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부산총회(2013) 개회식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론
레슬리 뉴비긴이 기독교에 기여한 점과 해악을 끼친 점, 오판과 자기비판, 복음적 노선과 에큐메니칼 사상의 이중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필요하다. 아래의 글은 '선교적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편집자 주)
1. 레슬리 뉴비긴의 생애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붕괴와 38년간의 인도 선교경험, 그리고 교회일치운동을 통해 교회의 본성과 정체성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그의 저서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교회론의 문제가 신학의 주요한 화두로 자리매김한 배경을 ‘기독교 세계의 붕괴’, ‘옛 기독교 세계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선교 경험’,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의 발흥’이라고 밝히고 있다.
천년이상, 유럽을 지배했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20세기에 들어 심각한 수준으로 훼손되었다. 합리주의와 과학만능주의 사고가 성행하여 종교를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신앙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 등이 생겨난 것이다. 유럽에 등장한 ‘비그리스도교 세력’은 유럽의 ‘탈그리스도교화’를 가속시켰으며, 더 이상 서구 유럽의 문화와 교회의 문화를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열강들의 군국주의, 식민주의 탐욕으로 촉발된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인들의 낭만주의, 특히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낙관은 산산조각 나게 되었으며, 유럽 전체에 허무주의와 불신이 양산되었다.
뉴비긴은 이러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붕괴와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던 자연스런 공동체의 유대 관계의 와해를 불러왔고, 인간의 ‘원자화 과정’을 야기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피폐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교회가 ‘참 공동체’의 모델을 제공해야만 하며, 이는 교회의 본성에 대한 고민과 연구 및 실천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뉴비긴은 에큐메니컬 운동이 교회의 해외선교 경험에 의해 태동되었고, 그리스도교 세계 내에서 교회가 이교도 사상들과 직면하는 선교적 상황에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받은 선교적 사명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컬 운동은 반드시 선교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정적인 특징이 WCC 결성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은 교회연합의 과도기적 단계이며, 수단일 뿐, WCC 자체가 연합의 최종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일각에서 제기되는 연방형태의 재연합에 반대했다. 그는 교회일치를 저해하는 여러 문제들이 교회의 본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만 해결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
뉴비긴은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입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에 대한 물음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믿음’, ‘연속성’, ‘성령체험’이라고 답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들어 믿음을 갖고, 역사적 연속성을 지닌 교회의 성사에 참여하며,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거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분열된 세 교파-개신교, 가톨릭, 오순절 운동-가 각각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이다. 뉴비긴에 따르면 각 교파에서 강조하는 가치들이 모두 다 필수적인 교회의 기본요소이므로,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왜곡된 교회 이해를 불러온다. 따라서 현재 분열되어 있는 교회가 온전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시적 일치를 이루어야만 한다.
1) 믿음
뉴비긴은 “내가 가장 먼저 거론하는 교회관이 자연스럽게 우선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겠다.”라고 말하면서, 교회를 규정하는데 무엇보다 ‘믿음’이 우선되어야 하는 가치임을 암시한다. 1세기 그리스도교에 일어났던 이방인에 대한 할례의 논쟁은 교회의 본성에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를 일으켰고, 그것은 곧 율법과 동일시되는 이스라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연속성 문제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믿음이 그리스도교를 이루는 중요한 가치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도들을 선택하셨듯이 주권적으로 이방인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성령과 믿음의 선물을 주셨으며, 이는 고넬료의 집에서 목격된 성령임재사건을 통해 드러났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믿음의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의로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의 환상이 깨지게 된 것이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언약이 맺어진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 율법의 짐을 지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행위에 도전하는 반역행위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율법과 단절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단절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그 선택의 기준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으므로, 율법이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연속성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철저하게 믿음의 가치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이 뉴비긴의 교회에 대한 이해이다. 그 믿음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갈 2:20) 믿음의 삶을 이끈다. 앞서 언급했듯이, 뉴비긴은 교회를 규정하고 설명하는 일에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며, 이것이 곧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2) 연속성
뉴비긴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핵심이 공동체에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열두 명의 제자를 선택했고, 친교를 나눔으로써 그들과 연합했으며, 그것은 곧 제자공동체에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맺음을 통하여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존재로,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예수와 제자들의 이러한 연합의 관계는 죄 사함의 권세를 포함한 예수의 모든 능력이 제자공동체에도 부여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가 자신을 대신할 특정한 제자공동체를 선택하신 것은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선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백성에게는 단지 믿음과 순종이 요구될 뿐이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의 구원을 위해 한 백성을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파송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 구원계획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로 이어졌다.
뉴비긴은 성례의 가시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가시성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행 2:38)는 예수의 선포에서 믿음과 함께 침례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는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모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는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는 것은 가시적인 공동체를 통하는 것이므로, 그 연합은 가시적인 침례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예수의 구속사역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의 만찬 역시 가시적으로 예수의 희생제사적 죽음과 부활의 승리를 표상한다. 주의 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몸과 피에 실제로 참여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에 연합하는 것이다. 이 연합은 부부가 한 몸을 이루듯이 영적으로 한 몸이 되는 의미이며, 침례는 연합의 가시적인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온전한 하나이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가시적인 공동체의 ㅅ람ㅇ 역시 성찬례를 통해 한 몸을 이루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가시적 특성과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증명된다. 역사상 교회 안에 일어난 외적인 형식과 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던 많은 개혁운동들도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는 형식과 조직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가시적이고 영속적인 구조’가 교회의 본성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가시적 사회에 영입되는 것이고, 이 가시적 사회는 그리스도와 모든 창조세계르 연합하는, 분열될 수 없는 연속적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에는 복음의 진리 수호를 위하여 불가피하게 교회의 연속적 구조를 깨뜨리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뉴비긴은 그러한 개혁 운동이 옛 구조 속에 융합했을 경우에는 그 구조 전체를 새롭게 만들었지만, 분열이 생겨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게 되면, 중요한 교회의 본성을 잃고 보편 교회에 속하는 풍성함과 온전함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본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교리나 경험을 바탕으로 파생된 교회의 구조는 예수가 조성하신 모임의 본래적 모습, 즉 인격적인 교제와 교리가 공존하고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뉴비긴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경계설정이 어떤 신학적 사안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성사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하면서, 엄격해 보이는 그 경계 안에서 역설적으로 공동체는 자유를 누렸다고 말한다. 이어서 믿음과 질서가 함께 주어졌던 교회가 죄로 인해 믿음과 질서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어느 쪽을 선택했든지 교회는 보편성과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뉴비긴은 성례를 교회의 생명과 같이 여기지 않는 개신교의 모습이 신약성서의 가르침과 먼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은 그리스도보다 합리적이거나 영적이지 않으며, 그리스도교는 가시적 표지들이 필요하지 않은 영적이기만 한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 즉 침례와 주의 만찬은 교회가 마땅히 의존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의식적인 종교체험을 넘어 서는 것이다. 뉴비긴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란 그분이 주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표지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뉴비긴은 개신교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가 개인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관계이므로 비인격적이고 제도적인 개념이 교회의 사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례와 제도적인 교회 생활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교회를 단순히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여긴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뉴비긴은 결혼관계와 가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인격적인 관계는 신체적, 생물학적 그리고 경제적 요인과 같은 비인격적인 요소가 강하게 결속된 곳에서 맺어질 수 있으며, 인격적인 요소를 법칙과 제도적인 요소와 대립시키는 것은 그 본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성령체험
뉴비긴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언하며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한다는 증거로서 성령이 주어졌으며, 이방인에ㅔ곧 구원을 주셨다는 명백한 표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출발점이었고, 성령에 의해 진정한 의밀의 교회가 세워졌다. 뉴비긴에 따르면 “교회는,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성령에 동참하는 모임, 곧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능력과 깨달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다.
뉴비긴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존재와 메시지를 교회의 삶에서 분리할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두 기능을 모두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가 성령 없이 구조와 메시지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사도적 사명을 주시며 자신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도록 능력을 부여하셨을 때, 그 중심에는 성령을 주시는 일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과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모두 성령의 선물을 받았을 때 수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교회는 메시지를 충실히 전한 덕택에 혹은 사도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친교를 나눈 덕택에 생명을 유지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살아있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성령을 통해 성육신이 이루어졌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증언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의 사역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성령의 임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이루어짐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영분별’이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주는데, 뉴비긴은 이 또한 성령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신약 성서의 교회론에서 성령 체험은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을 그리스도의 몸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뉴비긴은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를 인정할 때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를 굳이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추정한다면, 이는 신약의 교회론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것이 아닌지 아주 심각히 고려해 봐야한다.”고 지적한다.
뉴비긴은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이 구원사적 계시에서 드러나는 진리를 무시하고, 자신이 증언하는 특정 진리를 우위에 두는 잘못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신약 성서의 성령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말씀, 그리고 성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밝힌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온 창조세계를 향한 구원계획이 사회적인 동시에 우주적이며, 그 과정은 관계를 통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역사성을 가진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인간을 통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속의 작동 원리는 하나님이 각 사람의 영혼에 직접 접근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이웃과 창조 세계를 통한 간접적인 접근, 즉 자신의 반응을 통해 이웃과 연합되고 창조 세계와 연계되는 그런 접근 방식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구원계획은 이스라엘과 사도들의 선택으로 계시되었다. 뉴비긴은 이 선택을 신비의 영역으로 간주하며, 그 선택의 목적은 선택받은 사람ㅇ르 통해 다른 존재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과 이러한 선택의 원리가 구원 목적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뉴비긴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선택의 도구로 성령을 세우신다고 말하는데,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믿음을 갖게 되며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 편에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주어지는 순전한 은혜이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선택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맥을 같이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으로써 선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비긴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도적 사명을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은 선택의 수단인 동시에 확증과 표지로서 복음을 믿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며, 다가올 시대의 권능을 맛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그리스도인을 보증한다. 선택된 가시적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첫 열매이자 구원의 도구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의 통로인 것이다.
출처: https://museumpark.tistory.com/170 [Museum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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