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하이델베르크 일부 전경
목사가 되겠다는 분에게
목사가 되겠다는 장신대 신대원 학생들에게 (1)
목사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의 간절한 서원기도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부흥회 하다가 가슴 뜨거워지는 체험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 옵니다. 자기 혼자 감정이 고조된 것을 목사 되라는 하늘의 신호로 알고 잘 다니던 학교와 직장 때려 치고 신학교로 직행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저것 하다하다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나한테 하나님이 목사되라고 이러나 보다’하며 눈물 어린 간증으로 신학교를 두드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학은 가야겠고 성적은 안 되어서 신학교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가지가지 사연을 가진 게 목사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사실 어떤 과정으로 신학교에 들어왔느냐는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속좁은 우리가 다 알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 가운데 얼마나 목사가 될까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가운데 실제로 목사가 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렇게 목사 된 사람 가운데 자신의 목사직을 하늘의 소명으로 알고 진지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의 비율은 또 얼마나 될까요?
이따금 신학생이나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제 사무실을 찾아오곤 합니다. 조언할 처지는 안되지만 한 마디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 때마다 이렇게 말해 줍니다. ‘웬만하면 목사되지 마세요!’ 신학교 입학을 고민하고 있든, 신대원 졸업반이든, 내일 목사 안수 날짜 받아 놓은 사람이든, 저에게 목사의 길에 대해 조언해 달라고하면 매번 똑같이 권유합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길 찾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는 게 당신의 몸과 영혼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어린 권고입니다.
단지 요즘 교인이 줄어드는 시대고, 기독교 자체가 사회적으로 지탄 받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종교개혁 역사와 지난 오백년 간 목사와 목사 가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그 첫번째 이유로 들려드려야겠습니다.
실은 오늘 장신대 신대원 사경회에서 저에게 주신 주제가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바라본 기독교”인데, 뼈 때리는 이야기부터 해서 조금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장밋빛 이야기만 할 순 없기에 어두운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2009년 바젤에서 책 한 권 출판되었습니다. 파울 베른하르트 로텐(Paul Bernhard Rotten)의 『목사직』(Pfarramt)이라는 책입니다. 무척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는데, 첫 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배척 당하는 존재에서 의미 없는 존재로”
저자는 지난 오백년 간 교회 내에서 목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렇게 짧고 굵은 구절로 요약해버립니다. 목사라는 존재는 지난 오백년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배척당해 오다가 지금은 아예 의미 없는 존재처럼 소외되어버렸다는 뜻인데, 무척 의아하면서도 내용을 읽어보곤 폭풍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매우 쓰렸습니다.
이 자리엔 분명히,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군주처럼 군림하고, 사장처럼 폼잡고 맘대로 교회 돈 갖다 쓸려고 신학교에 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이 방을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이 땅의 악을 고발하고 싸우면서 그 자리에 선을 심어나가는 게 목사의 직무라면, 어쩌면 목사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절대 군주’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고 우리가 배운 목사의 모습은 그와 정반대의 길을 요청합니다. 그렇기에 이 길은 무장해제하고 전쟁터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린 모두 ‘목사의 길은 힘들어!’라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역사 이야기 하나 해봅니다. 오백년 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프로테스탄트라는 소위 개신교회가 출현했을 때,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새로운 자유와 해방, 복음의 시대가 열린 줄 알고 흥분했습니다. 그 때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여러 가지 등장했는데, 예를 들어 회중찬송이라든지, 자국어 예배라든지, 성찬 때 포도주도 평신도가 받을 수 있다든지, 성경을 자국어로 읽을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은 당시 혁명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지요. 그런 일 가운데서도, 주교의 안수가 아닌, 교회 공동체가 직접 선출하고 청빙하는 목사직의 출현은 금기를 깨뜨리는 것처럼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가 여성과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루터와 카타리나 폰 보라가 결혼 할 때, 사람들의 반대와 조롱은 완강했습니다. 파문된 사제와 수녀원을 도망친 여자가 결혼하면 머리와 꼬리가 여러 개 달린 괴물을 낳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실제로 루터와 폰 보라도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부와 아이들은 모범적인 가정을 꾸렸고, 이는 개신교 진영의 큰 자랑거리가 되었지요. 목사 가정은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비유되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의 가장 이상적인 역할 모델로 추앙받았습니다.
루터의 부인인 폰 보라는 중세 시대 여성의 지위를 격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실제로 경제관념이 없던 루터는 폰 보라가 아니었다면 종교개혁은 고사하고 생계조차 이어가기 힘들었을 겁니다. 종교개혁 역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주일 비텐베르크에서 개혁자들의 정기 모임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서고 내가 결정하기 힘들면 그 땐 캐티(폰 보라의 애칭)의 결정을 따른다”던 루터의 말을 볼 때, 폰 보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루터가 죽자 교회 당국은 당시 정부와 교회법에 따라 루터의 전재산을 환수하려고 했고, 미망인이 되어버린 폰 보라는 남은 가족들의 양육을 위해 교회 당국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몇 년 후 병환 중에 비텐베르크에서 토르가우 성으로 가다가 마차가 넘어져 엉치뼈를 다쳤고, 두 주일이 가기 전에 사망했다는 정보만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폰 보라는 평생 몸 받쳐 헌신했던 비텐베르크 교회당국과 재산 소송으로 화병을 얻었고, 결국 쫓겨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화가 쌓여서 죽게 된 것이지요.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목사는 자기가 목사하겠다고 했으니 고생하든 말든 상관 할 바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사의 부인과 자녀들은 무슨 죄가 있나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교회 당국에 현장 목사들에게 추천했던 도서목록 가운데, 원예도서가 인기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 당국에서 정기적으로 받는 성직록(월급)은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교인들이 보기에 목사직은 땀 흘리지 않고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낭만적인 직업으로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교인들은 교회 당국에 목사직에 대한 법을 제정할 때, 목회 이외의 수입활동을 금지하는 이중직 금지 조항을 만들었고, 목사의 아내도 역시 목회에 전념해야한다는 이유로 부가적인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게다가 목사가정이 살아야 할 목사관은 반드시 교회당 바로 옆이어야 한다는 조항도 따라 붙었습니다.
원예서적과 목사는 먹고 살기 위해 목사관 마당에 정원을 만들어 과실수를 가꾸었는데, 이유는 성직록으론 하루 세끼 끼니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과일을 직접 길러 먹을 수밖에, 정원을 가꾸는 목사를 보고 교인들은 목사직은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부러워했습니다. 당시 목사의 일과표를 보면 정원을 가꿀 시간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목사와 그 가족의 사회적 지위는 ..... 게다가 목사의 딸로 태어난다는 것은 .....
설교를 위해 책을 보고 있으면 목회를 등한시하는 목사로, 정원에서 나무를 가꾸면 시간이 남아도는 목사로, 정원이 정리라도 안 되어 있으면 게으른 목사로 낙인찍히기 일쑤였습니다. 바쁜 목회 일정에 정원 관리는 이제 목사 부인과 자녀들의 몫이 되어버렸지만, 교인들은 그 모습이 에덴동산에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목사들의 자의식도 변했습니다. 16세기에는 목사들 스스로 자신을 인식했지만, 계몽기를 지나면서 ---로 인식하게 됩니다. 목사부인과 자녀들의 문제도 .....
19세기에 들어 의사가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의사들이 겨냥한 공공의 적은 목사들이었습니다. 목사는 돌팔이., 게다가 전염병을 옮기는 숙주 역할로 지목됩니다. 사정을 알고 보면 목사가 하는 일이 그렇게 오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목사는 이제 윤리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회 공동체에서 필요없거나 또는 해로운 존재로 인식되기 까지 했습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자 기관목사직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서글픈 이유, 1958년 독일에서 여자가 목사가 되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통념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처럼 애달픈 사연들이 지난 오백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목사와 목사 가정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클라우스 휫첸(Klaus Fitschen) 교수가 목사의 가정을 이렇게 비유하더군요. “예배당 천정 한 가운데 매달린 유리집 안에 사는 사람들”
목사가 되겠다면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게 될 여러분들은 에덴동산의 행복한 낙원이 아니라 교회 예배당 천정에 매달린 유리집 안에 살게 될 겁니다. 그렇게 살면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은 교인들에겐 심심풀이 이야깃거리가 되고, 여러분에겐 슬픈 멍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의 장신대 신대원 여러분, 상황이 이런데도 여러분은 목사의 길을 가렵니까? 지금이라도 그만 둘 수 있다면 다른 길을 찾아보시길 진심으로 권합니다.
역사를 짚어보면, 목사와 그 가정은 결코 이상적인 가정의 모델이 아닙니다. 어쩌면 바젤의 파울 로텐의 말대로, 몸 바쳐 헌신한 교회 공동체로 부터 배척당하고, 이제는 의미 없는 존재로 밀려나 버린 것이 목사와 목사 가정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가겠다면 각오하셔야 합니다. 각오하되 든든한 무언가를 잡아야하겠지요. 이 길을 가겠다는 저와 여러분이 붙잡아야 할 버팀목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제 주제의 분위기를 바꿔 봅시다. 오늘 저는 다시 역사 이야기로 돌아갈 텐데, 지난 오백년간 목사와 그 가정, 그리고 개신교회 전체를 지탱해준 버팀목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눠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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