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왜성 성역화 기원 미사 장면
가톨릭 미사 참여, 무방한가?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양심을 향해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망명이나 또는 순교를 선택하라고 엄히 촉구했다. 아래의 글은 조진모 교수의 "칼빈의 미사 참석자들의 양심을 향한 권고"이다(페이스북에서 옮겨 옮). 저자에게 허략을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조진모 교수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위 미사 장면의 사진 소유권자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칼빈의 미사 참석자들의 양심을 향한 권고
조진모 교수
16세기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에 대한 심한 핍박이 계속되자, 이들 가운데서 신앙의 타협을 택하는 성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톨릭 미사에 참석한 자들은 하나님은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변명하면서 자신들의 위선적 태도를 정당화하려 했다. 칼빈은 그들의 양심을 향해 미사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동시에 망명이나 또는 순교를 선택할 것을 엄히 촉구했다. 칼빈의 양심론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양심은 죄를 책망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연신학을 인정했던 것은 아니다. 칼빈은 양심을 향한 고소에 대해서 사람에 따라 두 가지의 상반되는 양심의 반응을 소개한다. 악한 양심을 가진 자는 쉬지 않고 하나님께 반항하고,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후 전개된 위그노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들의 양심을 향해 권고한 칼빈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서론
프랑스 태생인 칼빈은 항상 모국에 있는 개혁교회의 상황을 사려깊게 주시하였다. 그 당시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기에 그들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다. 특히 강압적으로 미사에 참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타협적인 신앙을 가진 성직자와 성도들이 속출하였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미사에 참석하지만 내적 신앙을 잃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생각은 달랐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에 익숙했던 그는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곧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해 결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이 신앙에 굳게 서서 시련의 시간을 잘 이겨낼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을 주어야 했다.
본 논문의 논지는 칼빈이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성도들의 양심에 권고하는 방법을 통해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있다. 또한 역사적인 견지에서 그가 영적 예배의 회복을 종교개혁의 중요한 임무로 중시하고 이를 위해 주력했다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본 논문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형상사용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와 영적 예배 회복의 필요성을 먼저 점검한 후, 그가 성도들의 양심을 향한 권고의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검토할 것이다.
1. 칼빈의 로마 교회의 형상 사용 거부
1.1. 형상 사용에 대한 반감
칼빈이 26세가 되던 해인 1536년에 전체 6장으로 구성된 『기독교 강요』 초판이 출판되었다. 프랑스에서 부당하게 핍박당하는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개혁교회의 진리에 대한 변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생활을 돕기 위해서 저술하였다. 1장에서 율법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십계명에 대한 해설이 포함되었다. 칼빈은 제2계명을 해설하는 부분에서 어떤 모양으로도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들을 만들어 사용할 수 없다며 형상의 사용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는 교육을 위하여 성상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던 루터의 생각과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칼빈은 여기서 두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에 의하여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돌과 나무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경배하면서 참된 신을 경배했다고 확신하는 이방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예배는 오로지 한 분께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로,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성상이 책과 동일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히 핑계거리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성상을 통하여 사실과 전혀 무관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그들에게 도리어 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칼빈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은혜의 방편으로 허락하신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그들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후 칼빈이 1538년에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자 프랑스 주교인 사돌레토 추기경은 1539년 3월 제네바 시민들과 행정관들에게 로마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칼빈은 같은 해 9월에 답변을 써 보냈다. 여기에는『기독교 강요』 초판에 비하여 형상 사용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곳에 더욱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개혁교회가 초대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힘있게 변증하려 하였다. 그는 초대교회와 교리적으로 일치하는 개혁교회는 교회역사 흐름의 중심에 서 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형상을 예배하는 행위들은 초대교회의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가톨릭 교회의 형상 사용을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교리적 타락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려 하였다. 그들에게서는 건전한 교회의 근본이 되는 바른 교리, 치리, 성례와 함께 올바른 예배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개혁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들이 참된 교회의 모형인 초대교회의 교리를 버린 사실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핍박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들이 불과 칼을 맹렬히 사용하면서 핍박을 일삼는 것은, 자신들이 초대 교회의 전통을 벗어난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형상 사용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그의 『기독교 강요』 1559년 최종판에 가장 잘 드러났다. 1536년 초판에는 제2계명에 대한 내용이 불과 2절 밖에 되지 않았으나, 1539년 개정판은 총 20절로 분량이 크게 많아졌다. 그러나 1559년의 최종판에서는 다시 5절 분량으로 그 내용을 줄였다. 더욱이 칼빈이 기록한 내용은 비교적 평범하며 단순하다. 먼저 누구든지 지켜야 할 두 가지의 계명, 즉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과 이렇게 만들어진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금하는 내용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이 법을 어기는 자는 벌하시며, 잘 지키는 자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내용이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언뜻 봐서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두 계명에 대한 설명을 이전의 판들에서보다 훨씬 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1539년판에 수록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형상 사용에 대한 내용을 확장하여 제1권 11-12장(총 19절)으로 따로 떼어내어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신학에 능숙한 나이에 이를 때 까지 가톨릭 교회의 형상 사용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식지 않는 열정으로 심도있게 연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하려 하였다.
1.2. 형상 사용의 심각성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형상 사용에 관한 내용(1권 11-12장)을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 (1권 10-13장)에 대한 논의의 중심되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 유일하신 창조자(10장)이심에 대하여,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13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형상의 사용에 관한 문제는 바로 그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앞부분과 뒷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긍정적인 서술하였다면, 그 사이에 있는 형상에 관한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칼빈이 형상의 사용에 관한 문제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연결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기독교 강요』의 전체 요지를 풀어가는 열쇠가 되는 두 가지 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대한 그의 견해를 이해할 때 답을 얻을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두 가지 지식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하고, 또한 인간이 자신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지니게 될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형상의 사용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습득을 불가능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방해 요소이다. 인간은 올바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순결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위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알게 될 때 자신의 무력과 불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경건한 삶의 기초가 된다. 자신이 죄로 인해 심히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이며, 실상 아무것도 아니며 한없이 부족한 자인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된다. 그렇지만 형상을 사용하는 미사에 참석하는 자들은 두 가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잃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경건을 잃어버리게 된다. 칼빈은 형상의 사용을 매우 심각한 영적 문제로 간주하고 이런 행태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구체적인 이유로 형상의 사용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 신앙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지 『기독교 강요』 최종판 제1권 11-12장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형상의 사용은 하나님을 인간의 생각 속에 가두려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게 존재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유한한 인간에 의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시다.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려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행위이다. 인간의 생각을 형상에 담아두면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얻을 수는 있으나, 이렇게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그분께 드려야 할 영광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형상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우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은 하나님을 위엄을 모독하는 행위로서 그를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로, 형상의 사용은 교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성경을 거부하고 '유형적 신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난 '우상 숭배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과거에 초대교회에도 형상 숭배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락탄티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이 제시했던 건전한 교리 때문에 초대교회는 형상을 사용하길 거부하였다. 이에 반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가 형상을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그들의 교리가 건전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과 건전한 교리를 충실하게 가르쳤다면 성도들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형상의 사용에 관해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허용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들은 말로는 눈에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형상을 통하여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한 방법으로 형상물을 사용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형상을 섬기고 예배하게 된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예배에 임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우상숭배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세 번째로, 오직 바른 신지식은 참된 예배를 가능하게 해 주지만 형상을 사용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다. 물론 칼빈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형상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예배의 방법을 거부하면, 결국 인간은 자신의 방법을 찾기 시작하여 예술 작품을 종교화시킨다. 이러한 형상에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예배할 때 자신들의 영적 갈증이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형상도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형상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예배는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에 참된 예배가 드려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 만한 분임을 확신하고 나아갈 때 그의 위엄과 영광을 높여드리는 참된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형상을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어진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대조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경적 교리를 포기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바른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린 거짓 교회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그들은 과거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범죄를 재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최고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의 예배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영적으로 타락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스스로 바른 예배를 포기하였다. 그들은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 습득을 훼방하는 방해꾼들이다. 칼빈은 형상의 사용을 매우 심각한 영적 범죄로 간주하였다.
2. 영적 예배 회복을 위한 칼빈의 노력
2.1. 종교개혁의 필요성
16세기 종교개혁의 시기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를 가톨릭으로부터 신학적 분리 작업에 몰두하던 시기라고 한다면, 후기는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사상을 발전시키며 정체성 확립에 힘을 쏟았던 시기이다. 여기서 칼빈은 전기의 중간 정도에 속하였으나, 후기 개혁자들이 이어나갈 사명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그가 1543년에 스트라스버그의 부처의 요청으로 샤를 5세에게 바치기 위해 저술한 논문인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그의 견해를 잘 대변해 준다. 이 글에서 칼빈은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우상숭배로 전락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 대비적으로 연관시켜 영적 예배에 관한 자신의 신학적 개념을 정리하려 하였다.
여기서 칼빈은 잘못된 미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개혁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포기하지 않고 형상을 세워놓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더욱 열정적으로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잘못된 전통을 생명과 같이 소중히 여겼다. 그뿐 아니라,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꽃이나 묵주 등을 사용하기도 하고 촛불과 향을 사용하면서 점점 가증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그들의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러한 행태는 오히려 종교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잘 반증해 주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종교 개혁자의 입장에서 천주교회의 오류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칼빈은 상대를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임무에 충실하려 하였다. 그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주의 교회가 책임지고 성취해야 할 여러가지 사명들 중에서도 영적 예배의 회복을 매우 시급한 사항으로 보았다.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형상을 사용하여 영적 예배를 우상숭배로 탈바꿈시켜 놓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중단되었으며, 성도의 경건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히 칼빈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의 회복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갈망했다.
2.2. 칼빈이 추구한 영적 예배
칼빈은 영적 예배를 크게 두 가지로 특징지었다. 첫 째로, 영적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온전히 드리는 예배다. 둘째로, 영적 예배는 예배자의 경건에 영향력을 주는 예배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특징들 중에서도 칼빈은 전자를 더욱 중요시 했다. 전자가 이뤄질 때 후자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적 예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임의대로 열심을 다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칼빈은 전적으로 거부한다. 영적 예배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요구한다. 그가 정해 놓으신 것들을 제대로 지키는 예배다.
영적 예배를 규정지을 때 칼빈이 예배자의 느낌이나 경험보다 더욱 중요시 여기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로 드려진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칼빈이 일생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형상 사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는 열망에 대해서도 잘 살펴보았다. 그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예배, 성도의 경건을 도모하는 예배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난 대표적인 주석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2.2.1. 로마서 12:1 (1540, 1551, 1556).
로마서 12장 1절 주석에서 칼빈은 온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거든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자신을 받치는 것, 이것이 칼빈이 정의하는 영적 예배로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저함이 없는 예배자의 순종이다. 예배자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받았으며, 예배란 바로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그러한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인과 본인이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진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바칠 수 있다. 이런 자세가 없이는 예배에 임한 자들의 예배는 거짓된 것이다.
더욱이 칼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의 방법을 무시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내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런 행위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규정지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수고와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하여도, 그러한 예배가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를 대적하는 행위라고 단언한 것이다. 무모한 예배자는 그저 시간을 낭비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의 삶은 성결에 대한 묵상을 멈추지 않으므로 참된 경건을 이루게 된다.
2.2.2. 요한복음 4:23 (1553).
칼빈은 영적 예배를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정의하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참된 예배라고 인정하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를 어느 곳에서나 받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물리치시는 예배도 있다. 그것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지만 마음을 드리지 않고 외식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와 유사한 예배이다. 칼빈은 이곳에서 노골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예배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폐지된 그림자와 같은 외적 예식에 대하여 심하게 혼동하여 이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형상과 같은 외적인 요소들을 미사의 중심에 놓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인간의 생각이 그들의 미사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들의 미사에는 열심히 있었지만 하나님과 전혀 연관이 없었으며 성령의 임재를 스스로 거부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이곳에서도 칼빈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적 예배와 성도의 순종 간의 연관을 설명하고 있다. 영적 예배는 성도의 마음에 내적 신앙을 심어준다. 왜 성도에게 내적 신앙이 중요한가? 내적 신앙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 순종하는 자세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순종은 예배의 행위 그 자체보다 훨씬 근본적이며 중요한 것이다. 순종의 열매는 삶 속에서 반드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배하는 성도들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자기를 부정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아간다.
2.2.3. 시편 50편 (1557).
칼빈은 시편 50편 주석의 ‘논증’에서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외적 의식에 치중하였던 유대인과 정반대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과 형식에 맞춰진 의식의 행위를 마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가 자신의 마음을 바쳤는가에 관심을 두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따르되, 율법적으로 해석하여 이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순전한 마음으로 그의 앞에 나갈 때 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게 된다.
나아가서 그는 예배에 사용되는 어떤 외적 의식이라도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영적 예배를 드리는 데 도움이 될 때에 한하여 그 가치가 인정된다고 보았다. 만일 예배자가 마음을 드리지 않은 채 외적 의식에 임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노를 발하신다. 그러나 반대로, 순종하는 자세로 영적 예배를 드리며 진실한 마음으로 외적 의식에 참여하면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시고 예배도 받으신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예배자의 믿음이 더욱 증진되어 경건이 실천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영적 예배,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온전히 드리는 예배와 예배자의 경건에 영향력을 주는 예배의 필요성을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그가 영적 예배의 회복을 급선무로 삼았던 정당한 이유가 있다. 형상의 사용을 중시하는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와 전혀 다른 것이며, 성도들의 경건에 큰 해를 끼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단순히 사상의 변화로만 보지 않았다. 그가 중요시했던 것은 삶에서 경건이 실천되는 신앙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영적 예배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그리고 예배자의 순종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예배의 행위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영적 예배가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형상의 사용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영적 예배와 형상의 사용을 서로 상극의 위치에 놓았다. 영적 예배의 회복은 개혁교회 성도들을 향한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3. 영적 예배의 위기와 양심을 통한 해결
3.1 영적 예배의 위기
칼빈은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주된 사명으로 삼기를 원했다. 그래서 ‘신부’라는 이름을 남용하지 말고 맡은 자들을 향해 사랑하고 섬기는 자세를 지닐 것을 권고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항상 자신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동시에 그의 뜻을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를 원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충실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위치를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결속시키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망각하였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을 강제로 참석시킨 채 미사를 집전했던 것은 일종의 영적 횡포였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할 성도들을 우상 숭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적인 일을 배교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에 동조했다. 이런 방법으로 성도의 마음을 압박하여 양심을 자극하는 것은 육체에 괴로움을 주는 그 어떤 핍박보다 더욱 사악한 것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핍박을 이겨내야 했던 초대교회와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유일신이신 하나님만 참되시기에 다른 우상 앞에 절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했다. 외부의 핍박으로 인해 외적으로 신앙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내적 신앙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내적 믿음을 외적 행동으로 드러내야 했다. 영적 예배를 추구하며 전진하던 프랑스 종교개혁이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어려운 입장에 처한 성도들은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과 혼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칼빈에게 조언을 구했다. 칼빈이 1543년에 작성한 ‘성도의 처신에 관한 소논문’에는 그가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충고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는 100여명의 수많은 성도들로부터 그들이 처한 상황과 관계된 질문을 받은 사실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글을 통하여 현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그들에게 전해주려 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벌써 이전부터 칼빈과 그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칼빈은 1537년, 즉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에게 긴 문장의 편지를 썼다. 그가 이 글을 쓴 것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칼빈의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벌써 그는 그들이 현재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그들이 강제적으로 불경건한 자리에 가게 된 사실에 대하여 심히 가슴 아파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 그는 그들이 우상 숭배를 선택한 것은 외식 행위라고 지적하면서 계속하여 강력하게 그들을 질책한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들은 변하지 않고 계속하여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 위하여 외식하는 신앙을 선택했다. 또한 그들의 질문이 단순히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얻어내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칼빈은 그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개혁신앙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참석하며 은폐와 위장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행동은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아무리 예상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 하여도 성도의 편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타협할 수 없으니 외적 경배를 당장 중단하라고 명령하였다.
칼빈의 요구는 그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미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상 칼빈은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지역을 떠나든지 아니면 현장에서 순교할 각오를 하라고 권장한다. 초대 교회 성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고 순교자의 피를 흘릴 것을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결코 죽음 앞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할 수 없다는 칼빈의 주장은 그가 1544년에 작성한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변명’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옛 순교자의 신학을 거론한다. 그들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하였기 때문에 죽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사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이토록 완강한 자세를 취한 것은, 칼빈은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려운 상황의 핵심이 영적 예배의 위기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2. 양심과 위선적 행동
칼빈은 어려운 상황에서 일사각오로 신앙을 지켜야 했던 성도들을 향한 목회자적인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고난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았던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였기 때문에 경험하던 아픔과 괴로움은 곧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무조건 그들을 정죄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불이익과 죽음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그들을 위로하는 마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칼빈은 그들이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환경을 고려하여 눈감아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행동에 결코 책망받을 것이 없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적 적절한 충고를 통하여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깨우쳐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영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경건한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지도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칼빈은 진리를 말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에 권고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칼빈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영적 예배와 관련시켜 성도의 위선적 행동을 규정함에 있어서 양심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위선된 행동은 양심의 권고를 거부한 채 외적으로 마치 결백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양심과 위선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의견을 그가 1548년에 출판한 디모데전서 4장 2절 주석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인간의 양심과 위선적 행동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면 위선적 행동을 통해 자신을 숨기려 한다고 설명한다. 위선적 행동은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위한 외적 표현으로서 속마음과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프랑스의 개혁교회 성도들이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위선적 행동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그 양심이 화인을 맞은 상태라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영적 예배를 포기하고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위선적인 행동은 하고 있다는 것을 제일 잘 아는 것은 본인의 양심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그의 행동만 보고 판단할 것이다. 거리끼는 양심을 잠재우며 남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외식하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결코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로지 위선을 선택한 자는 자기의 양심을 속이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사 참석과 연관된 상황이 성도들의 영적 예배를 위협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의 양심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3. 양심의 기능
칼빈이 이해한 양심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동시에 머무는 곳이다. 양심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주된 활동을 하신다. 양심의 기능은 법정의 기능과도 같다. 이곳에서의 하나님은 법정의 재판장과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부패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나, 하나님이 양심의 법정에서 선과 악을 심판하신다. 인간은 양심을 통하여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양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람이 마음과 이해력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며, 그 사물을 “안다”라고 하는 것이 “지식”이란 말의 유래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밀착된 증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사람이 마음 속에 아는 것을 숨지기 못하게 하며, 도리어 그것을 추궁해서 드디어 유죄를 선언하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이다.
양심은 그 자체로서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한다. 칼빈은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과정을 가인과 아벨의 기사 본문을 주석하는 데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신적 목소리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조용히 점검하신 후 그를 찾아가신다. 그 후에 재판장의 자격으로 친히 판단을 내리신다. 그 누구도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양심이 알려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할 수 없다.
칼빈의 논조는,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주로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양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게 된다. 인간은 그의 양심의 고소를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이란 지식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결과를 수용하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일이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자신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양심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재판장의 신분으로 양심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런 일이다.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양심이 자신을 향해 고발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끊임없이 들리는 그 소리는 마음을 두드리며 심한 고통을 준다.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에 즉각 반응하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죄책과 두려움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기를 기대한다.
이제 양심의 기능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악한 양심을 가진 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자신이 행한 죄악에 대한 양심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억누른다. 마음의 재판소에서 결정된 사항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자아가 너무 강하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끊임없이 호소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도리어 심판자를 향해 반발한다. 마음의 부패된 인간의 너무나도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그침이 없는 고통의 산실이 되고 만다. 칼빈은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을 전해들은 후 겉으로는 전적으로 무시하려 하였으나, 속으로는 양심이 주는 고통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번민한 경우를 그 예로 들고 있다. 이 외에도 악한 양심을 가진 자들 가운데는 그 마음이 완전히 마비된 경우도 있다. 이들은 양심의 고발로 인한 고통마저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언제나 핑계거리를 찾아 피난처로 삼고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한다. 항상 성실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기 때문에 양심의 고발소리가 들릴 때에 이를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양심을 깨끗이 씻어낸다. 심판자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죄를 반성하고 해결하려 한다. 그 결과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1장 19절을 주석하면서 악한 양심과 선한 양심을 대조하여 설명하였다. 이 부분에 관한 그의 주석은 선한 양심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악한 양심을 가진 자의 마음은 바다를 항해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심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파선된 배와 같다. 이와 반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자의 마음은 폭풍이 지난 후 잔잔한 바다와 같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안은 폭풍과 같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찾아오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지닌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며 기쁨이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속하여 그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누구든지 예외 없이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은 악한 행실에 대하여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적으로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자신들이 예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 분별력은 오로지 구원받아 거듭난 자들만 소유할 수 있다.
3.4. 양심을 향한 권고
칼빈은 육체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의 양심에 권고하며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이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있던 그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지도자의 고민의 결과였다. 칼빈은 이미 언급된 ‘성도의 처신에 관한 소논문’에 기록된 모든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언급하였다. 자신의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생각과 글에 기록된 내용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받아 읽으면서 저자인 자신의 양심의 증거를 근거로 모든 것이 진실이란 확신을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양심이 명령하는 그대로 집필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행동은 양심의 통제를 받은 결과라는 점을 말해주고자 했다. 외적 행동을 유발하는 양심의 주체적 기능을 암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칼빈은 미사에 참석하는 행동은 그들의 양심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을 전제하여 ‘성도의 처신에 관한 소논문’을 기록하였다. 특히 글의 시작 부분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의 악함을 알고 있는 양심의 증거를 거부한 채 자기한테 질문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마치 어려운 상황이 닥치자 당황하여 칼빈에게 자문을 구하는 듯하지만, 이미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의 과오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은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구실을 찾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1537년도에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들이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고 있다고 꼬집어 지적했다.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변명”에서도 형상을 사용하는 미사가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이 그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 질문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양심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면 외적 행동은 중요하지 않다는 성도들의 주장에 맞서 칼빈이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는 일이라고 주장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생기는 문제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마음 만을 받고도 만족해하시니 자신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는 것을 영적 범죄라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성도들의 경건한 삶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양심을 잠재우는 것은 매우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양심을 속이고 마비시키면 큰 가책 없이 위선적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미사에 참석하여 우상을 숭배하면 그들의 영혼이 더러워진다. 영적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고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경건에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양심을 판단하시도록 하였다. 하나님은 양심 안에서 재판장으로서 일하신다. 그분은 위선적 행동을 낳는 양심의 결정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매우 냉정하시며 그 잘못에 대해서는 간과하지 않으신다. 이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이나 구속자 하나님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 칼빈은 양심을 향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양심의 고소를 그들이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강력한 어조로 그들에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는 그들을 ‘양심의 법정으로 소환한다’고 표현하면서, 성도들이 반드시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력히 경고하였다. 그들의 외식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스스로 용서하고 지워버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마치 글을 쓰는 자신의 진실성을 양심이 증거하듯이, 칼빈은 자신의 글을 읽는 성도들도 양심에 거리낌없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3.5. 평가
그러면 칼빈은 양심의 역할을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미 그는 줄곧 성도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반응도 알게 되었다. 칼빈은 자신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쉽게 변하지 않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양심에는 위선적 행동까지도 낳을 수도 있는 주체적인 기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분별하여 언제나 선한 것만을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지 못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양심은 마치 거울과 같다고 언급했다. 그들이 미사에 참석하면서 저지른 일에 대하여 고발하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는 일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양심을 거울에 비유한다는 것은, 양심이 위선을 선택한 성도들의 의지를 제어하는 절대적이고 강압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이 지닌 양심의 한계이다. 칼빈이 그들의 양심을 향해 권고했다는 것이 곧 그들의 양심에 모든 판단을 맡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그들이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길 원했다. 그들이 순교도 불사하는 믿음은 지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했다. 사랑과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지혜와 능력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절대적 진리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였기에, 임의대로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습관적으로 어떤 영적 도전도 거부하고 물리치려 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양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개혁교회 성도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칼빈이 대상으로 삼았던 성도들은 복음을 이해하였고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양심에 권고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개혁교회의 신앙으로부터 떠나 배교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미사에 참석한 것은 외부적 환경을 이기지 못하여 악한 양심의 판단에 의존하여 행동한 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은 폭풍에 요동치는 바다와 같았다. 평안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하여 날카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외식의 옷으로 그 마음을 감추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책망보다 위로가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칼빈도 그들에게 요구한 내용이 혹시 도를 넘은 것이 아닌가하여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1545년 1월에 루터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원칙에 서서 단호하게 이 문제를 풀어갔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의 문을 두드리셔서 바른 결정을 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끝까지 악한 양심을 고집한 자들에게는 그의 권고가 실제적인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양심의 고소에 귀를 기울이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선한 양심을 가진 성도들은 칼빈의 권유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칼빈이 1542년 제네바에서 본격적으로 목회하기 시작한 후부터 그 열매가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하여 순교자의 피가 그들의 땅을 적셨다. 그리고 수많은 위그노들이 망명길에 올라 정처없는 삶을 시작했다. 칼빈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영적 예배의 중요성을 알려주며, 위선을 버리고 당당히 순교나 망명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지도자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칼빈이 그들의 양심에 권고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
본 논문은 프랑스의 개혁교회 성도들이 강제로 미사에 참석할 수 밖에 없던 상황 속에서 칼빈이 그들의 양심을 향해 호소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 사실을 입증했다. 칼빈이 그들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가 로마 교회의 형상 사용을 우상 숭배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그가 영적 예배의 회복을 종교개혁의 과제 중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당시엔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미사에 참석하지만 마음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며 타협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이 속출했다. 칼빈은 그들을 그러한 상황에 계속 내버려 두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 근거한 믿음과 순종의 열매가 있는 경건 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래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칼빈은 양심이란 거울과도 같아서 성도들이 자신의 영적 현주소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가 이해한 양심은 마치 법정과도 같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한 일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양심의 고소 때문에 본인은 알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양심이 인간의 의지를 제어하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악한 양심은 위선적 행동을 유발시키나, 선한 양심은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게 한다. 칼빈은 자신의 글을 읽는 자들이 양심에 부끄럽지 않는 신앙에 근거한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였다. 교회 역사는 그가 심은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양심에 호소하는 칼빈의 방법은 오늘날 성도들의 건강한 신앙을 세우는 데 대략 세 가지 측면에서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이다. 칼빈이 가르친 신앙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지식의 조화를 말한다. 복음을 이해하면서도 외식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의 양심을 겨누어 공박하며 재판장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두 번째로, 영적 예배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형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높이려는 예배는 물리치신다. 그는 순종하는 자세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우리는 혹시라도 영적 예배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과감히 없애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세 번째는, 성경의 역할이 지닌 중요성이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영향력이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신앙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양심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자기 양심을 돌아보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식은 오로지 성경에서만 찾아지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Calvin's urge to the consciences of the Catholic Mass participants (Abstract)
Jinmo Cho
A religious compromise was made among some Christians in France during a time of severe persecution in 16C. Those who attended the Catholic Mass tried to justify their dissembling behavior with an excuse that God is concerned with internal faith rather than external behavior. Calvin, appealing to their consciences, firmly urged them not to attend it but to exile or accept martyrdom. Calvin's view of the role of conscience is God-oriented. Consciences do not have their own power to condemn, but they are inescapably aware of God's judgment. However, he did not endorse natural theology. Calvin introduces two opposite ways by which on e responds to the accusation. Those who have bad conscience constantly rebel against God, while those who have good conscience enjoy peace of mind through solving their problems. The history of the Huguenots hints us that Calvin's appealing to their consciences was not in vain.
중요 단어: 칼빈, 양심, 미사, 위선, 핍박, 영적 예배
Key words: Calvin, Conscience, Mass, Hypocrisy, Persecution, Spiritual service
출처: http://cafe.daum.net/reform25/5yI5/17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