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 파면 관련 주장과 자료들

by dschoiword posted Jul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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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파면 관련 주장과 자료들


(뉴스파워에서 옮겨옴)


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장이자 책향기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장영학 목사(예장합동, 동평양노회)는 총신대 신대원 교회사 교수 박용규 박사가 주기철 목사의 면직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 장영학 목사     © 뉴스파워

 

 장 목사는 주기철 목사는 19367월 마산문창교회를 사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그후 19389월 평양창동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각 노회에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했다. 노회는 개교회 목사들에게 신사참배 지시공문을 발송하게 된다.”면서 당시 주기철목사는 강력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하게 되므로 일제 경찰을 총회 전 농우회 사건 연루로 19388월에 의성경찰서에 수감되어 대구교도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19392월에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8월에 다시 평양형무소로 수감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1939년에 10월에 모인 제37회 평양노회에서 노회장 나귀환은 사임하고 최지하목 사가 노회장이 되어 주기철 목사의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처음에는 감옥을 찾아가 사직을 권고했지만 거부하자 1219일 제1차 임시노회를 남문외교회에서 개최하여 총회 결의 위반과 총회장 경고문을 무시한 괘씸죄를 적용해 주기철 목사를 면직을 결의하게 된다.”며 주기철 목사는 사직이 아닌 면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이때 1220일자 조선일보는 권고사직을 결의하였다고 보도하고, 매일신보는 임시노회에 참석한 형사들의 명단을 공개했다.”면서 하지만 1940124일 창간한 장로회보 창간호에서 27회총회의 결의에 위반하기에 면직을 결의하였다고 보도 했다.”고 는 내용을 들어 면직을 주장했다.

 

장 목사는 박용규 교수가 주기철 목사 면직사실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총신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박용규 교수는 2016617일 오후2시 동산교회수지수양관에서 열린 동평양노회 제178회 제1차 임시노회에서 주기철 목사 복직감사 학술세미나에서 주기철 목사 면직에 대한 1차 자료를 면밀히 검토할 결과 면직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주문했다.”면서 이때 박 교수는 모든 1차 자료의 믿을만한 것은 평양노회록이라고 주장하면서 제시한 근거는 2003년에 발행한 동평양노회사 부록인 역대노회별 촬요의 제37회 제1차 촬요(19391219) 를 근거로 들었다.”고 지적했다.

 

이 발표 후 기독신문과 기독교 언론은 일제히 새로운 사실로 보도하고 총회 역사위원회가 준비한 주기철 목사 복직 감사예배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되었다.”면서 박 교수의 세미나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1차 사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2003년 발행한 동평양노회사의 내용은 노회록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발행한 노회 촬요도 아니다. 집필자인 김요나 목사의 참고문헌이나 주석에 노회록은 참고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서 그러나 부록을 만들면서 기록한 촬요의 내용은 당시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을 토대로 임의로 만들어진 촬요라는 것이다.

 

다음은 박 교수가 제시했던 자료다.

 

평양노회 37회 제1차 임시노회 촬요

일시:19391219

장소:남문밖교회

안건결의

입석자:평양서 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 고등계 형사대,

전 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淸水川경부

1. 주기철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 헌법 권징주례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의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1. 이인식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다

 

조선일보(19391220일자 내용)

주목사의 사직권고

노회에서 총회결의와 총회장 경고 무시이유로

평양산정현교회 문제의 진전

평양 산정현장로교회 신사참배와 주기철목사의 처치문제는 오랫동안 교회와 경찰당국 사이에 신중한 대책이 간구되고 있었는데 십구일 평양노회의 결의로서 마침내 주목사를 권고 사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주기철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서 교회 헌법 권징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고 이인식목사를 이 교회 당회장으로 택한다는 결의를 통과하였다.”

 

매일신보(19391220일 내용)

문제의 주목사는 사면코 신사참배를 실현키로

-평양산정현교회 사건 단락

평양부 게리에 위치한 산정현교회의 신사불참배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장로교회에서는 드디어 19일 오후 한시부터 남문밖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고 각교회의 목사 장로등 교역자는 물로 서양인의 편하설목사도 참석한 가운데 토의하는 문제가 중대한것이니 만큼 평양서 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 고등계 형사대, 전 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淸水川경부가 참석하여 삼엄한 경계 가운데 노회장 최지화목사로부터 신사불참배의 전후 경과를 보고하고 현재 평양경찰서 유치중인 주기철 목사를 면회하고 조선장로교총회로부터 신사참배결의한 것과 최근 신사에 참배토록 발송하여온 통첩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나 주목사도 끝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에 보고하자 서양인의 편목사가 졸지에 일어나서 장로교 헌법 조문을 들어 양심을 구속 운사의 불온한 말을 하다가 입석한 경관에게 발언을 증지당하고 퇴장을 당한 다음 다시 의사를 속행하여 문제중의 주목사를 사면시키고 앞으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판란만한 산정현교회 문제는 이로서 해결되었다.

 

이에 대해 장 목사는 박용규 교수는 세미나 원고 내용 중에 지금까지 주기철 목사의 전기는 일차 자료가 아닌 개인들의 구전으로 듣고 만들어진 박용규 목사 의 저 높은곳을 향하여가 주기철목사의 파면을 결의하였으며 그후 김충남목사의 진달레 필 때 가버린 사람’, 1985년 민경배 교수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1992년의 김요나 목사의 일사각오’ , 그리고 2003년 이덕주 교수의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연구’, 2007년 김인수 교수의 소양 주기철목사등이 차례로 주기철 목사의 면직을 기술했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 교수는 ‘2006[평양산정현교회] 를 저술할 때도 노회록을 참고하였으나,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이번에 노회록을 살핀 결과 면직사실이 아님을 발견하였다라고 하지만 그것도 2003년에 발행된 김요나 목사의 동평양노회사를 참고하였다.”면서 결국 박용규교수는 동평양노회사를 평양노회록으로 착각하여 논지를 펼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사진은 지난 6월 23일 평안교회에서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의 전 주기철 목사 면직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장영학 목사. 이날 평양노ghl는 주기철 목사 복직을 결의했다.     © 뉴스파워


 "주기철목사는 면직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거듭 주장한 장 목사는 주기철목사의 면직은 당시의 현장의 증인들과 당시의 자료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아직도 국내에 1938년 이후 손으로 쓴 평양노회록이나 인쇄된 평양노회록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장로회보 등 당시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주 목사의 면직을 주장했다. 다음은 장 목사가 제시한 1940124<장로회보> 창간호 내용이다.

 

장로회보(1940124일 창간호 내용)

교역자로 국가의식 불응은

총회 결의 정신 위반-평양노회 수 면직 결의

"평양노회 구내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씨가 신사참배에 찬응치 아니함은 소화13(1938)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제27회 총회 개회 모두에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국민된 의무상 의당히 참배하기로 함"하고 결의한 정신에 위반이므로 작년말 소화141219일 평양노회 임시노회를 남문외예배당에서 회집하고 노회장 최지화 목사의 사회하에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

 

장 목사는 장로회보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지도자들이 독립된 신문의 필요성을 느껴서 1940124일 창간한 주간 신문으로 오문환이 제작자이며 총회 사무국에서 만들었으며 총회시에 총회 산하 모든 모든 총대들은 의무적으로 구독하도록 결의하기도 했다.”면서 일제에 의해 총교파적인 신문을 만들라는 지시에 의해 1942429일 통권 118호로 강제 폐간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신문은 주기철 목사의 평양노회 면직 사실을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당시 신문을 제작하는 총회 임원들과 평양노회 사람들의 활동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노회록 전체는 보도하지 않았지만 노회 촬요 형태로 보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 목사는 또 그후 총회는 1940<야소교장로회연감>을 발행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역대졸업생명부에서 19(19251222일 졸업) 졸업생 명부에 주기철을 삭제하고 졸업생을 30명으로 기록하였다. (원래 31명 졸업)”면서 그리고 <장신대학교 70년사> 졸업생 명단에서 19회에 주기철 목사의 명단이 없으며 장신대학교 동문명부에도 19회에 주기철 이름이 없다. 이것은 바로 주기철을 면직한 평양노회의 결의를 총회가 인정하고 그들이 세운 평양신학교(1939년 개교)의 졸업명부와 학적부의 주기철을 삭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 목사는 특히 박용규 교수가 주장하는 주기철 목사의 전기는 박용규 목사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 최초가 아니라 김인서의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연구가 먼저라고 말했다,

 

장 목사는 그는 해방 이후 주기철 목사의 전기를 내려고 원고를 정리했지만 6.25전쟁으로 미루어졌고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가 발행하는 신앙생활 제1010(성탄호,1951121일 발행)주기철 목사 순교기를 수록했고, 그 이전 7,8호에는 주기철목사의 설교기’ 9호에는 주기철 목사 설교 일사각오를 실었다. ”면서 그리고 7년후 1958년에 발행한 <주기철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을 발행했다. 내용 중 제7순교의 제목을 보면 본장은 필자가 본 사실이라고 했으며 제7‘2. 주 목사 파면의 내용을 기록했다.”는 근거를 들어 주 목사의 면직을 주장했다.

 

다음은 장 목사가 제시한 자료다.

 

평양노회는 남문외교회에서 소집하고

1. 주기철 목사는 파면함

2. 편하설선교사가 산정현교회 강단 서는 것을 금지함

3. 모 목사를 산정재교회의 당회장으로 택함

4. 산정재교회 수습위원 장운경목사, 박응률목사, 이인식목사 등 7인을 택함

주기철목사 파면을 결정할 때 우성옥 목사가 아니오 하고 소리치고 검속 당하였고 편하설선교사 불법노회요 소리쳤다. 산정재 박정익장로 이것은 노회 아니오 하고 퇴장하였다.“

 

장 목사는 그 이전 평양노회 제3334회 노회장은 박응률 목사이고 부노회장이 주기철목사였으나 193810월에 열리기 전 8월에 의성농우회 사건으로 의성경찰서로 검속되면서 노회를 참석하지 못하였고 나귀환목사가 노회장이 되었으며 193910월에 열린 제37회 노회에서 최지화 목사가 노회장이 되어 주기철목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감옥에 가서 사면 권고를 했지만 거부하자 19391219일 제1차 임시노회를 열어서 신사참배에 대한 총회 결의 위반과 총회장 경고를 무시한 것을 당시 총회헌법 권징조례 19조에 의해 주기철의 목사직은 면직 결의하고 평양노회에서 파면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헌법 권징조례 19조를 제시했다.(1934년판 헌법, 161-162쪽 참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징조례

4장 각항 재판에 관한 보통 규례

19: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 직할에 속하고 일반 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 직할에 속하나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치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이 있느니라.”

 

장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면직결의는 자동적으로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은 파면으로 정리하면서 주목사의 가족들을 사택에서 쫓아내고 평양신학교 교장 사택으로 사용했다.”면서 이 일에 공을 인정한 것인지 최지화 목사는 194111월에 평양창동교회에서 열린 제30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된다.”고 밝혔다.

 

장 목사는 주기철 목사가 19391219일 목사직을 면직한 지 77년이 지났다. 이는 순교하기 5년 전이라면서 해방 이후 평양노회 회원들이 월남하여 국내에서 목회를 하고 남한에서 평양노회를 재건할 당시 살아있던 시대인 1950년대에 주기철목사의 면직과 파면에 대한 기록을 담은 전기를 발행하였을 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특히 산정현교회가 남한에 재건하여 역사적 맥을 잇고 있으며 교회 연혁에 주기철 목사 평양노회 면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면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주장이 나왔기에 이는 사료를 잘못 보고 새로운 사실로 주장하여 한국교회에 혼란을 가져온 일이기에 총회 역사위원회와 평양노회의 요청을 받고 당시 자료와 정황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인 사료들을 살펴서 주기철 목사의 면직 사실을 확인 발표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장 목사는 예장통합총회 평양노회는 2006417일 제164회 정기노회에서 복직결의와 참회예배를 드렸다.”면서 예장합동총회의 평양노회와 그 역사를 함께하는 동평양노회, 서평양노회, 남평양노회, 평양제일노회는 제100회 총회가 결의한대로 노회 중 치리회를 열어 주기철 목사 복직을 결의하고 참회의 시간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 7일 박용규 교수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징계가 목사면직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된다며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첫째, 19391210일 평양노회 임시회 노회록에 면직이라고 기록되지 않았다. 둘째, 당시 일간지들이 면직이라고 보도하지 않았다. 셋째, 번하이젤 선교사 편지도 모두 입수해서 보았지만 면직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넷째, 심지어 안용준, 김인서도 면직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섯째, 38회 평양노회(1940319-22) 노회록에도 면직기록은 없다.” 등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최근 일고 있는 주기철 목사님 복직 복권과 관련해서는 '복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로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면직이라는 말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면서 “‘파면이라는 말은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말이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켰다는 의미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고 밝혔다.

 

다음은 장영학 목사 목사가 쓴 주기철목사의 면직에 대한 자료 연구전문

 

  주기철목사의 면직에 대한 자료 연구 

                                                                                              

주기철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순교자이다 주목
사는 한국교회의 가장 암흑기인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21일 옥사 및 순교를 하였다.


1. 주기철목사의 생애와 사역
주기철 목사는 1897년 경남 웅천에서 태어나 1910년 믿음 생활을 시작하였
으며 1916년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안갑수와 결혼하였으며 1920
년 김익두목사의 부흥회에 은혜를 받고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며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12월22일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였
다. (졸업생 31명)
1925년 12월29일-31일까지 열린 제20회 경남노회 기간 둘째 날인 30일에
부산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강도사 인허와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았다.1) 초량교회 담임한지 6년후 1931년 7월 14일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동
해 7월28일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마산문창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 허락을
받고 부임하게 된다. 이때 주기철목사는 경남노회 부노회장이었다.
1932년에 열린 제3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일하였고 1933년
제31회 경남노회에서 다시 노회장에 재선이 되었다. 이때 1932년 9월 9일-16
일 평양창동교회에서 열린 제21회 총회와 1933년 9월 8일-15일 평북선천읍
남교회에서 열리는 제22회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였으며 21회에서는 재정부
에서 22회에서는 헌의부로 상비부 활동도 하였다.
주기철목사가 마산문창교회 시절 사모인 안갑수가 1934년 5월16일 와병으
로 소천하였으며 1935년 11월 오정모선생과 재혼하였다. 그후 1936년 7월 마
산문창교회를 사임하고2)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그후 1938년 9월
평양창동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각노
회에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하였으며 노회는 개교회 목사들에게 신사참배

------------------------------------------------------------------

1) 제20회 회의록 참고
2) 김기현, 문창교회100년사, 2001, 한국장로교출판사, 참고
경남노회 제37회(1936년 5월) 제38회(1936년 12월) 노회록노회록 참고

                                               

                                              -1-

 

지시공문을 발송하게 된다. 당시 주기철목사는 강력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하
게 되므로 일제 경찰을 총회전 농우회 사건 연루로 1938년 8월에 의성경찰
서에 수감되어 대구교도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1939년 2월에 평양으
로 돌아왔으나 8월에 다시 평양형무소로 수감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
지 못하게 하였으며 1939년에 10월에 모인 제37회 평양노회에서 노회장 나
귀환은 사임하고 최지하목사가 노회장이 되어 주기철목사의 문제를 처리하
게 된다. 처음에는 감옥을 찾아가 사직을 권고했지만 거부하자 12월19일 제1
차 임시노회를 남문외교회에서 개최하여 총회 결의 위반과 총회장 경고문을
무시한 괘심죄를 적용하여 주기철 목사를 면직를 결의하게 된다.
이때 12월20일자 조선일보는 권고사직을 결의하였다고 보도하고 매일신보는
임시노회에 참석한 형사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하지만 1940년 1월24일 창간
한 장로회보 창간호에서 “제27회총회의 결의에 위반하기에 면직을 결의하였
다” 고 보도 했다.


2. 주기철목사 “면직 결의한 적 없다” 는 잘못된 주장.
총신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박용규교수는 2016년 6월17일 오후2시 동산교회
수지수양관에서 열린 동평양노회 제178회 제1차 임시노회에서 “주기철목사
복직감사 학술세미나”에서 주기철목사 면직에 대한 1차 자료를 면밀히 검토
할 결과 면직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주문했다.3)
이때 박교수는 모든 1차 자료의 믿을만한 것은 평양노회록이라고 주장하면
서 제시한 근거는 2003년에 발행한 동평양노회사 부록인 ‘역대노회별 촬요’
의 제37회 제1차 촬요(1939년 12월19일) 를 근거로 들었다.4)
이 발표 후 기독신문과 기독교 언론은 일제히 새로운 사실로 보도하고 총회
역사위원회가 준비한 주기철목사 복직 감사예배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되었다.
박용규 교수의 세미나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1차 사료를 제대로 이해하
지 못한 결과를 발견하였다. 2003년 발행한 동평양노회사의 내용은 노회록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발행한 노회 촬요도 아니다. 집필자인 김 요나 목사의 참
고문헌이나 주석에 노회록은 참고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부록을 만
들면서 기록한 촬요의 내용은 당시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을 토
대로 임의로 만들어진 촬요이다.

------------------------------------------------------------------

3) , 주기철목사복직감사학술세미나 자료집 41쪽(2016년 6월 17일)
4) 김 요나, 동평양노회사, 2003년 발행, 1244쪽 참고

                                             

                                               -2-

 

평양노회 37회 제1차 임시노회 촬요
일시:1939년 12월19일
장소:남문밖교회
안건결의
입석자:평양서 松本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 고등계 형사대,
전 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淸水川경부
1. 주기철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 헌법 권징주례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의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1. 이인식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다


조선일보(1939년 12월20일자 내용)
주목사의 사직권고
노회에서 총회결의와 총회장 경고 무시이유로
평양산정현교회 문제의 진전
“평양 산정현장로교회 신사참배와 주기철목사의 처치문제는 오랫동안 교회
와 경찰당국 사이에 신중한 대책이 간구되고 있었는데 십구일 평양노회의
결의로서 마침내 주목사를 권고 사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주기철목사는 총
회의 신사참배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서 교회 헌법
권징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고 이인식목사를
이 교회 당회장으로 택한다는 결의를 통과하였다.”

 

매일신보(1939년 12월20일 내용)
문제의 주목사는 사면코 신사참배를 실현키로
-평양산정현교회 사건 단락
“평양부 게리에 위치한 산정현교회의 신사불참배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장로교회에서는 드디어 19일 오후 한시부터 남문밖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
고 각교회의 목사 장로등 교역자는 물로 서양인의 편하설목사도 참석한 가
운데 토의하는 문제가 중대한것이니 만큼 평양서 松本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 고등계 형사대, 전 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淸水川경부가
참석하여 삼엄한 경계 가운데 노회장 최지화목사로부터 신사불참배의 전후
경과를 보고하고 현재 평양경찰서 유치중인 주기철 목사를 면회하고 조선장
로교총회로부터 신사참배결의한 것과 최근 신사에 참배토록 발송하여온 통
첩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나 주목사도 끝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3-


에 보고하자 서양인의 편목사가 졸지에 일어나서 장로교 헌법 조문을 들어
양심을 구속 운사의 불온한 말을 하다가 입석한 경관에게 발언을 증지당하
고 퇴장을 당한 다음 다시 의사를 속행하여 문제중의 주목사를 사면시키고
앞으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리하여 판란만한 산정현교회 문제는 이로서 해결되었다”.


박용규 교수는 세미나 원고 내용 중에5) 지금까지 주기철목사의 전기는 일차
자료가 아닌 개인들의 구전으로 듣고 만들어진 박용규목사6) 의 “저 높은곳
을 향하여” 가 주기철목사의 파면을 결의하였으며 그후 김충남목사의 “진달
레 필 때 가버린 사람” 1985년 민경배교수의 “순교자 주기철목사”, 1992년의
김 요나목사의 “일사각오” , 그리고 2003년 이덕주 교수의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연구” 2007년 김인수교수의 “소양 주기철목사” 등이 차례로 주기
철 목사의 면직을 기술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박교수는 “2006년 “평양산정현교회” 를 저술할 때도 노회록을 참고
하였으나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이번에 노회록 살핀 결과 면직사
실이 아님을 발견하였다“ 라고 하지만 그것도 2003년에 발행된 김 요나 목
사의 동평양노회사를 참고하였다.7)
결국 박용규교수는 동평양노회사를 평양노회록으로 착각하여 논지를 펼친
것이다.

 

3. 주기철목사는 면직은 역사적 사실이다.
주기철목사의 면직은 당시의 현장의 증인들과 당시의 자료들이 사실을 확
인하고 있다. 아직도 국내에 1938년 이후 손으로 쓴 평양노회록이나 인쇄된
평양노회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를 보면

 

장로회보(1940년 1월24일 창간호 내용)
교역자로 국가의식 불응은
총회 결의 정신 위반-평양노회 수 면직 결의
"평양노회 구내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씨가 신사참배에 찬응치 아니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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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책자 43쪽(박용규 교수 원고 내용중)
6) 박용규목사는 총신 58회로 졸업하고 1969년 성남시 중동에 성남제일교회 개척하여 담임하였으며 주기철목사를 비롯한 한국교회인물과 한국교회사의 연구자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박용규목사는 1968년에 주기철목사 전기 “저높은 곳을 향하여” 저술 하여 영화로 만들어져서 일반 극장에 개봉하였다. 그는 1968년에 주기철목사의 전기 “피를 바치련다”를 간행하였고 1977년에 “저높은곳을향하여” 제목을 바꾸어 증보판을 내었으며 1982년판이 영화의 원착이 되었다.
7) 박용규, 평양산정현교회, 2006, 생명의말씀사, 309쪽 참고

 

                                              -4-

 

소화13년(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제27회 총회 개회 모두에 "신
사참배는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국민된 의무상 의당히 참배하기로
함"하고 결의한 정신에 위반이므로 작년말 소화14년 12월19일 평양노회 임
시노회를 남문외예배당에서 회집하고 노회장 최지화 목사의 사회하에 준열
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

 

장로회보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지도자들이 독립된 신문의 필요성을
느껴서 1940년 1월24일 창간한 주간 신문으로 오문환이 제작자이며 총회 사
무국에서 만들었으며 총회시에 총회 산하 모든 모든 총대들은 의무적으로
구독하도록 결의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해 총교파적인 신문을 만들라는 지
시에 의해 1942년 4월29일 통권 118호로 강제 폐간되었다.8)
이 신문은 주기철목사의 평양노회 면직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기사는 당시
신문을 제작하는 총회 임원들과 평양노회 사람들의 활동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노회록 전체는 보도하지 않았지만 노회 촬요 형태로 보도한 것이다.
그후 총회는 1940년 “야소교장로회연감” 발행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
교 역대졸업생’ 명부에서 19회(1925년 12월22일 졸업) 졸업생 명부에 주기철
을 삭제하고 졸업생을 30명으로 기록하였다. (원래 31명 졸업)
그리고 장신대학교70년사에 졸업생 명단에서 19회에 주기철 목사의 명단이
없으며9) 장신대학교 동문명부에도 19회에 주기철 이름이 없다
이것은 바로 주기철을 면직한 평양노회의 결의를 총회가 인정하고 그들이
세운 평양신학교(1939년 개교)의 졸업명부와 학적부의 주기철을 삭제한 것이
다.10)
또 박용규교수가 주장하는 주기철목사의 전기는 박용규 목사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 최초가 아니라 김인서의 “주기철목사의 순교사” 연구가 먼
저이다. 그는 해방 이후 주기철목사의 전기를 내려고 원고를 정리했지만
6.25전쟁으로 미루어졌고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가 발행하는 신앙생
활 제10권 10호(성탄호,1951년 12월1일 발행)에 “주기철목사 순교기”를 수록
하였고 그 이전 7,8호에는 ‘주기철목사의 설교기’ 9호에는 주기철목사 설교
‘일사각오’ 를 실었다. 그리고 7년후 1958년에 발행한 “주기철목사의 순교사
와 설교집”를 발행하였다. 내용 중 제7장 ‘순교’의 제목을 보면 “본장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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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한국기독교신문잡지 백년사, 1984, 대한기독교서회
9) 장로회신학대학70년사,1971, 192쪽, 역대졸업생명부 19회 졸업생 29명만 기록
10) 필자가 학적부를 열람한바 졸업대장과 학적부는 제1회 졸업생 이름돠 19회 졸업생 이름의 글씨체가 같은 거스로 후평신 개교시에 다시 만들어진 졸업대장이다. 그럼 그 이전 폐교된 정통 평양신학교의 졸업대장과 학적부는 선교사들이 미극으로 가져가서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5-

 

가 본 사실" 이라고 했으며 제7장 "2. 주목사 파면" 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평양노회는 남문외교회에서 소집하고
1. 주기철목사는 파면함
2. 편하설선교사가 산정현교회 강단 서는 것을 금지함
3. 모 목사를 산정재교회의 당회장으로 택함
4. 산정재교회 수습위원 장운경목사, 박응률목사, 이인식목사 등 7인을 택

주기철목사 파면을 결정할 때 우성옥 목사가 아니오 하고 소리치고 검속 당
하였고 편하설선교사 불법노회요 소리쳤다. 산정재 박정익장로 이것은 노회
아니오 하고 퇴장하였다.

 

그 이전 평양노회 제33회 34회 노회장은 박응률 목사이고 부노회장이 주기
철목사였으나 1938년 10월에 열리기 전 8월에 의성농우회 사건으로 의성경
찰서로 검속되면서 노회를 참석하지 못하였고 나귀환목사가 노회장이 되었
으며 1939년 10월에 열린 제37회 노회에서 최지화목사가 노회장이 되어 주
기철목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감옥에 가서 사면 권고를 했지만 거부하자
1939년 12월19일 제1차 임시노회를 열어서 신사참배에 대한 총회 결의 위반
과 총회장 경고를 무시한 것을 당시 총회헌법 권징조례 19조에 의해 주기철
의 목사직은 면직 결의하고 평양노회에서 파면하였다.
당시 헌법 권징조례 19조를 보면(1934년판 헌법, 161-162쪽 참고)

 

권징조례
제4장 각항 재판에 관한 보통 규례
제19조: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 직할에 속하고 일반 신도에 관한 사건
은 당회 직할에 속하나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
가 순종치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
이 있느니라
주기철목사의 면직결의는 자동적으로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은 파면으로
정리하면서 주목사의 가족들을 사택에서 쫓아내고 평양신학교 교장 사택으
로 사용하였다. 이 일에 공을 인정한 것인지 최지화목사는 1941년 11월에 평
양창동교회에서 열린 제30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된다.

                                              

                                              -6-

 

결론
주기철목사가 1939년 12월19일 목사직을 면직한 지 77년이 지났다. 이는 순
교하기 5년 전이다. 해방 이후 평양노회 회원들이 월남하여 국내에서 목회를
하고 남한에서 평양노회를 재건할 당시 살아있던 시대인 1950년대에 주기철
목사의 면직과 파면에 대한 기록을 담은 전기를 발행하였을 때 아무도 이의
를 달지 않았고 특히 산정현교회가 남한에 재건하여 역사적 맥을 잇고 있으
며 교회 연혁에 주기철 목사 평양노회 면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인정하
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면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주장이 나왔
기에 이는 사료를 잘못 보고 새로운 사실로 주장하여 한국교회에 혼란을 가
져온 일이기에 총회 역사위원회와 평양노회의 요청을 받고 당시 자료와 정
황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인 사료들을 살펴서 주기철 목사의 면직 사실을 확
인 발표하게 된 것이다.
통합총회 평양노회는 2006년 4월 17일 제164회 정기노회에서 복직결의와
참회예배를 드렸다. 합동총회의 평양노회와 그 역사를 함께하는 동평양노회,
서평양노회, 남평양노회, 평양제일노회는 제100회 총회가 결의한대로 노회
중 치리회를 열어 주기철목사 복직을 결의하고 참회의 시간과 예배를 드리
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