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예슈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옳다고 한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쥬만이 아니라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백투예루살렘 운동 지지자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하도록 재정지원을 하는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유대교 풍습을 따르는 신종 교파가 한국과 중국에도 형성되고 있다. 이들이 "예슈아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가 옳은가,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했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6절). '여호수아'(יהושוע)를 음가 대로 읽으면 "예호슈아"이다. 그리스어 성경은 이것을 Ἰησοῦς(이에수스)라고 기록했고, 라틴어로 Iesus(이에수스)가 되었다. 'I'가 영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Jesus'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 초기 '야소'(耶蘇)라고 했다가 '예수'라는 본래 음가로 개정되었다.
'예슈아'는 어디서 온 말인가? 메시아닉쥬들이 '예수'를 현대 히브리어로 대체(substitute)시켜 얻은 명칭이다. ישֵׁוּעַ (예슈아). 야소(耶蘇)라고 불러도 랑그(langue)에 아무 변화 없듯이 빠롤(parole)에서 예슈아를 쓰는 것은 크게 탓할 게 못 된다. 랑그를 뒤집어 억지로 가공하려는 의도가 문제이다.
랑그와 빠롤은 언어학 용어들이다.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장기놀이에 비유하면 랑그는 규칙에 해당하고 빠롤은 그 규칙에 따라 장기를 두는 자의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전자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과 관행을 뜻한다. 후자는 개별 상황에서 각자가 하는 구체적인 말, 언어이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라는 뜻이며, 진째 발음과 같지 않으며, 거짓 이름이라는 까닭을 댄다. 진짜 이름의 발음이 '예슈아'였다고 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를 의미함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전통은 역사적으로 3단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첫째, 유대인 전통이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예언이기도 하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다. 인류의 구원자는 저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신 21:23).
둘째, 바울은 이 개념을 뒤집어엎었다. "그렇다. 신명기 법전 대로 그리스도는 저주 받아 죽은 자이다. 지당한 말이다." 바울은 이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셋째, 반유대주의(안티세미티즘)이다. 기독교가 세계를 뻗어나가면서 '예수'를 앞세워 유대인을 핍박했다. 예수교의 피해를 본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치를 떨었다. 현재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위 1단계 전통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자신들의 게토 중심으로 그 전통을 관철시켜 왔다. 현대 히브리어 사전은 '예수=저주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메시아닉쥬는 예수 믿는 유대인이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종파 교회가 여러 나라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 규례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쪽발 동물과 비늘없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 등 규례를 지킨다. 바울이 반대한 유대 율법주의적 기독교 종파로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메시아닉쥬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 이름을 앞세운 유럽 기독교 정치세력의 폭력에 시달려 온 그들이 '예수'라는 이름에 혐오감을 가진다는 것은 이해된다. '예수'가 기독교와 안티세미티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미국 메시아닉쥬는 'Jesus'가 제우스(Zeus)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싫다고 한다.
다음 몇 가지를 유념하자.
1) 호세아에서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로 바뀐 이름 '여호수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세/율법의 예언에 "나 같은 선지자"(신 18:15, 18)를 세운다고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여호수아였으다.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 예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율법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2) 예수 생존 당시에 '예수'는 너무나 일반적 이름이었고 인기가 없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두들 이 이름을 회피했다. 저주 받은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버려진 이름이었다.
3) 야웨 신앙은 히브리 전통에 속하지만, 헬레니즘은 이것을 세계로 파급시켜 기독교 세계화의 중요한 물결을 일으켰다. 히브리 문화 또는 헤브라이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을 포함한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 셉투아진트는 작은 규모의 히브리인들이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미널 역할을 했다. 유대인에게도 셉투아진트는 중요한 문헌이다. 신약성경이 언급하는 '성경(에)'라는 말의 배후에는 셉투아진트 성경이 자리 잡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어 번역판 구약성경을 참조했다.
4)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독창적 용어가 아니다. 셉투아진트는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 렘 42:2)를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5) '예수'를 '예슈아'로 불러야 한다면, 우리는 '예슈아 크리스토스'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예슈아 마쉬아흐'라고 해야 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들을 현대 히브리어로 바꿔야 하는가?
6) 우리의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보배로운 이름 '예수'는 성경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원자 그 분의 고유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라고 발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슈아'는 예수 시대의 발음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현대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언어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대 히브리 문자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몇 천년 1800년 동안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모음을 알 수 없고 자음 글자만 있는 히브리어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네 글자(YHWH)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기독인들은 여호와라고도 하고 야웨라고도 발음한다.
벤 예후다 기념우표, 이스라엘
현대 히브리어는 러시아령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태생 벤 예후다(Ben-Yehuda, Eliezer, 1858-1922)가 일상어로 재생시킨 언어이다. 그는 1886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태인이다. 파리대학교(솔본느)에서 공부를 했다. 히브리어 재생에 정열을 쏟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 구약학자와 그의 부인은 자기 자녀에게 자신이 만든 현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가르쳤다. 히브리어만 사용하게 했다. 그 언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공용어인 현대 히브리어이다.
벤 예후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을 때 영어, 독일어, 불어, 이디시(Yiddish)라는 언어가 모두 공용어가 될 뻔 했다. 이스라엘 국가 독립을 추구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면 무슨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논쟁을 했다. 벤 예후다는 모세가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할 때에 썼던 히브리어 문자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히브리어 복원에 삶을 바쳤다.
이스라엘로 이민 간 뒤, 아들 벤 시온(Ben Zion)이 태어나자, 아버지 벤 예후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영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이 복원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아이는 4살 때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한 명 뿐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태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국가적 민족적 난제인 언어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유대인들은 재생된 히브리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벤 예후다에게 “저희들에게도 히브리어를 알려 주세요" 하고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산된 현대 히브리어는 모세 시대나 예수 시대의 히브리어와 똑같지는 않다. 재생, 복원했다고 하는 히브리어의 발음이 모세나 예수 당시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루살렘은 전쟁과 불화와 갈등이 그치지 않은 도시이다. 그런데도 이름은 '평화의 도성'이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현대 히브리어를 만든 벤 예후다를 기념하는 거리가 있다. 다시 그곳에 가볼 기회가 으면 이스라엘의 영웅 벤 예후다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
예루살렘의 명소 벤 예후다 거리 풍경
손가락이 아닌 태양을 보라. 심볼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에쎈스를 보라. '예수,' 버려지고 저주받은 이름, 나무 위에 달려 우리의 추악한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과 화해에 필요한 제물이 되어 주신 그 분의 이름, 구원의 길을 열어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예수'는 참으로 존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나시기 전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 예수는 영원히 어제나 오늘이나 그 이름으로 우리게 복을 내린다(찬송가 80장).
필자의 글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시작 부분은 Young Jin Lee 님의 글 일부를 참고했다.
최덕성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 교의학 석좌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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