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위선
아래는 독일에서 수학하고 목회를 하고 있는 송다니엘 목사의 글이다. 저서 <산상보훈>의 일부에 실린 것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옮겼고, 다시 본지에서 게재한다.
위선이란 존재보다 외관이 무겁다는 의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원래의 모습(실재)보다 크고 무겁게 보인다. 혹은 존재와 외관이 서로 분열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위선을 나쁘다고 하지만, 실제로 위선은 사회적으로 볼 때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선이 없는 사회는 금방 망한다. 사람이 어느 정도는 위선적으로 살아야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어쩔 수 없다. 만약 위선을 벗으려고 죽기까지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가 될 것이다. 인간은 결코 위선을 벗지 못한다. 그러므로 적당한 위선은 필요하다. 약간의 위선은 겸손이라는 덕으로 치장되기도 한다. 다만 위선이 정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우리는 이것을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문제는 위선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거룩하신 자기 영을 주셔서 이들을 다스리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타난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간의 문화와 도덕을 훨씬 초월한다. 그리스도인은 문화적, 윤리적 실존이 아니라 초월적 실존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동양 문화는 특히 위선적이다. 서양 문화도 위선적이었지만,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많이 변화되었다. 즉, 수치문화가 죄의식 문화로 바뀐 것이다. 수치문화란 자기 잘못이 외부에 드러났을 때 비로소 수치심, 혹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잘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식 문화는 자기 잘못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규범을 어겼을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필자가 독일에서 신학생 때에 고전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여러 가지 그리스 원서를 읽게 되었는데, 그들 문화가 수치문화인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양인의 인간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어 수치문화에서 죄의식 문화로 바뀌었다. 우리가 독일 사람의 언어습관을 관찰할 때, 이들이 자기 말에 조금도 거짓이나 사실이 아닌 것이 섞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라져가는 유럽에서 다시 수치문화가 등장하고 있는 것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 사람도 불리할 때는 거짓말하는 것이 서서히 보편화하여 간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하나의 큰 이유는 극단적인 수치(체면) 문화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 생각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분리되어 있다. 자기가 손해 볼 말은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쉽게 한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고, 그것이 자기 인격 안에서 잘 조화된다. 독일 사람 같으면 이런 사람은 정신분열증 환자로 분류하는데 이들은 건강하게 잘 산다. 그 이유는 수치문화에서의 죄는 성경의 죄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밖으로 드러나면 죄가 되고, 감추어져 있는 한 죄로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적 문제로 이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서도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6•25 사변 이후 기독교가 한국인의 기호에 맞게 변질되어 번성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로 변질하였는지(transformed) 깨닫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가 진짜 기독교를 접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용어가 한국에서 대부분 변질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 거룩, 사랑, 구원, 의, 하나님 등. 그러므로 한국에 기독교가 정착하려면 체면 문화를 벗어나서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죄와 과감하게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예수님이 한국 교회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 된 우리는 산상수훈 연구를 통해 우리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와 거짓, 위선 등을 낱낱이 들어내시므로, 우리는 이것을 모두 나에게 적용할 수 있다.
위선의 본질은 속이는 것이다. 루터에 따르면 속이는 대상은 3가지이다: 자기, 상대방, 하나님. 사람은 때에 따라 자기를 속이기도 하고, 상대방을, 그리고 하나님까지 속이기도 한다. 그런데 율법의 임무는 바로 이것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어떤 율법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이 만족할 정도로 완벽하게 지키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앞에서 회개하게 된다. 그래서 율법은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혜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누구든지 율법을 통해 자기 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에까지 가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대속 은혜를 갈망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그 정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어여쁘게 여기시어 나를 받아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자기 속임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다. 외형적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자기가 만족하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다.
우리가 문화적 굴레인 위선을 깨뜨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깨끗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거의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렵고, 이런 사람은 사회생활에도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순교할 자세로 살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척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정말로 그를 다스리고 계시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기고, 위선을 벗고,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서 산다면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을 것이다.
송다니엘 목사, 저서 <산상수훈>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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