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신학을 어떻게 바꾸었나?/ 김병훈

by dschoiword posted Nov 0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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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신학을 어떻게 바꾸었나?

이신칭의와 성화의 은혜

 

김병훈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시작하는 말

 

앞으로 3년 후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다. 루터가 성안교회(Schloßkirche)의 정문에 천주교회의 면죄부 효력에 대한 반박을 담은 95개조 선언문을 붙인 해인 15171031일을 종교개혁의 기원으로 본다. 루터의 95개조 선언문은 천주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라기 보다는 주로 성직매매, 정실주의, 고리대금 등과 같은 성직자의 타락을 다루며, 특별히 면죄부 판매를 반박한다. 천주교회의 도덕적 타락 양상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개혁운동은 이후로 교회론과 구원론의 근본적인 변혁의 결과를 낳은 신학체계의 형성과 완성으로 나아갔다.

 

종교개혁의 신학의 특징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은혜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으로 흔히 요약이 된다. 이것은 실제로 종교개혁 신학이 천주교회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드러내준다. 먼저 오직 성경으로만!’은 신학과 신앙 인식의 최종적인 토대와 기반이 성경이어야 한다는 고백을 반영하며, ‘오직 그리스도로만!’은 구원을 위한 객관적 토대와 교회의 객관적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오직 은혜로만!’은 구원의 공로적 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뿐임을 말하며, ‘오직 믿음으로만!’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의 토대에 접붙임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천명한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들은 개신교회의 신학이 천주교회와 계시론, 교회론, 구원론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음을 잘 드러내준다. 지면의 제한과 편집진의 요청에 따라서 본 글에서는 구원론의 차이를, 교회론과 관련하여 제한적이나마, 특별히 개혁신학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칭의론과 성화론의 혼동과 구별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무엇보다도 개신교회의 칭의론과 천주교회의 의화론의 차이에서 뚜렷이 대비된다. 개신교회는 칭의론을 성화론과 구별하여 다룬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이러한 구별을 하지 않으며 의화론(義化論) 또는 성의론(聖義論)의 통합개념을 말한다. 즉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은혜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은혜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된 하나의 구원의 개념을 말할 뿐이다. 예를 들어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위한 트렌트종교회의(1545-63)1547년에 작성한 의롭게 함과 관련한 교령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종교개혁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죄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부으시고 또한 내재케 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배제한 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죄의 용서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혹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6차 속회, 법령 11)

 

그러면 천주교회에서는 왜 칭의론과 성화론의 구별을 저주를 말하면서까지 반대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천주교회의 구원론을 교회론의 구조와 함께 살펴봄으로 가능하다. 그것이 면밀하게 이해가 될 때, 칭의론과 성화론을 구별하는 종교개혁 신학의 구원론이 천주교회 신학이 어떻게 다른 지를 보여주는 핵심원리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구조적으로 교회론 안에 들어있다. 천주교회에 따르면 죄인이 구원을 받는 절차는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연옥에서의 정화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세례성사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가되는 원죄의 범책(reatus culpae)과 벌책(reatus poenae)을 면제 받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세례를 받은 신자는 대죄(peccata mortalia)를 범하며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무겁고 힘겨운 절차를 따라야 한다.

 

세례를 받은 이후에라도 인간은 죄악을 향한 성향 또는 욕정(concupiscentia)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죄를 범한다. 천주교회는 이 죄의 욕정 자체를 죄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초자연적 은사 혹은 부가적 은사(donum superadditum)를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함으로써, 죄의 욕정은 죄를 유발하는 적극적인 원인으로 작용을 한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죄를 범하게 되며, 그 범한 죄로 인한 형벌을 피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범한 죄의 형벌을 자신이 스스로 해결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죄로 인한 죄책과 그에 따른 영원한 형벌을 면케 하여 주셨으며, 또 스스로 범하는 죄의 죄책을 사하여 주셨다. 그러나 스스로 범하는 죄의 형벌은 죄를 범한 자가 직접 받아 해소하도록 하셨다. 자신이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스스로 해결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범한 죄의 범책은 면하여 주셨으나 그로 인한 벌책은 면하여 주시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면 죄의 영원한 형벌은 사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죄의 일시적 형벌은 여전히 남는다. 온갖 고난과 시련을 인내로 참아 견디며, 차분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 날이 올 때, 교인들은 이러한 죄의 일시적 형벌을 은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교인은 여러 가지의 고해성사에 따른 일들과 기도를 행할 뿐만 아니라 긍휼과 사랑의 일을 행함으로써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도록 애를 써야만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3)

 

천주교회에서 고해성사는 장차 닥쳐올 연옥의 고통을 현세에서 줄일 수 있는 은혜의 장치이다. 그리고 일단 연옥에 들어가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을 준다는 의미에서 연옥에서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또는 최소한 줄이려면, 천주교회 신자들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신앙의 수고를 다하여야 한다.

 

천주교회의 은혜, 선행 그리고 공

연옥에서 받아야 하는 죄의 형벌을 줄이는 유일한 방편은 공로를 쌓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공로를 쌓을 수가 있을까? 일찍이 서방교회는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행위구원론적인 공로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음을 부인하였다. 모든 인간은 원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자신의 힘으로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주어지지 않으면 결코 신앙의 열매를 맺어 자신의 허물의 벌책을 줄일 방도가 없다. 천주교회는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신학이 은혜를 우선하는 신학이므로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신학 못지않은 은혜의 종교라 자처한다.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정죄한 이후, 천주교회는 은혜가 없어도 공로를 세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영생을 얻기 위한 공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긍휼을 따라 주시기로 약속한 은혜에 의하여 가능해지며, 또한 선행을 행하며 공로를 쌓는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의 약속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누가 영생을 얻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주교회의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선행을 행하는 자들이다.(트렌트 종교회의, 6차 속회, 교령 16)

 

이처럼 천주교회는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으로 선행이 공로가 된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부어져도 이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간은 영적인 선에 반응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상하여 약화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의 의지에 자극을 주시어 일깨우는 은혜를 베푸시면 다시 활력을 얻어 은혜와 협력할 수 있게 되며 그렇게 협력하는 자는 공로를 이루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트렌트 종교회의, 6차 속회, 교령 5)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자유의지에 따라서 순종을 하거나 불순종하는 선택의 능력을 행사하며, 이것이 바로 그에게 칭찬이나 비난, 공로나 허물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가르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2)

 

천주교회의 은혜와 공로의 구별

 

천주교회에 따르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간은 의롭게 되기 위하여 일곱가지 절차에 따라 준비를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시작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소망 중에 바라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스스로 세례받기를 결심하고, 새 생명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Cf.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III, p. 515) 이러한 준비를 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도움을 주기 위해 개입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켜 조력은총(gratia actualis)이라 한다. 그렇게 회개를 시작하여 일곱 준비 단계를 잘 마치게 되면 거룩하게 변하여 의롭게 되는 과정, 곧 의화의 과정으로 들어갈 수가 있도록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이것을 가리켜 성화은총(gratia sanctificans) 또는 신화은총(gratia deificans)이라 한다. 그러나 아직 의화를 이룬 것은 아니다. 성화은총은 성령을 통해서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영혼 안에 불어 넣으시는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은총은 인간에게 상주하는 상존은총(gratia habitualis)이라 한다. 이 상존은총은 아직 의화 또는 성화를 이룬 것이 아니며, 단지 이를 위한 능력 혹은 가능태가 주어진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가능태가 현실적인 활동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다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데, 그것을 가리켜 또한 조력은총(gratia actualis)이라 한다. 조력은총이란 회심하기 이전이나 성화의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도움을 가리켜 말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6; Joseph Wawrykow, “Grace,” in The Theology of Thomas Aquinas, 193-99)

 

그러면 이러한 은총의 교리와 공로의 관계는 어떠한가? 의롭게 되기 위하여 인간이 먼저 행하여야 하는 일곱 단계의 준비 절차는 조력은총에 의하여 이룰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력은총은 은총을 받기 이전이라도 자신에게 있는 자연적 능력을 최선을 다해 발휘하여 자연적 선을 행하는(facere quod in se est) 자에게 주어진다. 이 때 조력은총은 선행은총(gratia praeveniens)의 성격을 갖는다. 이제 조력은총을 따라 상존은총을 받기 위하여 일곱 단계의 준비절차를 최선을 다해 실행하면 마침내 그에게 은혜가 주입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최선을 다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

 

천주교회는 여기서 공로를 말한다. 조력은총을 받아 회심 하기 이전에 나름의 자연적인 능력을 다해 자연적인 선을 행하는 경우,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그 일 자체로 인하여 공로를 인정받을 수는 없다. 또 조력은총을 받아 의롭게 되기 위한 일곱 단계의 준비 절차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에라도 그 일 자체로 인하여 공로를 인정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관대하심으로 인간이 최선을 다한 노력을 공로로 인정하여 주신다고 주장을 한다. 이를 가리켜 재량공로(meritum de congruo)라 일컫는다. 또한 상존은총, 곧 죄책과 죄의 오염에서 벗어나 내적으로 새로워지며 거룩한 성품을 이룰 수 있는 영혼의 성질을 받은 후에, 상존은총을 실행하여 초자연적인 선행을 행할 때, 이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조력은혜와 협력하여 상존은총을 실행한 것이므로, 진실한 의미에 합당한 공로, 곧 적정공로(meritum de condigno)를 이루게 된다고 주장을 한다. 천주교회는 이러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은총과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010)

 

지금까지 간략히 정리한 천주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신자는 스스로 범한 죄의 벌책에 따른 형벌을 줄이기 위하여 결국 이러한 적정공로를 쌓아야 한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이처럼 적정공로를 쌓는 것을 말하고, 공로가 부족하면 연옥에서 그 부족한 부분의 형벌을 연옥에서 받아 정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일시적 형벌인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친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구분과 적용: 범책과 벌책, 영원한 형벌과 일시적 형벌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잘못된 구분에 근거하여 성경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우선 범책과 벌책을 임의로 구분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한다. 개혁신학은 죄의 책임성을 과실의 책임성과 형벌의 책임성, 곧 범책과 벌책을 개념적으로는 구별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분리하지 않는다. 벌책은 범책에서 결과하는 것이므로, 범책의 해소는 벌책의 해소를 당연히 결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9, q. 3;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p. 244-46) 개혁교회는 최책과 형벌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죄책에 따른 형벌도 함께 면제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예를 들어 취리히의 개혁신학자 불링거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에서 의롭게 함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의롭게 함에 관련한 사도의 교훈에 따르면, ‘의롭게 함이란 죄를 사하는 것이며, 과실과 형벌을 면케 하는 것이며, 은혜 가운데 용납을 받아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는 로마서에서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8:33-34)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롭다하심은 정죄함과 대립되고 있다.(151)

 

그리스도의 속죄는 죄의 과실과 형벌을 완전히 면케 하시는 효력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은혜의 효력이 범책과 벌책을 포함하는 죄책 모두를 사하는 것이며 또한 형벌을 면제케 하시는 것이라는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오류에서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성경에서 이탈된 길로 빠져가 버린다.

 

 또한 천주교회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별하고 소죄의 경우는 일시적 형벌로 죄책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잘못을 범한다. 이와 달리 개혁신학은 어떤 죄가 다른 죄에 비하여 더 큰 죄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 죄들은 모두가 원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원한 형벌로 인한 비참함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임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원죄는 모든 이들에게 있는 것이며, 이로부터 비롯되는 다른 모든 죄들은, 그것들이 대죄라 불리든 소죄라 불리든, 혹은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을 거슬리는 죄라 불리든, 죄라 일컬어지며 참으로 또한 죄인 것을 인정한다. 아울러 죄들이 다 동일한 부패와 불신앙의 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며, 어떤 죄는 다른 것보다 더 무거운 것임을 인정한다.(2 스위스 신앙고백서 85. 6)

 

비록 죄의 중대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며 또 모든 죄들이 다 동일한 형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죄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죄라도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형벌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겠으나 형벌의 기간은 동일하게 영원하다. 개혁신학의 관점에 따르면, 중대한 죄는 무거운 형벌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고, 가벼운 죄는 좀 더 가벼운 형벌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Cf. Zacharias Ursinus,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q. 10, obj. 4) 성도의 죄는 어떠한 것이든지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John Calvin, Institutes II. viii. 58) 어떤 죄이든지 죄를 범한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며 모든 영적이며 일시적이며 영원한 비참함과 더불어 죽음에 처하게 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6) 따라서 개혁신학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대죄와 일시적 형벌로 속상을 치룰 수 있는 소죄로 나누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강하게 비판한다.

 

개혁교회의 선행의 교훈과 공로의 부인

 

개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원죄에 따른 영원한 형벌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범한 죄의 모든 범책과 벌책도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성경에 따라 올바르게 교훈한다. 즉 참된 신자에게는 형벌을 치러야 할 어떤 벌책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범한 죄로 인한 일시적 형벌을 감당하기 위하여 고해성사를 하고 그에 따라 보속을 행하며, 또한 공로를 세워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모든 범책과 벌책을 다 용서받은 자로 감사의 순종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신자의 선행적 의무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신자의 선행에 관한 올바른 교훈의 자리가 제시된다. 개혁신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말하지만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신앙의 열매인 선행을 필연적으로 행할 것이 요구된다. 개혁신학에서 교훈하는 의롭게 하는 믿음은 새 사람을 만들며,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며, 그 자유를 게으름과 나태에 빠지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한다.(벨직 신앙고백서 24) 어떤 경우에도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의롭게 하는 믿음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선행을 맺지 않은 채 홀로 나타나는 믿음이 결코 아닌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므로, 믿음은 의롭게 함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의롭다함을 받은 자에게 있어서 믿음은 단독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구원의 은혜들을 함께 수반하며, 결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2)

 

개혁신학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자가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임을 말함과 동시에 그러한 선행을 행하지 않고 악행을 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음을 교훈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질문 87: 그렇다면 감사하지도 않으며 회개의 삶을 살지도 않은 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까?

 

: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음란한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강도질하는 자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임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6:9-10; 5:19-21; 5:1-20; 요일 3:14)

 

이처럼 개혁신학은 선행을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영적 열매이며 증거라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결코 이러한 선행을 공로의 근거로 여기지 않는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교훈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일하심에 관하여 들을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이 참된 신앙이 그를 새 사람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한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신앙이 사람들을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게으르게 만든다든지, 반대로 바로 그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는 아무 것도 하려고 들지 않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멸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진실과는 먼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신앙이 사람에게 아무런 결실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되 그것으로 공로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울 수 있겠는가?)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가 기뻐하신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한 행위에 대하여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물을 은혜를 통하여 주신다.(24조 사람의 성화와 선행에 관하여)

 

개혁신학은 선행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의 공로성을 부인한다. 선행은 눅 17: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마땅한 신자의 의무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선행에 대한 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며 그 상을 받을 만한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도 공로가 아니며, 더구나 그것으로 자신의 벌책에 따른 일시적 형벌을 해소할 보속(satisfactio)이 될 수가 없다.

 

개혁신학의 선행의 은혜와 자유의지

 

개혁신학이 선행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의 공로성을 부인하는 까닭은 그 선행 자체의 실행적 가능성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앞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고백을 하듯이 새 사람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하는 은혜로부터 선행이 실행이 되는 것이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의 선행이 나중인 것이다.

 

일단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새로운 심령과 영의 창조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힘입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그의 말씀과 영에 의해 실제적으며 인격적인 성화를 이루어 간다. 즉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죄의 권세의 지배에서 비롯되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점 약화되며 극복이 된다. 그리고 점점 구원의 은혜 안에서 참된 거룩함을 실현하는 일에 신속하며 확고해진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1)

 

성령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게 되며,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인격적인 성화를 이루어 가는 참된 거룩함의 실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선행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행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일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은택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며 이러한 믿음의 열매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6)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나타나는 후행적인 것이며,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거나 죄로 인한 형벌을 면케 하는 공로가 아니다.

 

그런데 천주교회도 은혜가 먼저 주어져 인간의 자유의지를 일깨우고 자극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은혜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천주교회가 나름대로 은혜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즉 은혜가 미리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은혜를 거부할 것인가는 여전히 인간의 자유선택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조력은총이 주어져 상존은총을 활성화 하도록 돕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자유선택의 결정에 의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의화 또는 성화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주시어 구원하기로 한 사람에게 반드시 실행이 되어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즉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한다.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는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단순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자극하고 활성화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인간의 심령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문항) 또 다른 하나는 불가항력적이란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활동을 억압하여 은혜의 결과를 나타나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혁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가 없는 죄인에게 은혜를 주시어 그의 심령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적 선을 소망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은 채 그것의 활동을 통해 거룩한 선행의 열매를 반드시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며,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형벌을 보속해야 하는 공로란 불가능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의 복음의 교훈에 어긋난다.

 

맺는 말: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천주교회의 신학적 오류는 근본적으로 의롭게 함과 거룩하게 함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곡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의롭게 함이란 죄의 전가를 통해 죄를 사하시는 법정적인 선언과 같은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으며 우리에게 전가된 오직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가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로 받아주시는,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3문항)

 

그러나 천주교회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고백을 비판하면서, 의롭게 함이란 주입된 은혜, 곧 상존은총을 활성화하여 조력은총을 따라 거룩하고 새롭게 됨을 뜻한다고 주장을 한다.

 

성령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들에 부어지고 그것들에 내재하는 은혜와 사랑을 배제한 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으로, 또는 죄 사함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호의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트렌트종교회의, 6차 속회, 법령 11)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천주교회는 에베소서 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의 말씀과 로마서 5: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의 말씀을 제시한다(트렌트 종교회의, 6차 속회, 교령 8).

 

그러나 개혁교회는 이러한 구절들은 회심을 통해 성화를 이루어가는 변화의 상태를 교훈하는 증거구절이며, 의롭게 하시는 은혜에 관한 증거구절이 아니라고 반박을 한다. 의롭게 함의 은혜의 증거구절은 바울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다윗의 시편 32:1(cf.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후 5: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죄를 사람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 고후 5:21(“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의 말씀들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말씀들로 확정이 되고 있다고 칼빈은 힘써 강조한다(Acta Synodi Tridentinae cum Antidoto, CO 7:447) 의롭게 함이 의의 전가를 의미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구절들을 제시한다면 이외에도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Cf. 3:23-24; 5:19; 3:13; 1:7; 1:7 ).

 

천주교회의 그릇된 성경이해와 그것에 근거한 구원론의 왜곡을 바르게 잡는 종교개혁의 신학은 오직 성경의 교훈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러한 예들 가운데 우선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지금 잠깐 소개한 의롭게 함과 거룩하게 함의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살피는 일이다.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원죄로 인한 인간의 부패와 그러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능력, 원죄와 자범죄의 범책과 벌책의 구분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적용에 대한 제한,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연옥이라는 교회론과 종말론 등 전반에 걸쳐서 왜곡된 신학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신학, 특히 개혁신학은 이러한 오류를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교정을 하고,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드러내는 복잡하고도 힘겨운 일을 탁월하게 이루어냈다. 그 결과는 모든 오류를 식별하고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바른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는 종교개혁의 구호로 특징이 모아졌다. 그것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은혜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이다.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거짓된 교리적 오류를 거두어 내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임을 확신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의롭게 함과 거룩하게 하는 구원의 역사가 실행이 되는 것임을 천명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방편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공로가 아니며 오직 믿음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 특별히 개혁신학은 이 모든 선한 일과 관련하여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하며 선언한다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