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교회론과 선교

by dschoiword posted Dec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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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교회론과 선교

황대우/ 고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1. 서론

오늘날 선교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전도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 개념이다. 만일 선교가 전도와 다른 차원의 것이라면 우리는 바울의 여행이 전도여행인지, 선교여행인지 구분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도들의 활동 역시 전도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선교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과연 성경은 선교의 시발점, 즉 선교의 기원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당연히 예수님의 설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누군가 인류 역사 자체를 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할 경우 선교는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창조사건과 인간의 타락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역사는 성경의 구원역사와 구별되지 않고 오히려 동일하게 될 것이다.1)

하지만 선교의 직접적인 기원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분명 사도행전에서 찾게 될 것이다. 또한 특별히 바울의 전도여행이 최초의 선교 모델이라고 말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울의 전도여행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 즉 복음전도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전도여행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이스라엘 곳곳을 누비고 다니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리시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시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 구원 역사에는 물론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에 이방인의 가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소식이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복된 소식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 즉 선포하고 알리는 것을 우리는 복음전도라고 한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이 복음전도의 대상이다. 복음전도에는 전도 대상에 따른 구별이 없었다.

하지만 선교라는 개념이 바로 이와 같은 복음전도라는 개념에서 유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선교 개념을 전도와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선교 대상에 따라 자국 선교(home missions)와 외국 선교(foreign missions)로 구분하는데, 흔히 자국 선교를 ‘전도’로, 외국 선교를 ‘선교’로 정의한다.2) 그러나 이런 구분은 자칫 성경이 말하는 복음전도의 의미를 이론적인 선언과 가르침, 그리고 개인의 내적 변화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좀 더 신중한 자세가 요구된다.

본 논고가 말하는 선교 개념은 전도와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전도란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선포만의 문제는 아니다.3)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복음전도는 개인의 실존 자체를 만왕의 왕께 복종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전인격적인 변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의 어원적 개념인 “보냄”(missio)이란 의미에서 보면 선교란 전도와 다른 것이 아니며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든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선교의 고전적 정의와 일치한다.4)

네덜란드 개혁교회 선교학자 바빙크(J. H. Bavinck)는 선교를 “그리스도의 명령에 기꺼이 겸손하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교회 사역”으로 정의한다.5) 그래서 그는 선교를 “인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로 간주한다.6)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근본 개념이다. 본 논고는 이런 선교 개념에서 볼 때 종교개혁이 선교와 무관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자들이 선교에 무관심했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들 가운데 제네바 개혁가 칼빈의 선교 개념이 그의 교회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2. 선교와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시대인 16세기는 정치적으로 서로마제국 위에 건설된 신성로마제국의 시대 말기로서 권력의 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제국의 중앙집권체제가 붕괴되어 유명무실해지면서 각 지역마다 강력한 권력의 독립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가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기독교 외에 다른 것이 인정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정교일치의 시대였으므로 시의 시민, 국가의 국민, 나아가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에 등록되었다. 이 시대의 모든 서부 유럽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방인은 그들의 영원한 숙적 터키인들이었다. 종교개혁은 교리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의 타락상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타락상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즉 종교개혁은 당시 허물어지거나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집을 동일한 집터 위에 다시 새롭게 건설하거나 대대적으로 수리하고자 노력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수고가 맺은 아름다운 결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유대교를 향해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대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16세기는 지리적으로 신대륙이 본격적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시대일 뿐만 아니라 그 신대륙을 개척하고 정복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신대륙을 발견하는 단계를 넘어 정복하는 단계로 발전하면서 복음은 유럽의 신무기과 더불어 신대륙 정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피비린 나는 신대륙 정복 역사는 16세기말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7-1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세기의 소강상태를 지나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소멸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과 같이 선교를 체계화하여 선교 활동과 선교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서 선교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명 성급한 결론이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선교 운동이나 선교 사업을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7)

미국의 교회사가 라토렛(Kenneth Scott Latourette)의 총 7권으로 된 대작 “기독교 확장의 역사”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교회역사를 선교역사와 동일시하여 선교의 관점에서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는 16세기에 소수의 개신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양식을 새롭게 발견된 신대륙에 전파하려는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선교에 대한 개신교의 활동은 확실히 로마교에 비해 많이 빈약한 것으로 평가한다.8) 이러한 기류에 편승하여 저술된 책이 성공회 출신 선교사 스티븐 닐(Stephen Neill)의 『기독교 선교 역사』이다.9) 이 책에서 닐은 17세기 로마교 신학자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누스(Robertus Bellarminus, 1542-1621)가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이 “이단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변절시켰다는 것 외에 달리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을 신앙으로 회심시켰다는 말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고 비난한 말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선교 사상과 활동을 무시한다.10) 종교개혁자들의 선교관에 관한 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루터가 종종 유대인들과 터키인들을 친근하게 여기고 또한 확실히 복음이 점차 세계로 확장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종교개혁자들이 비기독교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호의적인 말들을 동원하고, 또한 종교개혁자들의 저술로부터 가능한 모든 증거를 수집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은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11)

정말 닐의 결론처럼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의 개념을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한 것일까?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신교는 로마교에 비해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게 있어서 선교활동이 전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교 개념조차 전무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루터 연구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일으킨 루터 연구의 대가 칼 홀(Karl Holl)이 1924년에 발표한 글 “루터와 선교”는 루터에게 선교 개념이 없다는 당대의 일반적인 견해를 뒤집어엎었다.12) 홀은 원문 자료를 근거로 루터의 선교 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루터 역시 실제적인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선교가 그 원리들을 따라 가야 하는지를 표시한 안전한 약도를 그려놓았다.”13)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분명한 선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사람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이다.14) 루터를 포함하여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적극적인 선교 개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평가한 바르넥(Warneck) 조차도 부써를 선교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진 예외적인 인물로 인정한다.15) 선교에 대한 부써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종교개혁 시대의 선교 개념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우리가 말하려고 의도했던 것에로 이제 다시 돌아가 보자. 만일 이런 방법으로 정부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받는 자들, 즉 태어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주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자들을 살필 때 그들 각자가 경건을 추구하고 발견하고 소원하는지를 살핀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들[=정부들]에게 확실히 복을 베푸실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정부들]은 또한 의를 추구할 수 있고, 또 유대인들과 터키인들과 다른 이교도들처럼 날 때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다. 그렇다. 그들이 자신들의 육적인 통치를 사랑하고 이 통치권의 확대를 위해 열정을 쏟아붓는 만큼 그리스도의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열심을 내었다면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터키인들과 다른 이교들의 땅과 재산을 뺏으려는 열정은 있지만 그들의 영혼들을 우리 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열정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세상의 통치자들이라 불리는 일반 군주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성직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16)

부써의 이 글은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 개념을 발견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지 잘 보여준다. 스트라스부르 개혁자는 통치자들이 재물과 영토를 소유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복음을 확장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비판한다. 또한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신대륙의 정복전쟁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여기서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정부까지도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부써는 다른 곳에서 “구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설교자들을 보내심, 그리고 부르심에 달려 있다”17)고 말함으로써 선교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 부써에게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사상이다.18) 부써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이다. 따라서 선교 즉 복음 선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곧 교회의 확장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선교 개념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에게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 개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평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19)

3. 칼빈의 선교 이론과 원리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의 선교 개념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20) 칼빈이 선교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여 일반화시킨 최초의 사람은 독일의 선교학자 바르넥이다. 그는 자신의 책 『개신교 선교 역사 개요』에서 칼빈이 선교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서 칼빈이 “비기독교 민족들 가운데 기독교의 확장, 즉 선교에 대한 특별한 교육이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결론 내린다.21)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그의 주석과 설교를 분석한 결과 칼빈의 신학에 선교 원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22) 사도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근거로 한 바르넥의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네덜란드 신학자 빌름 당크바르(Willem F. Dankbaar)가 지적했는데, 심지어 그는 칼빈이 제네바를 사도적 중심지, 즉 유럽 모든 나라에 참된 복음 선포를 확산하는 힘을 공급한 곳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3) 요하네스 판 덴 베르흐(Johannes van den Berg)는 선교에 대한 특별한 교리를 칼빈에게서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선교에 관하여 칼빈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 3가지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선교 사역이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단순한 순종의 문제라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된다는 것, 그리고 성경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24) 찰스 채니(Charles Chaney)는 칼빈 신학에서 최소한 이방인을 부르심과 하나님 나라의 진보, 교회를 모으심,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그리스도인 책임이라는 선교 원리를 발견할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25) 한 걸음 더 나아가 베르흐마(H. Bergema)는 칼빈을 선교의 영(een missionaire geest)으로 충만한 주요 선교인물(een belangrijke zendingsfiguur)로 규정한다.26) 칼빈 생전의 제네바 목사회의 회의록을 면밀히 분석한 필립 휴즈(Philip E. Hughes)는 1555-1562년 사이에 제네바가 복음 전도를 위해 다른 지역에 파송한 사람들 가운데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만 88명이며 선교 활동이 정점에 달한 1561년 한 해에만 해도 12명의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무려 그 해에만 142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파송되었다고 지적하면서27) 칼빈을 “선교 지도자”(Director of Missions)라고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과연 오늘날의 불신자 전도나 이교도 개종을 위한 선교와 같은 개념이 칼빈에게서 발견되는지 칼빈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1절에서 권면하는 기도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인류를 위한”(pro universo genere humano)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왜 우리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불신자들의 구원에 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형제들인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서로 기도하고 또한 하나님의 온 교회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바깥사람들은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생각에 대해 말하기를 “바울은 이런 잘못된 견해에 반대하여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도에 죽어 없어질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이들이 교회의 몸에 가까워지는 것을 제한하지 말라고 명령한다.”28) 그리고 동일한 구절 속의 “감사”를 설명하면서 “왜냐하면 그는[=바울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신자들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즐겁고 복된 성공을 위해 감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가치 없는 자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스스로 확대해 가야 한다.”29) 여기서 칼빈은 불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기독교 사랑의 대상을 온 인류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 즉 불신자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인류를 위한 사랑과 기도가 칼빈의 선교 실천 원리이다.30)

또한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3-4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사도가 생각하는 단순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지상의 어떤 백성이나 신분도 구원으로부터 제외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제공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음 선포가 [죽어 없어질 자들을] 살린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구원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신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그 설교는 개인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민족들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의도하는 것은 군주들과 바깥 백성들을 이 숫자에 포함시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1)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칼빈이 디모데전서 2장 4절 말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를 주석할 때 “모든 사람”을 개인의 총합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모든 민족으로 해설한다는 점이다. 즉 그것을 각자의 모두를 의미하는 개인에게 적용하지 않고 각 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집단에 적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이나 국가 단위에 적용되는 전도와 선교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의 전도와 선교 원리는 창조와 섭리의 원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사실은 모든 시대와 시절에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졌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할 만했고 그분과 어떤 교류도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율법 시대에 그분이 한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자신의 날개 아래 그들을 모으셨으며 나머지 세상은 혼란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 하지만 비록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자연히 그분께 속해 있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 모두를 만드신 것과 같이 그렇게 그분은 또한 그들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덕과 위대한 선하심으로 그들을 지켜주신다. 사람들이 타락을 향해 가는 것을 우리가 볼 때, 비록 그들이 불신자들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들을 우리와 결합하실 만큼의 은혜를 그들에게 베푸셨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마치 그가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자신의 손에 쥐고 계신 것과 같을 수는 없으나 우리 사이에 어느 정도의 형제애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우리의 적이며 이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질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아야 하며 그들을 다시 한 몸에 연합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가능한 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잘려나간 지체들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와 같이 흩어진 사람들을 볼 때 마치 괴물을 보는 것처럼 참으로 그것은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을 서게 만들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에게 새겨져 있고 끊어질 수 없는 끈이 있으나 우리 눈에는 마치 그들이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여운 불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손을 그들에게 뻗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성 바울이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상기하자.”32)

심지어 칼빈은 불신자에게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방해물과 걸림돌이라고 주저 없이 비판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제 자신들의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모든 자들과, 또한 가여운 불신자들을 인도할 마음은 없고 오히려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지도 않고 그분의 제국의 권능을 최대한 약화시키며 그분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지 못하도록 제한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의 도를 부분적으로 어둡게 만들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위엄을 감소시킨다.”33)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그 이후의 일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물론 아무런 열의나 성의가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전도와 선교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사후관리의 전략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생각하지 않았다. 참 복음을 전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의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터키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길 원하신다 해도 만일 반역을 한다면 그들은 정죄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34) 칼빈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약의 선지자는 오늘날 믿는 자들을 위한 목사의 역할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전도자나 선교사의 역할까지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4. 칼빈의 선교 실천

칼빈은 단지 온 인류를 위한 선교 이론과 원리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교도들을 위해 선교를 실천했다. 16세기 제네바는 칼빈의 선교 이론을 배경으로 당시 다른 여러 유럽 나라에 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개혁교회 선교 기지국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특히 핍박 아래 있었던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들(Huguenots)의 지하교회를 위해 수많은 목회자들을 프랑스 선교사로 보내었으며 심지어 개혁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머나먼 남아메리카의 신대륙 브라질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칼빈의 제네바를 선교의 중심지로 본 스탠포드 리드(W. Stanford Reid)는 1555년까지는 프랑스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로는 1555년 이전에도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있었지만 조직적인 노력의 증거가 별로 없다는 점과, 또한 칼빈 지지파가 제네바 정권을 잡으면서 분위기가 바뀐 해인 1555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선교사들과 선교지 목록이 발견된다는 점을 든다.35) 그리고 리드의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라질에까지 미칠 정도로 활발했던 제네바 선교가 칼빈 사후에는 오히려 선교 활동이 줄어들었다.36) 이런 정황들은 16세기 개혁주의 선교의 중심지로서 제네바 선교를 주도한 인물이 칼빈이었음을 증거한다. 칼빈은 유럽의 교회들을 개혁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교도에게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한 분 하나님을 알리는 위해 머나먼 이국 땅에 교회를 건설하는 일에도 헌신했다.37)

칼빈의 제네바는 빌러가뇽(Villegagnon)38)의 요청으로 1556년에 브라질에 파송할 2명의 선교사를 선출했는데, 피에르 리허르(Pierre Richer = Richier)와 기욤 샤르띠에르(Guillaume Charretier = Chartier)이 그들이다.39) 이들은 브라질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40) 이들이 선출되고 파송된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프랑스 위그노인 콜리니(Coligny)의 총독 가스빠르 드 샤띨롱(Gaspard de Chatillon)은 프랑스에서 박해 받고 있던 위그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신대륙에서 찾고자 했는데, 당시 브르따녀(Bretagne)의 부총독이었던 빌러가뇽이 콜리니의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1555년 7월에 위그노 이주민들과 군사들과 일꾼들을 가득 실은 두 척의 배는 브라질로 떠났고 11월에는 당시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라 불리는 지역 가까운 섬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그 섬을 콜리니라 불렀다. 빌러가뇽의 요청으로 300명의 새로운 위그노들이 1557년 3월에 도착했는데, 이 때 칼빈은 두 명의 목사 선교사와 12명의 학생들을 이들과 함께 파송했다. 리허르의 첫 설교는 도착일인 3월 7일 혹은 10일에 있었다. 주일의 두 번 설교 외에도 평일에 매일 두 사람 중 한 명이 설교했다. 하지만 소르본느(Sorbonne) 신학교 출신 교황주의자 코인타(Cointa =Cointac)가 성찬집행의 방법 문제로 칼빈주의 설교가들과 논쟁을 시작하면서 분열이 일어났고 이때 빌러가뇽은 코인타의 손을 들어주면서 교황주의자가 되었고 개신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주민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들 중 다수가 상인들의 배를 타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빌러가뇽은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몇몇은 죽이고 나머지는 포로로 삼아 불모지에 가두어버렸다.41) 안타깝게도 빌러가뇽의 정치적, 신앙적 변절과 위그노 신자들에 대한 핍박, 그리고 프랑스가 포르투갈과의 식민지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식민지 선교를 로마교에만 허락하고 개신교도들을 핍박하는 프랑스의 선교 정책 때문에 제네바의 브라질 선교는 싹을 틔워보지도 못한 채 질식되고 말았다.42)

5. 칼빈의 하나님 나라 이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나라로 인도하신다.43)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된다.44)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영적이며 그 시작은 삶의 갱신이지만 끝은 불멸과 하늘 영광이다.45)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하늘나라를 “경건한 자들의 나라”(piorum regnum)라고 부르는데,46) “이들의 나라와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있는 것이요, 예컨대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며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사람들이 그것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이 나라를 바라볼 수는 있다.”4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두 차원, 즉 ‘이미와 아직 아니’의 차원을 만난다. 칼빈에 따르면 완전한 하나님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어느 정도 가시적인 실체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작은 중생이고 끝과 완성은 복된 불멸이다. 그 둘 사이의 발전은 중생의 더 나은 진전과 증가에 놓여 있다.”48) 칼빈에게 있어서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두 차원 사이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점점 분명하게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실체, 즉 지상에서 성장해 가는 교회를 의미한다.49)

하늘나라는 이 세상과 매우 먼 거리에 있는 어떤 시공간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는 비록 이 세상으로부터 기원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꽃을 피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나라는 영적이고 영적인 일들을 내포하기 때문이며, 그 다음으로 그 나라는 불멸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50)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과 자기부인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51) 하나님 나라의 조건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의 의에 종속시키는 동안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영광의 참여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이다.52)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이중적인 방법, 즉 말씀 설교와 성령의 숨은 능력을 통해 실현된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다스리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단순한 소리는 성령의 내적인 능력이 없이는 마음을 관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고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둘 모두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스스로 기꺼이 그분께 속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과 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을 기도한다.”53)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속에 있다.5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미 택하신 자들 속에서 다스리시고 계시며 그들을 자신의 성령으로 인도하신다.”55)

“하늘나라는 영혼의 내적이고 영적인 갱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교회의 갱신은 내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는데, 이유는 그분이 천상적인 새로움을 위해 자신의 택자들을 살리실 때 그들 가운데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이다.”56) 이런 점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하늘나라를 교회의 새로운 환경,57) 즉 교회의 갱신 혹은 교회의 두 번째 상태로 해석한다.58) 하늘나라 자체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데,59) 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와 성전을 바치고 있는 선택된 보배로운 돌이시다.6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심겨졌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참여자들이고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이다.61) 하나님의 교회도 공동체도 백성도 오직 하나뿐이다.62)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유일한 왕(solus rex)이시며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그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건설은 하나님 나라와 결코 다르지 않다.63) 칼빈은 세 가지 용어, 즉 “하나님 나라”(regnum Dei)와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hristi)와 “교회”(ecclesia) 사이에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한다.64)

칼빈은 교회가 자연적인 수단들에 의하지 않고 천상적인 능력과 은혜에 의해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65) 이 교회는 비록 이 땅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 하늘 위에까지 성장한다.66) 또한 칼빈은 장자들로서 유대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과 연합하되, 그들 모두가 한 몸과 한 교회로 성장하기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유대인들이 감사하지 않음으로써 잘려나가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보았다.67) 이런 연합과 성장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우리 밖에 계시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끊어질 수 없는 교제의 끈으로 우리와 연합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온전히 우리와 하나가 되실 때까지 놀라운 연합을 통해 하루하루 점점 우리와 한 몸으로 성장하시기 때문이다.”68)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에까지 성장할 때 이것이 곧 성숙이요 완전이다.69) 이것은 성숙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70)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한 마음과 한 영혼이 되는 성장을 의미한다.71)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충만하고 완전한 힘을 얻지 못했으므로 죽을 때가지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며 교회 성장의 최종 목표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다.72) 이 성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subiection de nostre Seigneur Iesus Christus)”의 결과물이다.73)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성장의 방법과 과정과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세례 요한처럼 자신은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기를 소망하며,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길이 곧 교회 성장의 바른 길이며 지름길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제네바 종교개혁가에게 있어서 몸인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 이것이 곧 성장이요 성숙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의 완성점이다.74)

6. 칼빈의 사도직 이해

성경에 나타난 직분들을 일시적인 임시직과 지속적인 항존직으로 구분하는 칼빈은 목사, 교사(=신학교 교수), 장로, 집사를 항존직으로 분류하고 나머지 성경에 나타나는 다른 직분들은 임시직으로 분류하면서 이 모든 교회 직분이 유일한 그리스도 교회의 건설(aedificatio ecclesiae Christi una)을 위한 봉사와 질서라고 보았다.75) 교회 직분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칼빈의 선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건설하심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확장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칼빈이 생각하는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통로라는 사실이다. 즉 칼빈 선교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선교에 대한 사람의 계획과 노력을 수동적으로 만든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16세기 당시 거의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루터의 칭의론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칼빈은 부써의 영향으로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까지도 함께 강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주의해야 할 점은 칼빈의 성화에 대한 강조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더하는 형식이 아니라, 성화 자체도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인 인도하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즉 칼빈은 성화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 정도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은혜 위의 은혜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의 삶은 은혜로 시작되고 은혜로 유지되며 은혜로 종결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신자인 우리의 삶에 칭찬을 들을만한 성공적인 무엇인가가 나타나도 그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의 공로로 돌려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만 그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soli Deo gloria)라는 사상의 진수다.76)

칼빈은 사도직을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 주어진 직분, 즉 항존직으로 이해하지 않고 특별한 일시적인 직분, 즉 우주적인 교회의 설립을 위해 초대교회에만 주어진 임시직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칼빈의 이해는 사실 16세기 당시 다른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친 교황이 곧 사도직이라는 교리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동시에 그들을 사도로 삼으셨는데, 이 사도들은 “영생의 전파 사명을 세상의 모든 지역으로 전하는 자들”이다.77) “사도적 기능이란 바로 ‘[너희는] 가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 16:15)라는 명령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일정한 지역들이 지정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세계 전체가 맡겨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가능한 한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어디든지 그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송되었는데, 이들은 세계를 반역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참된 순종을 하도록 하고 어디든지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아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자들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들은 초대 교회의 건축자들과 같이 온 세상에 그[=교회의] 기초들이 된 자들이다.”78) 여기서 칼빈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선지자들(Prophetae)과 복음 전하는 자들(Evangelistae)도 지속적인 직분(perpetuum officium)이 아닌, 초대 교회에만 주어진 특별한 직분(extraordinarium officium)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끔 후대에도 사도들, 혹은 이들의 자리에 복음 전도자들을 세우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를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돌아오도록 하는 이런 자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79) 이처럼 개혁자는 교회의 항존직에 속하지 않은 특별한 직분, 특히 사도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의 직분이 역사 속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칼빈에 따르면 사도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의 임무를 대동소이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들의 공통된 임무는 적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찾아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즉 사도들의 최고 임무는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모든 민족을 믿음에 순종하도록 인도한 다음 자신들의 교리를 복음의 증표로 새겨 넣고 제정하는 것”이다.80) 사도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이러한 복음 선포까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교회의 항존직 가운데 교사들[=신학교 교수들]은 성경의 해석자로서 초대교회의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목사들 또한 자신들 각자에게 맡겨진 특정한 교회들을 다스린다는 것 외에는 사도들과 함께 동일한 직무를 감당한다.”81) 여기서 사도와 목사의 직무가 동일하지만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열방을 돌아다니면서 순회 목회를 하느냐 아니면 한 곳에 머물러 지역 목회를 하느냐에 있다. 칼빈은 사실 이 둘 모두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을 따뜻하게 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열기, 혹은 음식과 음료가 필수적인 것과 같이 이 땅에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도적이고 목회적인 직임이 필수적인 것이다.”82)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들의 직무이자 동시에 목사들의 직무이기도 하다.

제네바 개혁가에 따르면 복음의 새로운 선포를 세상에 전파하도록 주님께서 선택하신 12명의 사도들에게 당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와 영예가 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라는 단어의 어원적인 규칙과 습관에 따르면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이 ‘사도들’로 불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요 또한 그분의 사자들이기 때문이다.”83) 칼빈의 이 말은 교회의 사역자들은 모두 근원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신다는 그의 사상, 즉 교회 직분의 신적 기원론과 상통한다. 사도적인 직무는 오늘날 교회의 사역자들 모두에게, 특히 복음을 선포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따라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일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쏟아 붓지 않는 자는 누구도 사도들의 후계자일 수 없다. 더욱이 교사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자마다 사도의 이름을 거짓으로 가장한다. 이와는 달리 신약의 제사장직은 이것, 즉 말씀이라는 영적인 검으로 사람들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84) 사도적인 직무는 제사장적인 직무이고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교회 사역자의 직무이다. 이런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사도들을 위해서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한 시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끝까지 지속적으로 자신의 도움을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명백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것은 복음이 수많은 장애물들보다 월등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신비한 방법을 통해 기적적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이다.”85)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무가 조직 교회에서는 지역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의 직무이지만 불신자들을 위해서는 전도자의 직무이고 이교도들을 위해서는 선교사의 직무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사도의 직무가 목사의 직무로만 계승된 것으로 보는가? 그렇지 않다. 한 지역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에게 계승되지 않은 직무, 즉 국경을 넘어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인 직무를 칼빈은 초대 교회 이외의 시대에는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것이 필요한 환경이 되면 주님께서 얼마든지 그와 같은 직무를 감당할 사람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 즉 선교의 문이 열려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 없이 달려가야 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 “문이 내게 열렸으니”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가[=바울은] 의미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진입은 열린 문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 접근을 한다. 열매에 대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곳은 문이 닫혀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우리가 닫힌 길에서 건너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무익한 수고로 헛되이 지치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교회를] 건설할 기회가 나타나는 곳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 그리스도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친절하신 초청에 대해 우리의 순종을 제거하지 않는다.”86) 칼빈이 살았던 16세기는 국경을 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선교의 문이 닫혀 있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칼빈이 브라질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그가 브라질에서 온 소식을 통해 이교도 선교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도 당크바르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을 사도적인 영이라고 부른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며 어떤 점에서 그는 그의 신학보다 훨씬 사도적이다.”87)

7. 결론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개념이 잘 발달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6세기 당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교도들은 유대인들과 터키인들이고 그리스도인들과 이들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갈등과 반목 구조 속에 있었다는 시대적 상황과 당시에는 신대륙 발견이 지극히 초기 단계였다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왜 그들에게 선교 개념이 오늘처럼 잘 발달될 수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특히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 부써와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선교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몇몇 선교학자들의 주장, 즉 칼빈에게서 선교 개념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나 그가 이교도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칼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온 인류는 한 몸이었다는 자신의 창조론에 근거하여 죄로 인해 그 몸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칼빈의 선교 이론의 출발점이요 원리이다. 그는 이런 이론과 원리만 제시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시도에 불과한 것이며 결국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는 신대륙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이교도 선교를 실천했다. 이러한 이교도 선교의 실천은 칼빈의 교회론, 즉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개념과 열방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주어진 사도직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 설립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의 제도적 교회를 개혁하는 일, 즉 교회를 회복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개념에는 국경을 넘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열리기 시작한 16세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교도 선교를 통한 새로운 교회 설립이라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 복음 선포를 통한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교회 성장의 최고 목표는 그리스도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통해 달성된다. 복음 선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자신의 교회를 건설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는 교회 건설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복음 선포는 교회 안으로는 신앙교육을 의미하지만 교회 밖으로는 전도이며 선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칼빈에 따르면 복음 선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신 교회 사역자에게 맡기신 것이며 복음 선포를 통한 교회 건설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이것이 칼빈의 신학과 삶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다.


각주

1) 네덜란드 개혁교회 선교학자 J. H. 바빙크가 이런 관점을 제시하고 견지한다. 참고. J. H. Bavinck, 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s, 전호진 역, 「선교학개론」 (서울: 성광문화사, 1980). 바빙크의 이러한 관점은 아마도 그의 삼촌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인 것 같다. 헤르만 바빙크는 “성경 속의 선교”(De zending in de Heilige Schrift)라는 소논문을 다음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글로 기고했다. 참고. Henry Beets et al., Triumfen van het kruis (Grand Rapids: Eermans-Sevensma, 1914), 7-30.

2) 선교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음 책 참고. 전호진, 「선교학」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04), 17-23. 이 책에서 저자는 “선교를 타문화권에서 복음 전도를 위한 교회의 모든 활동”으로 정의하면서 오늘날 세계 선교가 선교를 개인 구원의 차원에 국한시키는 수직주의(verticalism)와 선교를 사회 구원으로 확대하는 수평주의(horizontalism)로 양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3) 존 스토트는 선교에 대한 자신의 저술에서 두 극단적인 정의 즉 선교를 전도로 정의하는 사람들과 선교를 사회혁신으로 정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두 정의를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했다. 참고. John R. W.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rdern World, 김명혁 역, 「현대기독교 선교」 (서울: 성광문화사, 1981).

4) 독일의 탁월한 개신교 선교학자 바르넥(Warneck)은 플리트(Plitt)의 주장을 수용하여 선교를 “이방민족들의 기독교화”로 정의한다. 참고. G. Warneck, Abriss einer Geschichte protestantischen Mission von der Reformation bis die Gegenwart (Berlin: Verlag von Martin Warneck, 1899), 9. 박영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와 선교”, 「선교와 신학」 제2집 (가을호, 1998), 104-107에서 재인용.

5) J. H. Bavinck, Zending in een wereld in noord (Wageningen: N. V. Gebr. Zomer & Keeuning's Uitgeversmaatschappij, ?), 5: “Zending is die werkzaamheid van de Kerk, waardoor zij, in blijde en nederige gehoorzaamheid aan het bevel van Christus, het evangelie van Gods genade predikt aan alle volken.” 바빙크가 선교를 이렇게 정의하는 배경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자 푸티우스(Voetius)의 선교 사상이 미친 영향이 크다. 푸티우스는 선교의 목적을 세 가지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회심”과 교회의 설립“과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함과 하나님께 영광돌림”이다. 참고. H. A. van Andel, De Zendingsleer van G. Voetius (Kampen:?, 1912), 150. J. H. Bavinck, 「선교학개론」, 163에서 재인용.

6) J. H. Bavinck, 「선교학개론」, 76.

7) 참고. Paul D. L. Avis, The Church in the Theology of the Reformers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81), 178. 이 책 171-174에서 저자는 “개신교 선교의 장애물들”을 몇 가지 드는데, 로마교를 대항한 개신교의 전쟁 외에도 개신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종교 전쟁, 개신교가 당시 선교사 파송의 교두보 역할을 한 수도원을 폐지한 것, 세상 곳곳에 개신교 신앙과 교리를 가진 신자들이 살고 있다는 개신교도들의 믿음, 복음 선포가 특별한 직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신념, 종교개혁자들의 임박한 종말론 사상 등이 그러한 것들이라고 설명한다.

8) 참고. Kenneth Scott Latorette,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Vol. 3: Three Centuries of Advance 1500 A.D. to 1800 A.D. (Grand Rapids: Zondervan, 1978), 42.

9) Stephen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revised for the second edition by Owen Chadwick (London: Penguin Group, 1986. Reprinted in 1990).

10) Stephen Neill, 188-189. 하지만 에이비스(Avis)는 자신의 책 11장 “종교개혁자들과 선교”(The Reformers and Mission)에서 닐의 저술을 벨라르미누스의 견해와는 달리 “균형 잡힌 판단”(a balanced judgment)을 추구한 것으로 평가한다. 참고. Paul D. L. Avis, The Church in the Theology of the Reformers, 167.

11) Stephen Neill, 189: “Yet, when everything favourable has been said that can be said, and when all possible evidences from the writings of the Reformers have been collected, it all amounts to exceedingly little.” 닐은 이 유명한 책에서 루터를 3번씩이나 언급하지만 칼빈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데, 인용된 닐의 문장이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12) Karl Holl, “Luther und die Mission”, in Gesammelte Aufsätze zür Kirchengeschichte, Vol. III: Der Westen (Tübingen: Verlag J. C. B. Mohr, 1928), 234-243.

13) K. Holl, 243: “Luther hat also nicht nur selbst wirklichen Missionssinn gehabt, sondern auch einen sichern Umriß gezeichnet, wie Mission nach seinen Grundsätzen getrieben werden müßte.”

14) 부써의 선교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J. W. van den Bosch, “Martinus Bucer en de zending” Gerefor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1933), 492-514, 544-568; L. J. Joosse, Reformatie en zending: Bucer en Walaeus, vaders van reformatorische zending (Goes: Oosterbaan & Le Cointre B. V., 1988), 30-108; 최윤배, “마르틴 부처의 종교개혁과 선교: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선교와 신학」 제21집 (2008), 69-96.

15) J. W. van den Bosch, 494에서 재인용.

16) Martin Bucer, “Von der waren Seelsorge und dem rechten Hirtendienst”, Martin Bucers deutsche Schriften, Vol. 7 (Gütersloh: Mohn & Co., 1964), 151-152: “Nun wollen wir wider keren zu unserem fürhaben: Wann die Oberen dermassen, wie erzelet, ernstlich bei den iren, die Christo dem Herren doch eigen geporen und dann auch im heiligen Tauff ergeben sind, versehen, das jederman zur Gottseligkeit recht gesuchtet, gefunden und getriben wurde, so wurde der liebe Gott inen das auch gewißlich fein in die hende geben, wie sie auch die recht suchen und zu Christo bringen mochten, die von Christo unserem Herren von gepurt und zucht entfrembdet sind, Als Juden, Türcken und andere Heiden. Ja, wann sie das reich Christi also liebten und zu erweiteren begirig weren, wie sie ire leibliche herrschafften lieben und die zu mehren geneigt sind. [152]Nun aber sehen wir leider, das man wol der Juden, Türcken und anderer Heiden land und gut suchet, aber wie man ire seelen Christo unserem Herren gewinne, spuret man wenig ernsts; Und das nit allein bei den ordenlichen Fürsten, die man weltlich herren nennet, sonder auch bei den genanten geistlichen.” 이 본문의  옆 공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요약문이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우리의 정부들은 또한 외국 민족들(frombde volcker)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불신자들에게서 그들의 재산과 통치권을 얻고자 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들로하여금 우리의 재산과 통치권을 강탈하도록 하실 것이다.” 1538년에 출판된 부써의 저술 “참된 목회에 관하여”는 네덜란드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H. J. Selderhuis, tr., Over de ware zielzorg (Kampen: De Groot Goudriaan, 1991).

17) Martin Bucer, In sacra qvatvor evagelia, enarrationes perpetvae, secvndvm recognitae, ... (Basel: Ioan. Hervagivm, 1536), 259: “..., ex Dei electione, missione praedicatorum & uocatione, omnia salutis pendere:...” 판 덴 보스(J. W. van den Bosch)는 자신의 글 510페이지에서 부써의 사복음서 주석 1530년 초판 본문을 제시했으나 필자는 그 초판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본문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1536년판의 본문을 인용했다.

18) 구스타프 안리히(Gustav Anrich)는 자신의 책 Martin Bucer (Strassburg: Karl J. Trübner, 1914), 114에서 부써를 “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의 아버지”(ein Vater des Calvinismus vor Calvin)이라고 불렀는데, 선교에 있어서도 두 개혁자 모두 칼빈주의의 신학적 특징인 신중심주의 즉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 사상이 강하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에 착안하여 칼빈주의와 선교의 공통점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분석한 논문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김철웅, “깔뱅의 5대 강령을 통해 본 선교신학: TULIP Missiology의 가능성 모색,” 「선교와 신학」 제21집, 163-191. 이 논문은 칼빈주의를 통한 선교신학의 가능성을 주권 사상에서 발견한 좋은 글이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제목이 큰 흠이다. “튤립” 교리는 칼빈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깔뱅의 5대 강령”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혹은 강령) 내지는 돌트(Dordt) 교리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19) 재세례파의 선교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홍지훈, “재세례파와 선교”, 「선교와 신학」 제21집, 131-160.

20) 이 글에서 인용되는 대표적인 글과 논문을 발표 연대순으로 나열했다. W. F. Dankbaar, “Het apostolaat bij Calvijn,” in Hervormers en Humanisten (Amsterdam: Ton Bolland, 1978), 185-199. = Nederlands Theologisch Tijdschrft (1949-50), 177-192; J. Vanden Berg, “Calvin and Missions,”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 3: Calvin's Work in Geneva,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2), 317-333. = Jacob T. Hoogstra, ed., John Calvin: Contemporary Prophet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59), 167-168; H. Bergema, “De Betekenis van Calvijn voor de Zending in de Missiologie,” Vox Theologica 29 (1958-59), 44-54; Charles Chaney, “The Missionary Dynamic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 3: Calvin's Work in Geneva,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2), 302-316. = Reformed Review 17 (1963-64), 24-38; R. Pierce Beaver, “The Genevan Mission To Brazil,” i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ed. John H. Brat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3), 55-73. = The Reformed Journal 17 (1967), 14-20; Philip E. Hughes, “John Calvin: Director of Missions,” i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ed. John H. Brat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3), 40-54; James De Jong, “John Calvin in Mission Literature,”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 3: Calvin's Work in Geneva,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2), 290-301. = Pro Rege 4 (1975), 6-17; W. Stanford Reid, “Calvin's Geneva: A Missionary Centre,”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 3: Calvin's Work in Geneva, Richard C. Gamble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2), 279-288. = Reformed Theological Review 42 (1983), 65-74; Carl D. Stevens, “Calvin's Corporate Idea of Miss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미간행 논문 (Ann Arbor, MI: U.M.I, 1992); 최정만, 「칼빈의 선교사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박경수, “깔뱅의 종교개혁과 선교,” 「선교와 신학」 제21집, 95-129.

21) Gustav Warneck, Outline of A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ed. and trans. by George Robson (3rd English ed., based on 8th German ed., Edinburgh, 1906), 20. James De Jong, “John Calvin in Mission Literature,” 291에서 재인용.

22) James De Jong, “John Calvin in Mission Literature,” 292.

23) W. F. Dankbaar, “Het apostolaat bij Calvijn,” 191.

24) J. Vanden Berg, “Calvin and Missions,” 317, 329. 선교에 대한 칼빈의 교리가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다음 참고. 최정만, 「칼빈의 선교사상」, 110-113.

25) Charles Chaney, “The Missionary Dynamic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303-310. 이 글에서 채니는 칼빈의 선택교리와 종말론이 칼빈 당대에는 선교를 교회의 근본적인 일로 말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한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후대에는 이 두 교리가 오히려 선교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결코 칼빈이 이 두 교리로 인해 선교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든지 선교 활동을 방해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26) H. Bergema, “De Betekenis van Calvijn voor de Zending in de Missiologie,” 52sq.
27) Philip E. Hughes, “John Calvin: Director of Missions,” 46.

28) CO 52, 265 (「디모데전서 주석」 2:1): “Poterant enim nonnulli ita secum reputare, Cur de infidelium salute essemus solliciti, quibuscum nihil est nobis necessitudinis? Nonne satis est, si fratres pro fratribus mutuo oremus, ac commendemus Deo totam suam ecclesiam? Nihil enim ad nos extranei. Huic sinistrae opinioni occurrit Paulus, ac iubet Ephesios suis precibus complecti omnes mortales, nec eas ad corpus ecclesiae restringere.”

29) CO 52, 266 (「디모데전서 주석」 2:1): “Nam quemadmodum vult infidelium salutem commendari Deo, ita et prosperos successus gratias agi... : et caritas nostra unsque ad indignos extendere se debet.”

30) 온 인류를 위한 사랑과 기도에 대해서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보다는 설교에서 훨씬 더 상세하고 감동적으로 주장한다. 참고. CO 53, 126-135 (디모데전서 설교 2:1-2).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대한 칼빈의 설교는 두 편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온 인류를 위한 기도와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지도자들의 직무를 주제로 설교한 것이다.

31) CO 52, 268 (「디모데전서 주석」 2:3-4): “Sequitur deinde huius etiam secundi membri confirmatio: quia velit Deus omnes homines salvos facere... Nam apostolus simpliciter intelligit, nullum mundi vel populum, vel ordinem a salute excludi: quia omnibus sine exceptione evagelium proponi Deus velit. Est autem evangelii praedicatio vivifica. Merito itaque colligit, Deum omnes pariter salutis participatione dignari. At de hominum generibus, non singulis personis, sermo est. Nihil enim aliud intendit, quam principes et extraneos populos in hoc numero includere.” 참고. CO 52, 269-270 (「디모데전서 주석」 2:5); CO 53, 147-160, 159-170 (디모데 전서 설교 2:3-5, 2:5-6).

32) CO 53, 159-160 (디모데 전서 설교 2:5-6): “Il est vray que le monde de tout temps a tellement esté eslongné de Dieu, que tous peuples ont bien merité d'estre comme bannis de son royaume, n'ayans nulle accointance avec luy. Pour ceste cause nous voyons aussi que du temps de la Loy, il a choisi un certain peuple, et l'a recueilli sous sa conduite, ayant laissé le reste du monde en confusion. Mais combien que les hommes ayent esté ainsi separez de Dieu, si est-ce que de nature tous luy appartienent, et comme il les a tous creez, il faut aussi qu'il les gouverne, et qu'il les maintiene par sa vertu et bonté. Et ainsi quand nous voyons les hommes aller à perdition, combien qu'ils soyent incredules, et que Dieu ne leur ait point fait ceste grace de les conioindre à nous en la foy de l'Evangile, si est-ce que nous en devons avoir pitié, et devons tascher de les ramener au droit chemin entant qu'en nous est. Voilà pourquoy sainct Paul en ce passage allegue, Qu'il y a un Dieu: comme s'il disoit, D'autant que tous sont creez de Dieu, et qu'il les a sous sa main, il faut bien que nous ayone quelque fraternité ensemble. Il est vray que ceux qui ne sont point d'accord en foy avec nous, sont comme nos ennemis, et y a longue distance:[160] mais cependant l'ordre de nature nous monstre que nous ne les devons pas du tout reietter, et que nous devons mettre peine, entrant qu'en nous sera, de les reunir au corps, pource qu'ils sont comme membres retranchez. Et de fait, quand nous voyons les hommes ainsi dispersez, cela nous doit faire dresser les cheveux en la teste, comme si nous voyions un monstre. Car tous sont d'une mesme nature, l'image de Dieu est imprimee en eux, il y a comme un lien inseparable: et cependant nous voyons qu'ils sont comme divisez... Ainsi donc notons bien quand nous voyons les povres incredules estre ainsi escartez du chemin de salut, qu'il nous en faut avoir pitié, et mettre peine de les secourir, et leur tendre la main: et pour ce faire que nous revisions en memoire ce que nous est ici declaré par sainct Paul, c'est asçavoir, qu'il y a un Dieu.” 영어번역판 참고. John Calvin's Sermons on Timothy and Titus (Oxford: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3. Facsimile of 1579 edition), 161.

33) CO 53, 161-162 (디모데 전서 설교 2:5-6): “Maintenant en premier lieu notons que tous ceux qui ne tienent conte d'amener leurs prochains au chemin de salut, ceux qui ne se soucient d'amener aussi les povres incredules, et qui les laissent aller à perdition, monstrent bien qu'ils ne portent nul honneur à Dieu, et qu'ils diminuent la puissance[162] de son empire entant qu'en eux est, et qu'ils luy veulent assigner des bornes, afin qu'il ne domine point sur tout le monde: et d'avantage, qu'ils obscurcissent en partie la vertu de la mort et passion de nostre Seigneur Iesus Christ, qu'ils amoindrissent la dignité qui luy a esté donnee de Dieu son Pere:...” 영어번역판 참고. John Calvin's Sermons on Timothy and Titus, 162-163.

34) Rodophe Peter, ed., Supplementa Calviniana VI: Sermons sur les livres de Jérémie et des Lamentations (Neukirchen: Neukirchener Verslag, 1975), 157: “Comme quoy, quant Dieu appelleroit aujourdhuy les Turcs à sa congnoissance et qu'il les vouldroit tenir pour siens, et si après il y a une revolte, ilz seront à condampner.” 한글번역 참고. 박건택 역, 「칼뱅의 예레미야 설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322.

35) W. Stanford Reid, “Calvin's Geneva: A Missionary Centre,” 282-283. 1555년의 목록에 의하면 악상프로방스(Aix-Province), 님므(Nîmes), 몽뻴리어르(Montpellier), 뚤루즈(Toulouse), 네락(Nèrac), 보르도(Bordeaux), 라 로쉐여(La Rochelle), 낭뜨(Nantes), 깽(Caen), 디뻬(Dieppe), 뚜르(Tours), 오를레앙(Orléan) 이외에도 많은 다른 지역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목사회의 기록에 의하면 1555-1563년 사이에 파송된 선교사는 88명 정도인데 이 숫자는 일부이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리드는 지적한다. 그 이유는 1561년 한 해에 파송된 수가 1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의 요청에 응하여 151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562년에는 프랑스 인구 2천만 가운데 위그노의 숫자가 3백만이었고 이들의 교회는 2150개 정도였다고 추정된다. 참고. Robert M. Kingdon, Geneva and the Comming of the Wars of Religion in France 1555-1563 (Genève: Droz, 2007. 초판은 1956년에 Travaux d'Humanisme et Renaissance 시리즈 22권으로 출판됨), 79.

36) W. Stanford Reid, “Calvin's Geneva: A Missionary Centre,” 286. 제네바의 브라질 선교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제네바로부터 학생 신분으로 브라질에 파송되었다가 돌아온 후 프랑스 개혁교회의 목사가 된 쟝 드 레리의 다음 책이다. Jean de Léry, Histoire d'un voyage faict en la terre de Bresil autrement dite Amerique. 이 책은 1578년에 제네바에서 출판된 이후, 1580, 1585, 1599, 1611년에 각각 출판되었고 최근에는 1957년에 M. R. Mayeux가 편집하고 각주를 달아서 파리(Paris)에서 출판했다. 레리는 자신의 글에서 빌러가뇽의 편지를 받고 소식을 접한 제네바 교회가 참되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 민족의 나라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전한다. 참고. R. Pierce Beaver, “The Genevan Mission To Brazil,” 61.

37) 칼 스티븐스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에서 칼빈의 브라질 선교 목적이 “복음 설교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복원이라기보다는 복음 설교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확장”(the extension of the church as a gospel-preaching institution rather than the restoration of the church as a gospel-preaching institution)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제네바의 브라질 선교 활동에서조차도 교회 복원이라는 칼빈의 교회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봄으로써 칼빈의 직접적이고 일차적 선교가 불신자에게 복음을 나누어주는 것도 복음 전도를 위해 세계 방방곡곡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도 아니며, 그의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선교는 복음 설교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복원이라고 결론 내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참고. Carl D. Stevens, “Calvin's Corporate Idea of Mission,” 229-232.

38) 빌러가뇽의 이름은 니꼴라 듀랑(Nicolas Durand)이고 1510년경에 샹빠녀(Champagne)의 프로뱅(Provins)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 법률가는 1516년에 빌러가뇽이라는 성씨를 얻었다. 빌러갸농은 한 때 파리에서 칼빈과 함께 공부한 동문이었지만 군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칼빈과 다른 길을 갔다. 참고. R. Pierce Beaver, “The Genevan Mission To Brazil,” 58-59. 빌러갸농이 칼빈에게 보낸 1557년 3월 31일자 편지 (CO 16, 437-440. nr. 2612))는 있으나 칼빈의 답장은 소실되었다.

39) 리허르가 제네바에 보낸 1557년 3월 31일자 편지(CO 16, 433-434. nr. 2609)의 수신자는 칼빈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며 이 편지보다 하루 늦게 기록된 리허르와 샤르띠에르의 1557년 4월 1일자 편지 (CO 16, 440-443. nr. 2613. CO에는 기록연도가 1556년으로 잘못 인쇄되었다)는 그 수신자가 칼빈이다. 이 편지에 대한 칼빈의 답신은 소실되었다.

40) Carl D. Stevens, “Calvin's Corporate Idea of Mission,” 219-223.

41) 브라질 선교에 관한 내용은 다음 책에서 요약함. Henry Beets et al., Triumfen van het kruis, 76-79. 빌러가뇽이 인도하여 브라질 섬에 정착한 위그노들은 그 주변의 인디언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브라질 나무를 거래하는 프랑스 상인들이 그들에게 제시한 무역 조건이 아주 좋았고 따라서 인디언들은 새로운 이주민들을 포르투칼에 대항하는 동지들로 환영했기 때문이다. 참고. R. Pierce Beaver, “The Genevan Mission To Brazil,” 60.
42) 칼빈과 제네바의 브라질 선교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다음 참고. Carl D. Stevens, “Calvin's Corporate Idea of Mission,” 202-226.

43) OS I, 86 (= CO 1, 72.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44) OS IV, 7 (= CO 2, 397. 「기독교강요」 III.2.1.): “… fides …, per quam regni caelestis possessionem adeunt quicunque adoptati sunt a Deo in filios:...”

45) CO 48, 568 (「사도행전 주석」 28:21-23): “...,  necesse fuit rectam definitionem constitui, ut scirent spirituale esse regnum Dei: cuius initium esset vitae novitas, finis autem beata immortalitas et coelestis gloria.”

46) OS III, 418 (= CO 2, 325. 「기독교강요」 II.10.17.)

47) CO 5, 212 (= W. Zimmerli, ed., Psychopannychia, 79): “Quorum regnum est et gloria in regno dei glorioso esse et cum deo veluti regnare et in eo gloriari, denique divinae gloriae participes esse. Hoc quidem regnum, tametsi nondum advenisse dicitur, tamen aliqua ex parte spectare licet.”

48) CO 48, 4 (「사도행전 주석」 1:3): “Huius regni initium est regeneratio: finis ac complementum, beata immortalitas: medii progressus sunt in ampliore regenerationis profectu et augmento.” 참고. CO 48, 8 (「사도행전 주석」 1:3): “Falluntur etiam in eo, quod ad carnalem Israelem restringunt Christi regnum, quod ad ultimos usque mundi fines propagandum erat.” “또한 그들은[=제자들은] 세상의 최종 영역들까지 계속해서 전파되어야 했던 그리스도의 왕국을 육적인 이스라엘에 한정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49) 하나님 나라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CO 6, 97 (latin. OS II, 121sq = CO 6, 98)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칼빈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종말론적인 실제로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글 어디에서도 그 둘 사이에 어떤 긴장점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회 확장과 성장은 결코 긴장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은 단지 신자들이 두 국면의 통일성과 지속성 가운데 미래적인 영광에 참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두 국면 사이의 긴장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상적인 삶은 약속된 최후의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성장 과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완전함을 일부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토랜스의 주장에 반대함. T.F. Torrence, Kingdom and Church, 110 과 134:“It is this tense relation between the present and the future that gives Calvin his characteristic nuance in eschatology: ...”. 그리고 “This correlativity between Church and Kingdom, however, is to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eschatological tension and reserve involved in the overlap of the two ages, ...”

50) OS I, 109 (= CO 1, 93.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 regnum in hoc quoque mundo florere, etsi ex hoc mundo non est (1 Cor. 1. Ioan. 17. 18. Rom. 14), primum, quia spirituale rebusque spiritualibus constans, deinde, quia incorruptibile ac aeternum (Luc. 1. Dan. 7)”

51) CO 45, 197 (「마태복음 주석」 6:10): “..., initium regni Dei in nobis esse veteris hominis interitum et nostri abnegationem, ut renovemur in aliam vitam.”

52) OS IV, 353 (= CO 2, 667. 「기독교강요」 III.20.42.): “Haec enim regni Dei conditio est, ut dum nos subiicimus eius iustitiae, gloriae suae consortes reddat.”

53) CO 45, 197 (「마태복음 주석」 6:10): “Hoc [= Deum regere] autem fit partim verbi praedicatione, partim arcana virtute spiritus. Verbo suo gubernare vult homines, sed quia nuda vox, nisi accedat interior vis spiritus, usque in corda non penetrat, coniungi utrumque simul oportet, ut stabiliatur Dei regnum. Precamur ergo, ut suam Deus potestatem exserat tam verbo quam spiritu, ut se illi ultro totus mundus subiiciat.”

54) OS III, 476 (= CO 2, 364. 「기독교강요」 II.15.4.): “... regnum Dei intra nos est, ...”

55) CO 5, 212 (= W. Zimmerli, ed., Psychopannychia, 79): “Regnat igitur deus iam nunc in electis suis, quos agit spiritu suo.” 비교. OS I, 407 (= CO 22, 63. l.t. CO 5, 346): “Le regne de Dieu est de conduire et gouverner les siens par son Sainct Esperit, ...”

56) CO 45, 424 (「누가복음 주석」 17:20): “..., quando nihil aliud est nisi interior et spiritualis animae renovatio: … Intus quaerenda est, quam Deus promisit, ecclesiae instauratio: quia, electos suos in coelestem novitatem vivificans, suum in ipsis regnum erigit.”

57) CO 45, 303 (「마태복음 주석」 11:11): “Regnum coelorum et Dei pro novo ecclesiae statu capitur, …”

58) CO 45, 172 (「마태복음 주석」. 5:19): “Regnum coelorum pro ecclesiae renovatione accipitur, vel secundo ecclesiae statu, …”

59) OS I, 88 (= CO 1, 74.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 in uno Christo ... ipsum denique regnum coelorum invenimus, ...” 비교. CO 48, 177 (「사도행전 주석」 8:5): “Coniungit [Philippus] regnum Dei cum Christi nomine: sed quia per Christum consequimur hoc boni, ut in nobis Deus regnet, ac renovati in spiritualem iustitiam mundoque mortui, coelestem vitam agamus: ...”

60) CO 45, 595 (「마태복음 주석」 21:42): “... lapis sit [Christus] electus et pretiosus, qui ecclesiam Dei, regnum et templum sustineat.”

61) OS I, 63 (= CO 1, 51.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 quod ita illi inserti iam vitae aeterae quodammodo sumus participes, in regnum Dei per spem ingressi.”

62) OS I, 86 (= CO 1, 72.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 unam esse ecclesiam ac societatem et unum Dei populum ...”

63) CO 37, 270 (「이사야 주석」 54:2-3): “Nam verum ecclesiae aedificium non aliud est quam regnum Dei:...”

64) 참고. CO 49, 265 (「로마서 주석」 14:17): “Nam quae vel ad erigendum, vel ad conservandum Dei regnum pertinent, nullo modo sunt omittenda, quaecunque tandem sequantur offensiones. Quod si ob caritatem cedere licet usu ciborum, illaeso Dei honore, salvo Christi regno, pietate inoffensa: ferendi non sunt illi, qui ob eos ecclesiam conturbant.”; CO 48, 114 (「사도행전 주석」 5:34). 칼빈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용어를 교회의 의미로 사용할 때 대체로 교회의 불가시적이고 영적인 특성이 전제되거나 부각되는 경향이 강한 반면에 “교회”라는 용어는 교회의 가시적이고 지상적인 측면이 전제되거나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참고. OS III, 476 (= CO 2, 364. Inst. II.15.4.): “...: nam quia non terrenum [regnum Christi] est vel carnale, ..., sed spirituale, ad aeternam nos usque vitam attollit: ...: ...numquam destituet nos Rex noster quin necessitatibus nostris subveniat, donec militia nostra perfuncti vocemur ad triumphum; quia talis est regnandi ratio ut communicet nobiscum quicquid accepit a Patre.”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영적 나라로서의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칼빈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Y.-B. Choi, Pneumatologie en christologie (Leiden: J. J. Groen, 1996), 197-207.

65) CO 23, 347 (「창세기 주석」 25:19): “... coelesti virtute et gratia non modis naturalibus ecclesiam nasci et crescere.”

66) CO 31, 523 (「시편 주석」 52:20): “...: sed peculiaris est ecclesiae erectio, quae admirabili Dei virtute, in terris fundata, supra coelos attollitur.”

67) CO 40, 394 (「에스겔 주석」 16:61): “..., ut Iudaei qui erant primogeniti, alios sibi adiungerent in societatem, ut ita coalescerent in unum corpus et in unam ecclesiam. Sed quia Iudaei sua ingratitudine resecti fuerunt, ideo fit etiam mentio , quod scilicet gentes succedent in locum ingrati populi, ...”

68) OS IV, 35 (= CO 2, 418. 「기독교강요」 III.2.24.): “...: quia Christus non extra nos est, sed in nobis habitat: nec solum individuo societatis nexu nobis adhaeret, sed mirabili quadam communione in unum corpus nobiscum coalescit in dies magis ac magis, donec unum penitus nobiscum fiat.”

69) COE 16, 232 (= CO 51, 199. 「에베소서 주석」 4:12): “Nam illa est legitima nostra integritas et perfectio, si coalescamus omnes in unum Christi corpus.”

70) COE 16, 221 (= CO 51, 191. 「에베소서 주석」 4:5): “..., ita ut quodammodo in unum hominem coalescamus omnes.”

71) OS I, 489 (= CO 5, 416): “...: ut ita uno eius verbo ac spiritu in cor unum et animam unam coalescamus.”

72) COE 16, 236 (= CO 51, 202. 「에베소서 주석」 4:15): “Et tamen quia nondum adepti sumus plenum et iustum robur, proficiendum est usque ad mortem. Finem profectus demonstrat, ut solus Christus inter nos emineat:...”

73) CO 51, 585.

74) 이 단락의 내용 대부분은 다음 글에서 가져왔으며 약간 수정하고 편집하였음. 황대우, “칼빈의 교회론,” 한국칼빈학회 편, 「칼빈 신학 개요」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161-162; 황대우, 「칼빈과 개혁주의」 (서울: 깔뱅, 2009), 239-241. 하나님 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참고. Dae-Woo Hwang, “Het mystieke lichaam van Christus. De Ecclesiologie van Martin Bucer en Johannes Calvijn,” 276-282.

75) 황대우, “칼빈의 교회 직분론: 교회 건설을 위한 봉사와 질서,” 개혁주의학술원 편, 「칼빈과 교회」 (부산: 고신대학교 출판부, 2007), 173-193. (= 황대우, 「칼빈과 개혁주의」, 242-262.)

76) 칼빈을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칼빈의 이러한 사상을 곡해하여 마치 칼빈이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간상과 아예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거나 알아도 가능한 억제해야 하는 지극히 금욕적인 인간상을 제공하는 것처럼 비난하지만 이것은 칼빈의 수많은 글 가운데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조차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어도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구절만 뽑아내기 위해 편견을 가지고 읽었기 때문에 발생한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다. 칼빈의 글을 편견 없이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가 인생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는지 인정하게 될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자를 그 영광의 참여자로 부르시고 하나님 자신의 그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리신다는 사실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것은 분명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77) CO 45, 820 (「마태복음 주석」 28:16): “..., nempe quum Christus discipulis apparuit, eos simul creasse apostolos, qui aeternae vitae legationem perferrent in omnes mundi plagas.”

78) OS V, 45-46 (= CO 2, 779. 「기독교강요」 IV.3.4.): “Quae sit Apostolica functio ex mandata illo[46] constat, Ite, praedicate Evangelium omni creaturae [Marc. 16. c. 15]. Non attribuuntur illis certi fines: sed totus orbis assignatur redigendus in obedientiam Christi: ut Evangelium ubicunque gentium poterunt spargendo, regnum eius ubique erigant... Missi ergo sunt Apostoli qui orbem a defectione in veram Dei obedientiam reducerent: vel, si mavis, qui tanquam primi Ecclesiae architecti, eius fundamenta in toto mundo iacerent.”

79) OS V, 46 (= CO 2, 780. 「기독교강요」 IV.3.4.): “Quanquam non nego quin Apostolos postea quoque, vel saltem eorum loco Evangelistas interdum excitarit Deus, ut nostro tempore factum est. Talibus enim qui Ecclesiam ab Antichristi defectione reducerent, opus fuit.” 칼빈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루터를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도”(insignis Christi apostolus)로 간주한다. 참고. OS V, 46 (「기독교강요」 1543년 판); W. F. Dankbaar, “Het apostolaat bij Calvijn,” 190-191.

80) CO 45, 821 (「마태복음 주석」 28:16): “..., ut evagelium ubique prmulgando in fidei obedientiam gentes omnes adducant, deinde ut doctrinam suam obsignent ac sanciant evangelii signo.”

81) OS V, 47 (= CO 2, 780. 「기독교강요」 IV.3.5.): “Pastores tamen (excepto quod certas singuli Ecclesias sibi attributas regunt) eandem sustinent cum Apostolis provinciam.”

82) OS V, 44 (= CO 2, 778. 「기독교강요」 IV.3.2.): “Neque enim vel solis lumen ac calor, vel cibus ac potus tam sunt praesenti vitae fovendae ac sustinendae necessaria, quam est conservandae in terris Ecclesiae Apostolicum ac pastorale munus.”

83) OS V, 47 (= CO 2, 780. 「기독교강요」 IV.3.5.): “Tametsi enim ex rationem et etymo verbi rite Apostoli possunt vocari omnes ministri Ecclesiastici, quia a Domino omnes mittuntur, eiusque sunt nuntii:...”

84) CO 45, 822 (「마태복음 주석」 28:19): “... nullus apostolorum succesor esse potest, nisi qui suam in evangelii praedicatione operam Christo impendit. Denique quisquis doctoris partes non implet, perperam nomen apostoli mentitur: imo hoc Novi Testamenti sacerdotium est, spirituali verbi gladio homines in sacrificium Deo mactare.”

85) CO 45, 826 (「마태복음 주석」 28:20): “Notandum est praeterea, non solis apostolis hoc esse dictum: quia non in unam modo aetatem, sed usque ad finem mundi Dominus auxilium suum promittit... Sicuti hodie clara experientia docet, arcano modo Christum mirabiliter operari, ut innumeris obstaculis evangelium praevaleat.”

86) CO 50, 31-32 (「고린도후서 주석」 2:12): “Significat occasionem evagelii promovendi fuisse oblatam. Sicuti enim ostio aperto patet ingressus: ita progressus faciunt servi Domini, quum datur facultas. Clauditur ostium, ubi nulla spes fructus ostenditur. Sicuti autem ostio clauso novum iter potius ingredi convenit quam ultra tendendo, frustra nos inutili labore fatigare: ita ubi apparet aedificandi facultas, existimemus ostium, Dei manu nobis[32] apertum, ut illuc Christum inferamus: neque subtrahamus nostrum obsequium tam benignae Dei invitationi.”

87) W. F. Dankbaar, “Het apostolaat bij Calvijn,” 199: “Toch zeggen wij niet te veel als wij Calvijn een apostolische geest noemen, apostolischer dan zijn theologie in zeker opzicht is.”


참고도서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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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어
CO =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OS = Joannis Calvini Opera Selecta
COE = Ioannis Calvini Opera Exegetica
et al. = et alii[ -ae, -a] (그리고 다른 이들[것들] = 그 외에도 = 등등)
sq. = sequens (표시된 페이지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