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마누엘 칸트를 공부했다
브니엘신학교가 개설한 임마누엘 칸트라는 과목을 수강했습니다. 최덕성 박사님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신학 예비 과정의 교양 과목 정도로 생각하고서 수강을 신청했는데 배움의 과정에서 이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수강 전에 나는 칸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유명한 철학자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강의와 수업이 진행되면서 이 분이 얼마나 우리의 사고 체계와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또 주고 있는지, 결국 이 칸트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다는 것과 신학도들이 칸트를 공부해야 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은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지와 요점 중심으로 진행하는 최덕성 교수님의 쉽고 재미있는 강의 덕분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금방을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종강을 했습니다. 이제 나도 어설프지만 칸트의 인식론을 사람들에게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독일어에 “마타그라볼리지렌”란 희귀한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말짱 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최덕성 교수님의 칸트 강의의 결론이었습니다. 칸트 철학을 정확히 간파한 사람만이 선포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주 명료하고 통쾌한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능한 것은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에 대하여 “마타그라볼리지렌”을 선포할 때, 그 동안 그 사상에 속고 살아 온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와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의 합성어입니다. 즉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철학은 인간이나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지혜, 원리,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본질, 세계관, 가치관, 이해, 인식, 존재론을 공부합니다. 철학은 결국 인간의 이성, 언어, 논리, 윤리, 수학, 신학 등 모두 영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약 2,500년 정도의 서양철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입니다. 그는 평생 독일 프로이센 지역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살았습니다. 독일 관념철학의 대표자이며,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고, 전통적 관념론과 인식론을 비판했습니다.
칸트는 10년 동안 다른 아무 책도 쓰지 않고 오직 이 한 권만 썼습니다. 『순수이성비판』는 약 1,000쪽의 대작인입니다. 흔히 칸트 이전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스 등 모든 사상은 칸트로, 그 이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부터 흘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칸트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도는 칸트를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하고 확실한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추구하는 기독교 개혁신학의 기초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최덕성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배운 것들입니다.
철학이 제기하는 수많은 질문 중 핵심 3대 질문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입니다. 칸트가 등장하기 전에는 존재론적인 질문이었는데 인식론적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할 때 칸트는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합니다. “진리를 어떻게 압니까?” 또는 “진리 자체를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세 가지 종류의 진리론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 대응론입니다. 진리 상응론이라고도 합니다. 사물이 알려주는 정보에 대응하여 인식한다는 이론입니다. 둘째는 진리 정합론(整合論)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진리로 여겨 인식하는 이론입니다. 셋째가 진리 가치론입니다. 실용적으로 가치가 있을 때만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 대응론에 따르면 진리를 진리 되게 하는 핵심은 사물 그 자체입니다. 물(物)이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니까 내가 그것에 반응하여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진리 정합론은 다수의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니 따라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결정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진리 대응론에서는 객관적인 사물 그 자체가 주체이고, 진리 정합론에서는 머릿속에서 판단하는 기능들이 주체라고 봅니다. 칸트 이전에는 수동적으로 진리를 인식하는 ‘진리의 수동성’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그 이후에는 사람이 사물을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진리의 능동성’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주관적인 사고 판단의 결과이므로 결국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만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경험 외에는 인간의 지식을 형성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경험이 참된 지식의 근원입니다. 경험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이 구도에 하나님은 중요치 않습니다.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진리는 불변하고, 영원하며, 하나라고 하는데, 정합론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은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아니하고 복수로 존재하고 가변적이고 임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트 추종자들은 시공간 안에서 한 번 있었던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그것을 진리라고 봅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저명한 책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을 다룹니다. 칸트는 인간이 순수한 이성으로 진리를 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지적하였습니다. 순수한 이성주의 사고는 한계가 있고, 그 이성으로 내린 판단은 틀렸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최덕성 교수님은 이것을 주황색 카드로 설명했습니다. 이 카드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황색이라는 하나의 진리로 인식되었는가요? 그 과정이 무엇인가요?
칸트는 지식의 모든 자료가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영국의 경험론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객관적인 실체, 즉 객체의 존재 그 자체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감각적인 인지를 통해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일련의 현상계이며, 이것들이 조직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주황색 카드는 “나는 주황색 카드이다”라고 칼로 두부 자르듯이 정보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형의 인지 덩어리뿐입니다. 사물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이것이 주황색 카드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두 가지가 견해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마음은 하얀 석고보드인데 거기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즉 경험을 통해서 지식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주황색 카드라는 것을 반복하여 학습 또는 경험했기 때문이 그러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의 상식 철학자들은 이것을 ‘생득적 관념’이라는 멀로 설명합니다. 출생 때 이미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기능(faculty)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이 생득적 관념으로 얻어질까요? 인간은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무엇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료들을 분석히여 그것을 실체를 파악해냅니다. 사물의 정보를 파악 활동의 결과를 지식이라고 합니다.
사물을 파악하는 구성요소는 무엇일까요? 칸트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12개의 범주라는 기본적인 구조 안에서 움직이고 사물을 판단하여 지식을 얻는다고 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 안에서 12개의 범주가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모든 인간은 이 12개의 범주에서 존재하고,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칸트가 말하는 12개의 범주(category)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본질성과 원인성과 상호성의 양의 범주입니다. 둘째는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의 질의 범주입니다. 셋째는 관계의 범주입니다. 본질성, 원인성, 상호성이 여기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능성과 현존성과 필연성의 양상의 범주입니다.
이 범주들은 보편적이고, 불가변적이며,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에서 작동됩니다. 경험하는 사물은 무형의 인지 덩어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에 사물을 분석하는 이 12개의 카테고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심겨져 있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지식은 머리가 결정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12개의 범주들이 우리의 머리안에서 지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경험은 마음이 인지의 자료들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과정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은 지식을 형성하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을 실제적으로 구성하고 결정합니다.
이와 같은 지식 형성의 과정과 활동을 일컬어 ‘지식의 능동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칸트 인식론을 설명하는 핵심단어입니다. 사람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두뇌가 외부에서 입력된 무형의 인지덩어리를 능동적으로 분석하여 주황색 카드라는 지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결국 순수이성주의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순수한 이성으로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의 순수한 이성으로는 참된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주관적인 프리즘을 통해서 나온 하나의 제한된 결과입다. 즉 인간의 진리는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진리는 다수로 존재하고,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는 가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절대적으로 없다고 봅니다. 제한된 인간의 사고 판단의 과정을 거쳐 지식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은 모두가 옳다고 하니까 옳은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판단의 주체입니다. 칸트는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칸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용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다수가 정합론적으로 동의를 하면 그것이 진리하고 합니다. 회원이 투표를 해서 절대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옳은 것이됩니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리처드 도킨슨은 신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상은 임마누엘 칸트에서 왔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권위를 다 깨부수고, 거부하며, 배격하라고 합니다. 과거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다 파괴하라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해체주의’, ‘탈구조주의’라고 합니다.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 해체해야 진짜가 떠오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보편적인 사상입니다.
자유주의 기독교 신학, 진보계 신학은 임마누엘 칸트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신학유형은 성경을 기독교 신앙의 참고도서로 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치를 와해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영향이 그만큼 신학계와 교회에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칸트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칸트의 인식론을 “마타그라볼리지렌”이라고 합니다. “헛된 글쓰기" 곧 말짱 꽝 또는 쓰레기라는 의미의 독일어입니다. 굉장한 것 같은데 자세히 따져 알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 게오르게 하만은 칸트의 대작 『순수이성비판』을 “마타그라볼리지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한마디로 쓸 데 없는 글쓰기를 하였고, 헛수고 하였고, 10년 세월의 수고가 빵점이다. 10년의 세월이 아깝지 않으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칸트보다 6살 어린 같은 동네의 지인이고 적수입니다. 칸트의 친구이기도합니다.
하만의 『메타비판』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최초의 논박서입니다. 『순수이성비판』가 문제제기는 했으나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칸트가 아는 것 너머에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만은 이성과 감성의 관계를 지적하였습니다. 감성과 이성은 동시에 작용하고 분리되지 않습니다. 칸트는 이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만은 “초월철학이 헛되이 기록하려던 바를 나는 연약한 독자들을 위해 언어의 성례와 관련하여 해석했다”고 말했습니다. 순수이성 이전에 언어가 있었고, 인간의 이성은 강한 능력이지만 언어에 힘입어 작용합니다.
칸트가 인간을 위대하다고 전제한 바, 이것은 교만이고 함정입니다. 달빛은 태양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이지,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식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빛의 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은 참된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례(세례, 성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만은 우리 언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그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덕성 교수님께서는 하만의 의견에 동의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만의 지적이 옳으며, 칸트는 헛수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한 모든 것은 헛되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언어와 개념 자체가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여 그 어떤 것을 이해하고, 이해 과정에서 판단을 하고, 그 결과를 산출하여 얻는 것이 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최덕성 교수님의 칸트에 대한 비판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칸트는 감각과 질료를 구분합니다. 이 감각과 질료가 어떻게 인간의 지성과 결합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둘째, 무형의 인지덩어리는 고정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로 매우 중요하합니다. 칸트는 인지덩어리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셋째, 칸트가 제시하는 범주들 곧 지식을 만들어내는 12개의 범주와 시간과 공간은 지식, 진리를 분석의 구성요소들인지도 불확실합니다. 예를 들면 칸트는 감각 같은 중요한 인식 기능을 것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칸트가 말하는 인식 구조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사후 세계, 내세의 상벌 등 경험할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으니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은 결국 어리석음이며, 따라서 칸트에게 기독교는 일종의 미신입니다.
다섯째, 칸트 아저씨의 인식론에 의하면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것 너머에 있는 중요한 것을 판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 밖에는 실재하는 것이 없습니까? 그러한 것이 실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따라서 신과 신의 계시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최덕성 교수님은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자신이 칸트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 진영의 많은 신학자들과 기독교 지성인들이 칸트의 추종자들이라고 합니다.
최덕성 교수님에 따르면,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주어진 진리는 인간 제한성 싸이클에 맞추어 보낸 신의 선물입니다. 칸트의 인식론은 인간의 이해와 지식이 상대적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 점에서 칸트 아저씨의 가르침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참 진리를 아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이고 또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함은 주제 넘은 주장입니다. 인간은 유한성 때문에 인간에 대한 온전한 지식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이 영원한 진리, 초월적인 진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옳다 그릇되다고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칸트, 당신의 이론은 말짱 꽝입니다. 유한한 당신이 신의 지혜와 지식, 초월적인 영원한 지식, 인간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의 유한성을 무시한 것입니다. 참 주제 넘은 태도입니다.
칸트의 인식론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주관적으로 파악하면서 그 파악 활동의 결과만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칸트의 인식론은 인간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킨트는 주제파악을 못했습니다. 자신이 인간이고, 인간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을 담은 <순수이성비판> 쓸 데 없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마타그라볼리지렌’입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간파한 칸트의 통찰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무엇을 판단하는 것이 다 제한적이고, 우리의 판단이 상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신적 계시의 진리, 특별계시,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한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흔든 칸트의 주제넘은 지식의 결과입니다. 10년 동안 헛수고 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최덕성 교수님은 칸트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아래의 성경 구절들을 소개하고 설명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최덕성 교수님은 하나님이 정답은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5~6).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이 특별계시로 주신 성경 곧 주의 말씀을 따라가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를 찾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영원한 진리의 비침을 받아야 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에 대한 우리의 답변입니다. 인식론과 관련하여 인간의 유한성과 신적 지혜와 지식과 계시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개혁신학은 칸트 인식론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놀랍게 합니다.
이명숙/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설명: 이 글은 최덕성 박사가 2021년에 브니엘신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친 ‘임마누엘 칸트’ 학과목 과제로 제출한 것이다. 강의실에서 배운 것을 글쓰기 형식을 갖추어 자기의 말로 조리 있게 적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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