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가?
<베리타스>( 2016. 5. 4. ) 보도문
이상원 교수(총신대)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은 2015년 5월 2일(토) 오전 7시 신반포중앙교회(담임 김성봉 목사)에서 제49회 샬롬나비토마토시민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좌의 주제는 “자살과 기독교 신앙”이며 총신대 이상원 교수가 발표했다.
이상원 교수는 심한 정신질환이나 치매 등 자유로운 결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행해진 자살보다는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전제했다. 거의 대부분의 자살이 정신질환의 상태에서 결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명이다.
그리고 자살의 동기와 목적에 따라서 통상적인 자살행위로 분류할 수 없는 경우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순교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 (강재구 소령, 구명보트의 군목, 전쟁 시 동료들과 국민을 위하여 싸우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전태일의 죽음),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이조시대의 은장도),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한 경우 등과 같이 인간의 생명의 가치보다 열등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밝혔다.
아래는 이상원 교수의 발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철학사적 관점
철학사적으로 볼 때, 플라톤은 자살을 신의 분노를 촉발하는 행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도시국가)에 대항하는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금지했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에서는 자살을 비판할 근거가 없었기에 오히려 자살을 예찬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몽테스키외, 루소, 흄, 괴테, 쇼펜하우어, 니체 등은 자결권의 차원에서 자살을 옹호한 반면에 칸트는 자연법과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자살을 비판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로이드는 인간에게는 삶에의 충동과 죽음에의 충동이 공존하며 이 충동은 윤리적 결단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만일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능가하여 나타나면 인간이 자살을 결행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삶에의 충동은 본능적인 충동이지만, 죽음에의 충동은 본능적이 아니며 외부에서 들어온 침입자에 불과하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거나 강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뒤르껭은 사회학적 요인들에 의하여 촉발되는 자살의 유형으로서 세 가지를 열거했다. 첫째, 이기적 자살은 사회와의 통합의식이 지나치게 약화될 때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 결행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집단 따돌림이 있을 때 자살하게 된다. 둘째, 이타적 자살은 집단과의 통합의식이 지나치게 강화되었을 때 집단을 위하여 결행하는 경우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가미가제 특공대나 9.11자살테러가 대표적이다. 셋째, 도덕이나 규범 등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긴급한 상황에 몰렸을 때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너무 많은 카드빚 등을 지게 되었을 때 자살로써 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이와 같은 사회학적인 원인들을 해소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원인들이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결정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사적 관점
교회사에서 자살을 윤리적으로 허용한 경우는 없다. 초대교회교부들은 모두 자살을 비판했다. 중세시대에는 자살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어 급기야 867년에 니콜라스1세가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로 선언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는 자살행위를 구원의 문제와 직결시켰다. 다시 말해서 자살을 결행했다면 비록 세례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특히, 단테는 자살자를 지옥의 맨 밑바닥에 위치시킴으로써 자살을 혐오했던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살을 윤리적으로 비판했으나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루터는 자살을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명백히 반대했다. 칼빈은 자살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나 성령 훼방죄로 보지는 않았다. 퍼킨스는 자살자가 원래의 자기 모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며, 자살을 결행하는 순간에 회개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과 긍휼의 무한한 깊이를 부각시켰다.
성경의 사례들
1. 삼손이 다곤신당을 무너뜨리고 자결한 경우는 이스라엘 민족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순국행위에 해당한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
2. 사울이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자기 칼에 엎드려 자결한 경우는 하나님의 백성의 시신이 이방인들에 의하여 모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행한 전쟁 중의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성경은 사울이 자살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고 다만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음을 강조한다.
3. 압살롬의 책사 아히도벨의 경우는 명확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히도벨의 자결에 대하여 어떤 규범적 평가도 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그가 아버지의 묘에 장사되었다는 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 가지 실수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나타난 기여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가룟 유다의 경우는 명백하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이다. “제 곳으로 갔다”는 표현은 지옥을 갔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다가 지옥에 간 것은 자살 이전에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자살비판의 규범적 근거들
1. 성경은 자살에 대하여 별도로 언급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죽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살은 분명히 살인행위이다.
2. 인간의 생명의 종결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따라서 자살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탈취하는 행위이다.
3. 사후에 심판이 있고 내세가 있다는 종말관은 자살에 대한 강력한 제동장치가 될 수 있다.
4. 자살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삶에의 충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본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행동인 반면에 죽음에의 충동은 그 창조질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5. 자살은 공동체에 피해를 끼친다. 자살하는 자는 이웃의 구성원들에게 끼칠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아가페 사랑의 태도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황금률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6.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면 그 고통 안에는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신학적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확신은 자살에의 충동을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자살한 기독교인의 구원의 문제
1. 기독교인으로서 자살한 사람의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생각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이교도들에게서 기원한 사상이 중세시대에 가톨릭교회 안에 스며들어온 것이다.
2. 자살은 고의적 살인의 경우와는 달리 정신적으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결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윤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에 앞서 정신질환치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한 순간의 실수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다. 예컨대, 다윗이 밧세바를 탈취하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지만, 이 비열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전 생애와 그의 중심을 보시고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내리시고 견인의 은혜로서 시종일관 붙드셨다.
4. 구원은 실존적으로 범한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룩하신 의로움만이 유일한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서, 사고 등으로 급작스럽게 죽게 되었을 때 회개할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억의 한계 때문에 생각해낼 수도 없는 경우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게다가 자살하는 사람이 회개를 하지 못한다는 판단도 근거가 희박한 생각이다. 구원은 인간 편에서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가능하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편 강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다.
5.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선언은 특히 청소년들과 일부 성도들에게 교육효과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를 훼손시켜 가면서까지 교육효과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 교육효과는 구원의 진리의 터전 위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 속한 교회들처럼 행위구원론이나 윤리주의를 따르게 되면 구원의 진리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고 교회의 터전을 무너뜨리게 된다. 개혁주의는 믿음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터전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야 할 성화된 삶을 철저하게 강조해야 한다. 구원의 은혜와 행동하는 믿음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