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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문화관과 세계관


 

1.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신학)

 

서 론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문화론(文化論)’이다. 곧,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문화에 대해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하며, 삶의 각 영역에서 어떻게 활동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화란의 저명한 신학자요 정치가요 저널리스트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많이 생각하고 발전시켰다. 그 결과 화란 개혁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지 전도하고 구원받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인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문화적 사명’이 있음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사명의 강조는 종교개혁 시대의 칼빈이 강조했던 것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해 ‘칼빈주의 문화관’ 또는 ‘개혁주의 문화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화란 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지성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학문 운동’, ‘기독교 대학 운동’, ‘기독교 문화 운동’ 등은 다 이러한 문화적 사명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교단의 ‘고신대학교’도 바로 이런 칼빈주의 문화관에 입각해서 설립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주장들의 핵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해 카이퍼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화란 내에서의 문화론 논의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 다음에, 카이퍼의 문화관의 개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이에 대해 간단히 평가함으로써 끝맺고자 한다.

 

I. 문화론 논의의 역사

 

1) 아브라함 카이퍼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전의 개혁 신학자들이 주로 ‘특별 은총’에만 관심을 가졌었다고 비판하면서 ‘일반 은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드 헤라우트」(De Heraut)라는 잡지(주간)에 1895년 9월 1일부터 1901년 7월 14일까지 ‘일반 은총’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연재하였다. 이 글은 나중에 「일반 은총」(De Gemeene Gratie; 이하 GG로 표기함)이라는 제목의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카이퍼는 이 책에서 인류의 문화 전반에 대해 깊고도 폭넓은 사상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문화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이 발전된 문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가 구원받는 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중생한 후에 바로 천국에 가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렇게 인구가 번성하고 역사가 진전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 발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지었을 때 단순히 그들만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를 생각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문화가 발전할 것을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 발전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카이퍼의 주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정을 실현하시기 위해 아담과 하와에게 인류 문화 발전의 ‘씨들’을 부여하셨다. 이 ‘씨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당위’인 동시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이다.


이렇게 해서 계발, 발전된 문화는 세상의 종말 때 심판의 불에도 소멸되지 않고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된다고 한다. 이것이 카이퍼의 문화론의 중요한 한 특징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죄와 부정한 것으로 물든 것들은 마지막 심판 불에 다 타서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다 소멸되지 않고 남아서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되는 것이 있다. 따라서 인류의 모든 분야에서 발전된 문화는 새 예루살렘에까지 ‘지속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한 소득’이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카이퍼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창조시에 부여하신 능력들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발전시켜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일종의 ‘문화 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은 크게 장려되고 고무되게 되었다.

 

2) 그 후의 발전

 

그러나 이러한 카이퍼의 문화론은 화란 내에서도 큰 반향과 파문을 불러일으키면서 계속 논란되어 갔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는 1932년에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 생활’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 대해 노르트만스(O. Noordmans)가 1936년에 ‘일반 은총’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글을 써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스킬더가 17회에 걸쳐 답변하였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1944년의 개혁교회 분열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교단 분열 후 1947년에 시몬 리덜보스(S. J. Ridderbos)가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적 문화관」이란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써서 출판하였다. 그는 카이퍼의 문화관에 대해 약간의 비판을 가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의 문화관을 옹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 이듬해에 메이어링크(H. J. Meijerink) 목사가 “나그네와 상속자”란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인 동시에 ‘이 세상의 상속자’이며 이것은 한 사실의 두 면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클라스 스킬더는 1948년에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카이퍼의 문화관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의 문화관을 예언적으로 통찰력 있게 전개하였다.


그 후 1966년에 기념비적인 논문이 하나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우마(J. Douma)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일반 은총」이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클라스 스킬더와 존 칼빈의 일반은총론을 서로 비교하고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그는 카이퍼와 스킬더의 문화관이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이 되는 ‘문화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곧 그들은 창조시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을 최대한으로 ‘계발, 발전’시켜야 한다는 공통된 기본 전제를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계발 사상(啓發思想, ontluikingsgedachte)’은 칼빈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우마의 논지였다. 그래서 다우마는 전반적으로 칼빈의 견해를 따르면서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인생(vreemdelingschap)’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다우마 교수의 주장에 대해 드 프리스(W. G. de Vries) 목사와 깜프하이스(J. Kamphuis)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특히 깜프하이스는 다우마가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정복하라”의 의미를 단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취하는 것(een in bezit nemen van wat de mens van Godswege reeds heeft)”으로 보고 마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정복하는 것’은 그것 이상의 것, 곧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노동’하는 것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반론에 대해 다우마 교수가 다시 답변하였다. 그 후 1974년에 나온 책에서 아뻘도른(Apeldoorn)의 펠러마(W. H. Velema) 교수는 “우리는 나그네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는 문화적 사명을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후로도 이 주제는 계속해서 관심 있는 주제로 논의되고 있다.

 

II.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개요

 

1) 카이퍼의 출발점

 

아브라함 카이퍼에게 있어서는 문화적 사명보다도 일반 은총이 출발점이었다. 이 말은 카이퍼가 문화적 사명을 말하지 않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 이후에도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주신 ‘일반 은총’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일반 은총」이란 책의 출발점은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이었다. 그 다음에 그는 ‘낙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주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대해, 곧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즉시 죽지 아니하고 계속 살아서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8절은 다루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 강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폭넓은 ‘일반 은총’의 빛 아래서 우리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 ‘기초되고(gefundeerd)’ ‘자극된다(gestimuleerd)’.

 

① 카이퍼가 창세기 1:28을 문화적 사명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반 은총」(GG)이란 세 권의 책에서 창세기 1:28을 언급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겐 아주 특이하게 여겨진다. 단지 한 군데, 그의 GG, II, p.271에서 지나가면서 조금 언급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낙원에서 아담은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으나 죄로 말미암아 그 지배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잃었던 지배를 회복한다.” 따라서 카이퍼는 우리가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문화적 ‘사명(使命)’보다는 땅을 지배했었다는 ‘사실(事實)’을 지적하고 있다.


② 그의 Dictaten Dogmatiek, III, Loc. de Christo (Pars Tertia), p.170에서 그는 창세기 1:26,28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능력(kracht)’을 부여하시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고 하셨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권(souvereiniteit)’을 부여하신 것이라고 한다.


Het Calvinisme, p.116에서 카이퍼는 창세기 1:28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순례자(pelgrim)’인데,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도중에 이 땅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과업(een onmetelijke taak op aarde)’을 수행해야 하는 순례자라고 말하고 있다.


Pro Rege, I, p.129f., p.133ff., III, p.457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모든 자연에 대한 ‘주권(heerschappij)’을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이는 또한 ‘명령(gebod)’이라고 말한다. “아니, 사람의 창조 후에 즉시 사람에게 또한 명령이 주어졌다. 이 명령은 사람에게 의무를 부과하는데, 곧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주권을 또한 행사하며 유지하며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I, p.133f.) 따라서 여기서 창세기 1:28의 말씀은 ‘축복(zegen)’인 동시에 ‘명령(gebod)’이다.

 

2) 하나님의 형상

 

카이퍼의 문화관은 창세기 1장 28절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설명할 때 잘 나타난다. 카이퍼는 하나님 형상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는 우선 옛 신학이 ‘하나님의 형상’을 너무 좁게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너무 ‘개인적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원래 아담에게 있었던 지혜와 거룩과 의 정도로만 보고 말았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사회적’ 요소를 무시하였다. 둘째로, 이들은 너무 ‘구원’에만 집착하였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의 구속도 언약적 관점이 무시되고 너무 개인적으로만 이해되어서 한낱 ‘피의 이론(bloedtheorie)’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카이퍼는 하나님의 형상은 너무나 부요하고 풍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한 개인에게서 다 실현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부모와 아이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부모의 얼굴과 성격의 특징은 한 아이에게서 완전히 다 찾아볼 수 없고, 여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져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부요하고 충만한 형상은 어떻게 한 개인에게서 다 표현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이 충만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는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heel ons menschelijk geslacht)’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사회적 요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인류 발전의 한없이 많은 ‘씨들(kiemen)’을 부여하셨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全)형상이 그[아담] 안에 씨로 농축되어 들어 있었다(··· dat heel het beeld Gods in hem in kiem geconcentreerd lag, ···).”고 한다. 그리고 이 씨들은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연관을 통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고 한다.

 

3) 씨의 발아, 성장

 

그리고 나서 카이퍼는 이 부여된 ‘씨들’은 발아(發芽)하고 성장(成長)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의 부요함을 사회적인 다양성과 충만함 가운데서 우리 인류에게 반영하시기를 기뻐하셨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러한 발전을 위한 씨들을 인류의 인간적 본성 속에 부여하셨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의 찬란함이 나타나야 하며, 그 부요함은 숨겨져 있을 수 없으며, 그 씨들은 말라죽을 수 없다. 또한 그 씨들이 충만하게 다 자랄 때까지, 그리고 충만한 인류의 발전이 실현될 때까지, 그만큼 오랫동안 인류는 땅위에 존재해야 하며, 그만큼 넓게 그리고 부요하게 발전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 인류 발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영광이 반영될 수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는 인간이 이렇게 계발하고 발휘해야 한다는 ‘사명(使命)’보다는(물론 이것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계발, 발전, 성장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당위(當爲)’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이퍼에 의하면 문화 발전은 우리의 사명인 동시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발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必然)’인 것이다.


그리고 카이퍼는 이러한 문화 발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 발전을 통해 우리 인간은 또한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류의 문화 발전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신다.

 

4) 독자적인 목적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발전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목적(een zelfstandig doel)’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인류 발전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적 외에 ‘그 자체의 목적(een doel in zichzelf)’을 가진다고 한다. 이 점이 카이퍼의 문화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물론 하나의 사실이 동시에 두 가지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군대는 조국을 방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또한 백성들에게 질서유지와 훈련이라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긴 역사의 흐름과 우리 인류의 부요한 발전은 그 발전 과정에서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며, 또한 동시에 무엇보다도 다른 여러 목적에 봉사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른 목적이란 택자들이 태어나게 하는 것, 영원을 위해 의미 있는 것들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도록 하는 것 등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류 발전이 또한 동시에 스스로 독자적인 목적을 가진다는 사실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 목적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찬송하기 위하여 우리 인류 안에 씨의 형태로 들어 있던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카이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적 발전(uitwendige ontwikkeling)’과 ‘내적 발전(inwendige ontwikkeling)’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외적 발전’이란 위에서 말한 문화 발전을 말하고 ‘내적 발전’이란 구원, 의, 성화와 같은 것을 말한다. 인류의 문화 발전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전혀 독립적인 것으로 발전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공연한 충돌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우리의 신앙에 유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 발전’은 계속되어야 하며 완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에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완전히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예정

 

카이퍼는 이러한 인간의 역사 발전은 하나님의 ‘예정(praedestinatie)’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만일 일반 은총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면, 그 기초가 허물어지며 그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는 것을 카이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예정’을 오직 택자들과 불택자들에 관한 특별 은총에만 한정하고 만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단순히 택자들의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 은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 은총의 영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까지 관계된 것이다. 일반 은총의 역사는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다 포함한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중국과 일본의 몽골들, 히말라야 남쪽의 인도인들, 애굽인들, 로마인들, 바빌론인들 모두 다 세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하여 예정의 결정은 모든 역사를 포함하며, 땅과 하늘이 진행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온 우주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종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고 말한다. “사탄의 온갖 방해와 사람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이 세상에 부여하신 것들이 나타나게 하시며, 계속 진행되게 하시며, 또한 그의 피조물의 충만한 생명력이 세상의 완성 때에 밝게 드러나도록 완전히 발전시키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6)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

 

이렇게 해서 계발, 발전된 문화는 종말 때에도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이 카이퍼의 문화론에서 또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발전된 것이 영원으로 이전되지 아니한다면, 이 세상의 문화 활동의 의미는 상당히 축소될 수밖에 없음을 카이퍼도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 끝날 때, 종말의 불에도 소멸되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세상의 종말에서 새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은 ‘점진적인 전이(geleidelijke overgang)’가 아니라 ‘파국(catastrophe)’이라는 것을 카이퍼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잠재해 있는 생명의 씨(de schuilende levenskiem)’, 곧 ‘사물들의 근본 의미(de grondbeteekenis der dingen)’이라고 주장한다. 새 땅에서는 그 씨로부터 동일한 어떤 것이,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것, 더 부요한 영광의 것이 발전되어 나올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알리아와 튤립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런 것들을 심으면 먼저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 꽃이 핀다. 겨울이 오면 농부가 이것들을 다 잘라 버리거나 뽑아 버린다. 이듬해에 날이 따뜻해지자 농부가 그 씨(열매)를 꺼내어 심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싹이 나고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똑같은 생명이, 아니 전보다 더 나은 생명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에도 ‘일반 은총’의 모든 식물이(우리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잘라져서 거두어진다. 그러나 새 땅이 다시 번창할 때에 이 일반 은총의 씨가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전의 발전의 열매이기 때문에 더 낫게 번창할 것이다.”


카이퍼는 이것을 또한 계시록 21:24,26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한다. 24절에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되어 있고 26절에는 그것이 다시 반복되어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카이퍼는 이 구절의 말씀이 종말 이전의 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그 자체,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인간의 일반적인 발전 중에서 죄가 스며들고 물든 것은 다 소멸되고 멸망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영원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 인류의 선행하는 발전 가운데서 그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datgene wat uit die voorafgaande ontwikkeling van ons menschelijk geslacht in dat rijk van glorie ingedragen wordt)”을 가리켜 본문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여러 민족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 후에 카이퍼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존귀와 영광은 만국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일반적인 민족 발전의 정도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온갖 영역의 것들이 포함된다.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 국가 기구와 사법 제도, 학문과 예술, 용맹과 경영, 상업과 기업의 영역 등에서 능력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은 다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카이퍼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본질상 일반 은총의 열매인 이 소득에 대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이 소득은 그냥 멸망해 버리거나 종말 때의 심판의 불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곧 새 땅에서도 그 소득은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가 도달한 이 존귀와 영광은 또한 이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류의 문화 활동의 열매는 ‘영원한 소득(blijvende winste)’이 된다.

 

7) 형태와 씨

 

카이퍼는 여기서 ‘형태들(vormen)’과 ‘씨(kiem)’ 사이를 구별한다. 사람의 몸이 죽으면 다 부패하고 소멸되지만, 그래도 씨와 같은 것이 남아서 그 씨가 다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씨에다 새로운 몸을 주실 것이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일반 은총의 열매가 맺히게 된 그 형태들은 언젠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강력한 씨는 계속 머물 것이며, 영광의 새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씨에다 새로운 형태를 주실 것인데, 그것은 그의 나라의 영광과 거룩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인류의 장구한 역사의 흐름은 택자들의 구원과는 별도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은 놀라운 정도의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발전은 우리의 현재의 삶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능력들의 발휘(een ontplooing van menschelijke kracht en van in de mensch door God gelegde vermogens)’를 가져오며, 그것은 또한 새 땅에 이루어질 영광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8) 요약

 

이처럼 카이퍼에게 있어서 우리의 문화적 활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전 ‘예정’에 뿌리박고 있으며, 창조시에 그것을 위한 ‘능력들’과 ‘씨들’이 주어졌으며, 역사의 발전에 따라 발아하여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며, 그 열매들은 마지막 심판의 불에도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되는 ‘영원한 소득’이 되며, 이러한 문화 발전은 택자의 구원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인류의 문화 발전을 기뻐하시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영광 받으신다.


이러한 광대한 문화 프로그램은 ‘일반 은총’에 의해 가능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우리의 죄와 사탄의 방해가 제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러한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의 문화적 활동은 자극되고 고무되며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카이퍼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란 것은 광대한 하나님의 ‘일반 은총’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며, ‘일반 은총’에 의하여 허락되고 가능해지며,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확실성을 보장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III. 간단한 평가

 

이상에서 살펴볼 때, 카이퍼의 문화관에서 아주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씨(kiem)’ 사상이다. 이 ‘씨’는 영원 전에 예정되었으며, 창조시에 인류의 조상에게 대표적으로 주어졌으며, 처음부터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발전에 따라 발아, 발전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퍼의 문화관의 핵심인 ‘계발 사상(ontluikingsgedachte)’과 ‘유기체 사상(organische gedachte)’을 보게 된다. ‘계발 사상’이란 창조시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들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다우마 교수에 의하면, 카이퍼에게 현저하게 나타나고, 스킬더에게는 절제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칼빈과 성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기체 사상’이란 19세기의 낭만주의(Hölderlin 등)와 이상주의 철학(Schelling과 Hegel 등)에서 비롯된 사상인데, 종전의 기계적 우주관에 반대하고 실재(實在)를 생명 있는 유기체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에 의하면, 1) 유기체는 생명이 있으므로 성장하고 발전하며, 2) 유기체는 단순히 각 부분들의 연결이 아니라 전체로서 조화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은 낙관주의, 진보주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카이퍼는 바로 이러한 19세기 후반의 유기체 사상과 진보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서 ‘낙관적인 문화관’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카이퍼에게 있어서 반복해서 나타나며, 조금도 의심받지 않고 자명한 사실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 진보’에 대한 신뢰이다. 그는 그 당시에 진행되고 있던 과학 기술의 발전, 예를 들면 증기 기관, 전기, 화학 등의 발명과 발전에 매료되었으며,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이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미가 아닌 바로 구라파(특히 북구라파)와 북미에서, 그것도 게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에게서 경이적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필자는 이것이 카이퍼의 문화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특정 철학이나 어떤 특정 사상보다도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과학 기술의 진보’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북구라파에서의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연결시켜서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 곧 그의 ‘문화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문화 발전이 때로는 거룩하지 못하며 택자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아니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봐서 계속적인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은총의 열매인 이 총체적인 발전은 계속 진보한다. 이것은 항상 거룩한 것은 아니다. 아주 거룩치 못할 때도 자주 있다. 그러나 여하튼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진보한다. 곧, 우리가 살고 있는 19세기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력, 사물에 대한 지식, 교통수단들, 삶의 편리함과 수많은 다른 것들이 이전 세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멀리 진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진보가 계속해서 이렇게 진행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 역(逆)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전에, 곧 세상의 종말 이전에 인류의 총체적인 삶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더 부요한 발전이 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처럼 카이퍼에게 있어서 인류 문화의 진보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었으며, 그의 방대한 문화론의 기초였으며 기본전제였다.

 

결 론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는 19세기 후반의 진보주의, 낙관주의에 크게 영향받은 신학자였다. 그는 기술 발전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이 1960년대에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 굴뚝에 연기만 나면 근대화요 발전이라고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선 지금, 공장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카이퍼도 역시 그 시대의 일반적 조류를 벗어나지 못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한 마디로 19세기 후반의 신학자였으며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신뢰하고 예찬했던 인류 문화의 발전이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것도 최고의 문화 발전을 이룩했다고 그가 그토록 자랑하던 게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에 대량 살육의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낙관적인 문화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가 죽기(1920년) 몇 년 전에 1차 세계대전을 직접 목도하기는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의 사상을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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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신학포럼 발표 원고(2006. 5. 1. 서울중앙교회, 5. 15. 광주은광교회)

 

2. 개혁주의 문화관과 고신교회


변 종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신학)

 

서 론

 

고신교단은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고신교단은 출범 초기부터 개혁주의 신앙, 개혁주의 신학과 이에 입각한 개혁주의 생활을 강조해 왔으며, 또한 동시에 개혁주의 문화 건설을 주창해 해왔다. 곧 이 땅에 성경 말씀에 입각한 개혁주의 문화 건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사명임을 일깨우고, 각자가 처한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 문화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해 왔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문화관이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먼저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 다음, 개혁주의 문화관 논쟁에 선구자적인 논의를 제공했으며 오늘날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의 문화관에 대해 신학적으로 제일 날카로운 이의를 제기한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또한 이들에 대해 명확한 분석과 평가를 제공한 다우마 교수의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문화관을 가져야 되는지에 대해 필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자 한다.

 

I.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文化)는 단어는 영어로는 culture, 독어로는 Kultur, 화란어로는 cultuur라고 하는데, 모두 다 라틴어 동사 colere에서 온 것들이다. colere는 ‘(집을) 짓다, (밭을) 갈다, 돌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의 문화 활동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냥 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일거리를 주셨다. 그것은 곧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이었다(창 2:15). 여기서 ‘다스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db[)’는 ‘노동하다(to labour), 일하다(to work)’는 뜻을, ‘지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마르(rmv)’는 ‘지키다(to keep), 경계하다(to watch), 보호하다(to guard)’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할 일 없이 지낸 것이 아니라 노동, 즉 문화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문화 활동은 타락하기 전에 이미 있었으며, 그 자체는 죄와 상관없는 신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것은 명령인 동시에 축복이다. 여기서 “땅을 정복하라. ... 다스리라”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다. 곧 문화 활동에 대한 사명이다. 따라서 문화 활동에 대한 사명은 인간의 타락 전에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문화 활동은 에덴동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창세기 1:28을 강조해 왔다. 우리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문화적 사명이 있음을 강조하며, 개혁주의 문화 건설을 촉구해 왔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문화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해 왔는가? 특히 화란에서 많이 발전된 개혁주의 문화관이란 어떤 것인가? 이를 위해 먼저 화란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II.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개혁주의 문화관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였다. 그의 문화관은 화란의 자유대학뿐만 아니라 미국의 칼빈대학, 남아의 포쳅스트롬 대학과 일본의 고베신학교, 그리고 한국의 고신대학교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카이퍼는 그의 문화관을 1895년 9월 1일부터 1901년 7월 14일까지 신학 잡지인 「드 헤라우트」(De Heraut)에 매주 연재했다. 그리고 이 글들을 모아 「일반 은총」(De Gemeene Gratie)이란 제목의 3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카이퍼는 이 책에서 그의 깊고 폭넓은 문화론을 전개하였다. 그 개요에 대해서는 필자가 전에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핵심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 출발점: 일반 은총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의 출발점은 ‘문화적 사명’이 아니라 ‘일반 은총’이었다. 인간의 타락 후에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그의 문화관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문화관을 노아 홍수 후의 언약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후에도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를 완전히 거두어 가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역사가 진행되게 하셨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베푸시는 은혜 곧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문화 활동이 가능해진다. 카이퍼는 그 후에 낙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논의를 하지만 창세기 1:28은 다루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카이퍼에게 있어서 인간의 문화 활동이 덜 강조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폭넓은 일반 은총의 빛 아래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 기초되고 자극된다. 그래서 카이퍼는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활동을 매우 강조하고 촉구하였다.

 

2. 하나님의 형상

 

 카이퍼는 옛 신학이 너무 개인의 구원에만 집착했다고 비판한다. 곧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논할 때 사회적 요소를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문화 발전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이퍼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문화 발전의 ‘씨들(kiemen)’을 심어 놓으셨다. 이 씨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발아(發芽)하고 성장(成長)한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당위(當爲)이며 필연(必然)이다.

 

 이러한 인류 발전은 ‘독자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구원만 목표로 하신 것이 아니라 문화 발전도 목표로 하셨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에 필요한 능력과 가능성을 부여하셨다.

 

3. 하나님의 예정

 

 카이퍼에 의하면 이러한 인간의 역사 발전은 ‘하나님의 예정’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예정이란 단지 택자들의 구원(특별 은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 은총의 영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 관계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심어 놓으신 것들이 싹이 나오고, 발전하고, 충만한 발전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4. 새 예루살렘

 

 이렇게 해서 발전된 문화는 종말 때에도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종말 때 온 세상이 불타는 가운데서도 남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잠재해 있는 생명의 씨들, 사물의 근본 의미라고 한다. 카이퍼는 이를 위해 튤립과 다알리아를 예로 든다. 이런 것들을 심으면 먼저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 꽃이 핀다. 겨울이 오면 농부가 이것들을 잘라 버리거나 뽑아 버린다. 이듬해에 날이 따뜻해질 때 농부가 그 씨를 꺼내어 심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싹이 나고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멸망할 때에 일반 은총의 모든 식물이 잘라져서 거두어지지만, 새 땅에서 이 일반 은총의 씨가 다시 피어날 것이며 더욱 번창할 것이다.

 

 카이퍼는 이것을 또한 요한계시록 21:24,26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한다. 24절에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되어 있고, 26절에 다시금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라고 말한다. 카이퍼는 이 구절들의 말씀이 종말 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고 본다. 곧 여기서 ‘만국의 영광과 존귀’란 ‘우리 인류의 선행하는 발전 가운데서 그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곧 ‘만국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일반적인 민족 발전의 정도’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흐레이다너스는 그의 계시록 주석에서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는, 최후의 날 후에 곧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되었을 때에, 땅의 왕들이 아직 있어서 그들의 탁월성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지상 시대에 하나님이 왕들과 권세자들과 힘 있는 자들, 각 분야의 유력한 자들을 회개케 하시며, 또한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교회를 세우는 일과 그의 나라가 영광 가운데 임하는 것에 협력하게 하신다. 영원에서는 이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카이퍼는 자신의 생각을 따라, 이 세상에서의 일반 은총의 열매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이전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영원한 소득(blijvende winste)’ 곧 ‘지속적인 이득’이 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면 인간의 문화적 활동은 하나님의 영원전 예정에 뿌리박고 있으며, 창조시에 그 능력과 씨들이 주어졌으며, 역사의 발전에 따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들은 마지막 심판의 불에도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까지 이전되는 영원한 소득이 된다.

 

II. 카이퍼의 문화관에 대한 비판들

 

1. 클라스 스킬더의 비판

 

 이러한 카이퍼의 문화관을 비판한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가 있다. 그는 1947년에 「그리스도와 문화」(Christus en cultuur)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먼저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의 세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1) 카이퍼는 ‘타락 이후’의 역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타락 이전의 낙원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를 살펴야 한다.

 

2) 카이퍼는 우리에게 ‘허용된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는 타락 이후에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거기서 ‘일반 은총’ 개념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것’이 아니라 ‘명령된 것’이 무엇이냐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3) 카이퍼의 문화관은 지나치게 낙관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래서 사명감보다는 자기만족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스킬더는 ‘일반 은총(gemene gratie)’이라는 말 대신에 ‘일반 명령(gemene bevel)’, ‘일반 소명(gemene roeping)’ 또는 ‘일반 사명(gemene mandaat)’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에 초점을 두며 창세기 1:26-28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2. 다우마 교수의 평가

 

 화란 깜뻔의 다우마(J. Douma) 교수는 1966년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일반 은총」(Algemene Genade)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클라스 스킬더와 칼빈의 일반은총론을 비교, 분석하고 평가한 기념비적 논문이다.

 

 그의 방대한 연구 중 제일 큰 공로는 카이퍼와 스킬더의 문화관은 그 근본에 있어서 사실상 많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카이퍼의 문화관과 스킬더의 문화관은 대개 정반대로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사실은 그 근본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계발 사상(啓發思想, ontluikingsgedachte)’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부여하신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발휘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 다 문화적 사명을 적극 주장하였다. 차이점이라면, 카이퍼는 불신자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본 반면에, 스킬더는 불신자들의 문화 속에 사탄적 요소가 있음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스킬더는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와 불신자들의 문화를 서로 대립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스킬더도 참된 기독교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함을 주장한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스킬더는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공통 문화’에 대한 관심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을 강조한 점이 그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스킬더는, 이러한 기독교 문화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으며, 교회는 마치 온 집을 따뜻하게 만드는 ‘벽난로(vuurhard)’와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종교개혁 시대의 칼빈에게서는 이런 ‘계발 사상’이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칼빈도 물론 일반 은총을 인정하고 문화 활동을 인정한다. 그러나 칼빈에게서는 이것이 대단히 조심스럽고 절제된 형태로 나타난다. 칼빈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인간이 ‘향유’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창세기 2:15도 칼빈은 문화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사람은 일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먹고 마시며 잠자는 것으로 삶을 허비하는 것보다 더 자연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동산을 지키게 하신 것’에 대해서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1) 우리가 땅을 너무 착취하면 안 된다. 2)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받은 그대로 또는 그보다 더 좋은 상태로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다우마 교수의 결론은, 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카이퍼에게 특징적이며 스킬더에게는 제한된 형태로 나타나며 칼빈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발 사상’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우마 교수는 자신의 문화관으로 ‘나그네 인생(vreemdelingschap)’을 주장하였다. 이 단어를 정확히 번역하자면 ‘외국인 됨’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11:13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외국인(xevnoi)’이란 단어는 ‘낯선 사람(strangers, aliens)’을 뜻하며, ‘나그네(parepivdhmoi)’란 단어는 ‘임시 거주자(sojouners, temporary residents)’를 뜻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외국인’으로, ‘임시 거주자’로 살아가며,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따라서 카이퍼나 스킬더에서처럼 문화 활동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3. 다우마 교수의 견해에 대한 반응

 

 이러한 다우마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도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드 프리스(W. G. de Vries) 목사와 깜프하이스(J. Kamphuis)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였다. 깜프하이스 교수는, 창세기 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다우마 교수가 단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보고 마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정복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 곧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노동’하는 것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한편, 아뻘도른의 펠러마(W. H. Velema) 교수는 “우리는 나그네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는 문화적 사명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III. 필자의 평가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에 어떠한 견해를 취해야 하겠는가?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전체적인 흐름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인 동시에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우리는 그냥 할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천국에 가는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그냥 길가는 나그네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낯선 사람, 임시 거주자이지만 또한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일 많은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일하는 임시 거주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명을 부여받았는가?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 사명’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8:19-20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 최고 최대의 사명이다. 그래서 보통 ‘지상(至上) 명령’으로 불린다. 둘째는 ‘문화적 사명’이다. 이것은 창세기 1:28에 잘 나타나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여기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적 사명이 인간의 타락 이후에 소멸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계속되는 것처럼(창 9:1),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도 계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타락 후에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강조되지는 않았다. 문화 활동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말해지고 있다. 곧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한다(고전 10:31). 여기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무엇을 하는 것은 다 문화 활동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타락 후의 인간의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서 의미가 있다.

 

2. 문화적 사명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

 

 창세기 1:28의 문화적 사명은 타락 후에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물론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의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배하지도 않으며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연하게 문화 활동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카이퍼나 스킬더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특히 스킬더는 그의 문화관을 전개함에 있어서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카이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너무나 문화에 집착하고 당시에 발전하고 있던 문화에 매료되어 사변적인 문화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문화적 사명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곧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상태에 살고 있다. 이 세상에는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이 더 많다. 그래서 타락 후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유지하고 전승하는 게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게 되었다(창 4:26). 문화 발전은 오히려 가인의 자손들에게서 발견된다(창 4:16-22).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난 후 성을 쌓았다(건축).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음악). 그리고 두발 가인은 각종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기계 문명). 이처럼 가인의 후손들은 문화 발전에 열심이었고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에 반해 셋의 자손은 그저 자녀를 낳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만 되어 있다(창 4:25-26). 곧 그들은 신앙 행위에 초점을 두고 살았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면, 이 세상은 마치 불난 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불이 나기 전에는 정원을 갈고 꽃을 가꾸며 아기자기하게 살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만 불이 나고 말았다. 그러면 무엇부터 해야 하겠는가? 정원 가꾸는 일을 계속해야 하겠는가? 꽃을 다듬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하겠는가? 아니다. 불 끄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곧, 죄에 빠져 죽어가는 영혼을 건지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 즉, 전도 사명이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에덴동산에는 없었던 전도 사명이 최우선 과제로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우선순위의 변화에 대해 화란의 개혁 신학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창세기 1장은 읽고 깊이 생각했지만, 인간의 타락을 다루고 있는 3장은 대충 읽고 넘어갔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은 많이 말하지만, 그래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명에 있어서 우선순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여전히 창세기 1장에 주어진 문화적 사명을 이룰 것을 강조하고 촉구했던 것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그래서 인죄론이나 구원론 등에서는 매우 심도 있게 다뤄지지만, 이상하게도 문화론에서는 거의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화란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문화관은 지나치게 낙관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죄의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피상적인 문화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란 개혁 교회는 문화적 사명은 강조했지만, 전도 사명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였다. 그 결과 전도가 약화되고, 나아가서 교회도 약화되고 말았다. 이는 다시금 기독교 문화 활동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문화적 사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집에 불이 났다고 했는데 비록 불은 났지만, 그래서 불 끄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지만 정원 가꾸는 작업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위의 ‘불난 집’ 비유가 100% 정확한 것은 아니다. 좀 더 근접한 비유를 들자면 이 세상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병원이며 사람들은 환자들이다. 급성환자들이 아니라 대개는 만성환자들이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개 70~80년이 걸린다. 그러니 우리는 환자들 치료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들을 다 팽개칠 수는 없다. 중증환자이긴 하지만,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이다. 그러니 밭 갈고 노동을 해야 한다. 정원을 가꾸고 한 번씩 노래를 부르고 음악회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음악회를 우리는 ‘환자들의 음악회’ 또는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들의 음악회’라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문화 활동을 우리는 사형수들의 문화 활동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타락 후의 인간에게 있어서 물론 문화 활동이 있기는 하지만,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전도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 후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화적 사명을 무분별하게 강조하는 카이퍼나 스킬더 같은 이의 주장은 잘못이다. 절제 있는 문화 활동, 조심스런 문화 활동을 말한 칼빈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있다.

 

3. 이 세상에서의 문화 활동의 열매새 예루살렘으로 이전된다는 주장은 문제가 많다.

 

 카이퍼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의 문화 활동의 열매 중에서 긍정적인 것은 새 예루살렘으로 이전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한 소득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카이퍼는 이 세상에서의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문제가 많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 종말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니”(벧후 3:10). 여기서 체질(體質)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는 ‘스토이케이아(stoiceiva)’인데, 이것은 ‘만물의 구성요소’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이것을 원자라고 생각했지만 요즈음은 그보다 더 작은 것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어쨌든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이 세상에 질적으로, 구성요소에 있어서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이 세상을 ‘개조’하거나 ‘리모델링’한 것은 아니다. 완전한 재건축이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근본적인 변화일 것이다. 루터파 주석가들은 ‘새로운 무에서의 창조(nova creatio ex nihilo)’를 말하는 경향이 있고, 개혁주의 주석가들은 대개 “새로운 질서”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후서 3:10-12의 말씀을 고려할 때, ‘무에서의 창조’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물의 구성요소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물질 자체가 달라지고 물리법칙도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것들이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새 예루살렘으로 이전된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면 이전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택함받은 자들의 ‘영혼(yuchv)’이다. 곧 성도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된다. 육체는 죽어서 부활의 때를 기다리게 된다. 물론 영혼은 이 세상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갈 것이다. 기억을 다 상실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기억이 있어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계 5:9-10, 7:10). 이 세상 역사의 기억은 보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전된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찬양할 것이다(계 11:17-18, 15:3-4). 따라서 이전되는 것은 ‘영혼’이며, 영혼의 ‘기억들’이며 ‘정보들’이다. 그러나 물질들은 이전되지 아니한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다(딤전 6:7).

 

2) 두 번째로 생각할 말씀은 전도서의 말씀이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한다(1:2). 여기서 ‘헛되다(하벨)’는 것은 영원한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영속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유익이 없고 무익하다.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닥치는 죽음 때문이다.

 

 그런데 전도서 중에서 아주 의미 있는 구절이 하나 있다. 전도서 3:14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행하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헛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지만 해 위에는 새 것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해 위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새 것’이다. 그 분이 행하시고 베푸시는 것은 ‘새 것’ 곧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곧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진리와 의이다. 따라서 카이퍼가 말하듯이 인간이 행하는 문화 활동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활동이 영원하다. 영생과 진리와 구원의 열매가 영원한 소득이 된다. 따라서 카이퍼의 주장은 사변적인 문화 철학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특히 전도서의 전도자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사상이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 활동이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문화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주장은 칼빈의 견해와도 다르고, 화란 내에서도 스킬더와 흐레이다너스에 의해 비판받은 사상이며, 다우마와 펠러마도 받아들이지 않는 견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 지식인들이 개혁주의 문화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성경과 칼빈의 신학에 바탕을 둔 개혁주의 문화관이 아니라 19세기 말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변적인 문화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결 론

 

 그러면, 마지막으로 필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단은 어떤 문화관에 기초해 있는가? 카이퍼의 문화관인가? 스킬더의 문화관인가? 아니면 칼빈의 문화관인가? 우리 고신대학교는 어떤 문화관에 기초해서 설립되고 운영되고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올바른 문화관의 정립, 올바른 신학의 정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한 신학자의 견해를 따를 것이 아니다. 카이퍼나 스킬더나 또는 어떤 위대한 신학자의 견해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성경적인 문화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연구해서, 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신 교회의 입장이며 또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基督敎大學과 學問에 對한 聖經的 眺望」(高神大學校 設立 50週年 및 漢石 吳秉世 博士 隱退 記念 論文集), 고신대학교 출판부, 1996, pp.197-212에 기고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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