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
최덕성 교수의 신간 저서 소개
기독교 정통신앙은 이단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이단이 도전할 때 잠자던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대응했다. 성경과 논리로 항변하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의 핵심 진리들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정통신앙 교리를 정식화했다. 아름다운 진주가 조개 안에서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각고의 제작 과정을 거쳐 화려한 보석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진주를 버리고 조개껍데기를 얻겠다는 생각으로는 진리를 정면으로 대할 수 없다.
역사는 대부분 기득권자, 승자, 정복자의 기록이다. 권력 장악자가 자기의 관점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건을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기술한다. 패배자, 피지배자는 자신의 역사에 대한 할 말을 잃는다. 역사가의 눈길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권좌의 주인공이 바뀌면 새 관점으로 역사를 읽고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 중심의 시각을 가지면 기득권 집단이 편협하게 기록한 역사의 허점들이 보인다.
기독교사상사를 전공하고 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과 교의학을 가르쳐 온 나는 오래 전부터 억울하게 희생당한 순교자들, 이단으로 정죄당한 위대한 증인들의 이야기를 엮고 싶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억울한 일을 당해 보면 거룩, 순결, 정통이라는 가면을 쓴 종교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한 충성스런 증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다수파, 승리자, 기득권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해자, 소수파, 진리수호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균형 있게, 공정하게 파악하는 눈이 생긴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가 만나는 위대한 이단자들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선 정통신앙인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쳤다. 복음진리를 고백, 파수하려고 자기 시대의 신앙적 격랑을 온 몸으로 헤쳐 나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정치적 힘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유와 석방을 거부하고, 핍박과 고문을 달게 받았다.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었다.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다”(히 11: 36-37). 맹렬한 불꽃더미에서 재로 산화되었다. 순교자의 반열에 든 이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더 좋은 것, 영원한 것, 영광스런 것을 상급으로 받았다.
교회는 종종 상을 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인들에게 벌을 주기도 했다. 진리 파수꾼들을 공격하고 박해했다. 처형, 파면, 정직이라는 끔직한 고통을 주었다. 로마교회, 로마가톨릭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이 아니라 힘의 논리와 당파적 시각으로 이단정죄와 처벌을 해 왔다. 총회와 공의회는 실수했고, 범죄를 저질러 왔다. 교회의 이단정죄 결정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기독인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교회의 결정에 순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위대한 이단자들은 진리가 평화공존 형태로 존재할 수 없음을 교훈한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는 교회를 해치는 맹독이다.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은 언제나 진리판별의 기준이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백성 또는 같은 신앙고백공동체의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대상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신앙고백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우리의 위대한 이단자 탐방 여행은 경천동지할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교회는 위대한 이단자들에게 신세를 졌다.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은 용사들에게 신세를 졌다. 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하고, 부당하게 핍박당한 자들이 정통신앙 수호,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통신앙은 주로 교회 변두리 인물들이 전수했다. 정통신앙인들은 진주를 버리고 조개껍데기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평화공존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거부했다.
둘째, 이단판별의 주체인 교회와 공의회는 많은 오류를 범했고, 죄악을 저질렀다. 위대한 이단자들은 교회가 저지른 자가당착, 적반하장의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교회의 결정을 절대화하는 교회교(Churchanity)의 위험을 경고한다. 실수하거나 범죄한 교회의 급선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과 무관한 이단판별의 희생자에 대하여, 교회가 신속히 재심을 하고 결의를 번복하고 원인무효를 선언함이 정의롭고 양심적인 태도이다.
셋째, 교회는 위대한 이단자들의 등장을 재촉한다. ‘별들의 전쟁’에 뛰어드는 진리의 투사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위대한 이단자들은 성경적 진리가 무시당함을 관망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글을 썼고, 행동했다. 자기 시대의 과제를 부둥켜 앉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서 신앙의 격랑을 온 몸으로 헤쳐 나갔다. 영광과 고립이라는 양날의 칼을 지니고 난관을 극복하고 당대의 한복판을 헤치며 치열하게 살았다. 이들은 거짓과 뒤섞인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거룩한 교회가 거짓과 오류가 혼합된 터 위에 서 있을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새 인물들을 붙잡아 교회개혁과 부흥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위대한 이단자들을 세워 진리증언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이바지하게 한다. 복음과 진리의 불빛이 희미해지고,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할 때, 교회에 의해 이단자로 정죄되거나 이단자 취급을 받은 자들은 오히려 교회의 정통신앙, 정통신학을 강화하고, 거룩한 삶을 고무시키고, 신앙고백공동체의 갱신을 자극해 왔다.
이단판별과 이단정죄의 과제는 교회와 기독인들에게 맡겨진 사도적 직무의 일부이다.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합리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공정하고 엄격한 이단 판별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보호하는 일이다.
가라지를 뽑다보면 알곡을 제거하는 경우가 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수 있다. 상을 주어야 할 자에게 벌을 주고, 힘의 논리, 기득권, 다수 판단을 기준삼아 결정한 것을 절대화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새 시대를 주도할 복음적인 ‘이단자’가 등장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리한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내걸고 이런 저런 결함을 구실 삼으며 이단자로 정죄하지 않을까? 자파 방어적, 이기적, 세속적 까닭들을 들이대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정치적 동기, 교권주의, 자파세력 유지 목적의 구실을 들이대지 않을까?
이단 심의 과정과 단죄에는 적법한 절차도 중요하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한 도르트총회(1618-1619)는 여섯 달 동안에 걸쳐 154차례의 회의 끝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 조사 대상자와 고발자를 불러 의견을 충분히 듣고 검토하는 심도 있는 논의 과정을 거쳤다. 한국교회의 이단정죄 방식은 도르트총회 시스템보다 열등하다. 예수를 심문한 유대교 법정보다 뒤떨어진 것 같다. 정당한 이단 심문은 당사자를 직접 불러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객관적’ 검증절차를 거친다. 석명, 변증, 변론의 기회를 준다.
예수께서는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제물을 드려라”(마 5:23-24)고 가르친다. 미흡하거나 잘못된 점은 교정하도록 사랑 안에서 지도, 계도(啓導)함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억울한 자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속히 신원(伸寃)해 줌이 마땅하지 않은가?
교리적으로는 이단이라고 단죄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질의 자극적인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인간의 죄성과 무의식적 공격 욕구를 자극하여 억눌린 카타르시스를 해소시켜 마음을 사로잡는 자들은 교회를 어지럽힌다. 반골기질을 배타적 발언으로 건실한 교리를 가진 교회들을 폄하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자파에만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성령의 은사를 상품화하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괴기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물질적 번영과 현세적 기복과 은사주의로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소속 교단조차 함량미달의 ‘종교 기술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교회는 사랑 안에서 교정을 요구한다. 그릇된 부분을 교정한 뒤에 한국교회의 대열에 들어서도록 지도한다. 배우고 고치고 버리겠다고 약속하고, 한국교회와 함께 가겠다고 하는 자들을 품는다. 배타적 태도를 버리지 않고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칠 수밖에 없다. 교정과 반성과 배움의 기회를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는 전문신학자들로 이루어진 한국교회 ‘신학자회의’(Theologian Council) 구성을 제안하는 바이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순수한 학자들,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확실하게 믿고 고백하면서 사심 없이 공정하고 학문적으로 판별할 신학자들로 구성된 신학자회의는 한국교회의 갈등을 줄이고 권위와 위상회복에 이바지할 것이다. 당사자와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고, 사실 확인을 한 뒤에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갖도록 하고 오류 또는 미숙한 점들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사랑으로 지도한다.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그 결과를 교단에 통보하고 공적인 언론매체를 거쳐 교계에 공개적으로 사실을 알린다.
이단 시비와 관련된 한국교회의 최대 현안은 이단판단의 주체다운 권위와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이단의 규모가 커지고, 교회의 피해는 심각해지고 있다. 변종 이단, 무례한 이단, 악질적인 이단이 설쳐대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한국교회의 범 교단 차원의 공동 협력이다. ‘신학자회의’ 구성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시대적 과제이며, 이단의 악영향을 막고, 교회를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는 비책이다.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
머리말
차례
제1부 바울에서 종교개혁전야까지
1. 바울
2. 플라비우스 저스틴
3. 아타나시우스
4. 피터 왈도
5. 리용의 빈자들
6. 존 위클리프
7. 롤라드 신앙운동
8. 얀 후스
9.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제2부 루터에서 주기철까지
10. 마르틴 루터
11. 울리히 츠빙글리
12. 존 칼빈
13. 재세례파
14. 토마스 크랜머
15. 그레이스앰 메이첸
16. 프린스턴 신학자들
17. 주기철
제3부 이단 패러독스
18.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
19. 중세교회의 이단정죄: 자가당착∙적반하장
20. 이단판별의 주체와 기준
21. 이단 바로 보기
맺음말: ‘신학자회의’ 구성을 제안하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622쪽, 양장, 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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