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손봉호 교수(고신대 석좌교수)의 주장이다.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의 맥락에서 "상대주의문화 시대에도 기독교 절대성 주장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사이버공간에서 옮겨 온 것이다. <코람데오닷컴> (2015.11.10.)에 게재된 것으로 보인다. 손봉호 교수가 복음을 알고 있는 지 궁금해 진다.
한국기독교철학회 기독인문아카데미(CHA)가 주관하는2015년 추계기독인문아카데미가 “기독교 인문학, 한국교회를 진단하다”라는 주제로 백석대학교 대학원(방배동) 진리동에서 10월 12일, 19일, 26일 그리고 11월 2일 나흘 동안 열렸다. 김형석 명예교수(연세대)가 12일 “역사 안의 그리스도: 역사적으로 본 기독교의 위상”, 19일 “인간은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의했고, 손봉호 명예교수(서울대/ 고신대 석좌교수)는 26일 “문화상대주의와 기독교”, 11월 2일 “기독교와 윤리”라는 제목으로 각각 강의했다. 강의는 60여명의 수강생들이 등록하여 4회에 걸쳐 수강을 하고 수료증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래는 추계기독인문아카데미 마지막 날인 11월 2일 손봉호 교수의 강의를 취재한 것이다.
문명 혹은 문화는 무엇인가?
손봉호 교수는 문명과 문화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마지막 날 강의를 시작했다. 문명이란 말은 ‘civic’ 즉, 시민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쉽게 말해서 ‘촌놈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도시의 생활 즉 ‘civilization’이란 촌사람이 도시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손 교수에 의하면, 문화(culture)라는 말은 라틴어의 ‘colore’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이 말은 땅을 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농업이라는 ‘agriculture’라는 말도 자연적인 땅을 경작할 때 생기는 것이 농업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문화란 자연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자연에 인공적인 것을 가해야 문화가 된다는 의미이다.
문화인류학에서는 문명과 문화를 같이 쓰는 경우가 많다.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 Tylor , 1832-1817)는 그의 책 <primitive culture>에서 “culture or civilization” 이라고 말함으로 문화와 문명을 혼용하서 쓴다. 타일러의 경우 문화 혹은 문명은 정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이 획득한 모든 능력 혹은 모든 습관 등을 뜻한다.
문화를 정의할 때 세 가지 요소는 반듯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첫째로, 자연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자연에 인간의 손이 가해지고 인공적이 것이 가해질 때 문화적 활동이고 문화적 산물이 탄생한다. 예를 들어 양봉을 영어로 ‘bee culture’라고 하는데 벌을 인공적으로 키운다는 의미이다. 이런 경우 양봉업은 일종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문화란 ‘nature’와 대조되는 ‘culture’이다. 두 번째로 문화는 반드시 인간의 의식을 거쳐 나와야 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문화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 자기도 모르게 돌을 찼는데 그것이 굴러가서 멋진 조각물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화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문화는 반드시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이 만든 문화이다. 개인의 문화는 없다. 이순신 장군의 문화는 없어도 이 씨 가문의 문화는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은 한국문화가 만든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인의 피가 한국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인간 기억의 축적이다.
동물에게는 문화가 없고 인간에게만 문화가 있다. 그런데 최근 보고에 의하면, 새도 집을 만들고, 원숭이도 도구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제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짐승과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물도 짧은 기억력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력과 같은 긴 기억력은 없다. 짐승은 잊어버린다. 그러나 사람은 기억력이 있다. 여기에 최초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기억과 연관해서 생각했다. 기억과 주목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설명했고 과거와 미래의 중간이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라는 것은 사실 없다고 주장했다. “나의 영혼이여 네 속에서 내가 시간을 측정하노라”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Confessiones)에서 이렇게 말하며, “나는 시간이 뭔지 안다 그러나 누가 물으면 모른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시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리학자들도 모르고 철학자도 모르다. 칸트도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전제할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기억은 머리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기억은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서 의사소통된다. 설계자는 설계도로, 화가는 그림으로, 음악가는 작곡으로, 학자는 책으로 기억들을 내 보낸다. 이렇게 내보낸 기억은 인간 공공의 자산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어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냄으로 기억은 축적된다. 따라서 기억은 내가 만들어 놓고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화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중 써놓은 논문이 맘에 들지 않아 불에 던져 넣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겨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논문을 지도하던 부교수님을 학교 복도에서 만났는데 그 교수가 갑자기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너 혹시 요즈음 네가 쓰는 논문 불에 넣어 버리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깜짝 놀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냐고 물어보았다. 그 교수는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 교수의 말 때문에 용기를 내서 논문을 계속 쓰고 제출까지 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서 우연히 어떤 책을 보는데 누가 썼는지 괜찮게 썼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내가 쓴 논문이었다. 그만큼 내가 그 당시보다 학문적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문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결과를 만들고 그렇게 인간의 기억이 축적되어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문자가 있는 문화와 문자가 없는 문화의 차이는 엄청나다. 문자가 없는 문화는 인간의 기억이 부정확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피상적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지만 그것을 문자로 표현해 놓으면 비교적 정확하고 오래간다. 문자가 문화발전에 중요하다. 한국이 이정도 사는 것도 한국의 문자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동물은 다르다. 신라시대의 개나 2015년의 개나 똑같다. 문화가 없기 때문에 발전을 못한다. 인간의 기억은 축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위 발전이 가능하다. 발전이란 말도 본래 진보 즉 점점 좋아진다는 뜻이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달라졌다. 인간의 발전이란 뜻은 점점 좋아지지 않고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그저 축적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progress’라는 단어보다는 ‘development’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어거스틴이 프로그래스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과거의 고대 종교 철학의 순환적 역사관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관을 변증하기 위해서였다. 고대 종교 철학은 역사는 회전한다고 생각했다. 즉 순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순환적 역사관은 과거 지향적 역사관으로 황금시대(golden age)는 과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율곡도 주나라의 주공 이전의 세계는 치세(治世)였고 주공 이후의 세계는 난세(亂世)였다고 했다. 과거 지향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관만은 순환적이 아니라 직선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관은 직선처럼 앞으로 나가는 프로그래스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문화 혹은 문명이라는 의미에 대한 개략적인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런 문화가 소위 상대주의문화가 되어버린 원인을 살펴보자.
문화상대주의의 탄생
프랑스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인류의 문화를 세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첫 번째 단계는 신학적 단계이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설명하는 시대이다. 두 번째는 형이상학적 단계이다. 모든 것을 원칙, 원리, 본질이라는 의미로 설명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로 콩트가 활동하던 당시의 단계로 실증주의적 단계이다. 모든 것을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경험으로 설명하는 시대이다.
신학적 단계의 문화의 예를 그리스 로마 신화와 중국 신화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인간이 덕과 지식을 획득한 것은 인간 이상의 영역 즉 신의 영역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문화는 신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문화의 단계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비로소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형이상학적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을 이야기 할 때 이성은 신적인 것이었다. 온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이성이고 그 이성이 인간에게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은총이 문화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간의 문화는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연과 문화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서양문화우월주의
그들은 문화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처럼 문화 안에 어떤 잠재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콩 속에 가능성이 있어서 콩을 심으면 현실화 되어 콩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능력 속에 콩처럼 가능성으로 주어진 것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면서 콩처럼 자라서 문화를 만든다. 문화는 자연과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이 바로 역사이고 문화라고 주장했다. 이런 헤겔의 영향으로 역사는 발전의 형식과 패턴이 있어서 잠재된 가능성을 펼쳐나가는 것(unfolding)이라는 생각이 신학에까지 들어왔다. 이런 생각들이 문화우월주의(ethnocentrism)를 만들었다.
여기서 문화우월이라는 말은 정확히 ‘서양문화우월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장 먼저 표현한 것이 서양문화라는 생각이다. 앞장선 문화는 서양문화이고 그 다음이 동양 문화이고 그 다음이 아프리카 문화 그 다음은 원시문화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일등은 서양문화 이고 마지막은 원시문화이다. 타일러의 책 이름이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라는 것은 문화는 서양문화가 제일 앞서있다는 점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생각들에 대해 19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회의하기 시작한다.
절대적 이성에 대한 도전
이성에 대해서 도전하는 학자들 예를 들어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니체는 이성은 이 주인 저 주인을 섬기기 때문에 창녀라고 말했다. 우리가 오늘날 강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세계관 저런 세계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회의가 그 배경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 19세기부터 시작된 상대주의적 요소를 전제로 한 것이다. 자연과학에도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칸트는 자연이란 것도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에 인과론이 성립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관찰자라 할지라도 관찰대상에게 영향을 준다. 관찰할 때의 대상과 관찰 안 할때의 대상이 다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도 상대적이다. 자연과학에도 상대주의가 들어온 것이다.
독일의 기독교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제자 칼 뢰비트(Karl Loewith)는 절대적 기준을 가진 역사철학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서구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이런 경향들은 역사철학대신 문화현상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민속학’과 ‘문화인류학’같은 학문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상대주의적 요소가 커지다가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1858-1942)는 ‘이누위’족의 문화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이누위의 문화는 서양문화보다 뒤떨어진 문화가 아니라 다른 문화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해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서양문화보다 열등한 문화가 아니라 서양문화와는 다른 문화라는 주장은 이제 문화인류학자들의 공통적인 주장이 되었다.
아프리카 사람이 이해하는 과학과 서양의 과학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서양과학만 과학이 아니고 아프리카의 과학은 전혀 다른 종류의 과학이다.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같은 문화인류학자들은 모두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문화는 여러 가지 있기 때문에 어느 문화가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없어진 용어가 ‘원시문화’라는 말이다. 극단적인 경우 이런 상대주의자들은 1948년 유엔이 보편인권 선언문을 채택할 때 ‘보편인권’이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유엔이 보편인권을 채택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문화상대주의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는 영원불변한 신도 없고, 이성도 없고, 원칙도 없고, 법도 없다. 유일한 설명은 문화이다. 문화가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왜 아무개가 저런 주장을 하느냐? 그 사람의 배경이 되는 문화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의의 영역이 아니라 ‘정의의 영역들’이 되었고 ‘다원주의와 평등의 옹호’같은 책 제목들이 유행처럼 나타난다. 예를 들어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인도의 “사티”도 비판할 권리가 없다. 사티라는 관습은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같이 불에 태워서 죽이는 인도의 전통 관습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을 때 가능한 인도문화를 존중하려고 했으나 사티는 금지했다. 인도가 해방된 이후 간디도 사티 금지법을 유지했다.
그런데 문화상대주의에 빠진 인도의 여성학자들이 사티를 회복시키자고 주장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실제로 인도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인도정부가 승인하지 않아서 사티는 지금도 불법이다. 중부 아프리카에서는 여자 할례 문화가 있다. 여자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돌칼로 여자 성감대를 잘라버린다. 여자는 성적인 쾌감을 느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아프리카의 지성 여성들이 이 제도를 회복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정도로 상대주의가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독교의 상대주의의 탄생
기독교에도 이런 상대주의가 들어왔다. 구원이란 하나뿐인데 구원을 받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구원이란 정상은 하나이지만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구원받는 다고 하느냐?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이것이 기독교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반박한다. 구원이라고 할 때 구원이라는 인식 자체가 상대적이다. 구원이란 말은 동일할지라도 구원의 실제는 전혀 다르다. 불교에서의 구원은 무아지경의 세계로 나의 정체성이 없어져야하는 구원인데, 기독교의 구원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나의 정체성이 온전해 지는 가운데 받는 구원이다. 불교의 구원과 기독교의 구원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구원자체가 종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기독교 절대성 고백하며 윤리적 삶을 살자!
손 교수는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하며, 종교의 특징 자체가 ‘절대성’이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이어갔다. 자기의 절대성이 없어지면 종교는 없어진다. 만약에 상대주의를 인정한다면 얼마 안가서 종교는 없어질 것이다.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종교가 자신들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다른 종교도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처럼 개종하지 않는다고 처벌하고 죽이면 안 된다.
기독교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다분히 헬라 철학적 개념이다. 성경 곳곳을 보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당신의 뜻을 바꾸시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불변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확실성이 확보된다. 모든 종교가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윤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윤리는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해를 안 당해야 하는 것이 윤리의 기본이다. 따라서 윤리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이어야 한다. 내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가 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람도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다. 다른 사람을 속일 권리도 없고 해를 끼칠 권리도 없다. 윤리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정의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 정의가 파괴되면 약한 사람이 당한다. 정의가 상대화 되면 약한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에 의하면 나의 확신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인정할 수 없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종교적 상대주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윤리적 상대주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 윤리 문제는 양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따르면서 타종교와 공존하되 윤리까지 양보해서는 안 된다. 손봉호 교수는 상대주의의 시대이지만 윤리 상대주의는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확신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윤리적 삶을 살아가자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