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
1. 거룩한 읽기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영성, 영성목회, 영성신학의 상징적인 용어로 부상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서슴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거룩한 읽기’를 뜻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독서 또는 읽기를 뜻하는 렉시오(lectio)와 거룩, 신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디비나’(divina)의 합성어이다. 성경 본문을 눈으로 읽고 그 거룩한 말씀을 마음에 모으는 성독(聖讀)을 한 뒤에 기도하는 것을 지칭한다.
중세기 관상기도에 집중한 수도사들은 첫 단계에서 성경 텍스트를 읽고 묵상하고 기도를 드리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체험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지성 차원에서만 받아들이지 않고 인격 차원에서 읽으며 그 텍스트를 자신 안에 내면화하여 최종적으로 절대자와 합일감을 체득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머리로만 성경을 읽고 분석하여 지적인 만족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이 독자 자신의 현재의 메시지로 전유되는 깊이 있는 읽기를 모색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중세 수도주의와 신비주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 신의 임재 체험, 신인합일 등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려고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내면화 하는 거룩한 읽기를 강조했다.
초대기독교 교부 오리게네스(185-254)는 "신적 독서에 충실하라"고 권면했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과 6세기의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눈으로 읽거나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온 몸과 영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했다. <베네딕트 수도규칙> 제48장은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깊은 영적인 독서(lectio divina)와 육체 노동에 구체적인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2. 수도사들의 사다리
렉시오 디비나는 12세기의 카르투시오수도회(Carthusian Order) 수도사 귀고 2세(Guigo II)가 <수도사의 사다리>(The Ladder fo Monks and Twelve Meditations)에서 정립했다. 현재 로마가톨릭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관상기도의 방법이다.
귀고는 구도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한 단계, 한 단계 하나님과 합일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4단계로 진행된다. (1) 독서(lectio), 성경 본문을 관찰하고 읽는 단계, (2) 묵상(meditatio), 본문을 묵상하는 단계, 추리와 상상하는 단계, (3) 기도(oratio), 묵상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단계, (4) 관조(contemplatio), 절대자와의 합일감을 경험하는 단계 또는 무아지경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거룩한 읽기'는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하여 성경 텍스트를 읽는데 초점이 있다. 달콤한 포도송이를 입에 넣고 씹거나 포도로 포도즙을 짜듯이 지성의 힘을 불러 일깨우며 천천히 여유롭게 집중하여 읽는다.
'묵상'은 말씀 안에 숨겨진 진리를 찾으려고 이성의 도움을 받는 적극적인 단계이다. 묵상을 치밀하게 하면 영혼이 내면에 머물며 덜 중요한 것에 묶여 있지 않다. 영혼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성경의 의미를 내면화 하고 그 의미를 반추한다. 상상의 폭을 넓힌다. 자신만의 삶의 경험 안에서 본문의 의미를 발견한다.
'기도'는 묵상에 이어지는 단계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단계이다. 지성과 감성의 감미로움의 차원을 넘어 다음 단계로 올라선다. 성경의 문자는 껍데기이고 그 글 안에 섬겨져 있는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단계이다. 이 단계의 기도에서 기도자는 하나님과 합일을 경험한다고 한다.
관조(觀照), 관상(觀想)은 마음과 뜻이 하나님과 일치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단계이다. 이것은 관상기도의 꼭지점에 도달하는 체험이다. 지성적인 접근을 내려놓고 읽기와 묵상의 과정을 거쳐 만난 하나님의 일치를 누리는 단계이다. 하나님이 감미롭게 느껴지고, 마른 땅에 이슬을 뿌리며, 고귀한 향수로 기름 부어주시고, 지친 영혼을 회복시켜 주며, 갈급한 심령을 만족시켜 준다. 배고픈 영혼을 먹여주시고 세상의 염려를 잊게 한다. 새로운 삶으로 이끈다. 꽃으로 비유하면 만개 상태인 이 신인합일의 체험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위 단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독서(lectio)는 묵상을 위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묵상은 보물을 파내는 작업이다. 기도는 그 보물을 꺼내는 일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관상의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3. 영혼상승의 단계들
렉시오 디비나로 시작하는 관상기도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영성훈련의 과정이다. 신앙 성숙을 도모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 영성 훈련의 한 형태이다. 영적인 단계들을 세밀히 구분하여 신인합일로 나아가는 방식은 중세 신비주의의 구조적 특징을 반영한다. 위-디오니시우스, 버나드, 보나벤투라, 그리고 선불교 사상과 궤를 같이하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사상에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귀고의 수도사들의 사다리는 4단계 영성 구조(읽기, 묵상, 기도, 관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계들은 보나벤투라의 신인합일을 향한 단계들과 동일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중세 수도주의에 심취한 수도사들이 영혼상승을 위한 정화(淨化), 조명(照明), 합일(合一)의 점진적 단계에 몰입한 것과 동일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최덕성, <종교개혁전야>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2 참고).
중세 수도사들은 거룩한 존재 곧 하나님에 대한 명상에 몰입하는 것을 가장 고상한 일로 간주하고 영적이고 신비한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에 이르는 길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수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신인합일의 삶을 추구했다.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일상적 또는 비범한 방법들을 탐색했다.
중세 신비주의 영성수련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는 정화적 삶의 단계이다. 나쁜 습관을 끊고 죄를 회개하고 자아 중심적 태도를 버리는 단계이다. 명상을 통해 사랑과 의지의 활동을 증진시키면, 영혼은 점진적으로 다음 단계인 조명적 삶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는 숙달가의 단계이다. 영혼에 붙어있는 세상적인 것을 제거하면, 자아가 새롭게 탄생하며 절대적 존재에 대한 신비의식이 솟아나고 거룩한 내적 삶의 중요성과 관심이 촉구된다. 세 번째는 첫 두 단계를 거쳐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완전자의 단계이다. 덕의 완전한 수행이 이루어지고 영혼이 “흑암의 길”을 거쳐 무지라고 하는 숭고한 차원에 기쁨으로 이르게 된다. 이 때 인간의 신성화(神聖化: deification)가 이루어진다.
4. 긍정의 길, 부정의 길
중세 신비주의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 길을 따랐다. 첫째는 “긍정의 길”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 사이의 유사성을 고찰하여 존재, 진리, 선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존재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관상 또는 관조, 관상을 거쳐 신적 속성을 체득하려고 했다. 이것은 능동적인 관상의 길이다.
둘째는 “부정의 길”이다. “흑암의 방식”이라고도 일컫는 접근방법으로 눈을 떴을 때가 아니라 감았을 때 펼쳐지는 영적 세계를 경험하는 길이다. 감각기능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으므로 상상과 시공적 세계를 뛰어 넘는 초실재적 어두움 가운데서 신인합일의 경험을 가지는 방법이다. 중세사상가들은 대개 후자의 길을 따라 영적인 순례를 했다. 이것은 수동적인 관상의 길이다.
긍정의 길을 따르는 관상 기도는 하나님의 속성을 단계적으로 관상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패턴을 지닌다. 기도하는 자가 상상력과 이미지를 동원한 자신의 노력으로 관상적인 체험에 이른다. 한 단계 한 단계 관상하면서 고상한 신의 속성을 맛보는 단계에 이른다. 일상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추구한다. 이를 일컬어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이라고도 한다. 예수회 창설자 익나티우스 로욜라가 자신의 회심과 추종자들의 영성훈련에 동원한 방식이다.
부정의 길, 흑암의 방식을 따르는 관상 기도는 주입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이며, 수동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체의 영성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의 경험하는 전통이다. 관상 체험에 이르려면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하고 순수 어둠의 상태에서 무념무상의 신인합일의 단계로 들어간다. 곧 자기의 관념, 의지, 감성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진입한다.
긍정의 길을 따라 렉시오 디비나로 시작한 관상기도는 부정의 길 혹은 어둠의 길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고 하는 무아지경에 이르면 모든 종교적 구분이 없어진다. 나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없다. 신인합일의 경지는 사람의 노력으로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은총을 넣어주는 방식이라고 하여 이를 일컬어 주입적 관상법이라고도 한다. 미국의 로마가톨릭교회 수도사이며 문필가로 <칠층산>(1948)을 저술한 토마스 머튼이 주입적, 수동적 관상기도의 대표적 인물이다.
5. 만트라, 무아지경, 마귀
주목할 것은 지성, 의지, 감성이 작동하지 않는 무아지경의 신인합일의 체험 상태 곧 자기의식을 비운 영혼의 어둠의 상태에 이르면 관상기도를 하는 자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를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간이 무의식 상태 또는 무아지경에서 창조자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트라(mantra) 곧 신에게 올리는 진언이나 주문처럼, 렉시오 디비나에서 얻어낸 경구를 반복적으로 외우고 그것에 몰입하면 자기의식과 지성과 감각이 차단된다. 인간의 기능들이 차단된 신인합일에서, 암흑의 단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연습, 집중기도, 관상기도, 향심기도 등은 로마가톨릭교회, 힌두교, 선불교, 도교가 공유하는 영성이다. 요가의 영성과 뉴에이지운동의 영성을 체험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교적 현상은 현대 로마가톨릭교회 안의 신비주의와 관상기도 수행자들, 참선을 강조하는 선불교, 동일한 종류의 기도에 몰입하는 여러 이방종교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6. 플라톤의 3층 구조 신비주의
중세교회가 남긴 유산들 가운데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받아들이는 것들도 있고 거부하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안셀무스의 대속론 만족설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깊이 통찰한 버나드의 찬송시는 우리들이 지금도 열열히 받아들이고 있다. 설교자들은 안셀무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고 자신을 십자가에 달려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외친다. 한국교회의 공용 찬송가는 버나드의 찬송시 4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신비주의, 렉시오 디비, 관상기도를 막무가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관상기도, 신의 임재체험, 신의 음성듣기, 명상수련 등 이른바 영성체험이라는 것들의 뿌리는 헬라철학 곧 플라톤의 3층 구조 신비주의이다. 어거스틴은 저작 초기에 플라톤의 3층 구조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에 처음 도입했다. 이방의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기독교 안에 도입한 사람은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였다. 그는 헬라양식을 가지고 기독교 신비주의를 체계화했다.
중세 신학자들은 신비사상을 논하면서 헬라의 사변철학을 자신들의 영적 통찰과 결속시켰다. 그래서 중세 신비신학은 강한 헬라적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중세기를 풍미하던 신비주의적 삶과 사상은 나무꾼, 광신자, 은둔적 수도사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높은 지적 능력과 직관을 결합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신학자들이 이끌었다.
신비적 신(神) 체험을 강조한 위험천만의 중세 신비주의는 결국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신비사상으로 발전했다. 엑크하르트은 신인합일의 경지에서 신격과 신성을 나누어 자신은 하나님의 신격을 지닌 존재라고 설명했다. 교회는 그를 이단자로 정죄했다. 엑크하르트의 사상은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선불교 사상과 다르지 않다.
7. 접신(接神)
'렉시오 디비나,’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넘어 신과의 만남 곧 신인합일을 추구한다. 신인합일 체험을 향한 거룩한 읽기와 관상기도의 위험한 끝은 접신 체험이다. 렉시오 디비나와 관상기도자가 마지막 단계에서 만나는 신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자 하나님인지, 변형된 자아인지, 마귀인지 분명하지 않다. 관상기도자가 만나는 신은 어떤 신이 어느 신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창조자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 지성, 감각의 필름이 끊어진 흑암의 세계에서 인간을 만나지 않는다. 신인합일 상태의 접신은 마귀와 합일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접신 상태에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은 마귀의 말일 수 있다. 접신 현상과 신일합일의 무아지경 체험은 19세기에 등장한 뉴에이지운동의 명상수련과 명상 기도 곧 관상기도에서 발견된다.
7. 큐티
기도로 깊이 진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경지에 진입하는 영적인 활동은 거룩한 일이다. 개신교회 신자들은 제자훈련의 입문단계로 ‘큐티’(QT)를 한다. 귀납적 성경연구는 지적인 갈급을 다소 채워주고 있다.
기도를 통해 진지하게 깊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을 읽고 정보를 얻는 단계(informative stage)에 머물지 않고 변화로 나아가는 것(transformative step)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인 기쁨과 전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기독인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이다.
로마가톨릭교회 전통의 렉시오 디비나를 적극 수용하는 복음주의자들은 '큐티'를 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대하여 의문을 가진다. 성경 연구 프로그램들이 우리의 삶의 변화에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은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방점을 찍고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를 적극 도입한다. 한국교회 신자들 상당수, 목사 상당수가 이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렉시오 디비나로 시작하는 관상기도가 플라톤의 신비주의의와 무관하지 않은 사실은 이것이 자칫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충분히 시사한다. 무의식 상태의 자아도취 현상을 신일합일로 착각할 수 있다. 마귀와의 만남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오판할 수 있다.
성령은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독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영적인 통찰력을 주신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 달고 오묘한 말씀이 되게 한다. 성경이 제공하는 정보(information)는 인간 변화와 성숙(transformation)의 기초이다. 인간의 지식과 삶이 변화되게 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우리가 회개를 하면 마음이 정화되고, 정화된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면 그 마음에 거룩한 빛이 비치는 것을 느끼고, 마지막에는 영혼이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이 다가온다. 성경을 깊이 읽고 그 메시지를 묵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침을 받는 영적인 활동은 모든 기독인에게 소중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읽고 묵상하고 그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는 것은 바람직하다. 성경은 깊이 있는 기도를 금하지 않는다. 삶의 위경에서 울부짖는 기도, 눈물의 기도, 확신이 있는 기도, 통찰 있는 기도, 서원이 있는 기도, 개인의 안위를 넘어서는 기도, 치유를 위한 기도를 금하지는 않는다.
기독인의 영성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성장과 발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렉시오 디비나는 일련의 심리치유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게 하며 스트레스나 불안, 다른 신체적 증상 등을 완화시키는 등 일반적인 명상이 주는 심리학적 유익을 줄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면서 인격 속에 숨어있던 어두운 면을 인정할 능력이 생기고, 기도를 거쳐 흘러나오는 깊은 평화가 정서적 장애를 털어낼 수 있다. 우리의 어두운 면에 대한 자아성찰과 상처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다.
8. 함정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는 이 단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즐거움, 무아지경, 무념무상, 무의식, 신인합일의 체험으로 나아간다. 그 끝은 이교 신자들이 만트라를 외울 때의 체험과 동일한 상태 곧 접신에 이를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성경읽기나 ‘큐티’와 비슷하다.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뿌리가 같지 않고 결과가 다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해와 깨달음을 위한 성경 읽기나 묵상과 기도가 아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천천히 읽고 난 후 묵상하고 있는 그 구절에서 하나의 단어나 간략한 문구를 얻을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성경 구절에서 뽑아낸 주문 곧 만트라 같은 단어나 문구를 되뇌인다. 한 단어나 작은 문구에 집중하고 그것을 반복 생각하면서 "침묵"으로 들어가는 간다. 만트라처럼 중언부언하다가 자아의식을 버린 무념무상의 상태에 진입하며 결국 접신에 이른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정상적인 사고를 멈추고 잡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고 이른바 ‘신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는 착각에 이른다. 낱말이나 문구를 되뇌면, 결국 그 의미를 잃게 되고 되풀이 하는 염불 같은 기도 소리는 수련자를 변형된 마음 상태 곧 암시에 걸려들기 쉬운 심리 상태로 바꾼다.
성경은 자기의식을 포기한 암흑 속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의 기도(마 6:9-13),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요 17:1-26),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성부께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기도(롬 8:27), 죽음에서 살아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면서 성부께 드리는 간구(롬 8:34)는 모두 무아지경의 기도는 암흑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맑은 정신의 단순한 기도를 원한다. 그리스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한다(마 6:7). 정직한 마음의 기도, 깨끗한 심령의 기도를 원한다. 자기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지적으로 알고 의지적으로 간구하며 감성적으로 동의하는 맑은 정신과 마음의 기도를 원한다.
'큐티'를 해도 신앙인격이 바뀌지 않는 경우가 없지 않다. 성경 연구 프로그램만이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단은 아니다. 여기서 방점을 찍고 중세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에 진력해도 변화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와 관상기도는 단순한 삶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테스탄트 영성과 삶에 불일치한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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