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황금장미
1. 황금장미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은 매년 고급 금세공 예술품인 황금장미를 국가 원수, 왕, 교회, 도시 등에 선물한다. 뛰어난 인물, 교회, 종교공동체에 보낸다. 황금장미는 특별한 영예와 축복의 상징이며,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을 장악하고 있거나 장악하려는 교황의 권위를 상징한다. 교황은 황금장미를 사순절에 축복의 수혜자들에게 표시로 보낸다. 이 관습은 11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황금장미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만났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시실리아의 왕에게 황금장미를 보냈다. 황금장미를 받은 왕은 영예로운 축복의 선물을 받은 지 일년이 채 못 되어 왕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의 황후는 교황으로부터 황금장미를 받았다. 그 후 황후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가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은 자살을 했다. 왕위계승자인 그녀의 조카 페르디노는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했고, 세계 제1차대전 발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제국으로 불려지지 않는다. 교황의 황금장미와 축복이 재앙을 가져온다는 통설이 생겨났다. 아래에서 다시 소개할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방한(2014)하여 한국을 축복하고 대한민국의 심장 광화문대로에서 시복식을 거행하고 대전에서 성모승천기념미사라는 우상숭배 행사를 집례했다. 교황이 한국사회에 감동을 주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한 것처럼 알려졌다.
그런데 교황이 한국을 떠난 뒤 부산과 경남 지역은 막대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산 사태가 나고, 사람들이 죽고, 버스가 떠내려가고, 시신이 강과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대홍수 참화와 교황의 축복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우연의 일치인인가?
교황 프란치스코가 한국을 떠나기 전날 내가 참석한 주일 아침 예배에서 설교자는 “교황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재앙을 받았다”, “교황의 축복은 재앙으로 되돌아왔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 일어난 저주스런 사건들을 소개했다. 교황의 저주(Anathema)를 받은 자들에게 오히려 행운이 찾아왔다고 했다. 설교자는 한국에도 조만간 큰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했다. 폭우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무슨 주장이든 확고부동한 근거가 뒷바침해야 하고. 주장과 논거가 일치해야 한다. 역사는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재앙의 원인이 과연 교황의 축복 때문인지, 찾아온 행운이 과연 교황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인지 그 관계를 확고하게 단정 짓기 쉽지 않다. 매 주일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는 개신교회 신도들도 가끔 불행한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프란치스코의 방한 직후, 그의 조카 일가족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주말 휴가를 마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던 에마누엘 오라시오 베르골리오와 그의 가족이 탄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했다. 에마누엘은 중상을 입었고 아내 발레리아 카르모나와 2살의 아들과 8개월 된 아들이 사망했다. 교황은 자기 가족에게 다아오는 재아을 막아낼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증오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과 마리아승천기념 행사에서 우리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우상숭배의 실상을 똑똑히 보았다. 천주교회는 중국의 공자숭배와 한국의 조상제사와 일본의 신사참배를 허용한다. 제사는 귀신을 섬기는 행위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우상숭배에 관한 제2계명을 제1계명에 포함시켜 그 의미와 중요성을 축소, 은폐시킨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증오한다.
교황의 축복과 저주에 관련된 설교를 듣는 동안 세 가지가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첫째, 무당이 푸닥거리하고 나서 참관자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장면이었다. 어릴 때 보았던 것을 근래에는 공주 신원사 인근 마을 가을 푸닥거리 행사에서 보았다. 사람들은 무녀의 종교 행사가 끝나자 그에게 복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둘째, 로마가톨릭교회가 번성한 필립핀, 남미 등지의 나라들이 가난에 찌든 장면이다.
셋째, 교황의 저주를 받은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손들은 복된 역사를 이루어왔다. 종교개혁 정신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사실상 지배하던 서양 중세기, 쌍두마차시대를 종식시켰다. 중세 망딸리떼를 뭉개버렸다. 지난 400년 동안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반대로, 바티칸의 축복 아래 수많은 유태인을 살해한 나치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인류의 영원한 지탄을 받고 있다.
2. 교황의 축복이 재앙으로 바뀜
아래의 글은 다소 극단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인다. 소시얼네트웍에 실려 있다. 구글에서 교황의 축복과 저주(Papal Blessings and Curses)를 검색하면 영문을 볼 수 있다. 특징은 "흥미로운 역사적 관찰을 담고 있다. 후학들의 연구 과제로 충분하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은 소개말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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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탈리아에서는 월드컵 세계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로마가톨릭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별히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 팀을 축복하고 다음 날 경기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팀은 패배했다.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세계 제패를 꿈꾸며 결승에 진출했던 이탈리아 팀도 바티칸에서 교황의 특별축복을 받고 출전했다. 그러나 패배했다. 이탈리아의 신문들은 교황의 축복을 위심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주간지 <카톨릭 위클리>(Catholic Weekly, 1990.7.25.)도 교황 축복의 효력을 의심하는 글을 실었다.
역사는 1588년 스페인 함대 사건을 알려준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영국을 정복하여 그 교구를 교황에게 되돌려 주려고 금과 군인을 가득 실은 함대 [아르마다]를 출항시켰다. 그러나 교황의 축복과 달리 사람들은 대부분 산채로 수장되었다.
역사는 로마 교황의 축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것들에 대한 수많은 예들을 들려준다. 독자 여러분은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의 축복과 저주가 어떻게 아이러니히지만, 일관성 있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1) 로마가톨릭교회 교황 비오 9세(1846-78)는 교황의 축복을 상징하는 황금장미를 시실리아의 왕에게 보냈다. 이 왕은 그것을 받은지 일년이 채 못되어 왕좌에서 쫓겨났다. (황금장미의 실물은 프랑스 파리의 끌리니 박물관, Muse de Pari에도 소장되어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교황 비오 9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축복했다. 황제는 일년이 못되어 베네치아를 잃었다. 사도와에서의 전쟁에서 참패당했다.
3) 교황 비오 9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황금장미를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왕좌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4) 교황 비오 9세는 프랑스의 위제니 왕후에게 황금장미를 보냈다. 왕과 왕비는 일년이 채못되어 권좌에서 쫓겨났다. 둘 다 망명 중에 죽었다. 그들의 외아들 왕자는 아프리카에서 줄루족에 의해 살해당했다.
5) 브라질의 왕후는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삼일 후 다리가 부러졌다. 왕과 왕비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귀양 살이 중에 죽었다.
6) 브라질의 왕위 상속자 공주는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그 뒤 곧 기형아를 출산했다. 망명 생활 중에 죽었다.
7) 교황은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황제를 축복했다. 그러나 황제는 곧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국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8) 교황은 역시 그 황제의 과부를 축복했다. 그녀는 불치의 정신병에 걸려 망명 중에 죽었다.
9) 1890년 교황은 수녀들을 가득 싣고 남아프리카를 향해 떠나는 증기선을 축복했다. 이 배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실종되었다.
10) 교황은 몬테비데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호화 여객선을 축복했다. 그러나 이 배는 이틀 뒤 침몰했다.
11) 교황은 프랑스의 로마가톨릭교회 교도 불랑제(George Boulanger, 1837-91) 장군을 축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주를 넘지 못하고 그는 추방되었다. 그뒤 정부(情婦)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다.
12)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 셔만(W. T. Sherman) 장군의 부인은 교황으로부터 황금장미를 받은 직후 죽었다.
13) 윈드호스트(Ludwig Windhorst, 1871년에 결성된 독일 로마가톨릭 중앙당 지도자) 박사는 교황이 수여하는 그리스도 훈장(Order of Christ))을 받은 뒤 일년이 넘지 않은 때 죽었다.
14) 1895년 다마스커스의 대주교는 빗토리아(Vittoria)에서 스페인의 군대와 함대에 교황의 축복을 기원했다. 그 결과 스페인은 두 개의 함대와 두 개의 군단을 잃었다.
15) 1897년 교황의 사절단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대자선 바자회를 축복했다. 그러나 5분이 채 못되어 바자회는 불길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황후의 자매 포함 거의 150명의 상류 인사들이 사망했다.
16) 오스트리아의 황후는 교황의 황금장미를 받은 직후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가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은 자살을 했고, 왕위계승자였던 그녀의 조카 페르디노는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했으며 세계 제1차대전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제국이 아니다.
17) 영국의 국와 에드워드 7세가 교황을 방문했을 때, 교황은 자신의 서명이 들어있는 레오 13세의 사진을 기념 선물로 주었다. 그 직후 영국군은 소말리아에서 역전패했다. 왕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죽을 때까지 건장을 회복하지 못했다.
18)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은 영국 국왕의 특사였던 덴비 경(Denbigh)을 축복했다. 그 날 남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참패했다. 미투엔 경(Mithuen)은 중상을 입었다. 영국의회의 교황 신봉주의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19) 1923년 바텐베르크(Battenberg)의 에나(Ena) 공주는 결혼식 날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나흘이 채 못되어 그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 13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하는 와중에서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그녀의 결혼 예복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1931년 5월, 그녀와 남편(알폰소 13세 왕)은 왕좌에서 쫓겨났다. 스페인에서 다른 곳으로 탈출했다.
20) 1906년 교황은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세르비아의 나탈리 여왕(Natalie)을 축복했다. 그녀는 망명 중에 죽었다. 그녀의 외아들은 왕위에 올랐다가 살해당했다.
21) 오를레앙 가문(Orleans)에 속한 포르투갈의 어느 왕비가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왕이었던 남편과 장남은 마차를 타고 가다가 왕비 옆에서 살해당했다. 목숨을 건진 왕비는 살아남은 다른 한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다.
22) 권세가 극에 달했던 독일의 황제는 1908년 교황을 방문하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1918년에 왕위를 잃었다. 망명 도중에 죽었다. 독일은 패망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23) 영국의 부호 다이어 에드워드(Dya Edwards)는 1914년에 교황 신봉자가 되어 1916년에 로마를 방문하고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4일 뒤에 죽었다.
24) 교황은 1926년에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황금장미를 보냈다. 1934년에 왕 알베르 1세는 등반사고로 죽었다. 며느리이며 왕비가 되기 위해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스웨덴 출신 아스트리드 왕비도 스위스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25) 교황은 1928년에 비행선 이탈리아를 축복하고 북극점에 놓을 십자가를 주었다. 그 비행선은 추락하여 두 동강이가 났다. 승무원 절반이 실종되었다. 노빌(Nobile) 장군은 부상을 입었고 사건조사위원회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26) 뭇솔리니가 이디오피아(Abyssinia: 옛 이름)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땅을 약탈했을 때, 교황은 이탈리아 국민을 “위대하고 선량한 국민”이라고 축복했다. 뭇솔리니와 그의 정부(情婦)는 살해되고 거꾸로 매달린 채로 군중에게 공개되었다.
27)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61년에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검은 색 의상을 입고 교황을 방문했다. 그 뒤로 해가 지는 일이 없다고 일컬어지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영국은 점차 주체성을 잃고 경제적으로 로마에 예속되기 사작했다. 또 영국 왕실 왕족들의 잦은 교황 접촉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28) 1963년 3월 7일, 소련의 후르시쵸프(Krushchev) 수상은 바티칸-소련 간의 관계개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딸과 사위인 아주벨(Adzubel)을 로마에 보내어 교황을 접견하게 했다. 그로부터 일년 반이 지난 뒤 1964년 10월 16일에, 그는 권좌에서 밀려나 당서기장직을 사임했다. 그 뒤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29) 1963년 7월 2일,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교황을 접견하고 축복을 받았다. 그 뒤 월남파병 병력을 증강시키고 미국을 월남전엔 개입시켰다. 1963년 11월 12일에 암살했다.
30) 1964년 교황은 황금장미를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지도자에게 보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영토 곧 “거룩한 곳”에서 끊임없는 소요가 잇달아 일어났다.
31) 1964년 5월 12일, 요르단 왕 후세인은 교황을 접견했다. 일년 후 1965년 6월 5일, 요르단 군은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에게 대패했고 많은 영토를 잃었다.
32) 1964년 10월 12일,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그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교황을 접견했다. 평범한 신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받은 것이다. 몇 해 뒤인 1967년 2월에 축출당했다.
33)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당수인 아더 콜웰은 교황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직후 그의 정치 생활은 끝났고, 정치무대로부터 사라졌다.
34) 1965년 10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뉴욕 시를 방문하여 유엔총회에서 연설했다. 미국 대통령 존슨은 개인적으로 교황을 방문했다. 1968년에 차기 선거에 나서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일년 뒤 사망했다. 그의 대통령 임기 3년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월남에 파병되었으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대학가에서는 반전데모가 일어났고 흑인 폭동이 꼬리를 물었다.
35) 1966년 4월 24일, 그리스의 왕 콘스탄틴과 왕비 마리는 교황을 접견했다. 일년 뒤인 1967년 4월 21일에 육군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콘스탄틴 왕을 폐위시켰다. 같은 해 12월 12일 친 왕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자 왕과 그 가족은 그리스에서 탈출했다.
36) 1967년 2월 5일 미국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곧장 교황을 접견했다. 1968년 6월 6일그는 암살되었다.
37) 1967년 6월 1일, 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전쟁 주축국이 항복한 뒤 형성된 평화위원회에 바티칸 대표를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다. 교황과 화해하려고 그를 접견했다. 그러나 1969년 8월 24일, 드골 대통령은 헌법개정안이 부결됨으로써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38) 1967년 5월 12일, 교황 바오로 6세는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를 방문하여 그 당시 수상이었던 살리자 박사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일년 뒤인 1968년 9월 8일에 살리자 수상은 중풍에 걸려 사임했다. 캐타노 박사가 새 수상이 되었다.
39) 1969년 7월 31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방문하여 자신을 초청한 밀톤 오보테 대통령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또 우간다 국민을 축복했다. 그러나 1971년 1월, 오보테 대통령은 이디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후 8년 동안 우간다 국민은 이디 아민의 폭정에 시달렸다. 1975년 9월 10일, 대통령 이디 아민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을 접견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2일, 인접한 탄자니아에서 온 해방군은 이디 아민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디 아민 대통령은 해외로 탈출했다.
40) 1970년 9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교황을 방문하고 월남전으로부터 모든 미군을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때 그는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의 냉대를 받고 축복도 받지 못했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닉슨은 미국 헌법이 바티칸의 공식 대표부를 두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특사를 바티칸에 보내어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청과 타협했다. 1972년 12월 21일, 닉슨 대통령의 딸 패트리샤와 사위는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74년 8월 24일,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터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럽게 사임했다.
41) 1970년 10월 10일 이디오피아의 황제 하이레 셀라시에가 교황을 접견했다. 1972-1973년에 걸쳐 이디오피아는 심한 기근과 가뭄에 시달렸다. 1974년 8월, 그는 쿠데타에 의해 폐위 당했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1975년 8월 27일, 감옥에서 죽었다.
42) 1970년 11월 30일, 교황 바오로 6세는 파키스탄을 방문하고 폭풍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돌아보고 난민들을 동정했다. 그런데 1971년 3월, 내전이 발생했다. 이 내전은 일년 이상 계속되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1972년 4월, 교황의 방문을 허락하였던 칸(Khan) 대통령은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
43) 1970년 12월, 교황 바오로 6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위대한 오스트레일리아 위에 함께 하기를, 또 평화와 번영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축복했다. 몇 년 뒤인 1973년 4월 27일에 수상 위트램은 교황을 접견하고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그 나라 역사상 최초로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뒤 많은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절제 없는 임금인상 요구, 경제불황, 17퍼센트에 이르는 높은 물가상승, 심각한 실업률 등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74년 12월 15일, 다윈 시는폭풍로 초토화되었다. 1975년 12월 13일 노동당은 선거에서 대패했다. 프레이져가 수상이 되었고, 노동당은 또다시 참패했다. 위트램은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44) 1972년 10월 5일, 영국 수상 히드는 교황을 접견했다. 한 해 뒤인 1973년 12월 17일,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찾아온 최대의 경제적, 산업적 위기에 직면했다. 1974년 3월 4일, 보수당이 패배하고 히드 수상은 사임했다. 이듬해 히드는 당수직에서 물러나고 마가렛 대처가 당수가 되었다.
45) 1972년 11월 14일, 망명 중이던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페론은 새 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전에 교황을 먼저 접견했다. 그런데 1974년 7월 2일, 일년간의 공직생활 뒤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46) 1973년 4월 9일, 월남 대통령 티우는 교황을 접견했다. 1975년 7월 24일, 월남군은 월맹군과 베트콩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었다. 티우는 해외로 탈출했다.
47) 1975년 6월 4일, 포드 대통령 부부는 교황을 접견했다. 1976년 11월 4일, 그는 선거에서 패배하고 지미 카터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48) 1977년 7월 4일, 오스트레일리아 수상 프레이져는 교황을 접견했다. 프레이져 수상에게 재앙이 내리는 대신에 1978년 8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죽었다. 새로 선출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도 급작스럽게 죽었다. 그러나 프레이져 수상의 인플레이션 대응책은 큰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최대의 실업률로 말미암아 크게 곤경을 당했다.
49) 1978년 2월 14일,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교황을 접견했다. 1981년 10월 7일 그는 암살 당했다.
50) 1979년 11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터키를 방문하여 수상 디머렐의 영접을 받았다. 1980년 9월 12일, 디머렐은 이브렌 장군이 이끄는 터키 군부의 무혈 쿠데타에 의해 하야했다.
51) 1979년 10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국을 방문하자 교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을 뿐 아니라 백악관에 초청하고, 의회 연설도 하게 했다. 카터는 1980년 6월 23일에 개인 자격으로 바티칸을 방문했다. 1980년 12월 선거에서 그는 레이건에게 압도적으로 대패했다. 교황의 두 번에 걸친 축복도 이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52) 1981년 2월, 오히라 수상은 일본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환영했다. 같은 해 6월 12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3) 1981년 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필리핀 군도를 방문하여 관습대로 땅에 입을 맞추고 필리핀을 축복했다. 그 뒤 이 나라는 태풍의 피해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상실했다. 마닐라의 대주교인 신 추기경은 필리핀의 경제가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The Age, 1981년 1월 2일자). 마르코스 대통령은 굴욕스럽게 쫓겨났고, 새 대통령 아키노는 인기를 잃었다. 재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54) 1980년 5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나의 아크라를 방문하여 대통령 리만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1982년에 로링스는 군사혁명을 일으켜 리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그 정권을 축출했다. 리만 대통령은 해외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
55) 1980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랑스를 방문하여 지스까르 데스땡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원수 급 예우를 받고 개인적인 면담을 가졌다. 그런 뒤 일년이 채 못된 1981년 1월 5일,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당수인 미테랑에게 패했다.
56) 1980년 7월 1일, 교황은 10일 동안에 걸쳐 브라질을 방문했다. 2년 뒤인 1982년에 브라질의 정부 관리들은 나라가 900억 불의 외채를 지고 있음을 시인했다. 1983년에는 지난 5년 동안의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브라질 일부 지역을 휩쓸었고 브라질은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57) 1981년 11월 11일,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은 교황을 접견했다. 1984년 11월 그녀는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58) 1982년 2월, 교황은 나이지리아를 방문하여 대통령 세가리의 영접을 받았다. 그 뒤 세가리는 바하리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에 의해 축출 당했다. 3년 후인 1985년에 바하리 대통령도 다고냐라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에 의해 축출당했다.
59) 1982년 6월, 교황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야외 미사에서 갈티리 장군을 비롯한 군 수뇌 장성들을 축복했다. 그로부터 4일 후 아르헨티나 군은 포크랜드 섬의 스탤리 항에서 영국 군에게 항복하고, 갈티리 장군은 사임했다. 1983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공군의 고위장성 두 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공군 사령관 플레시 장군이었다. 갈티에 장군은 12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60) 영국은 사상 초유로 교황이 영국을 방문하겠다는 호의를 수락하였다. 1982년 5월로 예정된 로마 교황의 영국 방문을 몇 주 앞두고 영국은 국민의 95페선트가 로마가톨릭 교도국인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61) 1982년 9월,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이 사고 약 2년 전 왕과 왕비는 로마에서 선전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교황을 접견했다.
62)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푸아 뉴기니아를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뉴브리튼 섬의 물루웨이 화산이 분출하여 섬 주민들이 급히 대피했고 1985년에는 집단 강간, 살인, 강도 등의 폭력 사건이 온 섬에 만연했다. 1986년에 지도자 소매어는 윙티에 의해 축출되었다.
63) 1984년 5월,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은 구아달카날과 호니아라를 방문하여 솔로몬 군도를 축복했고, 아울러 인근 피지와 바노트 섬에서 온 방문자들도 축복했다. 그런데 1985년 1월에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과 니켈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이 연달아 섬들을 강타했다. 특히 피지와 바노트에 있는 가옥과 농장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86년 3월,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이 솔로몬 군도를 강타하여 그 지역을 황폐케 만들었고, 섬주민의 절반은 집을 잃었다. 이 태풍은 계속해서 시카이나, 말라이타, 구아달카날, 산 크리스토벨 섬들을 강타했다.
64) 1985년 8월 13일, 교황은 아프리카의 카메룬 국의 보멘다 시를 방문하고 근처에서 야외 미사를 집전했다. 1년 후 화산호(湖)인 니요스 호수에서 독가스가 분출되어 보멘다 시의 외각지대의 촌락들에서만 2천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짐승과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65) 1986년 11월 22일, 교황은 랭 수상이 이끄는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1989년 8월, 랭은 더 이상 정치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사임했다. 그가 이끄는 당이 1987년 8월 선거에서 이겼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추문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66) 1986년 11월 25일, 뉴질랜드 야당 당수 하워드는 의회에서 교황을 환영했다. 그의 환영 연설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교황께서는 이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인으로서 이곳을 방문하셨습니다. […] 우리는 당신을 위대한 교회의 가장 추앙 받는 지도자로서 환영합니다. […] 기독교 신앙의 최고 멤버로서 말입니다!” 하워드는 1988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자유당 당수직에서 밀려났다.
67) 1986년 11월 26일, 제프 케넷은 비록 자신이 로마가톨릭교회 교도가 아닐지라도 플레밍톤 경마장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교황을 만났다. 그러나 1989년 케넷은 빅토리아 선거에서 패배했고 6개월 뒤 자유당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68) 1986년 11월 26일, 뉴사우스 웨일즈의 수상 언스워스는 시드니에서 교황을 영접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1988년선거에서 패배하고 언스워스는 실각했다.
69) 1986년 12월 1일, 호주의 재벌 알란 본드는 퍼트에서 교황을 영접하고 무릎을 꿇고 그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개인 면담을 했다. 그 뒤 그는 사업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호주의 방송 심의위원회는 본드가 방송면허를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고, 그는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70) 1987년 교황이 미국을 방문하고 떠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월 가(Wall Street)의 주가가 폭락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는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을 맞았다.
3. 교황의 저주가 행운으로 바뀜
1)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의 해방자 빅토르 에마누엘 왕을 저주했다. 이탈리아를 자유국으로 만들고 로마를 수도로 선포한 이탈리아 정부를 저주했다. 교황의 저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는 세계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려고 떠나던 이탈리아 군을 교황이 축복한 뒤로부터 이탈리아 제국은 다시 붕괴하기 시작했다.
2) 가리발디는 그의 모든 애국적인 노력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특히 시실리 왕국을 전복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가리발디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들이 여기 저기에 세워졌다.
3) 비스마르크와 프러시아이 왕이 예수회 사제들을 추방했을 때, 교황은 프러시아를 저주했다. 교황의 저주는 축복이 되어 프러시아는 세계 열강의 하나가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했다. 어느 날 그 지도자가 로마 교황과의 친교 관계를 맺는 불운이 오기까지 수년간 서유럽에서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했다.
4)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내린 교황의 저주는 영국에 큰 복으로 바뀌었다. 반대로 아일랜드에 대한 교황의 축복 이후 그 나라는 황폐해 졌다.
5)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받은 저주(anathema)로 말미암아 온 세계의 교회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는가.
6) 로마가톨릭교회는 한국에 들어온 지 200주년이 되는 1984년 5월 3일에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 시성식을 했다. 교황이 집전하는 행사의 진행 상황은 텔레비전으로 생생히 소개됐다. 교황은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순교 복자 103위를 시성했다.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직후 이 땅에는 국가적인 불운과 재앙이 닥쳤다. 로마가톨릭교회 교황 방한 넉 달 후인 9월 1일부터 3일 동안 중부 내륙 지방에 300밀리미터가 넘는 집중 호우가 쏟아졌다. 물폭탄이었다. 그 결과 한강에 대홍수가 발생해 189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실종됐다. 재산 피해는 1300여억 원에 육박했다. 북한이 수재 물자를 보내 줄 정도였다. 북한 적십자사가 “쌀 5만 석,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기타 의약품을 대한적십자사가 “상부상조의 길을 트고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받았다.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불과 넉 달 만에 벌어진 국가적 재난이었다.
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이른바 ‘세계성체대회’를 집전했다. 5년 전 그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떠난 뒤 한국 백성에게 또다시 재난과 불운이 찾아왔다.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11개월 뒤, 수도권에 대홍수가 또 발생했다. 1990년에 한강 전역에 많은 비가 집중적으로 내렸다. 경기도 이천, 수원, 강화, 홍천, 양평, 서울에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졌다. 사흘간의 중부지방 집중호우는 평균 452미리미터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곳곳에 크고 작은 많은 수해가 발생했다. 한강 대홍수가 났다. 126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실종되었다. 18만 726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5203억 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1984년과 1990년의 두 차례 한강 대홍수와 수해는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뒤 1년 안에 발생했다.
4. 역사해석
위에 소개한 글의 저자는 지난 1700년 동안 로마 교황청의 축복을 받고 망한 사람들을 세어 본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한다. 교황은 지구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축복하고 있지만,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재난이 생겼다고 지적한다.
교황이 축복한다고 반드시 재앙을 당하고, 저주한다고 복을 받는다는 공식은 없다. 역사는 그러한 사례가 많음을 말해준다. 교황이 주는 정치적 목적의 황금장미를 받은 자들이 당한 불행은 허다하다. 우리가 이 논의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교황이 황금장미와 그의 축복이 환영할만 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해석이다. 교회사가들은 신사참배라고 하는 우상숭배 때문에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의 수도가 되었다든지, 피난지 부산에서 우상숭배, 신사참배를 한 목사들이 슬피 울며 회개한 덕에 남한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남았다고 해석한다. 교황의 축복과 저주가 재앙과 복으로 연결되는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해석,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증오한다는 사실이다. 교황은 우상숭배를 행하는 종교 집단의 수장이다. 그의 황금장미와 축복이 반드히 복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로마가톨릭교회가 들어가 강세를 보이는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 개신교회가 들어간 나라들과 대조를 이룬다. 선교사가 성경을 가지고 들어간 나라와 묵주와 성반(聖盤)을 들고 들어간 나라가 큰 차이를 보인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교회일치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국 개신교회들(예장 통합, 기하성, 기장, 감리교, 성공회, 정교회 등)의 낭만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최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