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과 ‘재세례파’ 그리고 ‘개혁신학’의 ‘성례(sacrament)’.
장대선 (장대선 블로거에서 옮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갖는 대표적인 오해는 개혁신학이 교조주의적이며 편협한 시각을 지닌 신앙의 체계라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는 개혁신앙은 가장 보편적일 뿐 아니라 가장 넓은 입장에 서 있는데, 개혁주의 신앙이 얼마나 넓고 보편적인지를 잘 드러내는 주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례(聖禮, Sacrament)’에 대한 이해다.
우선 로마 가톨릭의 성례관은 기본적으로 예식 자체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성례를 통해 얻게 되는 모든 은혜의 유익은 절대적으로 예식 그 자체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러한 성례관을 바탕으로 사제들이 전쟁터에까지 달려가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성례를 시행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재세례파의 성례관은 예식 자체의 필연성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고백과 신앙에 근거할 때에 비로소 성례의 실제적인 유익이 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재세례파들은 참된 믿음과 신앙을 보증할 수 없는 로마 가톨릭의 성례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만의 순수한 신앙고백에 바탕을 둔 성례의 시행을 주장했는데, 그처럼 그들이 참된 신앙이 결여된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받도록 한다는 점에서 ‘재세례파(再浸禮派, Αναβαπτιστές)’라 불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유아들에 대한 세례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성과 판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아이들이 순수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은혜의 근거는 철저히 그들 자신의 순수한 신앙과 고백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과 재세례파의 성례관은 사제의 권위 혹은 신자들의 믿음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공히 동일하게 인간에 바탕을 두는 맥락 가운데 있는 성례관이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자들은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바탕위에 있는 성례관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사제의 권위 혹은 신자의 믿음 에 바탕을 두는 인간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의 성례에 대한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일관되게 잘 명시되었는데, 성례에 대해 다루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7장 제1항은 “성례는 은혜 언약에 대하여 인(印)치는 표…”라고 했다.
또한 제2항에서는 “성례에 있어서 표호(票號)와 실제(표호의 실물과 그 효과) 사이에는 영적 관계가 성립되며, 그 관계는 그 둘 사이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아울러 제3항에서는 이르기를 “성례가 올바로 시행되는 데서 나타나는 은혜는… 성례 자체에 고유하게 내제된 능력이나 집례자의 경건, 혹은 그의 의도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오히려 성례에 은혜가 임하게 되는 원인은 “첫째, 성령의 역사 때문이고, 둘째, 성례의 제정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례의 유익은 시행하는 예식 자체에 고유한 능력과 효과가 있다거나 사제의 경건하고 순전한 의도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과 확연히 구별되며, 동시에 성례에 참여하는 신자의 신앙과 믿음의 고백에 고유한 능력과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와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재세례파 혹은 경건주의의 패턴과도 명백히 구별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개혁신학의 독특하고 차별되는 성례에 대한 이해는 실천적으로 신앙에 있어서의 넓은 융통성과 보편성으로 연계된다.
실례로 로마 가톨릭의 경우처럼 꼭 세례예식에 참여하여야만 구원이 확실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세례예식에 참여하지 못했을지라도 구원에 있어서는 그것 자체가 결정적이지 않으며, 재세례파의 경우처럼 반드시 참된 믿음과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만 참된 세례예식이 되는 것도 아니므로 로마 가톨릭에서 영세(領洗)를 받은 경우라도 은혜 언약을 나타내는 표로써 인정해 주는 것이다.
또한 세례예식 자체가 필연적인 은혜의 효과가 내재된 것이 아니므로 시행되는 예식 자체는 일종의 상징적인 표(表, Sign)이며,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경우와 같이 전쟁터에까지 나가서 꼭 성례를 베풀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쟁의 비상적인 상황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는 있어도 성례까지 시행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장에 믿음을 보일 수 없거나 참된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없는 사람(대표적으로 영아(嬰兒)들의 경우)이라도 얼마든지 성령 안에서 은혜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8장 제6항이 잘 드러내주고 있는데, 제6항에 따르면 “세례의 효과는 세례를 시행하는 그 시각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무런 신앙고백도 할 수 없는 유아(영아)와 같은 사람이라도 그 당시가 아니라 나중에, 심지어는 죽음을 맞아 우리로서는 구원의 근거로 확신할만한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까지도 성례를 통해 얻게 되는 효과가 얼마든지 동일하게 수반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단회적인 ‘세례’ 외에 ‘성찬’의 경우에는 그러한 의미와 효과가 조금 다르게 적용되는데, 성찬의 은혜와 유익은 기본적으로 세례의 경우와 동일한 성례로서의 ‘표’와 ‘인’이기는 하나 세례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의 유익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유아들이나 초신자들의 경우에는 충분한 믿음과 신앙의 고백 가운데서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된 이후에 비로소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성찬의 경우에도 예식 가운데서 나누는 떡이나 음료 자체에 은혜의 유익을 주는 어떤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세례의 경우와 동일한 맥락(가시적인 것들 자체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맥락) 가운데 있다 하겠다.
이처럼 개혁신학과 그에 바탕을 두는 개혁신앙의 실천적인 측면들은 당장 사람의 눈앞에 있는 상황이나 현실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언약과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얼마든지 열려 있을 수가 있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고려하는 넓이와 깊이, 그리고 높이를 지닌 참으로 광활한 은총의 신앙관이다. 당장 우리 눈앞에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견고하게 인내할 수 있는 견인(堅忍)의 신앙은 바로 개혁신앙의 바탕에서 가장 강력하게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어떤 자유주의적인 사상이나 가치관들이 주지 못하는 무한한 자유의 원리를 깨우쳐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개혁신학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각 가운데서 우리 개혁주의 신자들은 비로소 이제 막 태어난 어린아이의 눈에서도 전적인 부패와 죄에 대한 무능력을 직시하고, 천박하게 웃는 창기(娼妓)의 눈에서 오히려 숭고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무한한 깊이와 넓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신학으로서의 개혁신학이야말로 갈수록 퇴락해가는 개신교의 현실을 극복할 거의 유일한 신앙의 체계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잊지 말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