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 (서울)
광장과 마녀사냥
1. 광장
광장(廣場, Street, Square)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넓은 장소이다. 도시(都市) 안의 공공(公共) 목적의 공지 곧 빈 터이다. 유럽 사회에서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광장이 도시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의 대중 광장은 인터넷, 스마트폰, 페이스북이다. 신문과 텔레비전도 광장에 속한다. 광장은 어떤 형태로든,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사소통 마당인 동시에 마녀사냥 터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광장은 성벽 밖에 있었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곳이었다(잠 7:12). 장로들이 회의를 하는 마당이었다. 수문 광장에는 사람들이 초막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느 8:16). 광장(거리)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창 19:2). 광장을 성 중앙에 두기도 했다(에 4:6).
신약성경에 나오는 아레오바고(Areopagys)는 광장 재판소였다. 종종 아레오바고 광장이라고 불렸다. 높은 지역에 공설 운동장과 같이 계단으로 좌석이 있고, 원고와 피고를 중앙에 세우고 재판관이 심문하고 판결하는 장소였다. 건물이 없었다. 재판이 없는 날에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토론과 대화를 한 것 같다. 바울이 붙잡혀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론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여러분을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습니다”(행 17:19)는 말로 복음전도를 시작했다.
장터도 광장이었다. 바울은 아테네 장터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예수 복음을 증거, 변론했다. 어떤 에피쿠르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쟁론을 했다. 바울이 전한 것은 저주스럽게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예수와 그 분의 부활이 가져온 희망, 구원의 복음이었다. 그는 장터에서 ‘말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복음전도를 하다가 아레오바고 법정 광장으로 끌려갔다.
대화와 토론 광장의 기원은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룸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의미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의사를 교환 또는 수렴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광장은 모여 대화를 주고받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소이다. 유럽 사회는 자신들의 도시에 광장을 필수 구성요소로 조성해왔다. 아고라와 포룸의 대화와 논의 형식을 지금까지도 불문율처럼 유지하고 있다.
2. 광화문 광장
서울에는 서울 광장, 청계천 광장, 광화문 광장이 있다. 민주국가라고 하는 대한민국에는 변변한 광장이 없었다. 고작 서울역 광장뿐이었다. ‘역전’ 마당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광장 없이 살아왔다. 광장이 필요한 사회구조에 살지 않은 탓으로 광장이라는 실체를 본 적이 없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에 나오는 ‘광장’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곳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 앞에 ‘여의도 광장’을 조성하면서 우리는 광장이 만남과 정치와 대중 행사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빌리 그래함 대회(1973)와 “엑스폴로 74”(1974) 행사가 그곳에서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광장이 점차 권력자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의 장소로 사용되자, 권력자는 여의도 광장을 폐쇄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전임 서울 시장은 서울 광장(시청 앞 광장)을 탄생시켰다. 정치와 축제의 경험이 공간적으로 현실화된 희귀하고도 소중한 대한민국의 아고라, 포룸이 등장했다. 광장은 인파로 가득 메였고, 광장의 ‘정치 공간’ 경험과 ‘축제 공간’ 경험을 했다. 이 경험들은 광장의 직접민주정치와 축제 기능에 대한 새삼스러운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드디어 대한민국에도 상징이나 추상이 아닌, 현실의 광장이 생겼다. 직접민주주의와 축제가 이루어지는 광장 공간은 잔디가 심기고, 보호되고, 관리되었다. 도심 녹지 공간이며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기도 하다.
광화문 광장은 수도 서울의 가장 중심 거리인 세종로에 있다. 식민지시대와 권위주의 정권시대에 형성된 직선적 위계 공간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시민 중심의 수평적인 이미지가 부여된 공간이다.
광화문 광장 (서울)
광화문 광장, 광화문대로(Street)는 권위주의의 성소가 아니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넓은 마당이다. 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눈높이의 수평화라는 상징성의 한 표현이다. ‘광화문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 옛 ‘육조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 ‘한국의 대표 광장’, ‘시민들이 참여하는 도시 문화 광장’이다. 정부와 시민들의 친화감과 공동체적 교감이 기대되는 장소이다.
광장은 ‘광장 공포증’을 가진 정치 지도자에게 반갑지 않은 곳이다. 최고 권좌에서 물러나라고 외치는, 무서운 함성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광장이라는 기념비적 장소에 대한 ‘광장 공포증’이라는 기형성은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을 억압하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광장의 목소리는 권력자가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파괴적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은 이 광장에서 자유와 책임의 성숙한 균형과 조화를 배우고 기억하고 전승한다.
3. 촛불시위
광장은 축복의 공간일 수도 있고 저주의 공간일 수도 있다. 대통령 ‘하야’를 외친 광화문 광장 촛불시위(2016.11.12; 19)는 특별하다. 시위를 긍정적으로 보면 광장은 복스런 장소이다. 광장은 엄청난 규모의 인구 밀집도가 뿜어내는 가공할 힘을 보여주는 곳이다. 시민이 오만한 권력을 응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광화문 광장은 알려진 바 100만 명을 수용하는 시위마당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시위들은 지방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러나 그 시위의 힘을 최종적으로 드러낸 곳은 항상 서울이었고, 광화문이었다. 광화문 광장은 집에서 뛰쳐나가 수십 분 안에 시위대에 가담할 수 있는 곳이다. 높은 밀집도와 가공할 인구 파워 그리고 현대 미디어 구조뿐만 아니라, 촛불집회를 24시간 온라인 생중계하는 기술 발전 덕분에 광장은 의사소통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로 바뀌었다. 시위의 동기를 시민들에게 일시에 알릴 수 있고, 순식간에 시위대를 조직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민주화 성취 면에서, 광장이 이바지하는 면은 탁월하지만 동시에 저주스런 장소일 수도 있다. 광장의 논리와 목소리가 사실과 불일치한 경우이다. 이단자 화형과 마녀사냥은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광장은 성난 민중의 불길한 목소리가 결집되는 곳, 마치 초침 소리를 알려주는 테러리스트의 시한폭탄과 같은 곳이다. 사회적 문제, 위기, 적,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재구성한다. 권력자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시위 장소이다. 별 것 아닌 것을 침소봉대하여 시민의 감정과 증오심을 극대화하고 원성을 불태우는 곳이기도 하다.
촛불시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은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질리게 만든다. 국민의 권리를 짓밟고 명예를 더럽힌다. 광장에 서면 처음 얼굴을 마주친 사람과도 깊은 동지애를 느낀다. 목이 터져라 같은 구호를 외친다. 정신을 확장시키고 양심을 약동시킨다. 광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을 하면 벅차오르는 우정과 시민의식을 공유한다. 시민이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역사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현장감으로 몸을 떨게 된다. 광장에서 최고 지도자의 비행을 규탄하며 도덕적 타락을 공격할 때는 더욱 신난다. 광장은 누구의 제지도 없이 으스대던 지도자를 멸시할 수 있는 자유의 마당으로 바뀐다. 근거 없는 우월감의 표출 장소로 변한 것이다. 정규재 선생이 한 말이다.
최순실시대의 유린된 상식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친구 아줌마에게 국사의 조언을 구했다. 동네 아줌마들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한 셈이다. 사퇴를 거부하는 대통령이 광화문 광장의 외침을 듣지 못할 리 없다. 광우병 시위 때인가, 어느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말했다. “도도한 촛불의 물결이 모든 걸 삼키고, 인왕산 그늘에 잠긴 청와대는 촛불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위태롭다. ... 지금 대한민국은 촛불이 강을 이루어 출렁이고 있다. 아니, 대한민국을 넘어 바다 저편 낯선 대륙에까지 번지고 있다. 도대체 이 거대한 출렁거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출렁이며 흘러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
광화문 광장 시위 (2016. 11. 12.)
4. 카타르시스
촛불시위는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y) 현상이다. 참가자들이 서로를 보고 감동한다.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 나간도 사람이 감동한다. 구경꾼이 서로 마주 보고 감동한다. 이 즈음에서 촛불시위는 본래의 숭고한 의도를 넘어선다. 시너지효과가 무한 팽창하면서 '공포'에서 출발하여 '일상의 억눌림'이라는 코드로 전환한다. 광장은 굴레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 해소 마당으로 바뀐다.
촛불시위는 억눌린 감정 해소의 마당이다. 광장에 이르면 거침없이 내달리는 역사의 바람을 실감하게 된다. 분수가 터지고 꽃이 피고 영웅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곳인 그곳에는 폭동과 반지성적인 피가 흐른다. 숭고한 감정과 무자비한 폭력은 광장에서 뒤엉킨다. 저주와 모욕, 비아냥거림과 깔봄, 폄하와 욕설, 난폭한 언어들이 난무하다.
광장은 역동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인 동시에 심성 깊이 내재한 어두운 일면을 드러내는 곳이다. 죄성을 둔갑시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국가의 법치 질서를 무너뜨리며, 사실(fact)에 눈멀게 한다. 작은 것을 침소봉대하고 거짓 감정을 불붙게 한다. 하나의 입증된 유죄를 가지고 모든 나머지 작은 행동들까지 유죄의 증거로 제시하고 나열한다. 집단 신념은 때로 무고를 정당화한다.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어려운 빈약한 증거가 사실처럼 각인시키고, 진짜 같은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 한다.2008년 광화문 광장에서 모인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는 광장의 광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 쇠고기 먹고 한 명도 광우병이 걸리지 않았는데, 미국 쇠고기 먹으면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는 거짓선동으로 서울 한복판을 수개월 간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5. 마녀사냥
광장은 집단의 열정을 종종 핏빛 충돌 에너지로 전환되면서 마녀사냥터, 이단자 화형장으로 바뀐다. 위대한 이단자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지롤라모 사보나롤나는 광장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광장에서 처형, 화형 당했다. 성경을 번역한 틴데일과 그에게 후원금을 준 런던의 상인들이 광장에서 희생을 당했다. 중국, 북한,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설치된 인민 재판대에 올랐다. 억울하게 죽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토마스 크랜머 대감독은 1556년 3월 21일 토요일 영국 옥스퍼드의 세인트메리교회당 광장에서 화형 당했다. 그날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빼꼭히 들어차 있었다. 3년 동안 옥살이를 한 크랜머가 끌려 내려와 기둥에 섰다. 그가 쇠사슬로 기둥에 묶이자 곧이어 주위에 쌓아올린 나무에 불길이 타올랐다. 이단자 크랜머는 오른손을 뻗어 불길에 집어넣으며 울부짖었다. “이 손이 죄를 지었소!” 크랜머는 몸이 불붙어 타버릴 때까지도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언론매체와 사회통신망(SNS)은 새로운 형태의 광장, 마녀사냥 터이다. 예수는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했다. 광장의 광기에 도취된 한국 언론은 무엇이라고 보도할까? “예수, 매춘부 옹호 발언 파장,”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지라고 사주하다”라고 보도하지 않을까? 예수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 분개하여 “독사의 자식들아”하고 꾸짖을 것을 “예수, 국민들에게 X새끼 발언 파문”이라는 제목을 붙일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 대한민국 언론은 무엇이라고 보도할까?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 하도록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라고 할 것 같다. 석가가 구도의 길을 떠나자, “국민의 고통 외면, 제 혼자만 살 길 찾아나서”라고 하고, 그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것을 “오만과 독선의 극치, 국민들이 끝장내야”라고 보도하지 않을까? 소크라데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면 한국 언론은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이라는 기사 제목을 뽑고,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면 “시저, 평소 주사위 도박광으로 밝혀져”라고 보도할 것이 분명하다.
윌리엄 클라크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고 했다. 광장의 마녀사냥꾼들은 “클라크, 소년들에게만 야망 가지라고, 심각한 성차별 발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데 대하여, “스피노자, 지구멸망 악담, 전 세계가 경악 분노할 발언”이라고 호도할 것이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라고 말한 데 대하여 “국민을 볼모로 하는 국가 정책에 국민은 피곤하다”고 보도할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현 정권, 신이 죽도록 뭐 했나?”라고 하고, 최영 장군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자 “최영, 돌을 황금으로 속여 팔아 거액 챙긴 의혹”이라고 보도할 것 같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통일이다”고 했다. 광장의 언론은 “김구, 통일에 눈이 멀어 민생과 경제 내팽개쳐”라고 보도하지 않을까?
광장은 모순을 연출하기도 한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율사 출신의 어느 정치가는 현직 대통령에게 “석고대죄를 하라”고 했다. 언론은 당장 권좌에서 ‘하야’를 하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통령의 “석고대죄”를 명시하거나 암시한 조문이 없다. 이 정치인은 과거에 대한민국이 유엔의 북한인권법을 결정에 찬성 반대 여부를 평양의 결재를 받아 결정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6. 기회
광화문 광장의 시위를 보면서, 동학란을 생각해 본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동학농민, 민중은 부패한 나라에 저항한 용감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는 자기 나라를 끝장나게 한 주역이었다. 동학란 참여자들은 10년이 채 넘기도 전에 나라를 없애자고 하는 이른바 '한일합방' 청원을 했다. 친일파 집단 일질회를 구성했다. 이 정치 권력의 등에 업힌 조선 왕 고종은 나라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 유익, 왕실을 유익을 위해 투쟁했다.
민주주의는 광장이 아니라 투표장에 있다. 민주주의는 법치질서에 있지 광장의 열기 속에 있지 않다. 광장은 독재자에 대한 칭송으로 열광하는 곳이기도 했다. 스탈린 광장과 평양 광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광장의 목소리가 커지면, 이상으로 커지면 민주주의나 헌정질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와 검찰이 광장의 사냥개 역할을 한다.
광장이 진리를 토론하고 합리적 결과를 도출하는 곳이 아니라 자유민주의주의와 헌법질서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곳이면 저주 마당으로 바뀐다. 광화문 광장의 목소리가 헌법질서를 따라 질서 있게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인민군 탱크가 가득하고,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결재를 받아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시대를 여는 장소로, 마녀사냥의 광장으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광장이 저주의 진앙지 기능을 발하는 셈이다.
사도 바울이 만난 아테네 장터 사람들과 거기서 나그네로 머무는 외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의 외침에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진실은 무엇인가? 주장의 근거는 확실한가? 천박한 상대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진실담론은 가치가 있는가? 인간에게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는가? 광장, 포럼에서 나눌 중요한 주제들이다.
광화문 광장이 덧없는 세상 복판에서 생명을 살리는 마당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대화와 토론을 거쳐 도출하는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결과를 맞닥뜨리고 겸허히 수용하는 곳, 주장과 팩트(fact)가 일치하는 곳, 마녀사냥터가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존중하고 질서를 소중히 여기는 시민정신의 요람이기를 희망한다. 언론 광장, 사회통신망, 법정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지식의 제한성을 자각하고, 국가의 대소사를 합리적으로, 헌정질서를 유지하며, 국법을 존중하는 태도로 해결해 나가면 진정 영예로운 광장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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