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르만다는 자살과 구원에 관한 아래의 견해와 동일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떠도는 글을 붙잡아 이곳에 저장하였습니다. 신원하 교수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자살과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해석
신원하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I. 한국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교회의 신학 부재: 문제의식과 목적
자살은 기독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혐오스러운 죄로 취급됐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피조물이 자기 뜻에 따라 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런 죄를 지은 자살자의 장례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왔다. 기독교 신앙과 문화가 지배해왔던 서구 사회에서는 자살에 대해 엄격한 분위기가 근세까지 주도해왔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이 조금씩 퇴조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자살자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교회도 세속화의 영향에 따라 이런 추세를 따라왔다.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최근 들어 자살자 수와 자살률이 급격히 늘면서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2010년 한 해 동안 1만 5천 56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루 평균 42.6명이 자살한 셈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2배 정도 증가했다. 특히 자살은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의 1위이고 40대 50대에서는 2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1)신자들의 자살도 늘어나면서 목회자들이 이전과는 달리 당황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때론 중직자의 가정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본인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가족들과 교회에도 큰 고통을 안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가족들은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자살한 자는 지옥 간다’라는 통설로 말미암아 더욱 고통을 받곤 한다.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소위 통설은 과연 어디서 기원했는가? 이것의 성경에서 말하는 근거는 있는가? 한국교회 중의 어느 교단이 이런 교리나 이에 관련한 신학적 입장 및 지침서를 만든 적이 있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통설은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 왔다. 구원론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속한 것인데, 신학적 검증이 되지 않은 통설이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교회와 신학자들이 게으르거나 책임 유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레먼스(James Clemons) 교수는 교회와 신자들이 자살문제로 고통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마치 낮잠 자듯이 이 문제에 소홀해 왔다고 따끔하게 지적한 바 있다. 기독교 윤리학자들도 다른 윤리적 주제들에 비해 이 문제는 현저히 소홀하게 다루었음을 통계로 밝히기도 했다.2)
이 글은 이 통설이 과연 타당한지를 신학적으로 살펴보고 평가하며 이를 통해 교회에 신학적 지침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3) 먼저 자살에 관해 성경의 사례를 살펴보고 분석한다. 이어 교회의 이에 관한 주요 결정들과 시대의 대표적 신학자들의 사상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 통설의 근원이 될 교회와 신학자들의 사상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죄 교리를 다룰 것이다. 그 다음에 용서받지 못할 죄에 관련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자살과 구원의 관계를 검토하고 정리한 뒤, 이 결론을 통해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적 조언과 함께 목회적 돌봄에 필요한 과제를 제안할 것이다.
II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분석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한 사람은 순서대로 아비멜렉(사 9:52-54), 삼손(삿16:23-28), 사울(삼상 31:1-6; 대상 10:13-4), 아히도벨 (삼하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신약의 가룟 유다(마27:3-10; 행1:16-18).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살한 경우이고 다른 경우는 직접 자살한 경우이다.
A. 신, 구약의 사례
1. 삼손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은 불렛셋 사람들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들이 다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 기둥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기둥을 무너뜨림으로 불렛셋 신당을 무너뜨리고 불렛셋 사람들을 죽이며 그와 함께 자신도 그 안에서 죽게 된다. 본문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삼손의 죽음은 자기의 두 눈을 뽑은 불렛셋 인에 대한 복수의 행위 또는 은 이스라엘을 압제한 불렛셋 민족에 대한 민족적 복수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손의 경우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죽이도록 위임한 것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살자가 아니라”고 신학자 바르트는 해석하기도 한다.4) 어거스틴은, 삼손은 성령이 은밀하게 명령한 대로 행동한 것으로 보면서 자살과 구별하기도 했다.5) 이런 주요한 근거는 신약의 히브리서가 그를 아브라함, 모세와 나란히 구름과 같은 믿음의 인물들의 한 명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히11:32).
2. 사울
불렛셋과의 전투에서 회복 불가능한 중상을 입게 된 사울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수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무기당번 병사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 병사가 거절하자,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 위에 엎드려 목숨을 끊었다(삼상31:1-6). 성경은 사울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를 치신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대상10:13-14). 그런데 사울이 죽은 방식 자체나 그에 관련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도 내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소식을 아말렉 사람에게 전해들은 다윗은 옷을 찢으며 금식하며 애곡했고(삼하1:11-12), 사울의 생애를 칭송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는 내용을 비중 있게 기록하고 있다(삼하 1:17-27)장).
3. 아히도벨
아히도벨은 본래 다윗의 책사이었지만, 다윗이 압살롬의 모반으로 쫓겨 가고 난 뒤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에게 가서 다윗을 칠 방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압살롬이 자기의 모략을 받지 않고 오히려 후새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고향 집으로 돌아가, 신변을 정리한 뒤에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생을 마감한 방식에 관한 언급은 없고, 단지 그가 아버지의 묘에 묻혔다고 기록한다(삼하17:23).
4. 시므리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신하였던 시므리는 왕를 모반하여 살해하고 다르사에서 왕이 되어 7일 동안 등극했다. 당시 전쟁 중에 있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자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군대 장관 오므리를 왕으로 옹립하고, 그를 공격하려고 왕궁으로 향했다(왕상 18:15-17). 이 소식을 들은 시므리는 왕궁의 경비초소로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았다(18절). 본문에 따르면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범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9절). 그런데 본문은 그 죽은 방식 자체에 대해서나, 그것이 그의 죄와의 인과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5, 가룟유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유다는 예수를 넘겨주고 난 뒤 후회하고 현실을 돌이킬 수 없음을 자책하며 은30을 성소에 던진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27:3-5). 성경은 유다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죽음으로(행1:18), “제 곳으로 갔[다]"(행1:25)고 기록해 놓고 있다.
6. 아비멜렉(사 9:52-54)
아비멜렉은 간접적으로 자살한 인물이다. 그는 여룹바알 즉 기드온의 첩에서 난 아들로서 왕이 되기 위해 자기 모계 친족 및 백성들을 꾀어 이복동생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는 3년간 왕으로 통치하다가 반역을 꾀한 무리들을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여인이 망대 위에서 아래로 던진 맷돌을 맞고 머리가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죽게 되었다. 그는 여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수치스런 말을 듣기 싫어 병사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죽이도록 명령했고 결국 병사의 칼에 죽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들에게 죽여 그의 아버지에게 악을 범한 것에 대해 아비멜렉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B. 관찰과 분석
위의 여섯 자살 사건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면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 언급된 자살은 어떤 것도 우호적인 표현으로 묘사된 것은 없고, 특히 어려운 시기에 탈출구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방편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6) 오히려 삼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아비멜렉, 사울의 죽음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말하고, 아히도벨과 시므리는 다 “제 주인을 반역한”(왕하9:31) 인물로 취급되었고,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둘째, 그럼에도 그들의 자살을 다룬 본문은 자살 행위 자체 즉 죽음 방식에 대해 흥미롭게도 침묵하고 있으며 어떠한 명시적 가치판단을 내려놓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사울의 경우, 그것이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주석을 붙여 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는 형식과 인과 관계가 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는다. 사울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의 죽음을 영예롭게 만들어 주는 다윗의 조사를 길게 다루고 있다. 아히도벨의 경우도 그가 아비의 묘에 묻혔다는 기록을 남김으로 당시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죽음을 저주했거나 수치스럽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게 한다.
셋째, 모든 자살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나온 반응이었다. 사울과 시므리는 적의 손에 죽게 될 경우, 아비멜렉 여인에게 부상당해 죽게 될 위기, 아히도벨은 거부당한 섭섭함과 심한 체면손상의 상태에서 나온 반응이었다.7)
넷째, 이들이 자살을 구원과 관련시켜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룟유다에 관련한 본문에서조차 비록 그가 “제 곳으로 갔[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의 자살 행위와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지 않다.
III. 자살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
A. 교회사적인 흐름과 주요 결정
기독교회의 자살에 대한 견해를 살피기 위해 기독교회가 세워진 동시대 그 지역의 문화와 사상이 자살에 대한 어떠한 견해를 가졌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427-347 B.C.) 죽음은 영혼이 감옥과 같은 육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영혼은 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임의로 생명을 끊어 영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도 삶이 통제되지 못할 정도의 병이나 견딜 수 없는 수치나 극도의 고통에 직면할 경우, 사람은 일종의 강력한 강박감 아래서 행동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살은 이해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닌 상태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것은 “나태하고 인간답지 못한 비겁한” 행동으로 보았다.8)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인간다운 삶과 덕목을 갖추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자살은 사람들의 안녕과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울타리가 되는 공동체를 해치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시민들의 조화롭고 통합된 삶을 살기 위해는 지혜, 절제, 정의와 아울러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용기란 비겁과 만용을 피하고 그 중용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가난의 고통 혹은 다양한 번민을 피하기 위해 생명을 끊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고, 용기 있는 사람은 고통 앞에서도 가난이나 고통을 정면으로 대면한다고 말한다.9) 그러기에 이런 덕목이 통합된 삶을 살고 또 추구하는 자는 자살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 고대 헬라와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형태로 번성한 스토아 사상은 자살에 대해 유연하고 관용적인 입장을 가졌다. 스토아 사상은 순환론적 우주관 즉 우주는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되는 곳이고, 유물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으로 우주는 소멸하면서 다시 생성되고 그 이전 존재로 반복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 영혼의 불멸과 같은 것은 믿지 않고 이것은 죽음으로 해체되어 버리고 우주의 영과 연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생명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이것은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즉 생과 죽음에 무정념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아주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인데, 삶이 어느 순간 더 이상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지점에 이를 경우, 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이성적인 본성에 맞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적에 포로로 잡힌 장군이 수모를 피하려고, 조국에 대한 충성으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끊는 영웅적인 자살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참을 수 없는 무료함, 그리고 극심한 질병 때문에 목숨을 끊는 비 영웅적 자살은, 모두 더 이상 자연에 따른 삶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위의 문화와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교회는 태동하였지만, 교회는 유대교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고, 자살에 관용적이고 때로는 정당화하는 로마 스토아 사상을 신학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살에 대한 교회의 신학을 세워나갔다. 어거스틴은 자살을 심각한 도덕적 신학적 주제로 삼아 취급하고 이를 정죄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의 분명한 자살에 대한 신학과 입장은 이후 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세 교회는 자살에 대한 주요한 결정을 내려 교리법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데, 첫째로 533년 오르레앙(Orleans)에서 열린 2차 오르레앙 공의회에서는 사제는 사형당해 죽은 자들에 대해서 미사를 드려도 되지만, 자살하여 죽은 자들을 위해서 진혼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리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자살한 자는 엄청난 죄로 처형당한 자들보다 더 악한 자로 취급된 것이다.10) 둘째로 이후 약 30년이 지난 561년, 1차 브라가 공의회(Council of Braga)는 교회의 미사 때 자살한 자들을 위한 어떤 추념과 같은 순서를 금지했고, 성시교독과 성가를 부르는 장례가 허락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11) 셋째로 693년 톨레도(Toledo) 공의회에서는 자살 미수자들이라도 그 죄책을 물어 2개월 동안 성도의 교제에서 단절시키고 성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결정을 내렸다.12) 교회가 교회법으로 이것을 명시화 한 흐름은 이후 교회법학자이며 교황이었던 니콜라스 1세(Nocholas 1)의 서신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866년에 니콜라스1세는 불가리아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서신을 통해 자살자들에게 결코 교회가 베푸는 장례의식과 남이 인식할 수 있는 경내 묘지에 장사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13) 이런 결정과 문서들은 자살자에 대한 교회장을 허락하지 않는 관습을 더 곤고히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고 그 흐름은 거의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다.14)
B. 교회역사와 신학자들
1.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자살에 대해 관용적인 당시 로마 지식인의 문화와 경향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하면서 이에 대해 신학적인 입장을 확고히 세운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은 자살 자체보다는 죽음의 방식, 그를 대하는 내적인 태도와 품위를 더 문제시 하고 중시하면서 영웅적인 자살을 두둔했지만, 어거스틴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성경에 믿음의 족장, 선지자, 사도, 그리고 제자들은, 적에게 포로 잡혀가고, 구금당하고, 능욕을 받고, 견딜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당했지만 그 누구도 그 수욕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런 목적으로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중대한 죄악으로 보았다.15) 그는 강간을 당한 뒤 자기의 불명예를 참을 수 없어 목숨을 끊은 로마의 여인을 예를 들면서 비록 이 여인이 그것으로 자신이 간음자가 아닌 순수한 피해자였음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명예를 지키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행동으로 취급했다.16) 악을 벗어나기 위해 더 큰 악을 행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7) 어거스틴은 그는 성경은 악과 고통을 피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을 불허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6계명은 9계명과 달리 “네 이웃”이라는 수식어가 없는데 이것은 이 명령이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하는 명령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2. 아퀴나스
중세 교회가 단계적으로 자살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정하고 가르쳐 온 흐름가운데 아퀴나스의 이에 대한 교리는 더욱 교회의 일정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 1권 20장에서 언급한 것을 기반으로 자살은 자기살인에 해당하는 것임을 재확인하고 세 가지 이유로 자기를 죽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죽임, 즉 살인에 해당하는 죄라고 규정한다.18)
첫째, 모든 것들은 자연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를 지키려고 하며,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것에 대해 어떻게든 저항한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본성(혹은 자연)의 성향과 자비 즉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 자비를 거스르는 것”이다.19) 이런 이유는 자살은 "자연법과 사랑에 역행하는“ (being contrary to the naturel law and to charity)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대죄(a mortal sin)일 수밖에 없다.
둘째, 각 부분은 전체에 속해 있듯이 모든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이고 그래서 공동체에 속해 있다. 그러기에 자살은 공동체에 상처를 가하는 잘못이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고, 그래서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종속되어 있다(신32:39). 인간은 오직 그것을 받을 뿐이지 스스로 종식시킬 권리는 없다. 그래서 자살은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다.20)
이처럼 아퀴나스는 자살이란 본인, 공동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치명적인 죄로 보았는데 이런 그의 신학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어거스틴 신학과 성경의 관점에서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을 중죄에 규정한 그의 신학은 중세 교회의 입장을 확고히 굳히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3. Luther
루터는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만큼 자살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내 놓지는 않았다. 그는 신자들에게도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때때로 우울함이 자살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21) 루터는 그의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방화를 통해 많은 인명을 죽이고 또 그 안에서 자신이 죽는 일은 그 사람에게 사탄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22)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루터는 자살을 다분히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탄의 힘에 장악되어 저지르는 죄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신자에게 예정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염려내지 두려움을 일으켜 우울하게 만들고 절망감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때론 자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23)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보다는 외부의 힘 즉 사탄에 사로잡혀 자살로 이르게 된다고 보았기에 루터는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것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로 단정 짓지는 않았다. “나는 자살한 사람들은 확실히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살한 것은 죽기를 강력히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의 힘에 장악되어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나무가 숲이 우거진 으슥한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24)
4. 칼빈
칼빈은 그의 방대한 양의 주석, 교리문답, 십계명 강해, 그리고 기독교 강요 등의 저작과 문서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자살을 주요 주제로 삼아 다루지 않았다. 오직 성경강해를 해 가는 가운데 사울의 죽음과 아히도벨의 자살에 관한 부분을 설교하면서, 그 두 설교문에서 자살을 취급했을 뿐이다.25) 칼빈은 어거스틴의 자살에 대한 가르침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인간이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면 살아야 하지만, 이생을 떠나야 할 때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이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켜 파수를 서야 하듯이, 인간도 하나님이 보내신 이 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늘 행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보면서, 자살을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러기에 그것은 교만(hubris)에서 나오는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살을 어거스틴처럼 자기 살해로 보면서 이것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26) 그는 고난의 순간에 있어서도 끝까지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신자는 가져야 하는데, 자살은 바로 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인 믿음에 역행하는 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어거스틴처럼 영웅적 죽음조차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보았다. 수치, 고문, 불행을 피하기 위한 자살도 정당화될 수 없기에, 사울의 죽음도 또 다른 죄를 첨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5. John Wesley
웨슬리는 자살을 사회 기강과 관련해서 다루었지만 이것을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사유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살을 자기 살해(self-murder)하는 죄로 확고히 간주하면서 이것에 대해 교회가 더 엄히 제재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당시 18세기 말 당시 영국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자살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영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경건하지 않고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살이 더 많다고 생각했지만, 아울러 영국법이 Gregorian 왕조부터 우울증이거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한 자살은 처벌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자살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스파르타 시대에 자살한 자들의 시체를 벌거벗겨 거리에 매어 달자, 자살이 줄어들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영국도 좀 더 엄격하게 자살자들을 처형하도록 법제화해야 하고, 그래서 그들을 사슬에 묶어 거리에 매달게 되면 자살은 훨씬 줄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27) 물론 교회도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는 죄인 자살에 대해 더 엄격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IV. 자살, 대죄, 그리고 영원한 저주에 관한 교회의 교리
A. 용서받지 못할 죄로서의 자살 인식의 흐름
교회사를 통해 간단히 살펴본 결과 자살이 구원받지 못하는 죄라는 통설은 중세 교회와 로카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회법과 교리에 크게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561년 브라가 공의회에서 교회는 자살한 자에 대한 기도해 주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그 기도가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즉 지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866년 교황 니콜라스 1세가 자살한 자의 장례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내는 가운데, 자살은 사탄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임을 명시했는데, 그것은 자살자의 영혼은 당연히 사탄이 취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28) 중세 교회의 영향을 받은 대문호 단테의 문학작품 신곡이 자살자의 상태를 묘사한 것도 이런 인식을 심화하게 했다. 단테에 따르면 자살한 자들은 9개 층으로 구성된 지옥에서 마귀가 있는 9번째 층에 가장 가까운 7번째 층에서 비참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로 영혼이 던져져 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육체를 내 던졌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 날을 맞아도 육체를 입을 수 없고, 결국 그 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운명인 채로. 그곳에서 숲이 되어 통곡하며 지낸다.29) 단테는 살인자들보다 자살자를 사탄에 더 가까운 곳에 배치해 둠으로 자살이 더 중한 죄라는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그리고 12세기 교회의 대 신학자인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가르쳤던 것은 그런 인식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결정들과 교리들을 통해 자살하면 지옥가게 된다는 인식이 굳게 자리 잡고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이와는 달리, 교회법이나 교리 문답을 통해 자살에 대한 공적 입장을 가르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에 대해 그의 편지와 대화 편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자살자들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살이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생각을 계승했기에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원과 연결시켜 정죄하지는 않았다. 웨슬레는 자살한 자들이 더 큰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경종을 가해야 한다고 자살을 심하게 정죄했지만, 그도 이것을 영원한 저주와 연관시켜 말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시켜 다루면서, 피조물이 교만하고 월권적인 죄로 취급해 왔다. 이처럼 개신교회에는 이 둘의 관계에 공적 결정이나 교리를 제정하지 않았지만, 개신교회 안에도 중세이후로 교회에 계속 내려오던 이 통설이 계속 자리잡아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28)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191. 29) Dante Ahligieri, La Dibina Commedia, 한형곤 옮김,『신곡』 (서울: 도서출판 서해문집, 2005), 149-151. |
B. 대죄(mortal sin)교리와 자살
자살에 관한 통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죄의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를 원죄(originla sin)와 본죄(자범죄, actual sins)로 나누고, 죄의 성격과 심각성에 따라 대죄(mortal sin)와 소죄로 구분하여 이해해 왔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분류한 바 있는데, 이것이 통설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죄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grave matters)임을 알고도(full knowledge) 의지적(deliberate consent)으로 범하는 죄이다.30) 심각한 문제에 해당되는 것은 십계명을 통해 이미 구분되어 있으며, 행동의 죄 된 성격과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범하면 그것이 대죄가 되는 것이다. 소죄는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데, 자기가 범하는 그 죄의 성격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고의가 없이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31)
대죄를 범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자비(God's charity)와 긍휼을 그들의 심령에서 파괴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을 상실하게 한다.32)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관계가 단절된다. 그렇기에 대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고해 성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고해성사는 대죄를 지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새로 역사하게 하고, 성화시키는 은혜를 회복하게 한다.33) 만약 고해 성사를 통해 회개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나라로터 배제되고 "지옥의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of hell)에 처하게 된다.34)
이런 로마 교회의 대죄 교리의 빛에서 본다면 대죄로 취급된 자살은 마땅히 고해성사를 통한 화목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적으로 자살하는 자는 그 순간을 놓쳐버리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할 수 없고, 결국 자살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교회 내에서 내려오는 통설은 로마 교회의 자살 이해와 밀접한 연관 하에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V.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신학
구약성경은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살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하는 것이기에 사형에 처하도록 엄중히 명하고 있지만(창9:6), 모든 살인을 다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모세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쳐 죽였고, 다윗은 살인을 교사해서 간접적으로 살인했다. 물론 그들은 그 행위로 상당한 값을 치렀지만 결국 용서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자기 살인이라 불리는 자살은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A. 회개와 구원의 관계
그것은 자살은 다른 살인행위와 달리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죽은 죄라는 생각이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생각의 주요한 단초를 제공한 가장 오래된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가룟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의 목숨을 끊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가중시켰을 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든 것이 그가 하나님의 긍휼의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파괴적 가책이 발동하여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기회"(chance of a saving repentance)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5) 또 같은 책에서 그는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위한 기회를 남겨놓지 않는 악한 행위[자살]하는 것을 보다는 낮지 않는가?” 라고 말했다.36)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이어졌고 대죄를 범했어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지만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살은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인식은 중세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의 신자들 그것도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단지 ‘사제를 통한’ 이라는 구절이 없어지고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기에 자살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회개하지 못한 죄이기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개신교회는 회개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다. 중대한 죄를 짓고 비록 회개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이 택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받은 바 그 아들됨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만약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회개해야만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면 이것은 자칫 행위 구원과 공로사상으로 미끌어질 위험을 안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K는 사업체가 부도나는 순간을 넘기기 위해 꽤 오랫동안 갚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절친한 친구P에게 곧 갚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친구의 보증을 받아 거액을 대출받아 썼다. 결국 P는 K를 위해 보증을 선 것 때문에 사업체와 가정이 파탄났고, 비관하여 자살하게 되었다. 그러면 고의적 사기를 범한 K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고 하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K는 의도적으로 8계명과 9계명을 어긴 상태이고 친구를 죽음에 빠뜨린 죄을 지었고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단정할 만한 성경적인 근거는 충분하지 못하다. 구원은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에 결코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자살한 자는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메릴 교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는 이런 것에 제한받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구약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든다.37) 살인했고 범죄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확신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 그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노래했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그 증거로 제시하며, 언약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특정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고 보았다.
35) Augustine, The City of God, bk 1. ch. 17 (p. 27).
37) Merill, "Suicide and the Concept of Death in the Old Testament," 325. |
B. 성령훼방죄와 자살
성경에 기록된 유일하게 사함을 받지 못할 죄는 오직 “성령을 훼방한 죄”(the blasphemy against the Spirit)(마12:31; 막3:28-29; 눅12:10)밖에 없다. 예수님이 직접 바리새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권위 있는 신약학자 카슨(D.A. Carson)은 이 죄는 신약의 히브리서의 구절 및 신약의 제반사항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진리를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대속의 죽음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히6:4-6; 10:26, 29).38)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일들과 능력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즉 사탄을 힘입어서 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마12:22-24)은 이 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다. 화란 교의학자 벌카우어(G.C. Berkouwer)는 바라새인들이 귀신들이 쫓겨나는 일과 같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하나님이 나라와 성령의 권능이 예수를 통해 나타나고 계시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예수의 메시야사역을 사탄의 대리자의 사역으로 돌리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석했다.39) 교의학자 바빙크(Herman Bavinck)에 따르면, 이것은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사탄적인 자세”(demonic posture)와 다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함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40) 그런데 후크마(Anthony Hoekma) 교수는 여기에 이 죄의 특징을 하나 더 관찰해서 밝히고 있다. 마가복음 기사(막3:28-30)통해서 바리새인들은 처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계속적"(continually)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30절의 ‘말하다’(elegon) 동사가 미완료(imperfect tense) 시제로 나타난 것을 지적한다.41)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목도한 바 있지만, 계속적으로 이 역사를 거부하고 모독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살이 성령에 대항하는 죄라고 볼 수 있는가? 삶의 어느 순간에 약함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구름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을 성령을 훼방한 죄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42) 그렇게 말하기에 그 어떤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죄의 핵심 성격은 1)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아 알고 있음에도, 2)계속적으로 일관되게, 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그 복음을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다.43) 이 성격의 틀에서 조명해 볼 때 일반적으로 현 사회에서 발생하는 자살이 이와 같은 죄의 특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그 행동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거부한 죄로 연결한다는 것은 꽤나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자가 구원 얻는 믿음을 부인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 내세, 구원 등도 없다고 주장하며,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이기에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차원에서 자살을 택한다면 그것은 이 죄에 해당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자살이 과연 일상의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할 개연성이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극심한 생활고, 참을 수 없는 육체의 고통, 정신적 우울감, 또는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다툼 등의 문제로 한 극단적인 행동 즉 자살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VI. 개혁 신학적 검토: 성도의 견인 교리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고백하는 교리 가운데 진실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Saints)교리가 있다. 이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이 자살 문제를 보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안경이 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에 수록되어 있는 이 교리는 (1)참된 신자는 전적으로 종국적으로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2) 그들은 확실히 끝까지 견디게 되고, (3) 이 확실성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르친다.44) 1절은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용납하고 성령으로 효력있게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한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은혜의 상태에서 세상 끝날까지 확실하게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45) 이 내용은 한번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결코 탈락될 수 없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통해 자살자를 들여다 볼 때, 자살이라는 그 행위 자체는 구원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핵심은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작정에 있기 때문이다.
2절에서 성도의 견인은 “그들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그의 선택 작정의 불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그들 속에 내주해 있는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내주, 그리고 은혜 언약의 성격에 질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다.(웨신, 17장 2항). 이것이 근거하는 주요 구절인 로마서 8장 29절 30은 이에 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성도의 견인은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주체자가 하나님이 시고 그 하나님의 선택의 작성에서 말미암음을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 사도는 그렇기 때문에 “그런즉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이나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롬8:38-39).
이 성도의 견인교리의 빛에서 본다면, 자살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란과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자유 의지적으로 자살을 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도 없고, 또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힘이나 공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자살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구원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이 견인교리는 잘 정리해 준다.
사람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택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살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이 그를 자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반 신자들이나 목회자로부터 간혹 들을 수 있는 유추적 주장이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웨신 17장 3절은 이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대답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의 세력과 자신들을 견인하게 하는 방편을 소홀히 함으로 죄에 빠지며 한동안 그 죄에 머물기도 한다....." 성도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언제나 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신자들도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약함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죄들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그것 때문에 일시적 심판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46) 이것은 마치 구약의 언약의 백성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비록 언약백성이 율법을 일시적으로 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효화하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의 신실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47)
선택된 자라 하더라도 극단적으로 약하게 될 때 극단적인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는 것이 그가 선택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도 성도들이 육체의 약함과 부패함 때문에 또는 사탄의 유혹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여러 잘못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지 여타 죄와는 달리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성격의 중대한 죄일 뿐이다. 평소 매우 경건하게 살며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살아온 신자가 과연 6계명을 범할 수 있을까? 드물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윗도 6계명과 7계명을 범하지 않았는가? 경건한 자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부패성으로 자살과 같은 심한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 교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성도가 자살과 같은 엄청난 죄악을 범했다 해도 그것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실하심과 주권적 사랑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로운 자들의 죄를 위해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인들, 소외된 많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손으로 생을 접은 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의 효력과 범위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롬8: 39)
VII 나가면서: 바른 교리로 말미암는 목회적 안내와 돌봄
A. 결론적 요약
삶의 순간에서 정신적 우울증이 원인이 된 예도 있지만 그 외의 다양한 이유로 이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싫어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할 때, 사람들은 자살을 결행할 수 있고 또 하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을 취할 본래적 권리가 없는데도 자기가 자유를 무한하게 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동시에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학자 오코넬은 이 성격 때문에 자살은 내재적으로 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 교회와 신학자들은 자살을 가장 심한 죄로 간주했고, 경계해 왔다. 이 점은 오늘도 변함없다. 그렇지만 자살한 사람이 반드시 영원한 저주에 처하는 것이 아니다. 자살자는 자살하는 순간 죄를 회개하지도 못하고 죽지만, 하나님은 개별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삶의 과정 전체로 그 사람을 판단하신다. 자살을 범하는 그 인생의 한순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48) 인생이 비록 하나님을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조차도 벗어나려고 하는 행동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막거나 무효화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 자살이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통설은 개혁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B. 목회적 돌봄을 위한 제언
자살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 유족과 남은 교회도 꽤 오랫동안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이런 자들에게 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통설을 바르게 잡고 그것이 근거가 없음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행여나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통설을 사용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에서 말미암는 것이라는 교리를 평소 좀 더 분명하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특히 유족들에게는 이 교리를 바르게 심어주면서, 진심으로 위로와 소망을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작정 안에서 살다가 간 사람이라면 여전히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작정 안에 있을 것임을 확신시켜 줘야 할 노릇이다.
그렇지만 목회자는 자살이 구원 여부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설교시간에 드러내놓고 언급하거나 설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도 그렇게 권고했는데 그런 설교는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49) 특별히 분별력이 약한 청소년들과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는 더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시간에 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고귀함,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그 생명을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아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더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유족들과 남은 성도들에 대한 목회적 돌봄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것은 자살자의 장례 문제이다. 목사와 교회는 이것에 대해 좀 전향적으로 고민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여기에 대해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 구 교회법은 자살한 자의 장례를 완전히 금했으나 새 교회법은 장례식을 거행했을 때 공공적 추문이 될 수 있을 그런 죄인들에 한해서 장례를 금지하고 있다.50)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장례식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은 자들과 유족을 위한 것으로 이해했던 어거스틴의 생각을 깊이 새기면서, 교회는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개 교회나 아니면 상회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고민하고 씨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신원하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