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의 바울 이야기, 그 감동

by dschoiword posted Feb 0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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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의 바울 이야기, 그 감동

   

동료 신학자의 책을 정독하고 진가를 칭찬하는 것은 용기 있는 학자만 할 수 있다. 아래는 최더함 박사가 <크리스천투데이>( 2016. 2. 1.)에 기고한 글이다.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의 제1장 바울을 읽고 쓴 서평이다. '이단의 괴수'(행 24:5) 바울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접근했다고 칭찬한다.

   

image 최더함.jpg   최더함 박사

 

바울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서평] 최덕성 박사의 <위대한 이단자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이야기했다. 바울과 동시대를 살았던 주의 사도와 제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증인들이 바울을 이야기했다. 교부들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그 이후의 웬만한 신학자들이 그의 생애와 사상과 신학을 연구하고 논했다. 그가 기독교회에 이바지한 공로를 평가하고 그 교훈에 대해 설파했다.

 

비록 학문적으로 수졸(守拙: 위기구품 중 말단의 품계로, 바둑에서 프로 초단을 일컫는 말)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 또한 바울을 공부했다. 바울을 알고 있고, 바울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그 영광을 흠모하며 나름대로 그를 논하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바울을 이 사람만큼 탁월하게 이야기한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 그의 바울 이야기는 단연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아부(?)를 떨며 그의 바울 이야기를 극찬하는 것은, 모두의 시샘과 질책과 조소의 '거리'가 될 위험한 발상과 시도임을 잘 안다. 나는 한국교회 안에, 이른 바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그 심성의 바닥에 어떤 것들이 주로 깔려 있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언론인이었던 고 이규태 선생은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논하면서 '콩나물 문화'를 거론했었다. 한국은 키가 먼저 크는 콩나물을 우선 뽑아 국을 끓여 먹는 사회라고 했다. 남이 두각을 나타내면 헐뜯고 비난한다. 그런 분위기가 한국교회 안에 팽배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소개하면 앞으로 비난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바울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최덕성이다(개인적으로 연배로 보나 위치적으로 보나 이렇게 호칭하는 것은 결례이지만,  공적 차원에서 일컫는 부득이한 표현임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20년 이상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과 교의학을 가르친 신학교수였다. 지금은 모 교단 직영 신학교의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위해 20여 권의 신학 저작들을 발표했다. 그 중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은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한 작품이다. 최근에는 <신학충돌>과 <신학충돌 II> 그리고 <교황신드롬>을 연속으로 발간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WCC를 중심으로 한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사회구원지상주의 등의 실체를 밝혀냈다.

 

그는 1월 중순경 한 권의 책을 내게 보냈다. 출간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의 신간이었다.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얀색 표지에 <위대한 이단자들>이라는 제목과 그 아래에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라는 부제가 찍혀 있었고, 톱으로 켜임을 당하는 기독인 또는 이단자가 처형받는 작은 그림 하나가 책의 하단부에 실려 있다.

 

작년 여름 무렵, 그는 나에게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역사학자로서 무언가 공헌을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결심의 결실이다. 그는 이 책에서 2천 년 기독교회사를 통해 주의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순교한, 바울 사도부터 시작하여 주기철 목사까지 17명의 위대한 이단자들, 정통신앙인들, 순교자들의 생애를 역설적 제목으로 추적하고 평가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책의 내용 전부를 거론하기보다, 그 중 그가 첫 인물로 내세운 바울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소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이야기만으로도 그 책의 나머지 내용과 탁월성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 하나만으로 그의 독보적 창의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사용하는 단어가 보여주는 풍성한 어휘력과 독특한 관점이 두드러진다. 그의 독특한 단어는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다. 그렇다고 그의 단어들은 생경한 것들이 아니다. 속세에서 사용하는 '왕따' 등의 단어들을 함부로(?) 구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는 단어들을 새로이 조합하기를 즐긴다. <신학충돌>에서 그가 만들어 보여 준 '개종전도금지' 같은 용어는 너도나도 차용하게 된 지 오래다. 그는 이번 책에서도 같은 기술(?)을 구사한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기독교를 '신종 기독교,'  '자연적 생명(bios) 문화공동체'라 부른다. 예수 처형 후 예수를 따르는 것을 '예수신앙운동'으로 정리한다.

 

반면 그가 구사하는 문장은 단조롭다. 85개의 문단 중 약 40개가 단 하나의 주어인 '바울은'으로 시작한다. 보통 이 정도의 글이면 맥이 빠지거나 알맹이를 건질 수 없다고 여길 게 뻔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주어에도 불구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들이 단소의 호흡처럼 높낮이와 속도를 적절히 맞추어 가면서, 독자를 신비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카메라 앵글을 기억하는가. 그 카메라는 잠시도 포즈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넓거나 좁은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문장이 그렇다. 한 문장에 사로잡혀 계속 다른 문장으로 끌려가게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음 장면에서 전혀 예상 밖의 세계로 안내를 한다. 묘한 흥분과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나아가 그의 글을 맛깔나게 하는 것은, 도중에 잠시 낮은 바위나 언덕 위에 앉아 읊조리듯이 소설 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 상상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여유로워서, 마치 산길을 거친 숨소리로 오르던 한 사람이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여유롭게 땀을 식히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표현들이다.

 

"바울은 자신의 결혼, 아내, 자녀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이 결혼을 했으면서도 아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내가 다마스쿠스 길에서 회심한 바울을 싫어하여 헤어졌을 수도 있다(고전 7:10-15, 15쪽 각주)."

 

"베드로는 보름 동안 바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갈릴리 바다 고기잡이 이야기, 장모 소식,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큰 자인가 하고 다투었던 화제로 시간을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울에게는 절실하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과연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 지상에 있는 동안 가르친 것들은 무엇인가? 바울 자신이 계시를 받아 전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는 확실한가(21)?"

 

최덕성의 글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다.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헨드릭슨은 바울을 '뛰어난 지성과 강철 같은 의지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평했다. 이런 식의 글은 좀 밋밋하다. 이에 비해 최덕성은 한 편의 웅장한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은 장면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바울은 부모와 함께 터키 동남쪽 다소로 끌려갔다. 흩어진 유대인 이민자, 곧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바울이 자라고 청소년기를 보낸 '2의 고향' 다소에는 흑염소들이 뛰놀고 마와 옥수수와 포도가 자라고 있었다(13)."

 

"바울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와 만나거나 마주쳤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들은 (이에 대해)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수 있다. 주후 3047일 금요일,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 일몰 때 죄수들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었다. 버둥대는 동물들을 짊어지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 도살된 가축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다(15)."

 

글 쓰는 기술만을 가지고 그의 바울 이야기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바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마치 그는 바울의 곁에 앉아 그와 대화하듯, 그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생각들까지 집어내고 있다. 최덕성의 글은 완전한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런 실력은 이미 여러 대학들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 쓰기>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먼저 서두에서 바울 메시지의 핵심인 '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를 소개하며 글의 논지를 앞세운다. 그런 다음 자랑스러운 유대인, 회심 체험, 바울과 베드로, 복음 전도, 이단의 괴수, 바울과 아볼로 등, 바울의 일생을 시간 순으로 전개하면서 그의 일관된 사역과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맺음말로 패러독스를 다시 상기시킨다'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는 정말로 패러독스한 사람이다.

 

최덕성은 바울의 약점까지 언급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볼로가 바울에게 어떤 존재였는가를 세밀하게 파고든다. 그에 의하면 바울은 독불장군 유형의 사도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괴기한 종교발명가'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그 앞에,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 개종자이자 구변이 탁월하고 구약에 정통한 아볼로가 등장했다.

 

아볼로의 지적 능력은 오히려 바울을 능가했다. 그런 아볼로가 바울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가 지닌 철학적·지적 탁월성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아볼로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지적 사유가 복음을 손상시킬 것을 우려했다. 바울은 신학적 사변성과 철학적 방법으로 인기를 끄는 아볼로와 소수의 지식인들을 경계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고린도전서 117절부터 216, 47-8절 등의 말씀을 기록했다. 물론 최덕성이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신종 기독교'를 주창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고 싶었음을, 신중한 독자라면 눈치챌 것이다.

 

나는 지금 바울에 이어 저스틴, 아타나시우스, 피터 왈도, 리용의 빈자들, 존 위클리프, 얀 후스를 읽고 있다. 아마 밤을 지새우며 이 책을 다 읽을 것이다. 성령께서 넉넉히 주시는 감동 덕분에 모든 피곤함을 잊게 될 것이라 믿는다.

 

나는 한국교회 안에 존재하는 독보적이고 탁월한 작품 또는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가진 인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소개하고 기쁨으로 맞이하고 치켜세우는 풍토가 도래하기를 염원한다. 이제 깎아내리는 일은 그만두자. 그것은 소인배 같은 행동이다. 오늘 최덕성의 바울 이야기, 그 감동이 새로운 장의 출발이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최더함 박사(아리엘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 도서출판 리폼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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