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칼빈에 대한 질타, 역사적 정황 고려하지 않은 판단
감리교계 인터넷 신문 '당당뉴스'에 이단자 세르베투스와 관련하여 종교개혁 신학자 존 칼빈을 폄하하는 글이 게재되고 그 글이 SNS 세상을 돌아 다닌다. <어쩔까나 한국교회>의 저자 신성남은 "신학은 '정통', 사역은 ‘밥통'"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칼빈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신성남의 역사 이야기는 편향을 넘어 악의적 왜곡으로 보인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며, 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는 맹독을 지니고 있다.
명예훼손 행위는 제6계명과 제9계명 위반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명예는 산자처럼 보호받아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튜브에는 "칼빈의 만행"(게시자 babuzizi)과 "기독교인이 보면 까무러칠 영상"(게시자 김기훈)이라는 제목의 저질의 동영상도 사실을 심각하게 호도하고 있다. 칼빈이 58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살인자이며, 끔직한 고문자라고 악평한다. 증거가 불확실한 주장을 펼치면서 마치 진귀한 사료를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선전한다.
칼빈은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정통교회나 장로교회에만 소중한 인물이 아니다.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칼빈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로마가톨릭, 재세례파, 아르미니우스주의 감정으로 정확한 근거 없이 신학자를 비방함은 기독인다운 처신이 아니다.
터무니 없는 비방이 쏟아질 때는 무대응이나 최선의 방도일 때가 있다. 칼빈 생존 시에도 세루베투스와 관련하여 칼빈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다. 카스텔리오와 쿠리오였다. 칼빈은 그들의 비방에 대응하지 않았다. '이단자의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단자와 다름없는 자들의 주장에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칼빈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제네바 시 의회의 요청에 따라 세르베투스 사상의 이단성을 조목조목 지적해 준 적이 있다. 세루베투스 사건은 칼빈에 대한 편협한 지속적 논점일탈의 오류와 그를 향한 인신공격의 빌미가 되고 있다. 칼빈이 사람을 죽였거나 끔직한 고문행위를 했다면 범죄자로 기소되어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칼빈은 고종명했고, 제네바 시내의 프랑 팔레 공동묘지에 뭍혔다.
아래의 글은 필자의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2015)의 "칼빈"에 관한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책은 올해 12월 초에 선을 보일 예정이다. 칼빈과 세르베투스 사건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정확한 이해를 돕고자 소개한다.
칼빈과 이단자 세르베투스
미하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양측으로부터 이단자로 정죄되고 제네바에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제네바 시에서 전개된 재판 과정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책이 담고 있는 이단 주장 38개를 뽑아 시 의회에 넘겨주었다. 고통스런 화형 대신에 고통이 적은 참수형을 권했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동북부 아라곤 지방 빌라노바에서 태어난 났다. 칼빈과 동갑내기이다. 툴루즈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의학논문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대학에서는 지리학과 점성술을 강의했다. 세르베투스는 재세례파 출신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자신이 유아기에 받는 세례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러므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에 복종하지 않고 공무원 되기를 원치 않으며 군 복무를 거부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의 오류들』(1531)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는 두 개의 대화집과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하나의 논문을 저술하여 정통신학에 맞섰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지도자들을 “교회의 폭군들”이라고 비난했다. 세르베투스의 신학사상은 뒤죽박죽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신비주의적이고 때로는 광신적이었다. 예리하고 명석해 보였다. 그러나 정확도와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추종하는 학파나 분파가 없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이며 무신론이라고 했다. 세 신(神)을 믿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이다.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고스와 하나님의 아들은 동일하지 않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속성의 교류라는 것은 없다.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성경구절들(요일 5:7; 요 10:30; 요 14:11; 롬 11:36)과 세례 선언문(마 28:19)과 사도적 축복(고후 13:14)에 나오는 성부 성자 성령은 세 위격이 아니라 세 가지 성향이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는 신탁(神託: oracle)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세르베투스는 의사 시절에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 왕으로 해석하는 글을 발표하고 하나님에게 영적인 아내가 있었는가, 성(性)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들을 쏟아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성가신 질문을 했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속에 있는가? 인간은 언제 그곳에 들어가는가? 기독교의 세례는 성찬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 신약성경의 두 성례는 무슨 목적으로 제정되었는가? 칼빈은 세르베투스에게 몇 차례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30차례에 걸쳐 질문 편지를 보냈다. 성례에 관한 자신의 글을 읽어보라고 하면서 보냈다. 『기독교강요』를 읽고서 책에 자기의 비판 메모를 적어 칼빈에게 보냈다. 칼빈은 시간낭비를 하지 말라고 했다. 정중함과 겸손이 중요하다고 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하나님을 괴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을 셋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삼위일체에 관한 공개 논쟁을 파리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공개토론(1534)이 절실하다고 했다. 칼빈은 약속한 장소에서 당도하여 기다렸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파리는 칼빈에게 매우 위험한 장소였다. 체포되면 이단자로 정죄되어 처형당할 수 있었다. 칼빈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세르베투스를 오래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도 성가신 편지를 보냈다. 제네바의 개혁교회 기독인들이 하나님도, 진정한 신앙도, 선행도 없는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제네바 교회가 참 하나님 대신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을 믿고 예배한다고 거칠게 공격했다. “당신들에게 저주, 저주, 저주가 있을 지어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세르베투스는 저작물, 편지, 변증문을 모아 『기독교 복원』(Restoration of Christianity)이라는 이름의 책을 출간했다. 앞서 출간한 “삼위일체의 오류들에 관하여”와 그리스도의 왕국, 신앙, 공의에 관하여 다룬 글, 전쟁과 적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한 글, 칼빈에게 보낸 편지 30통, 적그리스도의 표지 60가지, 멜랑히톤에게 보낸 변증문을 그 책에 담았다. 로마의 교황은 일곱 개의 머리와 뿔을 가진 거대한 붉은 용이며, 니케아공의회가 한 분 하나님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했다. 자신은 교황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들의 폭정을 전복시켜 순수한 기독교 본래의 모습을 복원시키는 소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자기의 책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맞먹는다고 자찬했다.
프랑스의 리용을 포함하는 비엔 지역의 로마가톨릭교회 추기경은 세르베투스의 체포하라고 명했다. 붙잡혀 이단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세르베투스는 자기주장을 변명하고 도주했다. 궐석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단 교리를 퍼뜨리고, 왕의 칙령을 어기며, 왕의 감옥에서 탈출했음을 근거로 화형 처벌을 선고했다. 세르베투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면서 그의 책들도 함께 불태웠다. 재산을 몰수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세르베투스는 제네바로 도주했다. 한 달 쯤 머물렀을 즈음의 어느 주일에, 교회에서 발각되었다. 경찰은 시 의회의 이름으로 그를 체포했다.
세르베투스에 대한 판결은 제네바 시 의회의 권한이었다. 칼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단자 재판은 몇 달에 걸쳐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핵심 혐의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위격과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이단 사상을 지녔으며, 신성모독의 내용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는 것이었다. 제네바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비방 혐의가 추가되었다. 세르베투스를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때 세르베투스는 대담하게 말했다. 세속 법정이 이단 사건을 재판함은 정당하지 않다. 자신은 제네바의 법을 어긴 적이 없고, 반역자도 아니고 난동자도 아니며, 자신의 주장을 지식인들의 논의의 주제로 던졌을 뿐이라고 했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했다. 제네바의 헌법과 법령은 이단자와 신성 모독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비엔에서 온 어느 장교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사형선고문을 전달하고서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세르베투스는 비엔에 돌아가면 화형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제네바에서 재판을 받고 싶어 했다. 스스로 세속법정의 종교적 사안 재판을 요청했다. 서면 토론을 요청했다. 법정은 공정한 재판을 하려고 칼빈에게 세르베투스의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항목들을 간추려 달라고 요청했다.
칼빈은 시의회의 요청을 반기지 않았다. 거절하지도 않았다. 당시, 칼빈은 정치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특정인을 성찬식에 참석시키는 문제로 시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세르베투스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그가 매우 위험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단호했다. 이단자는 뉘우치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든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세르베투스의 책에서 이단 명제 38개를 뽑아 라틴어로 적어주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이 작성한 38개의 항목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했다. 그의 항변은 공격적이며, 예리하고, 신랄했다. 성경구절과 견실한 논증을 곁들였다. 칼빈을 “마술사 시몬,” “살인자,” “광야의 맹인,” “중상 모략꾼,” “천박한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제네바 시가 오히려 마술사인 칼빈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기에게 손해 보상금으로 지급하라고 청원했다.
제네바 시 의회는 관할 지역 안의 네 개의 교회들에 질문서를 보내어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답을 요청했다. 교회들은 만장일치로 그의 신학적 주장들을 정죄했다. 어느 교회도 이단자 처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시 의회의 검사는 이단 교리와 신성모독에 대한 대중의 공포감, 교회들의 만장일치 판단, 제국 법 존중을 근거로 세르베투스를 기소했다. 제네바 시 의회는 그에게 사형과 화형 처벌을 선고했다.
고령의 파렐은 사형선고를 받은 세르베투스를 아침 일찍 찾아가 처형 시점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세르베투스에게 주장을 철회하라고 권했다. 이단자 세르베투스는 옹고집이었다. “그리스도가 성육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성경구절이 하나라도 있으면 인용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사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면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범죄하지 않았다. 나는 사형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외쳤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44세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당시의 자유사상가들과 재세례파는 이단 처벌의 가혹성을 질책했다. 칼빈이 이단 처형을 옹호한 지 한 달 뒤, 카스텔리오와 쿠리오라는 가명의 저자가 바젤에서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는 책을 출간했다. 종교적 관용, 불관용에 관한 성경구절들과 교부들의 글을 검토한 책이었다. 요지는 다양한 분파들이 각기 자신들의 원칙만을 고수하면, 한 분파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분파들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이른다는 것이었다. 박해는 이단자들과 종교적인 위선자들을 양산한다. 사자(獅子)가 자신을 풀어준 사람들을 향해 덤비는 것과 같다. 카스텔리오의 외침은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외친 볼테르, 침례교도, 퀘이커 교도들을 예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구원에 제한을 둘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확신, 종교다원주의, 만인보편구원주의 시대를 내다보고 있었다.
제네바 시의 제도와 법률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자와 신성모독자에 대한 사형처벌은 정당하다. 칼빈과 세르베투스는 종교적 불관용의 시대에 살았다. 신앙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과 인도주의가 무르익지 못한 시대였다. 당시의 엄격한 의무감, 공중의 법, 사회의 지배적 정서는 오늘날의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정의 원칙과 인도주의와 사상의 자유와 조화되지 않는다. 세속통치자의 이단자 처벌이 제도화 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재세례파 처벌, 이단자 재판, 마녀사냥이 시행되고 있었다. 시 의회는 이단자들에 대한 추방, 투옥, 수장, 참수, 화형, 교수형 처벌을 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완고한 이단 처형에 찬성했다. 야만적이고 가혹한 처벌 풍토는 기독교 정신의 진정한 표상인 박애주의가 등장한 17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세르베투스에 대한 칼빈의 접근이 정당하다는 평가가 19세기까지도 지배적이었다. 칼빈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재적 허풍쟁이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올 경우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칼빈은 성가시고 골치 아픈 이단자를 용서할 수 없었는가? 원수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없었는가? 조용히 떠나라고 권하거나, 시 의회에 제네바를 떠나는 정도의 처벌을 하라고 권할 수 없었던가? 왜 자기의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 방도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세르베투스는 그가 호소한 대로 제네바에서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
칼빈은 세르베투스 처형에 대한 견해를 바꾸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사건이 종결된 지 9년 뒤에, 그 사건과 관련하여 자기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서 이단을 엄격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아래의 글(1562)을 남겼다.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이단성으로 말미암아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어찌 그게 나의 뜻대로 된 일이란 말인가? 그의 불경건 못지않게 그의 교만이 그를 파괴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제네바 시 의회가 나의 권고에 따르기는 했지만, 여러 교회들의 의견을 따라 그의 지독한 신성모독을 처벌했다. 그것이 어찌 나의 범죄란 말인가? […] 멜랑히톤의 판단에 따르면, 후손들은 교회에서 이처럼 유해한 괴물을 처치한 일과 관련하여 내게 은혜를 입고 있다.
멜랑히톤은 칼빈의 세루베투스에 대한 이해를 지지했다. 세르베투스와 칼빈은 모두 다 자기의 양심에 충실했다. 세르베투스 사건에 대한 칼빈의 불관용을 일방적으로 질타함은 당대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다. 이 사건은 칼빈에 대한 편협한 지속적 논점일탈의 오류와 그를 향한 인신공격의 빌미가 되고 있다.
최덕성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이며 교희학 석좌교수이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위 글은 <크리스천투데이> "최덕성 컬럼"에 게재 (2015. 11. 4.)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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