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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동상과 시복식 (서울 광화문, 2014.8.15.)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불행한 만남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은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불행한 만남의 연장이다. 첫째는 진실과 정의가 결여된 평화와 화해만을 강조하는 교황의 립 서비스 때문이다. 북녘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나의 동포,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면서 생명을 구걸하는 나의 동족들과 그들의 인권을 애써 외면했다. 둘째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가르치뫄 모순적인 행사 때문이다. 조상제사를 허용하면서도 광화문 대로에서 이를 거부한 희생자들은 '순교자' 로 추앙하ㅗ '복자'로 인준한 시복식은 모순 덩어리이다. 대전에서 가진 마리아승천기념행사는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이켰다. 셋째는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불행한 첫 만남 곧 임진왜란 가담에 대한 참회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1. 기만적인 용서 메시지
교황은 한반대륙 남북한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고 했다. 종교지도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남한이 북한에 무조건 퍼주기를 계속하라는 말로 들린다.
교황은 한반대륙을 무인반도로 만들 대량 학살용 핵무기 개발, 강제수용소, 종교탄압, 인간권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녘의 아사자들을 외면했다. 북한정권의 도발과 위협까지도 무한정 용서하고 인도적 명분의 대북 정권 지원을 강화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만을 했다. 대한민국 언론과 천주교회 언론사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교황의 발언을 비판하지 않았다. 하이에나처럼 사사건건 국가와 국군을 물어뜯던 언론들은 교황방한 동안 바티칸의 기관지처럼 행세했고, 로마교 선전에 충실했다. 반국가적 선동을 일삼던 언론들이 친종교 선전 언론으로 변신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인간 권리는 하나님이 부여했다. 인권을 착취함은 신권을 착취함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국회는 9년 전에 거론하기 시작한 북한인권법안을 아직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교황은 대한민국 국회 정상화와 분단 70년 종식 그리고 북한 주민의 인권 과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교황에서 묻고 싶다.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누이, 오빠가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면 그처럼 침묵할 것인가? 정의와 진실이 없는 평화와 화해 구호만 외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힘 있는 자들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부당하다고 항의하지 않았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사라면 북한 주민들 때문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신 예수의 심정을 생각했으리라. 마리아의 심정을 가졌다면 국가연합(UN)을 향하여 탈북난민수용소를 설치하라고 말하고, 중국을 향하여 탈북자송환을 중단하라고 말했으리라.
왜 교황은 고통당하는 자들, 굶주리는 자들, 자유를 갈구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자들을 외면하는가? 억압당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무관심한 교황의 행보는 2013년 10월 대한민국 부산에서 모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교황의 태도는 그가 망령된 정의구현사제단을 경고하지 않은 것과 한국천주교회의 이석기 선처 요청과 일맥상통하다. 교황의 화려한 행보의 이면에 가려진 이율배반적이고 로마가톨릭교회의 모습이 엿보인다
교황 베네딕트는 진실과 정의가 결여된 평화와 화해라는 실체가 없는 거짓 선전과 야합했다. 여러 면에서 나치에 적극 협력하고 일제와 야합한 교황 비오 12세를 연상시킨다. 비오 12세가 일제와 야합하여 조상숭배, 공자숭배, 신사참배를 허락한 것과 일치한다.
2. 이율배반적인 시복식
교황 프란치스코가 광화문 대로에서 124명에 대한 시복식(諡福式)을 가졌다. 복자(福者, blessed)로 시복(諡福)된 윤지충 등은 조상제사를 반대하다가 죽은 순교자들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조선 선교 초기에 조상제사를 사자숭배(死者崇拜)로 취급하여 금지시켰다.
천주교 수난기에 당시 조선 지역 목회권은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1790년 윤유일(尹有一)이란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북경에서 주교 구베어를 만나 위패(位牌)와 제사에 대한 교리를 배웠다. 구베어는 교황 베네딕트 14세(1740-1758)의 교시를 들어 제사는 용납할 수 없는 ‘이단행위’로 단정하고, 조상제사를 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윤유일은 구베어의 이 가르침을 교리를 사수하는 진리로 믿고 조선으로 돌아와 한국천주교인들에게 전했다. 그 이듬해 전라도 진산의 양반 댁 신자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상(喪) 장례는 정성껏 거행했지만 구베어의 가르침을 따라 그 위패를 불태우고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
윤지충은 “사람이 죽어 천당에 간다는 것은 축하할 일(祝事)이지 슬퍼할 일(弔事)이 아니다. 위패란 공산의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주장은 유교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사회의 가치관과 사회질서를 송두리째 흔드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권상연과 함께 전주성 밖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그의 피는 손수건에 적셔져 북경에 있는 구베어에게 보내졌다.
조상제사 거부는 당시의 조선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3대 사옥(死獄)을 가져왔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3대 박해(迫害)라고 한다. 3대 박해는 신유사옥(1801), 기해사옥(183), 병인사옥(1866)이다.
신유사옥(1801)은 유교(儒敎)의 가르침이 서양 오랑캐들이 퍼뜨리는 이단적 서학(西學)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천주교에 온화정책을 써오던 정조가 죽자,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정순황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벽파는 경쟁세력인 남인의 시파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많음을 알고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서학 곧 천주교를 박해했다. 천주교의 비인간성, 비국민성, 체제도전, 제사를 포함한 예교위반, 신분제 위협, 질서거부, 비밀지하조직, 내세지향적 사회개혁의지를 꼽았다. 이 때 선교사 주문모와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강완숙(여) 등이 참수당했고, 정약용은 유배당했다.
기해사옥(1839)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조선 교구가 독립적으로 탄생한 것과 맞물려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천주교의 교세가 증가되었다. 조선 조정은 다시 천주교인들을 박해하여 3명의 서양인 신부와 119명의 천주교인이 처형했다. 헌종은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리고 백성들이 스스로 이웃에 천주교인들이 없는지 살펴 고발토록 지시했다. 천주교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처형당한 자를 믿는 나쁜 종교이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등 도깨비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인간의 만고불변의 도리를 무시하고 독신주의를 주장하여 종족을 그치게 하고, 효 질서가 심각히 위협당한다. "백성이 삼가 성현의 교훈을 애써 지키고 옷깃을 가다듬으며 하늘과 덕과 자연의 법을 바로 준수하기만 하면 인위적 노력 없이도 땅에 충만하고 이단은 반드시 배척되지 않아도 스스로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병인사옥은 대원군에 의해 1866년(고종 3년) 1월초 국내에 있던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처형된 사건이다. 대원군 치하에서 발생했다. 천주교가 외세를 끌어들이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등 유학에 바탕을 둔 봉건적 조선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여긴 탓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프랑스와 조선이 전쟁을 했다. 프랑스는 강화도 사고에 보관된 우리의 문화재와 유산을 약탈해 갔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인이면 어린 아이들까지도 죽일 것이며, 서양 오랑캐가 더렵힌 이 땅을 서학인들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고 명했다.
조상제사 반대로 일어난 3대 사옥으로 약 8000명의 조선인 천주교인들이 죽었다.로마가톨릭교회는 한국 천주교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조상제사를 1936년에 이르러 일제와 야합한 결과로로 “조상제사는 시대와 풍습이 바뀜에 따라 우상숭배가 아니라 미풍양속”이라면 허용했다. 교황 피우스 12세는. 일제가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강요해온 신사참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인정해 주면서 조선의 조상제사와 중국의 공자숭배를 허용했다. 조상제사는 신사참배를 허용한 로마가톨릭교회의 더로운 정치적 야합의 결과이다. 교황은 독일 나치정부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제 군국주의와 동맹을 지원하고 축복했다.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강력히 항거한 조상제사 거부는 일제와 야합한 로마가톨릭교회의 결정으로 무의미하게 되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1994년에 이르러 개선한 유교식 제사를 시행하도록 했다. 위패와 지방을 사용하지만 신위(神位)라는 칭호는 쓰지 않고, 그 자리에 이름이나 세례명 또는 생전의 벼슬만을 쓰게 한다. 제주(祭主)가 위패 앞에 재배(再拜)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삼제(三祭)와 고인이 음식을 들 수 있게 밥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는 삽시(揷匙),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 등 유교 풍습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조상제사 거부자들에게 시복을 하면서도 여전히 조상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조상제사를 거부하다가 죽은 순교자들, 광화문 대로에서 '복자'로 인정된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교황이 그들에게 시복함은 이율배반적이고 기만적이라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까? .
윤지충을 포함한 수 천명의 죽음은 억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교황청은 조상제사를 금한 데 대한 잘못을 고백한 적이 없다. 조상제사 때문에 순교자들에 대한 복자 시성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방한한 교황의 화려한 행보의 이면에 가려진 이율배반적이고 기만적인 로마가톨릭교회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다.
3. 마리아승천대축일의 우상숭배
초기 기독교는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요한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믿고 있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리아 신격화의 강도를 차츰 강화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냈다.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져 신도들의 기도를 중보한다고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4분의 1에 해당하는 많은 지면을 마리아론에 할애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리아 승천론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키릴이 이끈 431년 에베소공의회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정한 뒤에, 로마는 마리아를 더욱 신격화했다.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들이 ‘산타 마리아’(Santa Maria)에게 헌당되었다. 마리아는 서서히 ‘하늘의 여신’으로 둔갑했다. 이를 교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는 동정녀 마리아가 “임태한 첫 순간에... 원죄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면죄된 채로 보전되었다”는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했다. 성모 ‘몽소승천’(蒙召昇天) 교리는 마리아 무죄교리를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가 마리아 승천 교리를 확정함으로써, 마리아는 명실공히 ‘하늘황후’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나란히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린다. 중보자가 되었다.
이러한 마리아 교리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마리아론에 대한 글에서 상론한다. 교황 프란시스가 대전에 집전한 마리아승천기념 미사는 성모 마리아를 분노하게 했다. 마리아는 승천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신격화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지만, 그를 신격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는 일이다. 한국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과 더불어 한 발자욱 더 하나님의 진노에 다가섰다.
4.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불행한 첫 만남
박근혜 대통령은 잔혹한 역사로 유명한 로마가톨릭교회 예수회가 세운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방한한 교황에게 자세를 낮추었다. 공항으로 영접을 나가고 명동 미사에 참여한 뒤 환송했다. 대한민국의 심장인 광화문 대로를 종교집회에 내어주었다. 장차 수많은 시비의 원인을 만들어 놓았다. 자신이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것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혼동하는 듯했다. 교황방한 동안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지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막강한 조직을 가진 바티칸교황제국의 분봉왕(分封王) 모습이었다.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첫 만남은 불행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가담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로마는 지금까지 참회한 적이 없다. 로마가톨릭교회의 한국 침략과 한국천주교회의 친일행각은 추후라도 바티칸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석고대죄해야 할 사안이다. 이 주제는 "교황-주교가 사도직을 계승했는가?" 초두에서 언급했다.
교황 방한 기간 중 <문화일보> (2014.8.16.) 머리기사는 내가 쓴 글을 중심으로 교황반대 움직임을 소개했다. "교황 시복식은 재앙, 기도교회 모독하는 처사"라는 제목의 머리글을 실었다.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불행한 첫 만남을 필자의 글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각금재 문화부장 reap@newsis.com <뉴시스>의 글).
프란치스코(78) 교황의 방한을 반대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이 구체화했다. 로마가톨릭과 교황 정체알리기 운동연대(조직위원장 송춘길 목사)는 이미 지난달 22일 광주 겨자씨교회에서 ‘기독교회와 로마교 가톨릭의 일치 반대를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목사 2000여명이 참석했다.
운동연대는 또 ‘흑백보다 더 다른 기독교와 가톨릭’, ‘가톨릭과 바람난 한국교회’ 등의 서적 116만부를 배포했다. 교황이 우리나라에 오기 이틀 전인 12일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반대운동연대와 일산 킨텍스에서 ‘기독교·가톨릭 일치 반대 대성회’를 개최했다. 100여 교회 교인 1만여 명이 참가했다.
16일에는 교황방한대책협의회(회장 변병탁 목사)와 함께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8·16 기도 대성회’를 강행했다.
운동연대는 “가톨릭은 기독교회가 아니다”고 못박는다. “예수님을 근원으로 해서 성령에 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한 기독교회가 아니라 기독교회와 바벨론의 태양신과 우상숭배 종교와 인본주의 사상과 세상정치가 혼합, 혼재돼 로마에서 신생한 기독교회의 유사 종교”라는 것이다.
“가톨릭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행위 구원의 이설로써 십자가의 도를 왜곡시켜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익하게 만들고, 이 세상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죄와 사망에서 영혼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등 복음사역에 있어서 대적”이라고 비난한다.
“시복식이라 하여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죽은 자에게 돌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마리아 형상을 만들고 이에 십자가를 함께 세우는 종교의식 행위를 한다”며 “이는 혼합종교의 전형으로서 기독교회를 모독하는 처사”라고 강변한다.
정부도 규탄 대상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어떻게 대한민국 중심부 광화문 광장에 죽은 자를 위한 로마 가톨릭의 종교의식을 개최케 하여 주고, 지극 정성을 다해 제일 높은 수준의 경호병력으로 보호하는가. 철통같은 경찰병력으로 대한민국 땅, 국민들이 밟을 땅을 밟지 못하게 주권을 제한하고 통제한단 말인가. 어느 나라 경호원들이고 경찰 병력인가?”
임진왜란 조선정복군단 그림, 로마가톨릭교회의 상징 십자가 깃발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광화문은 집회 장소가 아니다. 많은 차량이 오가고 서울시민들이 내왕하는 곳이다. 2002년 월드컵 응원 때 시민들이 사용했지만, 종교·정치적 행사에 사용된 적이 없다. 그 대로를 가로막고 전 국민이 지켜보는 데서 행하는 미사와 시복식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스타일은 아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넓은 장소가 없어 그곳을 종교행사 마당으로 택한 것 같지는 않다. 로마가톨릭교회의 해묵은 선교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처음 우리나라 땅을 찾은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들은 침략자였거나 침략자들에 가담했다. 막강한 세력과 조직을 가진 수도단 예수회 소속이었다. 예수회는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를 세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대학을 졸업했다. 예수회 사제 교황 프란치스코가 대한민국의 중심이고, 세종대왕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종교행사를 함은, 권력자들을 개종시켜 그들의 힘으로 신민(臣民)들을 로마가톨릭교회로 전향하게 하려는 정복주의 선교전략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한국 정부는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방한할 때도 그곳을 집회장소로 내어주고 동등하게 대우할지 궁금하다”고 문제 삼는다.
운동연대는 “광화문에서 로마교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시복식 종교행사를 허용한 것은 하늘로부터 재앙을 불러들이는 단초가 된다”면서 “성경적인 우리 기독교회로서는 이를 간과하지 않고 재앙을 불러들이는 로마 가톨릭의 광화문에서의 시복식 종교행사의 실체를 폭로 규탄하고 거짓된 종교행사에 미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벼른다.
최 교수는 역사도 불러온다.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첫 만남은 참으로 불행했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 군단의 이름은 ‘그리스도단’이고, 그 침략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칼라’를 한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들이 뒤따랐다.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고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와 민족은 큰일 날 뻔했다.”
최덕성
리포르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