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교회당, 아래 글 내용과 무관한 교회 사진
내게 돌을 던져라
서양사회에서는 아들 목사가 아버지 목사의 직을 승계하는 경우가 있다. 성공주의 설교자 조웰 오스틴 목사의 경우와 같다. 이를 두고 아무도 세습이라 하지 않는다. 왜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목사직 승계가 한국에서는 세습이라고 지탄을 받고, 교회법으로 차단되기까지 하는가?
올해 정초, 경기 분당 지역에 있는 큰 규모의 어느 교회는 설립자 원로 목사와 은퇴한 공로 목사의 교회 출입을 금지시켰다. 경조사의 경우나 교회의 공식 요청이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출입하지 말라고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어느 누구나 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고 찬송하면서도 원로 목사와 공로 목사의 출입을 금지함은 아이러니이다.
최근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목회직 세습, 승계, 후임목사 선임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 교회의 불화를 자극, 조종, 확산시킨 화근(禍根)은 주로 목사직 승계와 관련하여 은퇴한 목사와 교회 그리고 후임 담임 목사 관계에서 발행한다. 대부분 교회 갈등의 진짜 요인은 감추어져 있고, 인간적인 허물이 질책을 받는다.
개신교회의 원로 목사 또는 은퇴 목사와 후임 목사의 관계는 모세와 그의 장인 이드로의 관계가 아니다. 장로회는 원로 목사와 담임 목사가 한 배를 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갈등 해소와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분쟁 예방에 개혁교회론과 교회 치리회 또는 장로회 제도 이해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 내게 돌을 던져라
어린 시절, 내 고향 교회 목사님은 10여 년 동안의 목회를 마무리 하는 송별회에서 “내게 돌을 던져라”고 말했다. 정든 목자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교우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지 말라, 무엇을 문의하거나 편지하지 말라, 연락하지 않고 방문하지 않는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인간적인 정(情)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여러분의 목사가 아니다. 후임 목사가 여러분의 목사이다”고 말했다. 그 송별사는 어린 나에게도 참 인상적이었다. 교회와 목회윤리에 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었다.
수도권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어느 목사는 퇴임 즉시 가족과 함께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다. 교인들과 접촉을 삼갔다. 대형 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그분에게는 한국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아들이 있었다. 후임 목회자 자격을 골고루 갖추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목회직을 아들에게 승계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자, “한국교회의 정서상 목회직 계승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목회자와 관련하여 수백 년 역사 경험을 거쳐 만든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이 교단 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는 자는 퇴임 또는 은퇴 즉시 다른 도시로, 곧 일정한 거리 바깥으로 이사를 가서 살겠다고 하는 서약 문서에 서명을 한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 제약에 민감한 나라이다. 그러한 문화권 안의 교회가 퇴임, 은퇴하는 목사의 거주지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임(前任) 목사가 지위력을 이용하여 퇴임한 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분쟁, 갈등, 폐습을 막으려는 목적이다.
2. 세습
한국 감리교회와 예장 통합은 2013년에 목사직 세습 금지를 제도화 했다. 의미심장한 교회사적 사건이다. 은퇴하는 목사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를 막고, 봉건적 기득권과 자본주의적 탐욕의 고리를 끊으려는 용단으로 보인다. 무자격자 아들에게 목회직을 세습하는 폐습을 차단하려 한 것 같다.
‘세습’은 왕정통치 권력의 계승을 일컫는 용어이다. 교회의 목사직 세습은 부당하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직무를 승계하는 것을 ‘세습’이라 하여 교회가 이를 제도적으로 가로막음은 무리한 결정이라 여겨진다. 세습과 승계는 다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태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목사의 아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구분함은 교회의 목회자 선택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원칙에 위배된다.
한국인은 사물을 두루뭉술하게 본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문화에 익숙하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며, 텅 비어 있음은 곧 가득 차 있음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랑, 인정, 너그러움 등 고귀한 것들이 종종 규정, 질서, 합리성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이러한 현상은 은퇴한 목사와 시무하던 교회의 관계가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 전임 목사가 후임 목사에 대한 불만 불평을 내뱉으면 곧장 교회 구성원들의 불만으로 나타난다. 교회갈등, 파당, 파벌의 원인이 된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하여 부흥시키면, 자신을 왕정국가체제의 통치자로 여기는 유혹을 받는다. 목사직 세습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담임 목사에게 상왕(上王)처럼 군림한다. 조선왕조 세종치세의 태평성대는 아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도록 정적을 제고하고 궂은 일을 담당한 상왕 태종 덕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의 ‘상왕’의 역할은 정 반대이다. 궂은 일은 후임자가 떠맡는다. 은퇴한 상왕 목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담임 목사가 목회하기 어렵다.
정상적인 목사는 은퇴와 더불어 교회를 떠난다. 후임 목사 선정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후임자의 목회활동을 간섭하지 않는다. 폐나 누를 끼치지 않는다. 선교비, 연구비, 활동비, 지원금, 행사비 명분의 부담을 주지 않는다. 교인들과 유지해 온 인간적인 정의 고리를 끊는다. 오직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고백한다.
심혈을 기울여 부흥시킨 교회, 정든 교인들과의 이별은 곤혹스럽다. 교회가 사랑 안에서 용납하고 무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계속 출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개척할 때 사재를 투입한 목사에게는 교회가 상응하는 사례를 함이 옳은 듯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고전 10:23). 통상적으로 볼 때, 은퇴한 목사가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덕을 세우지 못한다. 후임 목사에게 부담이 된다. 교회 발전에 지장을 준다.
3. 편지
최근 갈등을 겪고 있는 어느 대형 교회의 전임(前任) '원로 목사'가 후임 목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글이다. 전임 목사가 은퇴 후에도 계속하여 그 교회에 출석하면서 지위력을 행사하고 영향을 미쳤고, 상왕처럼 후임 목사의 목회 활동을 오랜 기간 동안 간섭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따진다. 후임자를 책망한다. 정말 오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인물이라고 꾸짖는다. 은퇴 5년이 지난 시점에 보낸 편지이다.
위 편지는 교회 갈등 핵심 요인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다름을 알려준다. 개인적인 친분, 사제지간, 의기투합 관계, 해당 교회의 역사와 특수성을 고려해도, 은퇴한 목사의 후임자 간섭은 정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론, 교회규례, 목회 윤리에 저촉된다.
위 편지에서, 원로 목사는 자신과 담임 목사를 ‘고부’ 관계로 설정한다. 같은 집에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는 ‘시어머니’로 여긴다. 후임자의 여러 가지 목회 활동을 간섭한다. 후임자가 신문에 기고한 시사 칼럼을 문제 삼고, 허세와 이벤트 행사를 한다고 지탄한다. 교리 설교를 탓한다. “설교 스타일과 내용을 수정할 용의가 없는가?”라고 한다. 인터넷 인구의 증가와 대비책을 묻고 따진다.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한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이 평생 생명처럼 사랑한 양 떼를 위해서라고 한다.
원로 목사는 위 편지를 보낸 이듬해에, 모 잡지와의 대담에서 교회가 너무 커짐을 비판했다. [후임] 목회자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맏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로 목사는 퇴임 몇 해 후 담임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 대필과 관련하여 모 교수에게 문의 전화를 했다. 후임으로 취임한 담임 목사가 십여년 전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일부 표절에 대하여 심층 조사를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여러 해 뒤, 은퇴한 목사는 교회의 실무를 맡은 ‘사역 장로들'을 소집하여 현 담임 목사의 목회 활동에 제동을 걸고 견제하도록 했다. 은퇴한 목사 부인은 남편이 퇴임한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교회 시설에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담임 목사는 암과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전임자의 하관예배 후 그동안 자신의 목회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원로 목사에게 쏟았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가?
위 편지를 후임자에게 보낸 시점의 교회 회집 인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임 목사가 은퇴할 무렵의 회집 교인 수는 약 1만 3천 명이었다. 이미 대형교회였다. 그가 현 담임 목사에게 위 편지를 보낼 무렵인 5년 뒤에는 약 3만 명이었다. 후임 목사의 지도하에서 교인 수가 곱절 이상 늘어났다. 어느 교회사가는 그 교회의 체질이 바뀌고, 신자들이 물 만난 생선처럼 싱싱해지고, 새 신자가 구름 떼 같이 몰려왔다고 기록한다. 집회 때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신자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고 한다.
위 편지는 후임자의 지도력과 더불어 교회의 회집 인원이 약 3만 명에 이르렀을 무렵에 보냈다. 차마 말하기 어려운 무슨 동기가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교회의 갈등에는 항상 여러 가지 요인과 쟁점이 혼재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은퇴한 목사는 오랫 동안 교인들과 깊이 맺어진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후임 담임 목사보다 더 주목을 받는다. 후임 목사에 대한 전임 목사의 간섭, 불만, 푸념, 걱정은 곧장 대다수 교회 구성원들에게 전달된다. 교회 갈등과 분란의 화근이 된다.
어느 곳에나 “구관이 명관이다”는 이끼 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옛 적 같게 하소서"라는 정신소유자들이 교회 갈등에 가담하면 담임 목사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구세력자들은 후임 목사의 새로운 스타일의 목회 방식, 예배, 설교를 거부한다. 담임 목사의 허물 찾기에 바쁘다. 사소한 허물을 침소봉대한다. 담임 목사의 흠이나 공황 상태(panic)에서 한 말을 꼬투리 잡는다. 조직적으로 배척 운동을 전개한다.
4. 판단 기준
국가 운영이 헌법에 기초들 두고 있듯이, 교회는 성경과 교회론과 교회 규례에 따라 움직인다. 장로교 목사는 개 교회 소속 교역자가 아니다. 목회하는 교회 안에서 피선거권을 가지지 못한다. 선거권 특별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목사는 장로회(노회)의 파송을 받아 치리회가 맡긴 교회의 양떼를 돌본다. 자기를 파송한 감독 치리회의 신학, 규례, 교회법에 부합하는 활동과 범위를 넘어서면 제재를 받는다.
은퇴한 목사는 퇴임 시점부터 그 양떼의 목자―목사가 아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목사직 '은퇴'란 목사라는 직책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다. 장로회 제도는 ‘상왕 목사’ 또는 ‘시어머니 목사’라는 지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은퇴목사가 후임 목사와 '한 배'를 타도록 하지 않는다. 은퇴 목사, 공로 목사, 원로 목사에게 담임 목사와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은퇴한 목사의 교회 간섭, 통제, 자유 제한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교회론과 치리회 규정은 없다. 퇴임 후에 계속하여 교회에 지위력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후임자의 활동을 간섭함은 규칙 위반이다.
‘원로 목사’라는 직함은 교회의 또 다른 하나의 직분 이름이 아니다. 목사 은퇴식은 ‘상왕 목사 취임식’ 또는 ‘시어머니 목사 취임식’이 아니다. ‘원로 목사,’ ‘공로 목사,’ ‘은퇴 목사,’ ‘명예 목사’라는 명칭은 미성숙한 한국교회의 특징을 반영한다. 장로회는 원로원 제도를 따르지 않는다. 위 명칭들은 교회가 퇴임한 목회자에게 존경을 표하며 연금과 같은 형태의 생활비를 제공한다는 의미만을 지닌다.
‘조기 은퇴’에 특별한 가치를 둘 필요는 없다. 정년 은퇴 목사보다 더 주목을 받아야 할 까닭이 없다. 장로교 제도에는 교회가 정년 시기보다 일찍 퇴임한 자에게 특권을 주는 예외규정이 없다, 세인의 인기와 주목을 받을 목적으로 은퇴 시점을 앞당기고서 ‘조기 은퇴’를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 순수한 목사직 퇴임이 아니라 은퇴한 교회의 재정, 인력, 행정력, 인맥, 인지도를 발판 삼아 또 다른 그럴듯한 무슨 일을 하려고 계획한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위 편지에서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발견할 수 없다. ‘교회사랑’과 ‘양 떼 사랑’으로 포장된 공로주의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위 편지를 쓴 분의 은퇴 후의 처신과 행보는 그의 전기(傳記)에서 지울 수 없는 옥(玉)의 한 흠(欠)이다. “내게 돌을 던져라, 나는 여러분의 목사가 아니다, 현 담임 목사가 여러분의 목사이다, 나와의 개인적인 정을 끊으라”고 선언하고 훌쩍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좋았으리라.
목사직 바통 이전(移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다. 인본주의 발상을 배격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이끄심의 동선(動線)을 감지하고 포착하는 데 실패한 공동체와 개인에게는 지도력과 일심단결과 영적인 위기가 온다.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면서 치리회 규례를 따라 품위 있게 질서정연하게 진행하는 공동체에서 교회의 주인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확인할 수 있다.
5. 자아비판
허물이 없는 목회자를 찾으려함은 무리이다. 목회자의 처신, 행보, 활동이 정도를 벗어날 때는 동역자들과 당회원들이 충고, 권유를 해야 한다.
개인이 목사직 사임을 강요함은 부당하다. 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당 건축은 재고해 볼 사안이기는 하지만, “성령을 근심시키는 프로젝트”라고 단정할 수 있는 확고한 성경적, 신학적, 합리적 근거가 없다. 선교지로 가거나 사회운동을 시작했더라면 명예롭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함은 장로교회의 질서와 치리회의 존재를 무시한 경솔한 발언이다. 갈등을 겪는 교회마다 득달하듯 달려가서 반대편에 유리한 말을 쏟아내는 것만이 기독교윤리를 실천하는 방법인가?
목사의 허물에 대한 처벌과 그 수위는 교회―치리회―노회가 판단할 사안이다. 교회 구성원들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대립각이 날카로워지고 비난이 빗발칠수록, 치리회의 판단과 결의가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품위와 질서”(고전 14:40)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고전 14:33).
위 교회의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는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교회는 조직기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개혁교회론과 치리회 규칙은 성경 말씀과 합리성과 역사적 경험의 열매이다. 치리회의 규정과 판단을 넘어서는 명료한 주장, 탁월한 영성, 무교병 같은 윤리척도, 청렴결백성, 신령한 은사, 합리적인 해결책은 타당성, 실효성을 가질 수 없다.
목회자 허물에 대한 치리회의 결정이 미흡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껴져도 우리는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개혁교회론에 따르면, 기독인에게 치리회의 판단과 지도에 순복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무엇을 교회가 결정, 시행, 요구할 경우뿐이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우상숭배―신사참배를 결의, 권유, 강요한 경우와 같다.
치리회가 다루고 있는 사안이거나 다루어야 할 사안을 세상법정에 송사하여 해결하려 함은 기독인다운 신앙 행위가 아니다. 증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사안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종결시키는 것이 장로회 치리의 원리이다.
타인과 교회의 허물을 일일이 꼬집으며 과오를 들추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다. 유럽 기독교의 몰락과 반(反)기독교운동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안에는 남의 허물을 알면서도 들추어 공개하거나 꼬집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복음전도와 하나님 나라 도래에서는, 교회가 세상을 무엇이라 보는가 보다 세상이 교회를 어떤 눈으로 보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을 받고, 사회의 우환거리가 되면 복음전도가 불가능해진다.
다윗은 자신의 몰락을 저주하는 베냐민 지파의 두령 시므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서 모욕을 참아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두 용사가 꺼꾸러진 사건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불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하고,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개가(凱歌)를 부를까 염려되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슬픈 노래를 부르며 원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弔喪)했다. 자기를 추종하는 무리에게 적대적인 인물의 죽음을 슬퍼하고 울라고 명했다(삼하 1:24).
갈등과 분쟁의 진짜 원인은 감추어져 있고 표면적인 구실이 대중적인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진짜 원인에는 눈멀고 겉으로 드러난 까닭에 연연하여 대중적 증오심을 발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목회자의 결함을 먹잇감 삼아 시기심과 속물근성의 허기를 채우려 하지는 않는가? 윤리, 정의, 투명성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공격욕과 속물근성(마 6:1)을 만족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교회론과 치리회의 규칙과 공동체의 질서를 무시하는 처신은 변형된 세속적 욕망의 표현이 아닌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황금률(마 7:12) 앞에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때이다.
최덕성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 및 교의학 석좌교수이며, 기독교사상연구원 '리포르만다'의 대표이다 .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 대상'을 수상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과 현대기독교의 신학적 위기를 분석한 <신학충돌: 기독교와 세계교회협의회>(2012) 등 다수의 학술서를 저술했다. 시간, 장소, 국경, 언어를 초월하는 Bread University라는 유비쿼터스-하부르타 방식온라인 신학교육 체계를 갖추고 있다. 신학저널 <리포르만다>(www.reformanda.co.kr) 운영자이다.
위 글은 최덕성, <교황신드롬>(2014) 제24장에 수록되어 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남의 그 모 원로 목사님은 후임자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반성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그야말로 완전히 상왕노릇이네요. 그리고 그의 아들이 공개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모를 지극히 사적인 그 편지를 공개하여 아버지를 욕보이는데, 그런 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 하면 용감하다더니...!
그런데 문단과 문단사이에 이런 이상한 부호(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 거듭되는데 글 읽기 번거롭습니다. 수정하면 방문자들이 읽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만 이것이 보이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