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케리그마 사명에 충실하라
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친인척들에게 전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려고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어느덧 2년 차 수업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다.
최덕성 교수의 ‘교회론’을 수강하면서 복음 전도의 사명이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리그마’(κῆρυγμα, 고전 1:21)라는 신학 용어를 접하였고, ‘전도’와 ‘설교’에 대한 명료한 개념을 가질 수 있었다. 최덕성 교수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 1:21)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구절에 나오는 “전도” 곧 ‘케리그마’는 복음진리의 선포적 증언 활동(the preaching of the message)이다. 길 거리에서 전도하고,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교회에 오라고 초대하는 활동을 넘어선다.
최덕성 교수는 케리그마의 선포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변론, 변증, 대화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는 선포적 활동이며, 단순한 설교 행위도 아니며, 구원의 복음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교회가 케리그마 활동에 충실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설교라고 하여 모두 케리그마라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목하며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는 선명한 복음진리를 선포하는 선언적 케리그마 활동에 충실하다고 하였다. 모범적인 교회는 케리그마 사명에 충실하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은 "케리그마 곧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지켜지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말씀 곧 로고스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사도들과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이 사역을 이어 왔다. 복음을 전파하였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야기이다. 케리그마는 이 진리들을 설교-선포하는 실천적 행동이다. 영원한 도(道)를 전(傳)하는 일 곧 영생의 길, 불변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단호하게 선포하는 활동이다. 구원과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활동이다.
인간은 본래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이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얻게 된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고백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천국 시민권을 받는다.
개인에게 케리그마 사명이 주어지지만, 교회는 더 크고 폭넓은 의미의 케리그마 공동체이다. 시대가 변해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의 관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은 케리그마 활동에서 드러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그리스도를 떠난 교회는 생명이 없으며 존재의 의미가 없듯이, 복음진리를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다. 교회가 성령의 도움으로 이 사명에 충실하면 케리그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우리의 교회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배의 핵심은 케리그마 활동이다. 대면 방식이든지 비대면 방식이든지, 바람직한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케리그마 곧 복음진리를 담은 선포적 설교가 교회를 살리고 영혼을 살려 왔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케리그마 사명 수행에 충실한가?
오늘날의 교회의 설교는 대체로 인간 중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지의 주변에 밀려나 있고, 중심에는 기복강령과 윤리실천과 사회참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인본주의적 설교가 자리 잡은 강단은 케리그마와 무관하다. 복음진리 선포가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다운 정체성 곧 표지를 상실한 집단이다.
케리그마 사명을 상실한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케리그마 부재의 강단은 성도들을 회심과 그것에 뒤에 따라오는 성화의 삶으로 이끌 수 없다. 교회의 등록 교인의 수가 많아도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얻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증거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케리그마 사명을 다하지 않는 교회와 그 교회의 성도는 무기력해 지고 결과적으로 사회를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조차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목회자는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양적 성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목회자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서 드러난다. 교회의 주 사명은 주께서 위임한 복음선포로 새로운 생명을 끌어내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케리그마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면 양적인 부흥과 영적인 삶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심령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심겨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드러난다.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설교가 아니라 명료한 복음진리를 선포하는 케리그마 사명 수행이 교회를 부흥시키는 첩경이다. 복음진리,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담은 케리그마 곧 설교의 선포활동이 이루어질 때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 있게 섭취하고 강건한 영적 상태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은 몸소 ‘케리그마’ 활동의 모범을 보였다. 산상보훈의 메시지를 보라.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된 영혼구원에 초점이 있었다. 복음서들은 케리그마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수 구원의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표지이다.
케리그마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전도’의 개념을 포함한다. ‘케리그마’가 오늘날에는 설교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설교행위가 아니라 복음진리를 선포하는 선언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설교자는 예수구원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를 올곧게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방법 즉 구속사적 설교를 한다.
개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케리그마를 “안으로는 말씀 안에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며, 밖으로는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인의 반열에 서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케리그마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양육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교회는 참된 부흥을 기도한다. 소망한다. 그렇다면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목회자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론 강단에서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케리그마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의 핵심은 복음진리 선포이다.
자연인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다. 영원한 형벌과 죽음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이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바람직한 교회는 케리그마 활동을 통하여 회중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매달리도록 한다. 현실에 안주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도를 전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전도(고전 1:21)이다.
교회의 존재의의는 케리그마 활동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이 복음적 케리그마 활동을 거쳐 성령의 역동적 사역 안에서 거듭난다. 모범적인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패러다임이 변화를 환영하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과 부활의 케리그마를 충실히 선포한다. 케리그마 활동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한다. 단회적으로 발생하는 ‘진정한 변화’ 곧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동시에 ‘지속적인 변화’ 개념의 회심의 역사가 펼쳐진다.
교회의 케리그마 사명은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된다. 우리의 교회가 복음의 파수꾼으로서 역할과 직무를 다하면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는 날 교회 곧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케리그마 활동이다. 교회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구원의 기관이 되며 충실하게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은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 1:21) 곧 복음진리의 선포적 활동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전도(케리그마)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에 매달리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김혜숙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2학년)
편집자 주: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목회학 석사(Master of Divinity) 과정 <교회론>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하나의 명료한 주장-논지를 가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차례 차례 제시한다. 최덕성 교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수업, 비평적 사고훈련, 학술 에세이 쓰기, 목사후보생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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