심지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을 위험 학교로 분류하여 홍보하겠다고 위협했다. 소위 다양한 교과서로서 기존의 교과서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단 한 가지의 새로운 교과서가 등장했을 때 검인정 교과서를 만들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역사관을 달리 하는 교과서를 용납하지 못하고, 단 한군데의 학교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나는 당시 좌파 지식인 중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나서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면 안 된다. 건전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를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단 한명의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다 죽었기 때문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이념에 다 함몰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라, 이념가다. 나는 지금도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를 통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왜 그 때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제야 소리를 높여 ‘국정화 반대’를 외치는 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대들은 좌파지식인이라고 그 때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것인가? 왜 그 때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신학교수로서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행동과 “건전한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이 공격을 당할 때 왜 그 때는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뒷북을 치는가? 결국 전국 2318개 학교 중 단 한 곳의 학교도 교학사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결과가 왔을 때에 나는 좌파 역사학도들의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내가 1986년에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장악해 나가던 주사파(주체사상파)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지 않다. 자랑스럽다. 나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시민이 아니라, 자유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고, 자유시장경제 제도가 완벽한 경제 제도도 아니지만 북한의 전체주의보다 훨씬 낫고, 사회주의 경제제도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제도에 만족한다. 나도 현재의 제도에 약간의 문제가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한다면 나는 그들과 싸워 막을 것이다. 6.25 때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나의 선배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듯이 나도 지킬 것이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인민민주주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 책들을 읽고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나는 그런 책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주역들이 한국사를 배우는 것에 반대한다. “신앙인으로서,” “학자로서,” “국민으로서,” 반대한다. 건전한 자유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우리 자녀들이 자라기 위해 지금은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긴급한 제안이 없었더라면 나같이 비겁한 사람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에 관해 몇 자 더 적고자 한다. 성경과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진리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갖고 있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좌파이건 우파이건, 경제적으로 상류층이건 하류층이건(자본가이건 프롤레타리아건, 부농이건 빈농이건), 남자건 여자건, 백인종이건 흑인종이건 황인종이건,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문제를 갖고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 구원은 영원한 생명, 즉 종말에 영원한 몸을 입은 하나님의 성도로 부활하여 종말에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8장 32절이 말하는 “진리”이고 우리가 그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진리 안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같은 신학교 교수로서 나는 그런 점에서 우리 교수들이 세속사회의 논쟁적인 주제에 관해서 섣불리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나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사실 내가 정말로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회자 후보생을 교육하는 신학교 교수고, 신학교 교수들은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일반대학교의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동이다.
신학교 교수의 성명서는 기독교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교수 집단의 주장을 넘어서 복음과 성경의 주장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지게 된다. 때문에 신학교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성명서를 남발하는 것보다 성명서는 아끼는 것이 더 현명하다. 최근에 장신대 교수회가 성명서를 낼 때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반대했다. 성명서 내용도 반대했지만,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특히 성명서 내용 중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들에 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장신대 교수들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남의 눈의 티를 빼겠다고 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2015년 10월 28일 장신대 신약학과 부교수 김철홍
“사상적 전향에 대한 그늘”에 대한 비판과 공산주의 이론의 그늘 속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학에 대한 나의 입장
김 철 홍
며칠 전 전주(全州)에 있는 본 교단 소속 한일장신대의 신약학 교수인 차정식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의 글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사상적 전향의 그늘”이란 제목의 이 글을 읽은 나는 응답하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나는 본교 교회사 교수들 중 누구라도 응답한다면 그 비판에 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고, 이것을 본 차정식 교수는 스스로 ‘구원 등판’을 결심한 듯하다. 이제 곧 논증되겠지만 사실 그의 글은 언급할 가치가 많은 글은 아니다. 그는 1980대초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학생치고는 이 역사 교과서 토론에서 실증적(實證的) 자료에 근거한 주장을 성실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쉽게도 대부분의 지면을 나의 심리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의 보수 우파적 전향을 충분히 믿어주지 않을까봐 선명성을 부각시키려 더 길길이 날뛰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나마 그의 글에서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된 실증적 내용은 한국 역사학계에서 근대사 연구의 태두(泰斗)로 여겨지는 김용섭(金容燮) 교수의 “경영형 부농(富農)”에 관한 언급이다. 자, 그럼 그의 목소리를 한 번 직접 들어보자.
“그는 한 역사교과서에 사용된 다양한 용어를 길게 나열하면서 그것이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북한식 유물사관에 오염돼 있다는 증거라고 성토했다. 그 용어의 상당수가 가령 김용섭 교수의 ‘경영형 부농’처럼 역사학자가 해석을 위해 고안한 개념이 아니라 당대의 신문에 나온 사실적 개념들인데 말이다”(차정식 교수의 글에서 발췌).
내가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이 왜 문제인지를 설명한 지난 번 글에는 사실 약간의 미흡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글에서 현재 역사학계가 왜 좌파 역사이론이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정식 교수가 그의 글에서 김용섭 교수를 언급한 것은 나로서는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따귀를 때려준’ 셈이다. 차교수는 이미 나의 따귀를 때렸다.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 여하튼 그가 따귀는 때렸으니 이제는 내가 제대로 울어야 할 차례다.
김용섭 교수의 “경영형 부농”에 대한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우리나라 근대사에 적용한 첫 성공적 사례로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시리즈로 발표된 “한말 일제하 지주제”에 관한 그의 연구들은 당시 지주 중에 단순한 농사꾼이라기보다는, 상당한 토지를 축적하고, 토지에서 창출된 농업 이윤을 다시 재생산에 투입하여 확대재생산을 반복하는, 일종의 농업자본가로의 변신이 충분히 가능한 “경영형 부농”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예를 들어, 1978년 『한국사연구』에 발표된 “高阜 金氏家의 地主經營과 資本轉換”같은 연구가 그런 것이다. 이 논문의 제목이 보여주듯 김용섭은 고부 지역 대지주인 김씨 가문이 자신의 토지를 사용하여 자본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묘사하려고 했다. 당시 그의 이런 연구는 국내 역사학계의 대환영을 받았고 이른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萌芽論)’이란 이름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즉,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부르주아 계층(자본가 계층)이 자생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만약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도 자본주의의 싹이 이미 텄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移行) 할 수 있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그 이행이 저지당했다는 주장이다. 김용섭의 이론이 환영을 받은 기본적인 이유는 그의 이론이 식민사관(일본의 식민지배가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을 한국역사 학계가 극복할 수 있는 출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나는 33년 전 1982년 대학 2학년 때 서울대에서 경제학과 안병직 교수의 강의에서 이런 내용들을 배웠을 때의 감동을 아직 기억한다. 도서관에서 구한말, 일제 초기의 토지대장과 소작소출 기록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 김용섭 교수의 논문들을 다수 탐독했고, 다른 학생들이 미팅을 하러 나갈 때 나는 그의 글의 각주에 인용된 글까지 찾아 읽으면서 그의 실증적 연구에 탄복했다. 그의 주장은 내가 그 동안 배운 유물론적 역사이론이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실제 우리 역사에 적용 가능한(applicable) 이론이라는 것은 경험하게 해주었다. 즉, 인류의 역사는 1) 원시공산주의, 2) 고대노예제, 3) 중세봉건제, 4) 근세자본주의, 5) 현대 사회주의, 6) 미래의 공산사회로 단계적으로 발전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이 그대로 우리나라 역사에 적용된 이론이었다. 김용섭의 연구는 국사학자들이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 경제사 이론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사학계에 큰 해악을 끼치게 되었다. 그의 이론은 절대로 단순한 경제사(經濟史)에 관한 서술이 아니다. 인류 역사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한다고 보는 이런 이행론(移行論)은 결국 우리나라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당연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행은 오직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유물론적 역사관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이론이 아니며, 산주의 “정치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 그러므로 김용섭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그의 연구를 지지하고 따르는 다수의 현대 국사학자들은 스스로 한국근현대사 연구를 공산주의 이론의 틀 안에 가두고, 오직 그 관점에서 서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차정식 교수가 “그(김철홍)는 한 역사교과서에 사용된 다양한 용어를 길게 나열하면서 그것이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북한식 유물사관에 오염돼 있다는 증거라고 성토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순진무구한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현재 “역사교과서의 다양한 용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 용어들은 이념적 용어들이다. 설사 차교수의 주장처럼 김용섭의 “경영형 부농” 개념이 김용섭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일개 신문사 기자가 고안해 낸 용어라 하더라도(물론 김용섭의 제자들은 차교수의 이 주장에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상관이 없다. 김용섭은 그 용어를 사용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을 개발했고, 이 이론을 통해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단계적 이행론을 우리 역사 연구에 적용했다. 신문사 기자가 “경영형 부농”이란 말을 쓸 때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용섭은 유물론적 역사관을 설명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했다. 같은 용어라도 사용방법이 다르다. 사용방법이 다르면 같은 용어도 다른 뜻을 전달한다. 차정식 교수가 말하듯이 내가 “이념적 이분법에 압도돼 역사해석의 기본인 ‘실증’을 소외”시킨 것이 아니다. 용어가 이념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이해 못하는 차교수가 스스로 자신의 무지에 “압도되어” “실증”을 보고도 이해 못하고, 나의 논지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켰을 따름이다.
김용섭의 이론은 이미 오늘 날 역사학계가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규범적 틀(normative frame)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 이론은 이념의 실천인 혁명 전략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이론이 어떻게 혁명 전략의 기초가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김용섭의 연구 뒤에 등장한 안병직의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이다. 이 이론은 원래 중국공산당이 공산혁명 당시 중국사회를 분석한 틀로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이행론을 ‘살짝’ 수정한 이론이다. 내용인 즉, 서구 열강의 침략 이전 중국은 농업을 주로 하는 전통적 봉건사회였지만 제국주의가 침략하여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지배국가의 자본주의 제도가 식민지에 부분적으로만 이식되었다. 동시에 전통적 봉건사회는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고 강제적으로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주장이다. 제국주의는 중국의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제도를 교묘히 반반(半半)씩 결합시켜 유지함으로, 결국 중국은 지속적으로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게 되고, 정상적인 자본주의로의 이행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식민지반봉건사회인 중국에서, 산업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그 숫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해답은 노동자와 농민이 연합하여 공산혁명을 이루는 방법에 있었다. 어차피 노동자와 농민은 제국주의 수탈의 피해자이므로 두 계급은 함께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다. 그래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단독 혁명이 아니라 노동자와 소농민(peasant)이 연합하고, 기타 제국주의, 대지주, 자본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총결집한 통일전선을 구축한, 계급간의 유혈 투쟁인, 인민해방전쟁을 수행했다.
현재의 검인정 역사교과서를 집필한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관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이런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과 동일한 관점에서 일제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성출판사에서 만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40쪽은 아래와 같이 당시의 상황을 계급투쟁론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파업 투쟁과 소작 쟁의가 폭발적으로 고양되자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 조합을 조직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자들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면서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그를 토대로 반일과 같은 정치 투쟁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미래엔출판사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인 『한국사』 269쪽은 아래와 같이 저자의 관점을 더욱 더 선명하게 노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1930년대 들어 농민·노동 운동은 급진적인 양산으로 바뀌어 갔다. 일제가 지주와 자본가의 편에서 농민과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농민과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혁명적 농민 조합, 혁명적 노동 조합을 만들어 저항하였다. (중략) 이러한 사실은 농민·노동 운동이 단순히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계급 해방을 추구하는 혁명 운동이자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 준다.”
노동자, 농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가 한 편에 있다면, 반대편에는 일본 제국주의, 지주, 자본가가 서있다. 이들 진영의 계급투쟁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 해소되며 그 결과는 단순한 생존권의 확보가 아닌 계급 해방이다. 그 혁명은 곧 공산 혁명이다. 내가 이 글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검인정 교과서들이 이런 공산주의 이론을 근거로 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에 근거해서 기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이 북조선 인민민주의의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이 일제시대를 기술할 때 사용하는 이론적 틀이라는 점이다. 모택동의 이론이 조선공산당에 영향을 주었고 이 전통이 현재 북한에 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교과서의 내용은 사실상 북한이 근현대사를 보는 관점도 사실상 동일하다(물론 안병직 교수가 북한으로부터 이것을 수입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아 스스로 이 이론을 세웠다). 차정식 교수는 내가 “한 역사교과서에 사용된 다양한 용어를 길게 나열하면서 그것이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북한식 유물사관에 오염돼 있다는 증거라고 성토했다”고 나를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는 비밀은 검인정 교과서들은 처음부터 이런 “유물사관에 오염”되어 있는 역사관, 즉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무지를 여기서 너무 심하게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차교수는 지금 이 교과서 논쟁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심대한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정식 교수는 역사학에 문외한인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생조차 현재 검인정 교과서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알아보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는 살아서 걸어 다니는 증거다.
우리는 종종 남한의 역사 교과서 저자들이 북한의 역사 교과서를 보고 베꼈다는 주장을 듣는다. 그 말은 사실 남한의 역사학자들을 우습게보고 모욕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습득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남한의 역사학자들이 갖고 있는 학문적 능력을 그렇게 폄하하면 안 된다. 그들은 북한의 역사책을 보지 않고도 북한의 역사책을 능가하는 책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어떤 면에서 남한의 좌파 역사이론은 북한의 이론을 오래전에 능가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남한의 교과서와 북한의 역사교과서 사이에 유사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표절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하는 실례의 말이니 앞으로는 삼가도록 하자.
남한의 좌파 이론이 북한의 수준은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것은 비단 역사학 분야만이 아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 반대하는 남한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수준이 그가 어떤 계열에 서 있건 관계없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있었던 “사회구성체론 논쟁”에서 이미 증명했다(물론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들이 이미 몰락한 상황에서 ‘세계적’이라고 해봐야 별로 세계적이지도 않은 것은 사실이다). 1985년에 『창작과비평』 57호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논쟁을 기획한 이래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국의 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 ‘주변부자본주의,’ 혹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등,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게 들리는 각종 이론을 주장하며 논쟁을 벌였다. 물론 여기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사파에게 북쪽의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통일전선 형성 시 연대의 대상일 뿐 토론의 상대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토론은 1990년을 지나면서 급격히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국사회의 각종 경제적 지표들이 이미 이들의 주장을 무효화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그들의 노력이 별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대학교와 같은 그들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라는 다소 모호한 이론이 그들이 떠난 빈 자리 공백을 메우게 되었다.
이런 그간의 사회구성체 논쟁의 내용을 총 정리하여 4권으로 집대성한 책,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을 편집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현 서울시 교육감 조희연이란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자유시장 경제제도를 채택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학생교육의 수장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사회구성체논쟁을 집대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이념적 좌파들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고 깊다. 그들은 이미 고지(高地)를 선점(先占)하였다는 나의 말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러므로 교과서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 검인정 교과서에서 6.25를 남침으로 묘사했느냐 북침으로 묘사했느냐, 그런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6.25를 남침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교과서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갖고 있는 문제는 이 교과서의 근현대사 부분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역사관에 의해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교과서가 사용되는 한 사회주의에 친화적인 태도(socialism-friendly attitude)를 갖고 있는 젊은 세대를 끊임없이 생산해낸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범 좌파계열이 모두 한 결같이 입에 거품을 물고 국정화를 반대하는, 그 비밀스러운 이유가 숨겨져 있다. 주사파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건, 새천년민주당이건 일반시민이건, 이들은 한 마음으로 연합하여 국정화를 막아야만 한다. 그것은 그들의 공통의 이익이다. 단지 북쪽의 공화국이 국정화를 반대하라고 공개 지령을 내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정화를 막지 못하면 당장 야당에게 친화적이고, 사회주의 이념에 친화적인, 다음 세대를 만들어 결국 언젠가는 한국사회를 사회주의로 이행시켜야 하는 그들의 역사적 소명을 성취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적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차정식 교수가 얼마나 좌파 이론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와 이런 문제로 토론한 적이 없고, 그의 짧은 글을 읽고 그가 갖고 있는 사상의 경향과 깊이를 가늠하기가 나로서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 눈에 그가 사회주의 이론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차정식 교수와 나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여기에 갈색의 물질이 있다. 그것은 얼핏 보면 된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인분(人糞)처럼 보이기도 한다(편의상 이하에서는 인분대신 영어 알파벳 D를 사용하기로 한다). 차교수는 검인정 역사 교과서는 D가 아니고 된장이라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그 책들이 된장이 아니고 D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D이므로 어린 학생들에게 먹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차교수는 이것이 된장이므로 학생들에게 계속 먹이자는 것이다. 차교수는 나에게 “이 갈색의 물질이 D인지 된장인지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그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먹어봤기 때문에 안다”이다. 차정식 교수는 내가 좌파 이념을 버리고 애국 우파로 전향한 것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상적 전향을 한 학자가 그 굴절된 내면의 그늘을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중략). 그러나 그의 사상적 전향에 또 다른 트라우마의 그늘을 대하는 씁쓸한 뒷맛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사상적 전향에 대해 차정식 교수가 어떤 입맛을 다시는지에 관해 나는 사실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꼭 말해주고 싶다: “정말 이것이 D인지 된장인지 알고 싶으면 직접 한 번 먹어 보라. 내가 먹어봤는데 그 맛은 씁쓸하다.”
그리고 동일한 말을 공산주의 이론의 그늘 속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모든 역사학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물론 그 안에는 그 동안 D를 나보다 더 많이 먹어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먹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엇인지 모르고 먹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자로서 걸어온 길을 한 번에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들이 좌파 이론을 버리고 한국사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않을 것이고,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단숨에 역사를 설명하는 다른 길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사실 나는 그들이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들끼리 모여 무슨 말을 하건 큰 관심은 없다. 나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관점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지만 하면 그들이 그들의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것에 찬성한다.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나의 현재 심리상태에 관해 차정식 교수는 내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얼룩지게 한 좌파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더욱 더 신랄하게 씹어대고 가혹하게 공격하지 않으면 과거의 이념적 괴물이 다시 출몰해 자기의 존재에 위해를 가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고 적었다. 사상적 전향 때문에 내 심리의 이면에는 “배제의 공포심리도 적잖이 작용하는 것 같다”고 그는 진단한다. 나의 심리적 상태를 분석하는 그의 삼류 심리학에 나는 별로 감흥이 없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배신자로 낙인찍힌 사람”에 비유한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차정식 교수는 내가 사상적으로 전향한 것을 ‘배신’행위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내가 좌파 사상을 버리고 우파로 돌아선 것은 우리 시대에는 ‘용서받지 못한 죄’를 지은 것이고, 나같은 사람을 ‘가롯 유다’와 동급으로 보는 차정식 교수의 관찰은 사실 정확하다. 그는 “정말 이것이 D인지 된장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치고는 매우 예리한 관찰력을 지녔다.
통합진보당 19대 국회의원이었던 임수경 의원이 탈북자 백요셉씨에게 술에 취해 쏟아낸 말, “개념 없는 탈북자 00가 국회의원인 나한테 함부로 개겨?”, “야 이 탈북자 00들아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어, 자꾸만 그 북한인권인지 하는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러다 다친다? 너 몸조심해 이 00야”, 등은 1989년 평양통일대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던 ‘통일의 꽃’ 임수경의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그대로 잘 보여준다. 조선인민주의공화국을 버리고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탈북자들이 그들의 눈에는 “개념 없는” 배신자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죄인들이다. 1980년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스스로 폐기하고, 대한민국의 경제를 ‘중진자본주의’로 새롭게 정의하면서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한 안병직 교수에게 ‘사상적 변절자’라는 딱지(label)를 붙이고 공격한 사람들은 누구였나? 그들은 바로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는 좌파들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박원순 서울시장의 말씀)는 좌파들이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을 배신자로 비난한다. 장신대 일반게시판에 일련번호 28330의 글을 쓴 본교 학생 송현석군은 나에게 “역사학과 교수님들이 함께 의견을 낸 모습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과거사를 들고 반대하고 나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고 점잖게 타이른다. 그렇다, 그 학생에게는 내가 우파로 전향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제 2의 김영환이라도 되어보겠다는 건가?”라고 묻는다. 나이 어린 학생의 질문치곤 제법 무서운(!!!) 질문이다.
언제부터 이 나라가 좌파 이념을 버리면 변절자, 배신자, 부끄러운 자가 되는 나라가 되었는가? 도대체 이 나라에는 내가 나의 사상을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도 없는 것인가? 내가 “제 2의 김영환”이 될 수도 있지, 뭐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은 이제 내가 나의 사상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는 나라다. 좌파이념을 버리고 우파가 되면 변절자, 배신자 소리를 듣는 나라다. 정말 웃기는 상황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을 덮고 있는 전체주의의 망령,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인민민주주의(속칭, 민중민주주의)를 꿈꾸는 망상가(妄想家)들이 이 땅의 교육계를 활보하는 한, 나는 차정식 교수가 주는 경고, “저쪽 진영에서 이미 날 배신자로 낙인찍었는데”를 깊이 묵상하면서 몸을 사려야 하는가? 정말 웃긴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살던 그 시대의 상황에 최선을 다해 응답했다. 그 말은 내가 뛰어난 이론가였다는 주장도 아니고, 내가 누구보다 더 뛰어난 투쟁을 했다는 뜻도 더 더욱 아니다. 나는 그렇게 좋은 머리를 갖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천성이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겁이 많다. 그런 나를 내가 잘 알기에 나는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 나의 몸을 던졌다. 과거에 대해 아무런 후회도 없고, 원망도 없다. 난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했고, 그 일로 인해 내가 당했던 약간의 부당한 탄압도 내가 당연히 지불해야 했던 대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 마음은 항상 평안하다. 차정식 교수가 염려하는 그런 병리적 심리 문제는 아쉽게도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정식 교수처럼 당시 학생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더 불안해 보인다. 기왕에 심리분석 문제가 나왔으니 나도 어설픈 삼류 심리분석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어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노래를 부르면서 “학우여”라는 외침을 던지며 어떤 학우가 경찰에 끌려가고 있을 때, 그와 함께 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을 자책하면서, 방과후 학교 앞 선술집에서 막걸리에 취해 군부독재를 욕하던 사람들, 끌려간 친구를 생각하면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의 내면의 깊은 곳에 ‘죄의식’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그들을 향한 연민, 그리고 죄책감이 결국 수많은 386, 486 세대들의 마음속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런 죄의식은 지금도 이념적 좌파들을 향해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형무소에 다녀왔으므로 그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자동적으로 면죄부를 주게 하고, 그들이 공산주의 이념에 물들어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그건 안돼”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대체 언제까지 그 죄의식에 시달릴 것인가? 좌우 이념적 대립의 문제는 자라나는 세대가 일으킨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의 “중견”으로 자리 잡은 세대들이 갖고 있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차정식 교수가 나를 “중견 교수”라고 부른 것은 적절하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중견 시민이므로 이제 우리 중견 시민들의 선에서 지금 이 문제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균수명이 90가까이 길어질 미래에 386, 486 세대는 죽을 때까지 앞으로 40년 동안 이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화냐 검인정제도냐 이 선택은 큰 의미가 없다. 지금은 친일청산이 중요한 시점이 아니고, 좌파이념의 청산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 끝으로 차정식 교수의 ‘구원 등판’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2015년 11월 4일 장신대 신약학과 부교수 김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