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데이빗 조(조용기)의 명암
한국 교회는 10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포퓰레이션 1000만 명을 돌파한 역사를 새롭게 쓴 교회로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고, 아마도 갱신되지 않을 걸음일 것으로 예견된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초기 대부흥운동의 여파로 전국적인 새벽기도와 한반도의 온 동리에 교회를 세우는 전도 운동을 일으키고,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리더십을 분명하게 발휘하여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교육의 전반에서 지도적인 역량을 드러내었고, 이와 더불어 교회 자체의 성장을 이루었다. 전쟁 이전의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속 교회로서 사회적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한 삶을 꾀하였다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열린 카이로선언(1943), 얄타회담(1945, 02), 포츠담회담(1945, 07)으로 이어지는 강대국의 손익계산과 함께 미소의 한반도 개입과 이익 분할을 계기로 38도선을 근간으로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는 불행한 결정이 뒤따랐다. 소련의 뒷배를 믿고 김일성을 주축으로 벌어진 북한의 남한 정복 전쟁이 일어나 폐허에 폐허가 겹치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의 리더십을 떠맡았던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로 민심은 악화되었고, 일군의 기독교는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묘수를 택하는 빌미를 만들었다. 친일을 배경으로 자신을 형성했던 박정희는 휘하 장교들을 이끌고 한강 다리를 건너 청와대를 불법으로 접수하는 5.16군사쿠데타를 감행하였다. 박정희는 한편으로는 북한과의 대치를 전면에 내세워 반공정서를 강화하면서 친일 혐의를 벗고자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있는 군대라는 조직을 동원하여 대한민국의 경제적 재건의 기초를 세우는 것에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꾀하는 전략적인 지점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반공의 가치와 경제재건이라는 시대정신을 뒷배로 유신헌법 제정 이전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인 리더십을 구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한국 교회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대정신을 따라서 한편으로는 반공 정서와 새마을 운동이라는 가치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의 평화통일과 인권신장이라는 가치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노정하였다. 이런 흐름과 함께 한국 교회는 두 다른 유형의 교회로 분화되었다. 하나의 유형은 반공과 독재 기반의 정권과 투쟁하면서 사회변혁적인 방향성을 뚜렷하게 노정하는 교회로 그 정체성을 드러냈고, 다른 하나의 유형은 반공과 독재 기반의 정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경제적인 자립과 성장을 꾀하는 일에 편승하면서 자신을 드러낸 교회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전자를 진보적인 교회라고 부르는 경향을 보였고, 후자를 보수적인 교회라고 부르곤 하였다. 소위 진보적인 교회는 토착문화기독교를 근간으로 민중신학이라는 화두를 구성하여 노동해방, 인권보장, 평화통일, 여성해방이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었고, 상황화신학(contextualizational theology)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나름의 목표와 그에 상응하는 괄목할 만한 사회적인 기여를 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보수적인 교회는 한국 사회의 다차원적인 쟁점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활동하기보다는 자기 안정화를 꾀하는 방향으로 치달았으며, 개인과 교회의 경제적인 안정을 화두로 전도에 매진함으로써 개교회의 성장을 꾀하는 일에 괄목할만한 결과를 남겼다.
이런 쟁점이 구체화되어 사실상 교회의 분열로 이끌어진 계기는 세계교회협의회에 동참할 것인지 여부에서 촉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세기 초엽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세 종류의 복음적인 선교단체와 20세기의 비극인 세계 제2차 대전의 결과인 붕괴된 유럽을 재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던 대륙의 신학자들의 연대로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총회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단체이다. 초기 그들의 모임에서는 복음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차원이 배제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복음보다는 사회적 책임 쪽으로 경도됨으로써, 시간이 흘러가면서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가 직면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현실에 매몰됨으로써 일방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형태로 변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결과가 1970년대의 로잔복음주의대회의 출현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 대표자를 파송하고, 이런 흐름의 총회에 참여할지 말지를 고민한 끝에, 무엇보다도 반공 이념을 축으로 쟁론을 거듭한 끝에 통합은 참여를 합동은 불참을 표명함으로써 한국 교회 주요 교단의 분열로 치달았고, 한국 교회 전반을 놓고 볼 때, 참여 쪽의 교회가 진보적인 교회로, 불참 쪽의 교회가 보수적인 교회로 자신을 극명하게 노정하게 되는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다. 사실, 성경은 교회의 역할을 두 차원 모두를 포월하는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교회가 두 차원을 통합적으로 이끌어내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비단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세계 교회의 모습도 전자의 지향성을 가진 세계교회협의회와 후자의 모습을 견지한 복음주의자대회로 크게 양분되었었고, 그런 모습이 한국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투영된 것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 역시 해외의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의 전반적인 진보와 함께 이슈를 상실하면서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 상태에 빠져들었고, 대신에 케이프타운대회에서 드러났듯이 초기의 세계교회협의회가 견지했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복음과 사회 참여 사이의 우선성을 보지하면서 통합을 꾀하는 복음주의대회가 중심을 이루며 세계 교회의 질서가 재편된다는 점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평가의 여지를 담지한 운동이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슈를 신학적으로 선점했던 바르트나 몰트만과 같은 지도자를 더 이상 배출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었으며, 회원 교회들도 더 이상 이 단체에 기금을 출원하는 일에서 발을 뺌으로써 무의미한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전망은 성만찬신학의 공통분모를 찾는 방식으로 이 운동에 공감했던 마르틴 브링크만과 한국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열리기 직전 열린 헝가리학회에서 만나 나눴던 대화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세계지도상으로 작은 지점을 차지한 한반도의 교회도 이런 국제적인 움직임과 별개로 형성된 교회는 아니었다. 그곳의 분열이 이곳의 분열이었고, 그곳의 문제가 이곳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2021년 9월 14일 작고한 데이빗 조(The Late Rev. David Cho, 1936-2021)도 이런 분화된 한국 교회의 분위기 내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일천 석을 거두는 부농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의 국회의원 도전 실패로 인한 가산 탕진, 이윽고 터진 한국전쟁으로 피난 생활을 하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좋은 두뇌를 가진 청년이었으나, 부산공고 2학년 때부터 당시에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되었던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까지 치달은 때가 있었다고 한다. 고교시절 학교에 상주하던 미군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오순절교단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의 설교를 통역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복음을 접하고, 1년 후 루이스 리처드(Louis Richards) 선교사와 대화를 통하여 신학 공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골수에 사무친 가난에서 해방되는 길을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기독교신앙에로 귀의하여 목회를 꾀하였다고 한다.
성경 해석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자서전적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난에 사무친 청년 데이빗 조는 오순절운동계열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고, 은사로 상당한 영향력을 떨치던 최자실 전도사를 만나, 그녀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 목회의 현실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58년 5월 18일, 최자실 전도사의 거실에서 밭에서 일하다 때마침 내린 비를 피하러 모여든 네댓 명의 부녀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촉발된 그의 목회는 가난한 자들과의 어울림에서 형성되었다. 가난은 질병을 동반하고, 그런 회중을 목양하는 과정에 순복음적인 열정이 반영되었다. 치유사역이 강조되었고, 치유의 소망 가운데 기도하고 박수하는 일이 거듭되면서 성령의 치유하는 사역이 불가불 동반되었다. 곤고한 중에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기도에 성령께서 반응하고 돕는 손길을 내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실은 이런 현상은 비단 데이빗 조의 목회 현장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가난에 찌들고 각양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되, 그것을 딛고 설 의료 시설이 구비되지 않은, 설령 구비되었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에는 요원한 한반도의 상황에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애절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비단 순복음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전반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령의 치유하는 사역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던 데이빗 조의 목회현실에서든, 말씀을 선포하고 양육하는 교회에서든 성령의 치유하는 사역은 다양한 교파적 교회 안에서 편만하게 일어났었다. 한반도의 상황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사역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한국 사회 전반의 진보와 함께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국민보건으로 어느 정도 정돈되었을 때, 교회 안에서 일어나던 치유도 점차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챙기시던 일을 한국 사회의 교육받은 의사들이 상당한 정도로 수행해냈기 때문이다. 일반은총만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일에 굳이 하나님이 직접 나서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신체상의 문제보다는 정신적인 문제를 걸어서 과거 여의도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지식인 순복음 지도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려는 목회적 기획을 일각에서 꾀하였고, 그 한 모습을 대구의 모 순복음교회의 사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을 심리학과 상담학의 이론에 버무려 한국인의 고유한 한을 어루만지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의도 특유의 안수 양상을 계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을 딱히 성령의 치유 사역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일반적인 평가가 사실은 바른 진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성령의 치유하는 사역을 강조하는 다양한 유형의 집회가 양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교회성장의 핵심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양한 규모의 순복음교회 현실을 놓고 볼 때 옳은 분석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요인이 함께 어우러졌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순복음교회 특유의 삼박자 구원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알기 쉬운 대중적인 설교를 유려하게 수행했던 데이빗 조의 설교 능력을 꼽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 당시 소위 대중이 듣고 별다른 고민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그 설교에 담아낸 희망의 메시지가 주는 울림이 삶의 변화를 간절하게 원하는 회중의 욕구에 상당한 만족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데이빗 조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이 함께 강연회를 개최하고, 데이빗 조의 “희망의 목회”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을 조명하는 일이 있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흥미로운 조합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몰트만의 리더십을 축으로 활동하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과 일관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거점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운 일로 다가온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우선적으로 이념에서 자유로운 운동체였던 반면에, 데이빗 조는 반공 이념에 깊이 공감한다는 점에서 서로의 사상적인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가난을 인권과 연결하였다면, 데이빗 조는 번영신학과 연결하였다는 점에서 그 결을 달리한다고 여겨진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기초하였다면, 데이빗 조는 개교회지상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그 전망이 사뭇 다르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위르겐 몰트만이 제3세계의 삶의 정황에 깊이 공감한 신학자라면, 데이빗 조도 가난한 나라에 대한 선교적 열정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지향성이 유사범주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빗 조의 설교 사역에 담긴 희망이라는 화두가 한국 교회 당시의 현실에서 볼 때는 매우 매력적인 요소였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번영신학이라는 것이 윤리적인 차원을 담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었다고 본다. 한국의 전래 종교성인 무속종교도 번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윤리적인 지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의 고난을 끌어안고 목회를 수행하되 토속종교의 문제 상황을 딛고 기독교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성경적인 신앙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데이빗 조의 희망은 세속화의 문제를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상황과 성경적인 메시지 사이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데이빗 조의 (설교)사역의 한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경향성은 교회와 유관 단체와 관련한 가족적 결속을 낳는 것으로 결과하였을 것이다.
성령의 현장성 있는 사역을 포함하여 구성적인 면에서 매우 쉬운 설교, 내용적인 면에서 희망을 담은 설교가 데이빗 조의 목회 사역에 중요한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의 핵심 요인은 아니었다. 한국교인들은 별로 집중하지 않는 다른 요인이 있는데, 유학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이것을 실감한 바가 있다. 남아공화국에서 유학할 때, 선교학박사학위를 받고 프리토리아대학교 신학부에서 강의하는 한 분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빌름 하르딩 박사인데, 그는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라는 사실을 안 후로는 한동안 거의 매일 땅콩초콜릿바를 하나 사들고 찾아와 잔디밭에서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장제도에 있었다. 이런 사실은 셀교회를 설계하고 증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랄프 네이버의 『셀교회 지침서』에서도 확인된다. 대형교회 증식의 이론으로서 셀 교회의 원리는 사실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장 중심의 교회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소위 빨간 가방을 든 구역장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핵심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를 통하여 형성되고 관리되는 교회의 조직 관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바빠도 구역장 교육과 관리는 가능한 한 직접 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관심을 집중한 사역의 대상이었다. 자세한 분석은 다양한 논문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으니 이곳에서는 삼가려고 한다. 한국 교회, 소위 모이는 일에 열심하는 교회는 구역조직의 효율적인 작동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들어오는 문은 열어두고 나가는 문은 닫으라는 말이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과 구역장은 나가는 문을 잠그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들어오는 문까지 활짝 열어젖히는 기능을 수행했으니 교회의 성장 전략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구역 조직의 세포증식적인 확장과 그 조직 관리의 철저함은 실로 엄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기조에서 수적인 배가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고, 이렇게 형성된 지역 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교회로서 자리매김이 되고 지교회의 헌금이 중앙으로 모이는 형태로 교회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중앙집권적인 교회 구조는 힘의 집중화를 낳고, 힘의 집중화는 전략수립과 실행에 있어서 순발력을 가져온다. 상당히 큰 규모의 인력풀을 동원하면서 지역별로 교회의 특성을 분석하여 적절한 인재를 투입하고 목회적인 전략을 세워 목회를 일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실은 구역 관리는 기업의 경영 관리에서 유추하여 적용한 것이요, 교회의 성장에 따른 지교회의 설립과 유지는 한국 사회 기업의 생존 원리를 본 떠서 실행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교회성장학자들의 관점이다. 본래 미국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경영이론을 교회 목양에 적용하는 일을 꾀하였고, 교회성장연구소는 그런 관점을 수용하여 교회에 적용하는 전략적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문어발식 교회 확장이라는 측면이 과연 올바른 결정이었는가, 하는데 있을 것이다. 개교회회성장주의라는 함정에 빠진 상태에서는 이런 인간적인 꾀가 용인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나라의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하늘로부터 온 선한 지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회일선에서 은퇴하고 다음세대로 목회가 이양되면서 지교회는 여의도순복음본교회로부터 전면적으로 분리되어 독립하는 방향으로 생존을 꾀하는 일이 뒤따랐다. 누구의 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후임자로 선정된 현재담임목사는 기존의 관행에서 탈피하여 목회를 꾀하였으며, 장로교회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한 양심에 일치하게 성령세례의 본고장에서 성령세례가 아닌 성령충만을 일관되게 외치면서 목회하는 뚝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한 목회 철학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개교회 이식이나 복제 증식은 올바른 길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를 기반으로 한국 교회를 볼 때는 재정과 인력과 힘을 가진 대형교회가 자기 복제를 꾀하기보다는 지역주민의 인격적인 특성이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반영되어 나타나는 또 하나의 교회로 독립할 수 있도록 분리독립교회로 세워야 했을 것이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도시문화가 형성되고 인구의 집중화와 다세대를 포괄하는 주택구조로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탈지역교회가 아닌 지역교회의 형태로 교회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있어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했다고 본다. 탈지역교회구조에서 인간의 인격성은 배면으로 숨겨지고 미디어를 낀 외연적인 모습만 강조되는 방향으로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이율배반적인,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검증되지 않는 형태로 신앙이 형성될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몹시 잘못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 데이빗 조 문상 과정에서 대통령후보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우연인 듯 조율된 듯 만나 보란 듯이 안수하는 행위는 보수적인 교회의 정치적 편승의 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경직 이후로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퇴행, 독재와 손잡거나 반공을 이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관행이다. 진보적인 교회에서 보이는 정반대의 정치적인 유착 또한 지양되어야 한다. 세속정부 그 자체는 어떤 지도자 아래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정권이든 정권은 기도의 대상이어야 하고, 기도의 내용은 잘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기원의 방식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탄원의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든 간에 교회는 정부와 일치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와 정부의 영역은 구별되어야 하고, 윤리적으로 상호 견제되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정부는 이단을 경계하고 올바른 예배가 자유롭게 실행되도록 해야 하고, 교회는 정부가 윤리적으로 올바름을 찾아갈 수 있도록 살펴 기도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리라는, 순복음교단의 어느 신학자와의 대화에서 확인하였듯이 나중에는 강건하고 잘되어 있어야 영혼이 잘 된 것처럼 역질서에 떨어지곤 하는 번영신학에 버무려진 왜곡된 인간의 욕망이 정권과의 밀착을 통하여 실리적인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사유화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목적으로 정권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북의 긴장이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할지라도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용기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념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교회의 생존의 이유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00, 김00, 조00, 김00, 전00으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이런 형태의 교회 모습은 일견 유의미해보이지만, 일견 왜곡된 기독교의 한 모습이었다는 점에서, 데이빗 조의 죽음은 한국 교회의 역사에 시사하는 의미가 적지 않다 할 것이다.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이 지향하는 바를 상속하고 계승한다고 표방하는 한국의 개신교회가 150여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과연 그 순수한 존재를 구현하고 있는지 다시 되물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드러낸 핵심 가치는 시대마다 시대정신의 거센 조류에 도전을 받는다. 수선이 필요하고 개선이 필요한 이유이며, 때로는 근원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 데비빗 조를 거슬러, 웨슬리를 거슬러, 칼빈을 거슬러, 루터를 거슬러,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슬러, 이레나에우스를 거슬러,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되돌아갈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인간의 목회는 유일한 터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성경을 축으로 완전하게 폭로되어야 하며 평가되어야 한다. 족적의 공과와 명암을 살피며 불연속할 것과 연속할 것을 구별하여 취하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6-8)
이야기를 매듭짓기 전에 데이빗 조와 관련하여 한 가지 꼭 언급해야 하는 것은 20세기 선교사에 남겨진 그의 족적이다. 그는 1966년 4월 30세 나이로 서대문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던 해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총회장직을 연임하게 되는데, 1969년 동아시아 13개국 330여 지도자들이 모인 하나님의성회동북아시아대회를 서대문교회에서 주최하면서 세계에 흩어져 생존을 꾀하는 오순절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그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이런 인지도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을 발판으로 세계를 여행하면서 전도집회를 갖곤 하였는데, 생래적으로 오순절적인 성향을 지닌 회중이 운집했다는 브라질에서의 집회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다양한 선교적인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세계 선교와 관련하여 20세기에 가장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선교를 수행한 지도자로 빌리 그레이함(William F. Graham Jr., 1918-2018)을 꼽을 수 있다면, 그 다음으로는 한국의 오순절운동을 이끌었던 데이빗 조가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남긴 선교사적인 영향력은 역사적으로 평가될 필요가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유태화 교수(백석대)의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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