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는 개혁을 환영하는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체계는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풍요로운 유산이지만, 무오하거나 종결된 신념 체계가 아니다. 개혁주의는 특별계시로 주어진 성경에 충실한 신학체계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진리 체계는 아니다. 그것을 모르는 개혁신학자가 있을까만, 최근 한국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일어나는 격앙된 논의들을 접하면 이 점을 확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혁'은 고친다는 뜻이다. 개혁주의는 '개혁'(reformanda, reforming)을 환영한다. 한국 개혁주의 계는 개혁을 선호하는가?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과 합리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개혁파 신앙고백서들도 탁월하다. 그러나 개혁신학과 신앙고백서들은 인간의 산물이다. 개혁신학 안에 성경과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거나 미진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발견되면 정중한 논의를 거쳐 개혁하는 것이 개혁주의 전통의 특징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개혁을 환영하지 않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개혁주의라고 하지만 실제는 그 이름으로 보수주의나 수구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개혁신학, 개혁주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 신학체계의 대부분의 주지들이 높은 지적 영적 신앙고백적 결실이라고 믿는다. 내가 개혁신학과 그 신념 체체를 존중하는 것은 무오하거나 절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적이며 합리적인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개혁신학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신앙문답 등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을 존중하는 까닭은 성경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전통의 상속자들의 가야할 길은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연구, 토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발전시킬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고백서에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 발견되면 개혁 곧 고쳐 바르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신학과 신앙고백서는 역사적 산물이지 정확무오한 정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신학 논의는 정중함과 진지함으로 다감이 바람직하다. 개혁신학과 그 전통의 신앙고백서들을 절대시하거나 완성된 경전처럼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신학생 서절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대요리문딥』 제 66문답이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나무의 접붙이기로 비유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이 문답은 바울의 돌 감람나무와 좋은 감람나무 접붙이기에 관한 설명(로마서 11장)을 인용한 내용이다. 내가 생각에는 이 비유에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바울은 꺾어진 돌 감람나무 가지가 뿌리를 가진 좋은 원 감람나무에 접목되어 진액을 받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과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설명한다. "또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롬 11:17),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 11:24).
내가 바울이 나무 접붙이기 비유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의 의도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연합을 나무 접붙이기로 비유하는 접근에는 의문이 있다. 나는 감나무와 밤나무를 접붙인 경험이 있다. 나무 접붙이기는 좋은 유전인자를 가진 가지를 자양분을 빨아올리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질이 열매를 맻는 뿌리를 가진 동종의 야생 나무에 접목하는 작업이다. 접붙임을 받는 나무의 가지는 선하고 유익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접붙임되는 뿌리를 가진 둥치는 섭생력이 강하지만 나쁜 열매를 맺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감람나무 접붙이기와 감나무, 밤나무 접붙이기는 다르지 않으리라.
연합을 설명함에 감람나무 접붙이기를 대입면 모순이 발견된다. 꺽어진 가지인 인간에게 무슨 선한 유전인자가 있는가? 원둥치는 나쁜 열매를 맺는 좋지 않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돌 감람나무의 나쁜 유전인자에서 무슨 선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가?
성경의 비유는 그 이야기의 의도, 전하려는 메시지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는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울이 감람나무의 접붙이기 비유로 전하려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생명 관계에 들어간다.
개혁신학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은 양심의 자유를 가로막거나 지식 발전을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에 종속적이며 상대적이다.그래서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무엇이 발견될 때, 주저 없이 고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들은 성경 가르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개혁신학과 신앙고백 문서들이 커다란 가치와 의의를 갖는 것은 그것이 성경에 충실히 근거하고 있고 합리적으로 정당하다는데 특징에 있다. 모든 가르침은 성경에서 유래했다. 오직 성경이 개혁신학과 고백서들이 지닌 가르침이 원천이며 표준이다.
칼빈주의라고도 불리는 개혁주의 신학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해 전수받은 역사적 신앙이며,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고, 돌아서라는 곳에서 돌아감을 강조한다. 철저히 성경 말씀에 토대하고 두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은 생명을 주는 운동이다. 적극적인 신앙, 긍정적안 사색, 그리고 사람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다.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깨닫고 성견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높이는 생동력 있는 신학이다. 타협 없이 진리를 증거 하려는 역사 적 보편성, 세계성을 띤 신학이며, 닫힌 신학이 아니라 열린 신학이며, 신앙과 신학의 분리를 배격하는 신학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구성요소인 언약신학은 오래 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언약신학이 17·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발전한 사상이라는 논의가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아 담고 있는 '행위언약'을 불운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지적해 왔다.
이러한 비판의 주 까닭은 언약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고 간주하고 모든 비칼빈주의자들을 이 은혜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배타적 사고의 근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은 ‘내 편-네 편,’ ‘우리-그들’ 식의 사고방식이 발전되어 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네덜란드개혁교회들은 국가의 인종차별정책(apartheid)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이 텍스트에서 찾으려 애썼다. 개혁신학에 대한 지적과 강조가 문화와 인종 우월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면 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7장 2항과 3항은 ‘연방신학’(Federal Theology)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항목들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은 두 가지의 주 언약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은혜언약이며, 아담이 천지창조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두 번째의 언약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본다. 이 개념은 후기 개혁주의 전통과 청교도 신학의 구성 원리가 되었다. 비판자들은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유래한 개념이 아니라 17세기 산물이라고 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여러 해 가르친 스코틀랜드 출신 신학자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는 성경은 기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언약 곧 은혜 언약만을 가르치고 있다고 논증한다. 언약의 본질 또는 실체는 하나이다. 두 개의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약이 존재한다. 다양한 것은 하나님의 집행뿐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시작으로부터 언약사상의 단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신적 언약이 은혜와 약속에 의한 주권적 집행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구성적 또는 통치 개념을 부여하는 것은 쌍방 간의 맹약, 계약, 상호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있다는 뜻에서 섭리이다”(John Murray, The Covenant of Grace, London: Tyndale Press, 1953, 30-31)라고 말한다.
알버투스 피터스 교수(Albertus Pieters, 1869-1955)는 개혁신학 안에 있는 비성경적 개념들에 반기를 든 신학자이다. 많은 시간을 개혁신학의 율법주의적 특성을 논박하는 데 할애했다. 아울러 세대주의적 접근의 유해성에 경종을 울렸다. 미시간 주 홀랜드의 호프칼리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다가 같은 학교 구내에 있는 웨스턴신학교에서 1939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이 학교는 미국개혁교회(RCA)의 목회자 양성신학교이며, 개혁신학 전통을 따르고 있다. "알버투스 피터스 콜렉션" 안에는 개혁신학을 개혁하려고 했던 그의 흔적들이 일부 담겨 있다.
개혁주의의 성경적·지성적 전통은 개혁파 전통의 선구자이며 종교개혁가인 쮜리히의 목회자 쯔빙글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쯔빙글리는 성경적 기독교를 이상으로 삼았다. 영적 실체와 하나님의 말씀을 물질과 감각적 호소 수단보다 더 중시하는 경향을 지녔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호소를 거부하는 이면에는 당시 서양 문화의 특징인 이원론적 사물이해가 다소 엿보인다.
쯔빙글리의 확신은 개혁주의 전통과 장로교 신학의 대부인 요한 칼빈의 그것과 대동소이 했다. 스콜라주의자 윌리엄 오캄의 전통을 따라 신적 계시를 신학의 원천으로 삼고, 성경 내용을 조직하고 연결을 짓는 동시에 합리적 이성활동을 중시했다.
이성의 시대인 17세기 정통파 기독교인들 곧 칼빈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종교개혁가들이 신앙했고 가르쳤던 바를 더욱 합리적으로 체계화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이러한 지성적 노력의 산물이다. 칼빈주의 전통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과학방법론에 의해 강화되었다. 신학자는 과학자이며, 자연이 과학자의 자료로 사용되듯이 개혁신학자들은 성경을 신학자의 유일한 연구 자료로 삼았다.
종교개혁가들이 부르짖은 '오직성경'(sola scriptura)은 본래 로마가톨릭 전통이 교회의 표지로 내세우는 '전통'이라는 권위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된 구호이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이 말은, 성경이 신학의 유일한 자료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학이란 진리의 보고인 성경으로부터 자료를 꺼내와 자연과학자가 그러하듯이 과학방법론에 따라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일이라고 이해했다.
합리적인 사색을 중시한 개혁주의 전통은 임마누엘 칸트에서 시작된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두려워하면서 지성적 전통을 넘어 주지주의(Intellectualism, Rationalism)의 경향을 띠었다.
18세기 칼빈주의자들은 신임할 만한 신학 체계를 세우고, 합리적 신앙 지식을 형성시키거나 강화하고, 이를 방어하고 해석하는 일에 정열을 쏟았다. 믿는 바 내용에 대한 지적 확실성을 중시했다. 지적 확실성이 결여된 신앙은 불가지론, 회의주의, 비과학적, 비합리적 태도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무오성(infallibility)를 넘어 성경 무오성(Inerrancy) 교리는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합리적 사색을 중시하지만, 인간 사색에만 의존하는 사변적 신학을 경계한다. 잡다한 가치들로 장식된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만으로는 신적 진리에 관한 합리적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육과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형성된 자연주의적 합리성(Naturalism)에 대항하여 그것들을 넘어서는 영적 차원, 신앙, 은총의 논리, 초자연적 세계(Supernaturalism)를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도(道)와 진리를 체계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중시하면서도 강력한 합리적 동기를 갖고 움직인다. 개혁주의 전통은 신앙 운동인 동시에 일면 합리적, 지적 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주제에 구 프린스톤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학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전자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임을 강조하며 증거주의(Evidentialism) 견해를, 후자는 신앙적 지식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일을 부정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입장을 취한다.
개혁주의 전통이 변천의 과정을 밟아 왔다는 사실은 '개혁주의'가 완성된 신학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개혁주의는 하늘에서 직접 떨어진 신학 체계가 아니다. 성경과 이성적 활동을 중시하면서 각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정황이 요구하는 지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신앙적, 신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제도화되고 화석화된 계급주의적 교회제도를 박차고 성경적 기독교를 추구하며, 초자연주의와 신본주의 기초 위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왕성한 신학적 사색의 산물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학문체계이다. 성경에 비추어서 잘못된 것이 발견될 때는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수정할 자세를 갖고 있다. 개혁주의는 유한성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 이성의 부패성을 전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끊임없는 개혁을 요청해 오고 있다. 교회의 제도나 관습만이 개혁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신학과 교리의 개혁도 요청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인 정신 활동과 창의성을 요구한다. 이 요소들은 개혁신학의 발전에 꼭 필요하다. 개혁주의 신학 활동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축척이 아니다. 여러 신학 영역의 기초 개념을 파악하고, 성경의 여러 사실들과 현상들의 관계를 규명하고, 원리와 법칙을 알아내어 현실과 관련지으며,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이를 응용하는 기술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 활동이다.
신학수업은 개미처럼 많은 정보나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다. 정보와 지식을 체계화하고 타당성을 논하며 응용하는 작업이다. 신학 지식 탐구의 주요 과정은 이러한 통합된 학습 과정이다.
창의적 신학 활동은 교회의 문화적,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신학도는 인류가 겪고 있는 시대적인 격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다. 인류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이데올로기적 냉전 체제가 종식을 맞았다. 그러나 인종이나 민족 간의 갈등과 분쟁은 격해지고 있다. 핵무기의 위협, 환경오염, 인종갈등, 마약, 인공지능의 오용, 생명 공학, 유전자 조작, 윤리성 퇴행, 무한접속정보통신, 유비쿼터스, 메가버스 등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급격한 변화는 불가피하게 긴장, 갈등, 회의를 낳게 된다. 세대 간 격차의 골은 깊어가고, 문화적 갈등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변치 않는 복음과 변하는 문화 현장 사이에 서서 그 복음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항구성을 지닌 진리의 복음을 격변하는 삶의 현장에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인 신학도는 목회현장의 한국적 정서를 파악하고 한국의 문화적 도구를 사용해 한국인의 기호에 알 맞는 한식 요리를 해 낼 복음전파와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 버터와 치즈를 자료로 삼아 상술(商術) 정서와 이원론이라는 도구로 요리된 음식이 아니라, 농자지천하대본(農者之天下大本)과 한(恨)이라는 정서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인 틀로 이해된 진리와 복음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종종 '보수주의'라는 오해를 받는다. 보수주의는 사물, 신념, 사상에 대한 태도와 경향성을 뜻한다. 보수주의는 수구적인 멘탈리티를 동반한다. 변화와 갱신을 두려워하며, 심지어 그것을 악마처럼 여긴다. 복음의 학문적, 선교적, 문화적 사명을 경시하고, 옛것에 집착하고, 옛 영광을 자랑하며 옛것만을 고수하고자 한다. 때로는 서양 신학의 문화적 요소조차도 진리로 여기며 이를 보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 성향을 가진 개혁주의 신학도는 영원한 진리와 이해된 진리를 동일하게 여긴다. 버터와 치즈 맛을 정통으로 여기며 김치와 된장 맛을 악마처럼 여긴다. 제국주의적 혹은 식민주의적 발상, 백인우월주의적 성경 이해조차도 하늘에서 떨어진 진리인 것으로 여긴다. 이런 종류의 개혁주의 사고는 수구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신학 활동을 방해한다.
보수주의와 개혁주의는 불일치한다. 보수주의는 개혁을 싫어하지만 개혁주의는 환영한다. 보수적 개혁주의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조상들의 관습과 정신성에 종속되려고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보수주의 멘탈리티는 창백하고 경직된 신학도를 만든다. 창의적인 사색이나 역동적인 신학 혹은 목회활동을 적으로 여기며 성경에 기초한 신학의 발전을 두려워한다. 열려진 시대가 적합한 새로운 선교 활동에도 관심이 없다.
보수주의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신앙해 왔던 성경적인 가르침과 가치를 '보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켜야 할 보수주의와 버려야 할 보수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정적 특성은 환영을 받을 수 없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고자 하는 점에서 훌륭하다. 그러나 수구적 정신으로 무장한 보수적 개혁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교회 개혁과 창의적인 신학 활동 또는 목회 활동을 방해한다.
모범적인 개혁주의 신학도는 창백한 노인성(老人性)의 껍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옛적 같기를 구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날마다 개혁하며, 새롭게 되며, 발전시켜 나간다. 통합된 진리 체계인 개혁주의와 그 지성적 전통을 더욱 빛내고, 발전시키고, 수하고, 오늘의 신학 마당과 목회 현장에 그리고 문화 현장에 토착화한다. 성경에 충실한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신학활동을 계속한다.
개혁신학과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다음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최덕성,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 최덕성,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 존 헤세링크, <개혁주의 전통>(최덕성 역), 유진 오스터헤이븐,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최덕성 역).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유유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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