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트리오스 상 (모자이크, 호시오스 루카스교회당, 그리스,
11세기). 비잔틴 세계에서 '거룩한 전사'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비잔틴제국을 아십니까?
서양문화사는 인간 역사상 아주 매혹적이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한 시대를 오랫동안 과소평가해 왔다. 1천 년 이상이나 연연히 이어진 대제국이며 빛나는 문화를 지닌 비잔틴기독교제국(동로마제국)을 무시해 온 것은 불가사의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서양 역사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재구성되었다. 영국인 윌리엄 렉키(William Lecky)는 비잔티움의 역사를 다만 “승려와 환관들과 여자들이 벌이는 정사(情事), 독살사건, 음모, 당연한 일처럼 행해지는 망은(忘恩) 행위, 꼬리를 물고 얼어나는 형제 살해가 연연히 이어지는 지루한 이야기”로 규정한다.
현대 유럽인들은 비잔틴 사람들을 오늘날의 그리스인의 먼 조상 정도로 알고 있다.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지몽매한 두꺼운 장막에 가려 있다가 가까스로 근년에 재발견되어 암흑의 중세에 종지부를 찍고 현대의 유럽사회가 출현하는 조건을 제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이렇게 구성하면 비잔틴제국은 로마제국의 조락(凋落)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흥륭(興隆) 사이에 끼어 있는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제국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대의 로마제국과 종교개혁기 중간에 놓인 장려한 비잔틴제국 시대는 암흑시대라고 할 수 없는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비잔틴기독교제국이 남긴 유산은 종교, 정부, 법률, 건축, 예술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제국은 자신이 정통성 있는 로마제국이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제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유례가 드문 정치조직 덕분에 국가는 1천 년 넘게 유지되었다. 서로마제국의 연장인 유럽이 봉건단위로 분열되어 지적(知的) 활동이 극도로 저미(低迷)한 상태에 있었을 때, 동로마제국은 위대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 문화는 근본적으로 그리스적이었으나 나중에는 기독교 문화와 융합되었다. 동양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다. 비잔틴 생활의 중심을 이룬 기독교 신앙은 따지고 보면 동방에서 연유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며 종교의식에 둘러 싸여 있던 황제의 지배력도 동방에서 유래했다. 비잔티움의 장엄한 예술에는 동방의 특징인 추상, 단조(單調), 화려한 색채, 정교한 장식 등이 도처에 역력히 나타난다.
오랫동안 수수께끼와 오해에 싸여 있던 비잔틴사회(동로마제국)의 공헌은 빛나는 모자이크 예술, 교회당에 뚜렷이 남아 있는 건축 양식과 시공 기술만이 아니다. 서양세계는 이러한 건축양식의 체계를 최초로 만들어 낸 비잔틴 건축가들의 위대한 재능에 큰 신세를 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유산에 빚지고 있음이다.
비잔티움은 로마제국 최후의 직계 상속인이다. 비잔틴제국은 최초의 완전한 기독교 국가였다. 그 이중성격은 나라를 창시한 황제 콘스탄틴이 생생히 보여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로마풍의 원주(圓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여신 아테냐의 상과 함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준 빵을 넣었다고 하는 바구니를 모셔 놓았다. 비잔티움은 그 긴 역사를 거쳐 고전문화를 존중하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켰다. 궁정에서는 그리스 철학이 논의되고, 호머의 시를 읊는 목소리가 끓어지지 않았지만, 국가는 근동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어 러시아인을 개종시키고, 슬라브족에게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수백 개의 수도원을 건축하도록 원조했고, 신비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구했다.
비잔틴제국이라는 별명은 4세기 초부터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을 때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비잔틴제국이라고 부르는 그 나라 어느 시골 마을에 찾아가 10세기 무렵의 주민에게 ‘비잔틴제국을 아십니까?’ 하고 물으면 그들은 ‘아니요. 생전 들어보지 못한 나라입니다’고 답할 것이다. 그들은 헬라어(Greek)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이 ‘나는 그리스인(Greek)입니다’고 말해도, 그 나라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백성들이었고, 자신들을 진정한 로마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 콘스탄틴이 새 수도를 기독교 도시로 만들기로 결심한 때로부터 헤아려 약 1천 년 전 어느 날, 비자스(Byzas)라는 이름의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가 고향 메가라에서 배를 띄워 에게해 북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트로이의 유적을 지나 마르마라해로 배를 몰아 드디어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에 도착했다. 이 좁은 해협은 관목(灌木)이 무성한 바위투성이 산 사이를 27킬로미터 남짓 굽이돌아 흑해로 통하고 있었다. 비자스는 그 천연의 요새에 새 도시를 만들었다.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이 이곳을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하기까지 이 땅은 비잔티움이라고 불렸다. 그 명칭은 새 도시를 건축한 사람의 이름 ‘비자스’에서 유래했다. 황제 콘스탄틴은 그곳으로 천도(遷都)하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틴의 도시라고 지었다.
그리스도상 모자이크 (이스탄불, 1960년 무렵의 사진). 표면을 덮고 있는 회반죽
을 신중하게 제거하자 여러 세기 동안 감추어져 있던 예술품이 자태를 드러낸다.
중세서양인들
한편, 서양중세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암흑시대를 겪은 그들의 지능은 유비쿼터스시대와 우주항공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 비해 낮았을까? 미개하고 무지하고 우둔했을까? 신체적으로 덜 발달된 사람들이었을까?
서기 1천 년 무렵에 살았던 서양인의 뇌 용량은 오늘날의 유럽인의 뇌와 다를 게 없었다. 서양 중세인들은 현대교육과 같은 체계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의 지혜와 지식이 담긴 기록들을 보면 그들의 사고능력이 오늘날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양중세인들은 자급자족했다. 현실에 부합하는 생활을 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지나친 고민을 하지 않았고, 근심걱정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친구에게 가슴속에 담긴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웃 사람과 사귀고, 인생을 즐겼다. 더불어 살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었다. 인내력이 강했다. 뛰어난 손재주를 지녔다.
서양중세인들의 머리에 담긴 지식은 책에서 배우거나 학교에서 습득한 것이 아니었다. 극소수 사람과 성직자들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중세인의 학습은 모방에 의존했다. 사물과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로 아버지와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배웠다.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가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모두 기억에 의존했다.
서양중세인들은 조상들로부터 구전(口傳)된 민담을 머리에 담고 있었다. 유서 깊은 가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민요를 즐겨 불렀다. 맹수와 더불어 싸운 사람들과 피에 굶주린 전사들의 무용담(武勇談)을 즐겨 이야기 하고 그것을 대대로 전달했다.
서양중세인들은 탐구심이 강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슬픔이며, 아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려고 양초에 눈금을 새겨 사용했다. 그것이 타 들어간 만큼 흐른 시간을 계산했다. 모래시계를 만들어 설교의 길이를 쟀다. 늦잠이라고 하는 덕스럽지 못한 습관을 고치려고 오랜 연구와 실험을 하여 드디어 괘종시계를 만들어냈다.
Y1K
Y1K(1000년)를 맞이하던 기독교세계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극도의 상황을 예상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현대인들이 Y2K(2000년) 때 큰 혼란이 야기된다고 두려워한 것과 비슷하게, 1천 년 전의 기독교인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전환기를 맞이하지 못했다. 커다란 종말 사건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어느 성직자는 ‘1천년이란 해가 마감되는 순간에 적그리스도가 찾아올 것이고, 곧 최후의 심판이 뒤따를 것이다’고 설교했다. 영국의 웅변가 울프스탄 대감독은 새 천년기의 두려움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신의를 저버리고 성직자를 공격하고 경멸하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것들이 모두 임박한 종말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잔인하고 정의롭지 못한 법률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팔려가고 아이들까지 노예로 전락하는 현실을 탄식했다.
부르고뉴 출신의 수도사 랄프 글라베르(Ralph Glaber)는 989년 9월 어느 날,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에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그 빛은 하늘을 채우는 것 같았다. 혜성은 수탉이 울 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낸 별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별의 밝기를 조절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밤하늘의 그 현상을 어떤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사건의 확실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 직후에 사람들의 공경의 대상이던 어느 교회당이 불타버렸다.
글라베르는 그 무렵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화재와 공포에 찬 비명과 이단의 폭동과 베드로에게 죄를 고백하려고 교회당으로 달려가는 군중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사도 요한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글라베르 자신은 침대 발치에서 모습을 드러낸 악마를 여러 번 만났으며, 그가 본 환상과 그것과 관련된 회개에 관해 언급했다. 그러나 종말은 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33세에 그리스도의 시대를 시작한 점을 지적하면서 1033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해에도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Y1K 때의 사람들은 Y2K를 맞이하던 때의 사람들과 비슷한 심리현상을 경험을 했다.
비잔틴 부활절 용 장식 빵. 오늘날에도 동방기독교인들은 비잔틴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생긴 빵을 부활절 월요일에 먹는다.
씨줄과 날줄
오늘날 유럽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이 접하고 방문하는 것들은 대부분 웅장한 대교회당, 수도원, 대학, 현란한 색채의 박물관, 고풍스런 성채, 고색창연한 도시들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여행한 쌍두마차시대의 유산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세기’라고 하면 흠칫 놀란다. 옛날 옛적의 일로 생각한다. 무지하고 어둡고 미개한 시절의 옛 이야기로 여긴다.
중세기를 옛날 옛적 일로 여기는 독자들에게 필자는 쌍두마차를 이끈 교황과 황제의 우람찬 행보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서양중세인들의 내밀(內密)의 자아, 희망, 기쁨, 증오, 감수성, 감추어진 의식, 몸짓, 표정, 숨결, 원기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서양중세기는 기독교가 오랜 경쟁자인 유태교와 영지주의와 이교주의를 압도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강한 개성 때문에 기존 체제에서 소외되고 왕따 당한 인물도 있었고, 사회지배층에 맞서서 교회의 도덕적 개혁을 시도한 수도사도 있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의 평균 수명 30-40세를 넘긴 상류층 인사들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접하는 서양중세인들은 신분상승으로 권력과 부를 누린 사람들이다. 역사가는 불가피하게 권력자와 지식인이 남긴 자료의 창문을 거쳐 과거를 본다. 중세를 구성한 다수 대중의 삶은 기득권자와 승리자들의 그늘에 파묻혀 그 모습을 알기 어렵다. 우리는 과거를 오늘이라는 창문을 통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제의 시간과 장소는 우리의 ‘객관적’ 연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발명하기 전까지는 인간의 제한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중세사회는 실제보다 미화되어 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황제와 교황이 이끄는 우람찬 쌍두마차의 행보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감상한 예술품들과 화려한 채색무늬는 그 시대의 대중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실제 모습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중세 상류인들이 남긴 추상화와 풍경화와 수평선 위를 떠도는 줄무늬들 사이에 일부분이나마 묘사된 대중, 서민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고 그들의 삶을 감지할 수 있어서 그나마 참으로 다행이다.
중세서방교회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융합을 거쳐 유럽을 지배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교회는 분열과 성직자들의 부정부패와 사변성에 의존한 신학과 민족의 이해관계에 시달리면서도 영광의 순간들을 경험했다. 신앙의 맥이 ‘교회’라고 하는 가시적 제도의 언저리에서 중단되지 않고 생명력 있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쌍두마차시대 여행에서 정지된 시간, 어두운 거리, 지성과 철학을 하녀로 삼은 신학, 마녀, 마술, 종교재판, 흑사병, 환상, 무지, 수도사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섬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기독교신앙은 여러 가지 형태로 서양사회 구석구석에 자리 잡았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알기 쉽게 소개하려고 글을 쓰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조용히 하나님을 가까이한 사람들도 있었다. 권력을 거머잡아 세상까지 정복하고 지배하려고 한 성직자도 있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연약함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동·서방으로 나누어졌다. 중세교회는 십자군전쟁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경험했다.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십자군전쟁이 교회에는 ‘빛 좋은 개살구’였지만 뜻밖에도 유럽 천지를 뒤흔들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감독의 교황제국건설의 꿈을 무산시키고,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태동을 향한 꿈틀거림이 시작되게 했다. 중세서양사회와 교황의 교회로 하여금 르네상스시대와 종교개혁운동이라고 하는 예기치 않은 시대로 나아가게 했다. 신앙과 불신앙,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둠은 중세교회사를 엮은 씨줄과 날줄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완벽한 사람이나 무흠한 신앙공동체에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교회의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 알곡과 가라지 모든 것들이 오늘의 교회를 위한 거울이다. 중세인들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행동과 신앙을 교정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다.
후편 『종교개혁전야』(2003)는 중세교회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십자군원정에서 종교개혁전야까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자기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역사를 펼쳤으며, 그 시대의 기독인들이 그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믿고 고백하며 어떤 형태로 하나님의 뜻과 부름에 반응했는가를 탐색한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교회 안에 참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보존되고 발전했으며, 그것이 유비쿼터스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그 시대의 사회와 교회가 남긴 아름다운 예술작품들과 함께 살펴본다.
최덕성 지음 『쌍두마차시대』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2), 맺음말과 사진
(생명의말씀사 보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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