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문답 설교
고재수
이 글은 리포르만다 대표자의 고려신학대학원의 동료 교수였던 고재수 박사(N.H. Gootjes)가 교리문답 설교(CATECHISM PREACHING)라는 제목으로 1993년 9월 국제개혁교회협의회(ICRC) 모임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손정원 목사가 번역한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글을 붙잡아 여기에 보관한다. ICRC 1993, pp.136-163에 수록되어 있다. 의미변화가없는 범위 안에서 글자를 고쳐썼다. 원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www.spindleworks.com/library/wcf/catech.htm .
서론
교리문답 설교는 국제개혁교회연맹(International Council of Reformed Churches, 이하 ICRC) 회원 교회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반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문답은 네덜란드 배경을 가진 개혁교회들에서 시행되는 설교 형태입니다. 영국/스코틀랜드 배경을 가진 장로교회들은 교리문답 설교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를 하는 교회와 하지 않는 교회가 ICRC라는 하나의 모임에서 만납니다. 이 차이점을 토론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토의를 위하여 우선 이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이해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교리문답 설교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이에 대하여 노의해야 합니까? 우리는 논의를 필립 샤프가 쓴 책 <기독교계의 신조들>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샤프가 자기 책에서 한 말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잘 표현해 주는 듯합니다. 샤프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찬미자였습니다. 신조들의 역사에 관한 자기 책에서 그는 가장 많은 문단의 분량을 할애한 것들 중의 하나가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입니다. 그는 교리문답 설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알기 쉬운 부연 설명, 주석, 설교, 공격과 방어를 논하는 총서들이 쓰여졌다. 많은 개혁 교회들, 특히 화란(또한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매주일 오후에 교리문답을 강단에서 설명하는 일이 의무거나 관습으로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한다. 따라서 그 문답들은 칼빈의 교리문답에서 설정된 예를 따라서 52주일로 나누었다."[1]
샤프는 교리문답을 52주일로 나눈 것에 대하여 한 각주를 덧붙혔습니다. "이런 52주일의 구분은 아마도 이른 시기인 1566년의 라틴어 판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것이다."[2]
필립 샤프가 교리문답 설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샤프는 교리문답 설교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작성한 본래 의도 중 하나였는지 아니었는지가 불명확하다고 했습니다. 만약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초기의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교리문답은 1563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566년 판의 52주일의 구분은 그때[1566]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교리문답 설교가 등장했음을 암시합니다.
2. 교리문답을 52주일로 나누는 것은 칼빈에게로 소급되고 이 사실로부터 교리문답 설교를 행하기 시작한 것은 칼빈에게로 소급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3. 교리문답 설교는 특별히 화란 교회들과 화란 후손들의 교회들에서 관습이었고 지금까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샤프의 견해, 또는 아마도 세계 개혁교회 교인들 대부분의 견해를 보면 교리문답 설교가 이중의 한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중의 한계는 교리문답 설교가 칼빈주의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과 칼빈주의 전통 중에서도 화란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하에서 이런 샤프가 주장하는 세 가지 진술을 검토해 볼 것입니다. 이 작업은 우리에게 교리문답 설교의 가치에 대해서 적절하게 토의하는 데 꼭 필요한 배경을 제시하여 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설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1563년 1월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팔쯔(Palatinate)의 교회법에 포함되어지기 전에 몇 가지 변화를 거쳤습니다. 그 교회법은 팔쯔의 선제후들이 1563년 11월 15일 출간한 것입니다. 교리문답을 52 주일로 나눈 것은 이 판(edition)에서 처음 나타납니다.[3] 그래서 샤프가 교리문답을 주일로 나눈 것이 이른 시기라고 주장한 것은 올바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일(Lord's day)로 나눈 것은 사실 샤프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전이었습니다. 주일로 구분한 것은 교리문답이 처음 출판되었던 그 해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회법에서 가정, 학교, 교회가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어떻게 협력해야 했었는가를 읽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학생들은 교리문답의 질문과 대답들을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오후 예배에서 목사가 전(前)주에 설교했던 문답과 이번 주의 오후 예배에서 설교했던 문답을 말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교리문답은 주일 별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목사는 적어도 일년에 한번 그 교리문답을 전부(through) 설교해야 합니다.[4] 교회법은 주일로 나눈 것이 설교와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는 나중에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이 풍깁니다. 왜냐하면 교리문답이 1563년 1월에 출판되었고 교리문답을 설교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교회법이 그해 11월까지도 아직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게 가르칩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바로 처음부터, 즉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의도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지적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지적들 중에 하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주 저자였던 우르시누스(Ursinus)가 1563년에 쓴 편지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가 다 해내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시 당국이 그에게 할 일을 더 많이 주어서 이제 그는 주일 3시 교리문답 예배에서도 교리문답을 설교해야 했습니다. 이 3시 설교는 이전에 올레비아누스(Olevianus)가 했던 것이었습니다.[5] 이 사실은 교리문답 설교가 적어도 팔쯔의 수도인 하이델베르크에서는 교회법의 출판보다 더 이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교리문답 설교를 바로 그 교리문답의 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563년 1월 19일로 되어 있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판 서문에서 선제후는 자기 영지 안에 있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을 충동질하고 지시하기를, 이 교리문답을 어린아이들에게는 학교와 교회에서, 일반인들에게는 교회 강단을 통하여 되풀이하여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6]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교회에서 설교였을 뿐 아니라 교실에서도 가르쳐지게 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이전의 교리문답설교
샤프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52주일로 나눈 것이 칼빈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샤프가 그렇게 명백히 말한 것은 아닐지라도, 교리문답을 매주 설교하는 일이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할 때도 또한 관행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에 말한 진술인 제네바 관행설은 옳은 것이고, 앞에 말한 52 주일 구분설은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두 개의 교리문답서를 저술했는데, 하나는 그가 제네바에서 추방되기 전에 저술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제네바로 돌아온 후에 저술한 것입니다. 이 둘 중 두 번째 것은 질문과 대답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와 같은 형식입니다. 이 교리문답서는 두 언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즉 1542년에 프랑스어로, 1545년에 라틴어로 출판되었습니다. 프랑스어 판은 각주를 지나서, 주일로 구분되었습니다.[7] 라틴 판에서 이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라틴 판은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 제네바에서 개혁 교리들이 어떻게 가르쳐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일로 나누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어 판은 제네바의 경우 교회 회원들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이 교리문답이 주일에 설교되어야 했기 때문에 주일에 따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눈 것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처럼 52 주일로 나눈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55 주일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눈 것은 제네바에서 하이델베르크에서처럼 매년마다 전 교리문답을 다 설교하는 하이델베르크와 같은 그런 동일한 규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교리문답 설교가 어떻게 제네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칼빈은 교리문답을 제네바의 1541년 교회법에 나오는 설교에 관한 규정에 따라서 만들었습니다. 이 교회법은 매 주일마다 세 번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세 번의 예배 중 정오에 시작되는 두 번째 예배가 교리문답 예배입니다. "정오에 있는 것이 교리문답 예배이고, 그 예배는 제네바에 있는 세 교회 모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친다."[8] 나중에 교회법에서 이런 교육을 다시 언급할 때 단지 '가르치는' 교육만이 아니라 뭔가가 덧붙어 있습니다. "교리문답 예배의 명확한 규정은 아이들이 가르쳐지고, 이에 근거하여서 교훈이 주어지는 것으로 구성된다. 곧 아이들이 들은 것에 대하여 곧 그것을 잘 들었고 잘 기억하는 가를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으로 구성된다"[9]
이런 규정들은 우리에게 그 시대의 관행을 파악하는데 어떤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교회의 교리문답식 교육은 주간 중에 실시되지 않고 오히려 주일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10] 예배 그 자체가 교리문답 학습을 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예배시간 동안 교리문답을 말해야 했고, 목사가 설교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누가 이 교리문답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까? 이 규정은 이 점을 온전히 명백히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확실히 '어린아이들'만은 아니었습니다. 학교 교사와 아버지들도 어린아이들과 함께 참석해야 했고, 가사를 돌보는 자들도 예배로 보내져야 했으며, 제네바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이 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11]
그러나 우리는 제네바 교회법 어디서도 교리문답이 일년 내내 설교되어져야 한다는 규칙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제네바와 하이델베르크 문답서 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문답 설교에 있어서는 둘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가 칼빈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실제로, 교리문답 설교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교회들이 행했던 교리문답 설교
교리문답 설교는 이미 루터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 1527년 곧 루터가 95조항을 출판하고 십년이 지나서 교회 감찰단이 종교개혁의 방법에 있어서 루터를 따르는 교회들 안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 방문단원들 중에 하나가 루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자신이 시작한 개혁이 지역 교회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볼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기겁을 했습니다. 그는 일반 교회 백성들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발견했고 특히 시골 지역은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목사들이 말씀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정상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설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이전의 사제이기 일수였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그가 십계명과 사도신조와 주기도와 성례에 대하여 설교했던 것들을 개정하여 이것들을 "대교리문답"(1529)이라는 표제 하에 출판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들을 위한 설교 모델로써 쓰여지도록 의도되었으며 그리하여 설교자들은 교의의 주요 부분들에 관하여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2] 루터가 소교리 문답에다가 더하여 만든 이 대교리문답은 날마다 읽혀졌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이 교리문답 교육은 종교개혁 운동이 지식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약해져 가고 있는 때에 준 루터의 답변이었습니다.
이 대교리문답 설교와 교육은 1533년 비텐베르크 교회법에서 교리문답 설교에 관한 지침으로 이어졌습니다. 매 주일 아침마다 사제나 집사는 교리문답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전체 교리문답서를 다 설교한 후에는 그 전체 교리문답를 다시 설교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설교자는 잘, 성실하게 교리문답서 전체를 설명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게 되고, 이렇게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특별히 일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13] 여기서 교리문답 설교는 자녀들과 교회 성도들이 배워야만 하는 주요 부분, 즉 신조․십계명․주기도, 또 이에 성례에 관한 부분이 덧붙여진 교의의 중요한 부분에 관한 설교를 의미합니다. 루터 교회와 칼빈주의 교회 사이의 교리문답 설교 실행에는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루터가 만든 대교리문답은 교리문답식 설교의 모형을 제시한 것인 반면에 제네바의 교리문답서는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단지 설교를 위한 출발점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루터 교회의 교리문답 설교는 처음부터 교회의 어린 회원들을 위한 교리문답적 가르침과는 구별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어린 회원들을 위한 교리문답식 가르침은 1521년의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개혁 교회들은 주의 만찬에의 허용으로 이끄는 교리문답식 교육이 교리문답 설교와는 분리하여 가장 잘 지도될 수 있음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2세기 이상 루터 교회들에 교리문답 설교가 있었습니다.[14]
교리문답 설교의 필요성은 루터주의에서 뿐 아니라 쯔빙글리 종교개혁 진영에서도 느꼈습니다. 1532년 불링거와 레오 유대는 쮜리히 시를 위한 목회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 규례들 중 하나가 목사들은 오후 예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한 조항씩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해에 레오 유대의 교리문답이 출판되었을 때 이것은 교리문답 설교를 위한 기초로써 쓰이게 되었습니다.[15]
우리는 교리문답 설교가 대륙에 있는 종교개혁 진영의 세 주류에서 세워졌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루터주의, 쯔빙글리파, 칼빈주의.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예외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교리문답 설교가 행해졌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예외적으로 교리문답 설교가 행해졌던 곳이 있는데 그들은 런던에서 회합한 다른 나라에서 온 피난민 교중의 모임입니다. 그들의 교회법에 따르면 교리문답이 설교되어야 했습니다.[16]
그러므로 샤프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의 배경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종교 개혁만을 본 것은 너무 제한적인 것입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교회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제도였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행했던 교리문답 설교
기독교 신앙의 요약(신조, 십계명, 주기도,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 설교한다는 의미로 취하여진 교리문답 설교는 종교개혁이 만들어 낸 산물입니까? 루터는 말합니다. "우리가 강단에서 교리문답을 설교할 때 그것은 이전 일 천년 동안이나 행해지지 않던 어떤 것이다."[17] 이 말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루터 이전의 설교자들이 교리문답에 관해 설교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옳습니다. 그러나 교리문답 설교가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 동안에도 인식되어졌다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맨 먼저, 13세기 말까지 지방 사제들은 주의 기도와 사도신조를 매주, 십계명과 교회의 칠성례는 한 달에 한번 또는 최소한 일년에 3~4회는 강해할 것을 지시 받았습니다. 이 강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모국어로 주어져야 한다는 부가적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그 의도가 일반 교회 회원들이 이 신앙의 조항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18] 만약 이런 설명이 매주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대한 설교에 추가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 설명은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교리문답식 요약에 관한 설명들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1294년의 이 지시가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19]
그 몇 년 전에도 유사한 결정이 영국에서 내려졌었습니다. 1281년 람베트(Lambeth) 총회는 성직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지식의 결핍에 대하여 불평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의 목사들은 신조, 십계명, 율법의 두 대강령,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 일곱 가지 주요 악덕, 칠 덕과 칠 성례를 가르치도록 명령받았습니다.[20]
독일에서도 요하네스 게르손이 교리문답적 주제를 설교했습니다. 그는 십계명과 신조들을 토론했습니다. 많은 다른 대중적 설교자들도 교리문답으로부터 주제들을 정하여 설교했습니다.[21] 이런 일들이 교리문답 설교를 하나의 전통으로 만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유의 설교를 칭찬하고 있는 목회에 관한 책도 있습니다. 사제들이 아침이나 오후 예배에서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신앙의 조항과 십계명을 설명하고 그들이 얼마나 그 내용을 이해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좋은 전통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책은 1498년에 출판되었으니,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기 거의 25년전입니다.[22]
교리문답 설교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에 대한 증거로써 루터 자신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터 자신도 1517년 이전에 교리문답을 설교했습니다.[23] 그리고 그 자신의 대교리문답서 서문에서 루터는, 중세 때로부터 전해진, 목사가 가르쳐야만 하는 모든 개개의 것들을 포괄하고 있는 여러 개설서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24] 루터는 교리문답 설교를 만들면서 교회에서 결코 실제적인 도구를 공급받은 적이 없었던 중세의 규칙 하나를 단지 집행했을 뿐이었습니다.[25] 그의 개혁이 처음으로 교리문답을 강단으로 가져왔다는 루터의 주장은 단지 그때 그 규례가 만들어지고 지켜졌다는 의미에서만 옳습니다.
이 전통은 중세 시대에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적어도 약 A.D. 800년까지는 교리문답 설교가 프랑스의 샤를마뉴 대제의 영향 아래에서 일어난 교회의 회복에서 강조되었습니다. 789년에서 비롯되는 한 규정은 주교들로 하여금 사제들의 신실한 신앙 유지와, 그들 스스로의 주기도문 이해와, 그것을 모두가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설교하는지를 감독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852년에 있었던 지시는 각 사제들이 신조와 주기도에 대한 설명을 정통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널리 연구하여 설교를 함으로 신자들이 그 내용들을 믿게 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26] 이 규정들은 교리문답 설교가 경시되었음과 동시에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심지어 중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미 교부시대 동안 교리문답식 가르침에 대한 설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거스틴(354-430)의 신조 설교는 잘 알려진 바입니다. 그는 또한 모세의 십계명에 대한 연속 설교도 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의 또 다른 예는 약 A.D. 350년에 예루살렘의 시릴이 한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조, 성례, 예배예식에 관하여 이 설교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27]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써 교리문답은 기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교회 교부들의 시대에 교리문답적 가르침의 수단 중 하나가 교리문답 설교였습니다.
네델란드에서 행해졌던 교리문답 설교
샤프가 한 세 번째 논평은 교리문답 설교가 특별히 네덜란드와 네덜란드로부터 온 교회에서 유지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옳지만,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교리문답 설교는 반대 없이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며, 다른 나라에 있는 교회들의 지지 없이 유지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떻게 교리문답 설교가 네덜란드에서 설립되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1566년 이른 시기, 하이델베르크에서 교리문답을 채택한지 3년 후에,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암스테르담에서 규칙적인 기초 위에서 설교되었습니다.[28] 이 사실이 말하는 바는 교리문답 설교가 심지어 개혁 교회를 위한 어떤 교회법이 채택되기 전에 이미 국부적으로 설립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 개혁 교회의 생활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568년 베젤에서 열린 모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서 만든 규례에서 교리문답 설교가 다루어졌습니다. 세 가지 형식의 교리문답식 가르침이 교회에 이어 부모와 학교 교사가 교리문답을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교회의 그 의무에 관련하여 일반적 규칙은 자녀들이 교리문답을 글자 그대로 정확히 암송하도록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모든 노력이 기울여져야 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공식적으로, 예배예식 동안에!) 그들이 단어들을 이해하는가,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용을 이해하는가를 보기 위한 질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젤에서 모인 형제들은 단순한 용어가 교리문답 설교에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점을 베젤 조항의 말로 하면, "교리문답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능한 만큼 더 많이 매우 명백하고 자녀들이 이해하기에 적당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29] 교리문답 설교는 일차적인 교육의 수단으로써 명백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도르트레흐트 지방 총회(synod)가 1574년에 모이기까지 교리문답 설교는 교회들 안에서 설립되어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총회는 심지어 주의 만찬이 기념된 그 주의 오후 예배에서조차 "교리문답의 설교는 평상시와 같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라는 규례를 만들었습니다.[30]
이것이 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가가 이 총회에서 논의되어진 것에 대한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좋은 설교들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졌습니다. 아마도 목사들은 신조, 십계명, 주님의 성만찬과 같은 주제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루터를 생각할 때, 그는 대교리문답을 교리문답적 주제에 대한 모범 설교의 모음으로 의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총회는 다른 해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역 목회자들 모임(classis)에서 목사들은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교리문답의 어떤 문답들에 관하여 간략한 주해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서로를 도울 수 있었고 교리문답을 "철저하게 그리고 교훈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서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31]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1581년 제국 총회는, 총회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 교리문답에 관한 바스팅기우스 박사의 설교들이나 다른 설명들을 자세히 검토한 뒤에, 그것들을 출판하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다루었습니다. 바스팅기우스와 그의 교회가 속한 지역목회모임(classis)은 교리문답에 대한 설명서를 만들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32]
1586년 총회는 다시 교리문답 설교에 관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각각의 목사들은 오후 설교에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그 규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교리문답 전부를, 주일로 된 교리문답의 구분에 따라, 일년마다 한번씩 설교해야 했습니다.[33]
이런 결정들은 교리문답 설교가 네덜란드에서 많은 어려움 없이 설립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교리문답이 모든 교회에서 설교되어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관례는, 이런 결정이 있은 후 일 백년이 지나기까지도 견실하게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교리문답 설교는 두 가지 도전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반대는 실천적 성격의 문제였고, 두 번째는 교리문답 설교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실천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항상 만들어 지기 쉬운 것은 아니었으며, 특별히 시골의 작은 동네들에서 그랬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여러 시골 교중들에게 봉사했으며, 서너곳을 돌아가면서 설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적인 교리문답 설교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리문답 예배가 대중적인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들의 모임은 시골에서 단지 한 교회만을 섬기는 목사는 오후에 교리문답을 설교해야만 하며, 그때 심지어 단지 몇몇만이 참석한 경우에도 그래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이유로써, 안식일 훼방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34]
교리문답 예배에의 참석율은 저조했습니다. 어떤 장로감독회(classis)에서 그 교구에 속한 딴 교회의 참석율은 어떤가를 서로 알아보았더니, 교회A는 교리문답 예배가 있다고 세 번이나 알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교회B의 경우도 세 번 광고를 했으나 두 명이하의 성도들이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 C는 교리문답 예식을 열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D에서는 관리인만이 유일의 청중이었습니다.[35]
이런 현상은 교리문답 설교를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인들은 주일 오후를 그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개방해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를 견고하게 설립하는 데는 약 한 세기가 걸렸습니다. 그러나 한번 확립된 후에는 교리문답 설교는, 그 역사를 추적한 바 있는 스호우털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리 저리로 흔들리지 않고 모든 교훈의 풍조에 끌려 다니지 않는 성숙한 교중"[36]을 낳았습니다.
이 설교의 형식에 대항하는 두 번째 반대가 더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하우다(Gouda)의 교회 목사들이 1586년 총회의 규정을 깨뜨리고 교리문답을 설교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 이유가 인간이 만든 본문은 교회에서 읽히거나 설교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요 총회들이 이를 그냥 지나가도록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지방 총회는 문답형식의 교리문답은 성경에서 명령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 조항들의 요약을 가지거나 가르치는 것은, 히브리서 6:1에 보면, 사도적 전통이다고 했습니다. 이 전통은 언제나 교회에 남아 있었으며 큰 유용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37]
그러나 교리문답을 설교하기를 거절하는 배후의 진정한 이유는 여러 목사들이 특히 아르미니안(Arminian)적 확신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교의를 대항하는 반대 이유를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특히 도르트 총회 몇 년 전에 명백해졌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항의하는 목사들(Remonstrant:항론파)에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으로부터 취하여진 명제들에 동의 진술할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들은 그 교리문답의 교의에 동의한다고 선언할 수 없었습니다.[38]
이 반대의 결과로써 교리문답 설교는 1618년 도르트 총회에서 논의되었습니다.[39]
도르트 총회의 논의
교리문답 설교는 도르트 총회에서, 국내의 대표들만이 아니라 외국 교회의 대표들까지 참석한 때에 논의되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단지 화란의 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도르트 총회의 회의록(the Acts of Synod)에는 단지 외국 대표의 조언들만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언들이 그 당시 개혁 교회들 내에서의 교리문답 설교의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발췌해볼까 합니다.[40]
대영제국의 신학자들은 '사도들의 실천과 이성과 경험이 우리에게 문답식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가르친다는 일반율로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거룩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는 두 기회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하나는 매주 일어나는 기회이고 특별한 하나는 주의 만찬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매주 교리문답 예배는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참석해야 하나, 단지 어린이들만이 문답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국 대표들이 교리문답 예배를 공식적인 교리문답 교실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답의 공적인 낭송은 단지 어린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보다 나이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듯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른들도 또한 교리문답을 잘 암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영국인들은 목사들을 위한 조언도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가능한 가장 명료하게 매 대답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설명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물어서, 그들이 그 설명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답에서 그의 설명이 이해되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가능하다면) 더 명료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며 반복해야 합니다. 다른 흥미로운 언급은 정부가 교리문답과 관련해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태만하면 처벌을 받아야만 하고, 어른이 교리문답 설교에 참석하지 않으면 벌금이 과해질 것입니다.
팔쯔의 신학자들은 많은 이단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주 요인이 교리문답적 가르침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라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주일날 오후에는 간략한 교리문답 설교가 선포됩니다. 그 후에 목사는 강단으로부터 내려와서, 교리의 어떤 부분을 읽고 교리문답의 몇 문답을 선별적으로 전혀 학교에 가보지 못한 어른들에게 설명합니다. 오후 예배는 여기서 이중의 기능을 가집니다. 곧 교리문답 설교의 기능뿐 아니라 학교에서 교리문답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교리문답 교육의 기능을 가집니다.
또다른 독일 국가인 헤세의 신학자들은 우선 성경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이해에 적합하기도 한 그런 교리문답이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화란 교회는 이런 교리문답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안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신학자들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항하는 항론파의 반대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서명하기까지 하려 했습니다.
목사들은 정규적인 시간에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또 교리문답을 설교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에 태만한 사람은 처벌받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공적 교리문답 질의응답 시간에 참석하여서, 그들 자녀들에게 그 교훈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을 단위에서는 교리문답이 교리문답 설교 이후에 가르쳐지면 충분할 것이요, 도시의 경우 주간 중 두개의 교리문답 교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스위스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공화국 사이에서 그 실천에 차이가 있으나 교리문답 교육은 모든 곳에서 견지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일에 많은 설교들이 도시와 마을들에서 전파되는데 그 중 하나가 교리문답 설교입니다. 교리문답은 매년마다 설교될 것이며, 이는 반복을 통하여 보다 나은 기억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주일의 교리문답 예배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사람들과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이 참석하게 됩니다. 주간 중의 일하는 날에 교리문답은 학생들을 위하여 설교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한 주를 단위로 교리문답 설교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네바에서의 실천은 스위스 신학자들의 보고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개별적으로 설명됩니다. 제네바의 대표들은 사도신조, 주기도, 십계명, 성만찬의 교의가 명료하고 간단하게 설명된 어떤 형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형식의 둘 혹은 세 조항이 몇 몇 적절한 성경 구절들과 함께 주일 오후 예배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여기 제네바에서도 역시 목사가 교리문답(예배)에로 사람들을 거의 모을 수 없다는 그 문제가 광범하게 인식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최소한 어린 자녀들과 그보다 나이 든 아이들은 참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길고 연설적인 교리문답 설명들에 반대하는 특별한 경고가 더해집니다. 설명은 문답의 질문에 포함된 주제를 논하고, 그리하여 청중의 동의를 유도해야 합니다.
이제 독일 도시들의 신학자들의 조언이 따라 옵니다. 브레멘의 신학자들은 강한 어조로 시작합니다. 즉 교리문답식 교육은 교회 설립의 기초이다고 합니다. 교리문답을 배우는 세 가지 방법이 언급되고 논의된 바,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입니다. 교회에서의 교리문답에 관하여는 두 번째 설교 대신이나 후가 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것은 어쩌면 예배의 비정규적 부분일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공적인 질의를 발견합니다. 그들 조언의 끝에서 이 신학자들은 다시 한번 강한 언급을 하는데, 만약 어린이들이 교리문답 안에서 잘 교육된다면 우리는 성인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엠덴에서의 교리문답 교훈의 설명은 역사적 평가로 시작합니다. 즉 구원 교의의 확고한 지식을 얻는 데 교리문답 교육보다 더 필수적인 게 없는 한, 그리고 그것이 영적 집의 기초라면, 결국 1520년 종교개혁의 시초에 우리 선조들은 자녀들과 어린이들도 역시 기독교 교리의 그 첫 번째 원리로 가르침을 받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 언급은, 여기 교리문답 교육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개혁 신앙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루터파 종교개혁이 그 시초에 섰던 그 선상에 서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엠덴의 보고는 또한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교리문답 예배가 조직되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사는 그들의 학생들을 매 주일 오후 교회로 데리고 옵니다. 목사는 이 오후 예배에서 먼저 기도하고, 다음으로 기독교의 주요 단락들, 예를 들어 십계명, 신조, 세례와 주의 만찬의 설립 등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이 아이들에게 그 예배 동안 설명될 문답을 암송하도록 합니다(아이들은 10세가 되기까지는 엠덴의 교리문답 전부를 암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후 목사는 암송된 문 답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할 때, 마치 성경 본문을 설교할 때처럼 합니다. 세 달내로 그들은 전체 교리문답을 반복할 것입니다.
이 독일 북부에서도 교리문답 설교를 세우는 데 있어서 모든 다른 지역에서 느낀 그 동일한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포기해서는 안 되다. 시골의, 또는 단지 몇 명만이 그 예배에 참석하는 그런 곳의 목사들도 봄, 가을, 겨울 동안 간략하게 교리문답 설교를 합니다. 경험이 가르치는 바는 청중들이 긴 설교를 혐오한다는 사실입니다.
외국 대표들의 조언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모두 교리문답 설교를 실제적으로 설립하기를 원했습니다. 도르트 총회가 부모와 학교 교사의 교리문답 교육 다음으로 교리문답 설교를 설정한 사실은 약간 놀랍습니다. 도르트 총회는 적당히 짧고, 가능한 대로 단지 성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해가 적합한 교리문답 설교를 시행하는 것은 목사의 의무라고 결정했습니다.[41] 교회법에는 교리문답이 오후 예배에서 설교되어야 한다는 그 규칙이 68조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샤프에게로 돌아가서, 그는 올바르게 교리문답 설교가 부분적으로는 네델란드의 개혁 교회에서 창설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의 시기에 전 개혁주의 진영이 교리문답 설교에 찬동하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 또한 주목할만합니다.
-교리문답 설교 Ⅱ-
제Ⅰ부에서 저는 교리문답 설교를 시행하는 관례에 대한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배경을 제시한 목적은 교리문답 설교가 고립된 어떤 한 교단 혹은 어떤 나라의 관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종종 교리문답 설교는 매우 제한적인 시기동안 개신교(The Reformed)교회의 작은 범위내에 한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이 특별한 형태의 설교가 개신교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 교리문답 설교는 개신교 교회내에 꽤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인 것 이상을 말해야 합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결코 실제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는 교리문답 설교가 성경이라는 심판대 앞에서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더 중대한 문제를 제 Ⅱ부에서 토론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론이 교리문답 설교를 반대하기 위해서 제시되었습니다. 저는 세가지 중요한 반대를 다루고, 끝에 가서 더 일반적인 고찰을 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본문으로부터 설교을 하는 것
교리문답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한 가장 심한 반대는 교리문답이 인간이 만든 문서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교리문답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리문답으로부터 한 단락을 본문으로 취해서 설교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좋은 설교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솔직하고 악의없이 이 반대를 명확히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리문답의 기능은 궁극적으로 설교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설교를 바르게 하도록 보호해 주고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을 바르게 하도록 보호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조와 교리의 주요 기능이다. 그러므로 교리문답을 매 해마다 계속 설교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 앞에 항상 열려져 있는 성경을 가지고 성경 그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말씀을 취해서 설교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도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로 만들어진 신조나 교리문답보다 차라리 성경자체의 본문을 설교하는 것에 더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42]
이 비판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확신으로 인해 로이드 존스가 교리문답 설교를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곧 "이런 교리문답 설교는 인간이 성경 말씀을 이해한 것을 설교본문으로 취해서 하는 설교이므로 설교라고 할 수 없고 성경 말씀에서 취한 본문을 선포해야 설교라고 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리문답 설교를 옹호하는 자들도 반대자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출발점에서 출발하는데 교리문답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네덜란드 표준 본문을 쓴 T. 훅스트라 박사는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 말씀의 해석와 적용으로서 설교를 정의합니다.[43] 그러나 훅스트라는 교리문답 설교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설교에 대한 자기 책에서 교리문답 설교 부분을 다루는데, 거기서 말합니다.
교리문답 설교에서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셔서 교중들을 위하여 은혜 언약의 신비를 밝히신다. 그러므로 교리문답 설교는 말씀의 집행이다.[44]
교리문답 설교의 옹호자들은 이 교리문답 설교에서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을 지지합니다.
근본적으로, 설교에 대한 동일한 정의를 사용하는 이 신학자들이 실제적으로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에 관하여서는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설교에 대한 정의에 근거하여서 이 전체 문제를 결정할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물어야 합니다. 곧 신조 혹은 고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신조 혹은 고백은 성경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조 중의 하나인 사도신경을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답해 봅시다. 이 신경은 모두 성경으로부터 취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신경을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구약 혹은 신약 성경구절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이 사도신경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신경의 내용은 성경으로부터 취해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어진 계시들이 조직적인 방식으로 함께 가져와져서 모아진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구조는 마 28장 19절의 세례 명령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역으로서 요약되어져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적 진리의 조직적인 요약인 성경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이 동일한 내용이 종교개혁 시기의 더 폭넓은 고백들에서 나중에 말해질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정의하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개혁주의 고백들이 그 고백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성경적 계시로 조직하고 요약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요약 형식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들은 그 공식문에 연관된 성경구절들을 집어넣고, 그 항목에 덧붙인 성경본문으로 그 교리들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이 교리문답 설교와 연관하여서 대답해야 할 문제는 이 교리의 특징이 무엇인가하는 것이고, 이 요약이 교리문답 속에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의 공식문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 그 자체가 무엇입니까? 이 교리가 성경에서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면 이 교리가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개혁주의 신학자인 찰스 하지는 교리를 인간의 문서로 봅니다. 성경은 분리된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 사실들은 되는 데로 함께 결합될 수 없고 그 사실들 사이에 연관성이 그 사실에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연관성들을 만듭니다. 하지만 하지에 따르면 이것은 교리가 분리된 성경보다 더 수준이 낮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이 교리는 성경보다 더 수준이 높습니다.
많은 수준 높은 종류의 지식이 단순히 분리된 사실들의 축적물에 의한 것보다 이렇게 획득되어진다. . . . 우리는 우리가 적어도 몇 가지 선한 방법으로 서로의 입장을 포함하는 그 가운데에 진리를 분리시키는 계시 안에서 이해하지 않는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문제를 해결한 것, 곧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사실들을 조화로운 배열로 맞추어 만든 것은 수세기 동안 교회가 연구하고 논의한 댓가이다.[45]
유사한 견해가 아브라함 카이퍼가 신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때에 그에게서 발견됩니다. 신학은 관찰을 목적으로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는 과학이고 이해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46] 카이퍼는 항상 흥미로운 평행구들을 찾아서 빛나는 금이 되기 위해서 녹아진 광석과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비교했고, 먹기 전에 빵으로 바꿔야 하는 곡식과 비교했습니다.[47]
하지와 카이퍼 둘다 신조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학에 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신조에 대한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교리를 요약한 교리문답이 "더 높은 종류의 지식"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지식은 성경 계시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만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신학자들에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점에서 입니다.[48] 성경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계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직 먹을 수 있게 빵으로 만들어야하는 곡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 그 자체가 사실의 의미들에 대한 식견을 제공합니다. 성경의 진리들 사이에 관계는 그 동일한 성경안에서 지적됩니다. 하지가 말하는 이른바 더 높은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습니다. 또한 카이퍼가 말하는 성경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떡입니다.
사도신경과 연관하여 몇 가지 예들을 제시하겠습니다.
-마 28:19이하에서는 세례와 삼위일체를 연결시키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말합니다.
-엡 1:3-14에서는 우리의 구원안에 포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많은 사역들을 설명합니다.
-창 17:1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단지 사실이 아니라 아브라함(그리고 모든 신자들)의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행해야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창1장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물에 관해서와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물 가운데서 인간의 위치를 결정하셨는지를 말합니다(26절).
또한 성경 교리에 관한 예들을 제시하겠습니다.
-딤후 3:16에서는 교훈과 책망 등을 위하여 구약의 중요성과 성경의 영감을 연결시킵니다.
-벧후 1:20이하에서는 성경의 신적 기원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 19:7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는 사실을 언급할 뿐만아니라 이 완전한 율법이 영혼을 소생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계속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성경이 어쨋든 여러 조각들을 함께 모아둔 느슨한 사상들의 수집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분명하게 해 줍니다. 제가 이렇게 교리를 연결시킨 것은 성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신조를 작성함에 있어서 오직 두가지 일을 행할 뿐입니다. 1. 신조를 작성할때에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져 있는 계시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2. 신조를 작성할 때에 흔히 신조 그 자체의 말로 이 신조의 진리들을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조를 작성하는 것은 교리를 짜맞추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성경에 나타난 교리를 읽는 것입니다. 신조와 고백은 성경 그 자체에 나타난 교리를 한 곳으로 모아서 조직하는 것입니다. 교리는 계시의 이해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도 아니고(하지) 성경안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형식으로 주어진 것을 다듬어 만든 것도 아니고(카이퍼) 하나님이 계시하신 여러 가지 계시의 구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에 대한 결정은 교리문답 설교가 원리적으로 가능한지 아니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만일 교리문답이 성경에 있는 조직되지 않은 요소를 인간이 조직화한 것이라면,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리문답은 성경에 나타난데로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교리문답이 말하는 것은 물론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여전히 신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교리문답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리문답 설교는 사도 바울이 전체 하나님의 경륜(역주: 한글개역에서는 counsel이 '뜻'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이라고 부른 것을 정당하게 다루는 선한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그는 "자기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경륜 혹은 계획[49]은 바울을 동일한 이 고별 연설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24절)과 왕국의 설교(25절)라고 부른 것과 관계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경륜 혹은 계획이라고 불려질 때, 이 단어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따른 것이라 점을 증거합니다. 문맥에서 바울은 특별히 "전체(Whole)"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whole) 경륜을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어떤 부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청중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당하고 심판 당할때에도 부끄러하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축소시켜서 청중들에게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표현은 내가 내 견해를 말할때 정확하게 설교를 위한 규칙으로 사용했습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의 한 부분도 설교에서 무시되어 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체 계획의 일부를 설교에서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목사가 자신이 다룰 수 있고 어떤 관심이 있는 본문을 선택할 때, 그는 쉽게 본문의 선택에 있어서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교리적 구조를 농축한 교리문답은 성경 내용의 개관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교리문답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인 내용을 붙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또한 목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 이유는 교리문답이 목사의 설교가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본문 설교가 교리문답 설교를 신선하게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계속 순환되는 교리문답 설교는 본문 설교를 유지시키는데 유익합니다.
두 가지 실제적인 반대
교리문답 설교가 오직 성경만이 설교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이 답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반대가 교리 문답 설교를 대항하여서 생겨났습니다. 이 단락에서 저는 교리문답 설교가 실제적인 동기에 있어서 적절한가를 진술하는 두 가지 반대를 토론하고자 합니다.
교리문답 설교가 때때로 당연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곤 합니다. 교리가 설교되어지나 그 교리들은 실제 생활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청중들의 생활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50]
청중들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 흔히 설교자에게 대한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입니다. 설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직접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설교는 청중들이 스스로 메시지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메시지와 자신이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설교의 일반적인 국면입니다. 설교가 청중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교리문답 설교에 제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설교에 대한 요구입니다. 목사가 특별한 본문을 설교할때도 그는 동일한 요구에 직면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가끔 청중들에게 설교의 적실성을 보여준데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패가 사람들의 생활에 본문을 적용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날마다의 생활을 위하여 교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그런 방식으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합니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교리가 바로 여기서 설명되어지는 그 방법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적용은 교리의 설명에서 주어집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유명한 첫째 문답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이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이 사나 죽으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 ."에 강조를 둡니다. 이 첫 문답은 아주 개인적이고 적용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나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항상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당신의 피로 사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호하십니다."는 것입니다.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다음으로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토론 합니다. 우리는 매마른 내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먼저 나는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내가 어떻게 그런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해석되어지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계속되는 모든 대답에서 교리문답은 어떻게 내가 개인적으로 포함되는지를 토론합니다.
한 가지 예로 삼위일체 교리를 제시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세 위격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 생활에서 중요합니까? 교리문답은 사도신경과 연관하여서 삼위일체에 대해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계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의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 존재하시는데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을 말합니까?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들에게 구별되는 세 위격이 한분이시고 참되며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 문답이전에 이 교리문답에서는 우리를 위한 세 인격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곧 그것은 성부와 우리의 창조, 성자와 우리의 구속, 성령과 우리의 성화입니다(제 8주일).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실제적인 특징 때문에 직접적으로 청중들을 위한 적절한 방식으로 교리를 설교하는 것은 쉽습니다. 많은 초보 목사들은 본문 설교에서 보다 교리문답 설교에서 적용이 더 쉽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웨스트 민스터 소교리 문답이 다르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합니다. 이 소교리문답은 교리를 설교하기에 부적절하다고 반대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소교리문답은 저와 여러분에 대해 말함으로 교리를 가까이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 교리문답의 목적은 교리에 대한 아주 분명한 해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첫 번째 문답을 생각해 봅시다.[51] 그 첫 문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적용이 거리 먼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서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2문답은 특별하게 우리에게 선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법을 주셔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기도록 지시하셨습니까? 구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즐기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법입니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청중들에게 선포할 설교가 쉽게 이 교리에 근거하여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실례를 들면, 제 6문답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위격에는 얼마나 많은 위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격에는 삼위가 계시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으로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라고 하고 이 문답은 정직하게 말하면 더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이 교리가 왜 중요한지 모든 지적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에 대한 전제는 이 고백된 진리들이 실제 신자의 생활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모든 진리들이 실제 생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 교리들의 중요성에 있어서도 성도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에 대한 더 오래된 설명은 이 고백된 진리들의 실제적 적실성을 보여줍니다.[52]
따라서 교리문답 설교가 당연히 적용이 없는 설교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실제적인 반대는 교리문답 설교가 반복된다는 것에 대한 반대입니다. 나중에 완성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일년 52주일을 통하여 설교될 목적을 표현하는 52주일로 나누어졌습니다. 칼빈의 교리문답은 55주일로 나뉘어졌습니다. 만약 이 교리문답이 제네바에서 일년 이상의 기간동안 행해진 것이 아니면 그것은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이 13달에 걸쳐서 이루진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교리문답 설교가 다소 더 자유롭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다수의 성도들 가운데서 교리문답 설교가 일년 혹은 반년의 주기로 전체적으로 설교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반복이 성도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청중들은 이미 교리문답 설교를 몇번이고 되풀이 해서 들었습니다.
이 반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규칙적으로 교리문답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보다는 차라리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반복해서 되풀이 되는 교리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은 교리를 전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도 동의하게 됩니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의 교리와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요약을 다룹니다. 곧 교리문답은 창조, 구속의 약속,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성화, 만물의 회복에 대해 말합니다. 이런 주제들은 반복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들이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신앙의 중심적인 교의이기 때문입니다.[53]
일정한 반복없이 사라지려는 것을 굳게 붙들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여러분들은 미국에 50주가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지식이 계속 새롭게 제시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 어렴풋해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L.A에 친구가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소포를 전달해 달라고 뉴욕으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경우이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인도네시아에 무엇인가를 전달해 달라고 인도로 가는 어떤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지리학 수업에서 알게 된 지식이 새롭게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 지리적인 사실들이 흐릿해질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텐데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사역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내용들이 반복해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절에서 이 사실을 말합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전에도 이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얼마나 쉽게 그 진리를 잊어버리고 날마다 일어나는 많은 일들속에서 잊어버리게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사실을 제시하고 성도들이 이전에 말했던 진리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씁니다.(또한 빌3:18을 보라.)
많은 경우에 이 동일한 방법으로 성경의 근본적인 내용들이 우리가 그 내용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되어집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늘 새롭게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데로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
주제 설교(Preaching a topic)
마지막으로 주목할점으로서 저는 목사들이 종종 한 주제를 정하여 설교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저는 일부 목사들이 때때로 일종의 사적인 교리문답식의 설교를 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듣지 못했던 한 예를 제시하겠습니다. 어떤 목사가 어떤 순간에 자기 성도들이 세례에 대한 교훈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마28장 19절을 본문으로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목사는 자기 설교에서 세례라는 단어가 나오는 신약의 모든 본문을 설명했습니다. 그 목사는 계속해서 1. 세례 요한의 세례, 2.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세례, 3. 성령으로의 세례를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히 본문 설교의 예가 아닙니다. 마 28:19이 공식적으로 본문이 되고 설교에서도 그 본문만 다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안에서 삼위일체와 세례와 사이에 관계가 중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설교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설교는 오직 본문으로부터 "세례"라는 단어만이 사용됩니다. 실제적으로, 이 설교는 교리문답으로부터 "세례"를 설명한 단락에 대해 설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또한 교리문답 설교는 아닙니다.
이런 설교와 교리문답 설교사이에 두 가지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 첫째로 이런 접근은 개념을 가진 단어를 혼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는 세례식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이 "세례"라는 단어를 사용한 모든 본문을 수집하여 모은 것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례식, 세례의 선구자, 할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 자료가 "세례"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모아진 것이므로 이 본문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어를 중심으로 살피는 방법은 우리가 정말로 심사숙고해야 할 본문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방법은 다른 한편으로 많은 본문들을 포함시킵니다. 성령과 관련된 세례를 언급하는 두 본문은 "세례"라는 단어를 포함하나 세례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세례라는 단어에 근거한 세례라는 주제 설교는 한편으로는 포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적입니다.
이런 방식의 설교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교회가 수십세기 동안 교리에 대해서 배워왔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수십세기 동안 세례에 대해 설교하고 가르쳐왔고, 이런 과정 속에서 유혹과 오해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할 것을 배워왔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폭로하고 의식적으로 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목사들이 이 모든 역사를 무시하고 목사 자신이 마치 일 세기의 마지막에 살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근거하여서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주제를 설교하는 것은 교회가 수십 세기동안 가르침을 통하여 축적해온 지혜를 사용하는 것보다 이런 설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제를 설교하는 것이 교리문답에 따라 설교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엄격한 본문 설교와 교리문답 설교형식은 내 생각으로는 이상적인 결합인 것 같습니다. 본문 설교는 특별한 본문의 특별한 의미를 가르칩니다. 본문 설교는 성경 본문이 다양한 만큼 다양합니다. 본문 설교는 수천년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사역의 상세한 부분 혹은 하나님의 율법의 한 부분 부분을 밝힙니다. 본문 설교는 변화무쌍한 다양함으로 주어집니다. 본문 설교는 항상 새롭고 항상 놀랍습니다. 게다가 특별한 필요가 쉽게 특별한 본문 선택에 의해서 선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큰 주제들을 간과하지 않 아야 하고 성경의 구조를 강조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부지중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는 것을 막아주고 거짓된 가르침과 우리 자신의 시대의 다양성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교리문답 설교가 바로 이 지지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교리문답 설교는 성도들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교훈의 본을 순종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입니다. 롬 6:17.
(역자는 신언교회 목사이다. 고재수 교수가 제시한 원리에 따라 오후 예배 시간에 교리문답 형태로 교육을 시행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