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박사께 묻는다
손봉호 박사(고신대 석좌교수)는 최근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방한한 교황 프란치스코를 격찬하고 칭송한다(“종교는 바른 일에 급진적이어야” <한겨레신문>, 2014.8.24.). 그러나 독자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기독교가 무엇이며,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존재의의와 필요성은 무엇인가? 무엇이 세상에 감동을 주고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2014)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감동에 목말라’ 있던 한국 사회는 바티칸 종교 지도자의 모습과 가르침에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교황이 보여준 낮은 자세, 겸손, 검소함, 진실성, 자비한 모습은 복잡하고 고단한 삶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청량제 같았다.
교황에 대한 한국사회의 긍정적 반응은, 우리 사회가 종교를 향하여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게 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경호비가 몇 배가 더 들고, 훨씬 더 많은 경호원이 필요한 한국산 작은 자동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신학자들에게 ‘프란치스코 현상’ 연구라는 과제를 남겼다.
개신교 안에도 이름 없이, 빛 없이 그리스도가 맡긴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귀한 목회자들과 성인(聖人)들이 곳곳에 있다. 교황의 인기는 개신교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자아냈다. 개신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보다 더 시급하게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느니, 자신감을 잃었다느니, 교리 차이를 내세우며 반대만 하는 개신교의 모습이 부끄럽다는 등의 혹평이 나왔다.
손봉호는 방한한 프란치스코를 격찬하고 한국종교계가 그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한국에서 자기의 신앙과 임무에 철저히 그리고 진실하게 충실했으며, 자신이 섬기는 예수님을 따라 당연한 윤리적 삶을 살고,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낮고,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가 아닌 무엇이 “위선과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경쟁과 미움이 가득 찬 세상에서 양보와 사랑을, 부와 사치가 큰 자랑이 된 세상에서 겸손과 검소함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심어주는 역할을 하겠는가”라고 격찬한다.
손봉호는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존재 의의 또는 필요성을 윤리적 삶에서 찾는다. 그리고 정직과 겸손과 청빈의 삶 실천이 세상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킬 것이라고 한다. “낮아지고 검소하고 자비롭고 참되라고 가르치지 않는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종교가 필요한 이유다”고 한다. “화려한 건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천막에 모여 예배나 불공을 드리면 세상이 감동할 것이고, 소형차를 타거나 걸어 다니면 탐심도 줄어들고 극심한 경쟁도 약해진다”고 한다.
손봉호는 세상이 무엇에 감동하며,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교황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낮은 자세, 검소함, 겸손에서 찾는다. 교황에 열광하는 한국사회가 무엇에 목말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손봉호는 한국의 종교계 특히 기독교인들을 꾸짖는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큼 진실하지 않으며, 돈, 권력, 인기 같은 세속적인 이익에 연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실과 양보, 사랑, 겸손과 검소, 평화 등을 가르치지만, 교회는 교회답지 않고, 종교인과 종교 지도자는 말만 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손봉호의 교황 칭송과 한국의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에 대한 꾸지람은 일리가 없지 않다. 겸허히 듣고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교훈이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에 손봉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통로로 그의 가르침을 접했다. 이모저모로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왔다. 그의 교황 칭송과 한국 교회를 향한 꾸중은 오랫동안 지녀왔던 필자의 의문이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의 근본에 관한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진보계 기독교 지도자들께 드리는 질문이기도 하다.
교회의 본질적 속성인 사도성 곧 사도적 직무 수행이다. 사도직은 단회적이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바울에게 국한된다.
오늘의 모든 교회와 기독인은 사도성을 부여받았다. 사도성 또는 사도적 직무의 핵심은 예수 그분이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알리는 증언 사역이다. 베드로와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은 무엇에 전심 전력했는가? 예수가 예언자가 오리라고 말한 그 메시아, 그 그리스도, 그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마 16:16; 행 5:42, 17:3-5, 18:5; 딤전 2:5; 요일 2:22).
교회와 기독인들의 사도성 또는 사도적 직무는 기독인의 타종교인과의 대화, 이웃 사랑과 섬김, 나눔 활동의 원천적인 동기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다(딤전 2:5). 중보자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사도적 직무의 핵심은 이처럼 구원의 진리를 증언, 전파하는 활동이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진정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프란치스코나 다른 종교 지도자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윤리적 모범이 아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인류의 목마름의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복음 결핍 때문이다. 기갈(飢渴)에 허덕이는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소개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전심전력한 사도적 직무를 외면했다. 로마가톨릭교회에 따르면, 예수 없이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 도덕적 삶이 훌륭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미지의 신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제16조).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가 로마가톨릭교회에는 충실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사도적 직무에 충성하지는 않았다. 교황(주교)이 사도직을 배타적으로 계승했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사도적 직무는 이행하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전심 전력한 시도직무와 무관한 정치적 종교적 행보룰 보여주었다.
손봉호가 교황을 격찬하면서 그가 자기의 신앙과 임무에 철저했고, 자신이 섬기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보여주었다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손봉호의 교황 칭송은 과연 그에게 기독교는 무엇이며, 복음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成肉)한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필자는 지난 40년 동안 이러저런 형태로 그의 메시지를 듣고 접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필자가 경청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 말하고 싶어 한다. 복음을 아는 기독인은 그것을 타인에게 전하고 실어한다. 마음 안에 있는 기쁜 소식을 감추지 않는다.
손봉호께 묻는다. 기독교는 무엇이며, 복음은 무엇인가? 낮은 자세, 겸손, 검소함, 진실성, 자비 등의 윤리적인 실천이 세상에 진정으로 감동을 주고, 실제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침묵하는가? 생명(zoe)의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길을 제시하지 않으며, 암시조차 하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인 것에 연연하고 중심적인 구원의 복음은 ‘쬐끔’도 언급하지 않는가?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 고려신학대학원 교수(1989-2009)
로마서 8장이 제시한 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생명을 갖게 되면, 예수님께 도달하도록 완전히 자라나기를 갈망하게 되고,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보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믿음과 선행(야고보서) 둘 다 필요하다. 믿고 구원 받으면 다 된 것처럼 함부로 사는 것이 문제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진실된 믿음일까?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화의 길은 과부와 객과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산상수훈의 삶을 포함한다.
기독교인들이 동네 개처럼 무시 당하는 이유는 후자를 행하지 아니하고 입으로만 사랑과 구원을 떠들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믿음의 증거로 후자를 잘 행하는 삶을 본다면, 이를 보고 이끌려와서 전자의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반면, 믿음 없는 선행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부질없는 것이다. 손봉호 씨는 자신의 윤리로 세상과 특히 기독인을 재단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장로라고 말하지 말고 윤리 선생이라고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