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신학교 전경.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을 계승한다
구 프린스턴 신학방법론
원제: 찰스 핫지의 신학 방법론 중심으로 본 프린스턴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연계성
서론
약 40년 전, 예일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시드니 알쉬트롬(Sydney Ahlstrom)이 1955년에 출간된 <교회사>(Church History)지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미국 신학 간의 연계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 뒤로 이 논제는 복음주의 신학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알스트롬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은 칼빈의 영향을 무시했으며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으로 신합리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따라서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은 순수한 개혁주의 전통을 변질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미국의 근본주의 역사가 어니스트 샌딘(Earnest Sandeen)에 의해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샌딘은 자신의 주저 <근본주의의 뿌리>(The Roots of Fundamentalism)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투레틴과의 연계성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1881년에 성경의 무오성 교리를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샌딘의 주장은 또 다시 로저스(Rogers)와 그의 제자 맥킴(McKim)에 의해서 한 차원 더 발전되었다. 로저스와 맥킴은 <성경의 권위와 해석>(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에서 샌딘의 주장을 따라 성경 무오성 교리가 19세기 프린스턴 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구원의 영역뿐만 아니라 과학과 역사적인 면에까지 확대시키는 성경관은 최근의 현상이며, 전통적인 성경의 권위는 구원과 행위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오(Inerrancy)가 아닌 불오(Infallibility)가 적합한 개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프린스턴 신학 간의 연계성을 널리 확산시킨 인물은 역사신학자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이다. 주저 <근본주의와 미국문화>(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개혁주의 신학, 특별히 프린스턴 신학을 지배했다고 보았다. “인간의 지성은 영적인 분야에서 맹인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은 성경 저자의 유오한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성경을 사건 자체에 대한 성경 저자의 무오한 증거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마스덴은 성경의 무오 교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전적 부패라는 칼빈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성경은 유오할 수밖에 없는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성경을 보는 관점에 반영되어 성경 무오교리를 낳았고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반진화론 사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마스덴은 성경의 완전무오성 대신 성경의 정확성을 다만 신앙과 행위에 제한시키면서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 무오’를 주장한다.
프린스턴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에 관한 논제는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일련의 커다란 쟁점으로 비화되었다. 이 쟁점은 비단 조직신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신학계와 신약신학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고 한 신학 학파와 한 철학 학파 간의 연계성을 넘어서, 이 쟁점은 성경 영감론에 대한 근본적인 재물음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논제가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 좌파와 우파 간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권성수 교수가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1989)라는 소논문에서 ‘구프린스턴의 신고안’이라는 소제로 이 쟁점을 다루었으며, 박용규 교수가 “프린스턴 신학과 보편실재론”(1994)이라는 소논문에서 이 쟁점을 보다 폭넓게 다루었다. 공통적인 것은 이 두 교수의 입장이 모두 복음주의 우파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는 점이다.
이 글은 프린스턴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이라는 논제를 취급한다. 이 논제를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프린스턴 신학자 찰스 핫지(Charles Hodge)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먼저, 신학의 학문성에 대한 서론적인 언급을 다루고, 다음으로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을 중심으로 프린스턴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신학의 학문성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과연 신학이 학문인가?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신학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학문은 드물 것이다. 철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구약 성서의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신학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중세기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구에 대학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던 14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신학과를 가지지 않은 대학은 설립될 수 없었다.
근대에 이르러 신학과를 가지지 않는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대신 신과대학이 단독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학의 학문적 성격, 곧 학문성이 점차 의심스럽게 되었거나 부인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한 교리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13세기에 여러 가지 학과를 가진 대학이 설립되면서 그의 학문적 성격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자연과학적 방법을 가지지 않은 학문의 분야들은 그들의 학문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무엇이 학문이며 무엇이 학문이 아닌가를 결정하는 규범이 되는 것은 자연 과학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았다. 그리하여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물들을 연구하는 분야의 학문들은 학문이 아니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신학이 의심을 받게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철학도 이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학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신앙 내지 신념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적 방법이 주도하는 학문의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변천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과 역사의 현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현실의 모든 분야들이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과학적 방법 및 표상과 부합하는 학문만이 학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딜타이(W. Dilthey)였다. 그는 자연과학에 대한 정신과학의 차이를 주장하면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그의 대상으로 가진 학문들의 전체”를 가리켜 정신과학이라고 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정신과학은 분석적 연구 방법이 아니라 이해하는 연구 방법을 가진다. 정신과학의 출발점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삶의 통일성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 전체가 주어져 있다. 이 삶의 통일성은 자연과학의 관찰 방법에 따라 파악되지 않는다.”
딜타이의 견해는 그 당시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학문의 개념에 대한 토의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학문의 개념에 대한 토의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토의의 중심점을 이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입장이 계시신학의 입장이라면, 둘째 입장은 자연신학의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계시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 이 학문의 연구 대상인 하나님은 경험적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는 이 세계에 대하여 초월하여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계에 속한 다른 사물들과 같이 하나의 학문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사물들과 같이 인간에게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분석 및 파악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에 의하여 지배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여 버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오직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의 연구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만,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참여와 순종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수한 학문”이다. 특수한 “신앙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하는 계시신학의 입장의 다른 한 가지 특징은 “교회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자연신학의 입장도 신학의 교회성을 부인하지 않으나 신학의 학문적 보편성을 강조하는 반면 계시신학의 입장은 신학의 교회성을 강조한다. 후자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 내면적 관계성을 가진 보편적 학문들 가운데의 한 분야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한 “교회의 한 기능”이다. 바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의 선포가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계시와 일치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자연신학의 관점에 의하면, 이러한 계시신학의 입장은 소위 말하는 학문의 보편성과 무제한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신앙하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으나 그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대상으로 인정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엄격한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현상과 연구의 대상을 전제하며 합리적 비판을 거부하는 절대적 권위의 내용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계시신학의 입장은 비학문적인 입장이며 결국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자연신학의 입장은 비판한다.
이와 같은 반성 하에서 자연신학의 입장은 하나님을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다른 학문들이 연구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 현실의 모든 것은 만물의 근원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원칙상 다른 학문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신학과 일반 학문들은 대립 관계에 있지 않고 유기적인 전체에 속한다. 따라서 신학은 “특수한 학문”이 아니라 한 “보편적 학문”으로 이해되며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그의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신학 학문론
핫지는 자신의 주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서론에서 자신의 신학 학문론을 피력한다. 핫지는 프린스턴 신학을 확고한 철학적 신학적 토대 위에 두려고 시도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해서 그렇게 했다. 이것은 그의 「조직신학」 서론 첫 단락인 “방법에 관하여”(On Method)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과학에 존재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실과 관념이다. 사실은 항상 특수적이고 일반 지식 속에서만 알려지지만, 관념은 항상 합리적이고 과학적 지식 속에서만 알려진다. 성경은 마치 자연처럼 본질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성경은 체계적이 되는 모든 사실들을 포함한다. 자연적 사실이 화학자들에게 맡겨진 것이라면, 성경 진리는 조직 신학자에게 맡겨진 것이다. 성서 신학자는 이러한 진리들을 분명히 하고 공고히 하는데 반해 조직 신학자는 이러한 사실적 진리들을 정돈하고 증명하고 조화시킨다.
인간의 정신 구성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사실들’ 또는 ‘고립된 사실들의 단순한 축적’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 구성은 ‘고등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진리 체계의 획득을 요구한다. 또한 신학에서는 사변과 신비라는 a priori (연역적) 방법 대신, 귀납이라는 a posteriori (귀납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 잘 정립된 사실들이 수집되면 사실들의 일어남을 결정짓는 일반 법칙이 추론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감각 인지’, ‘정신 작용’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 우리 본성의 구조에 주어진 그러한 진리들의 확실성이 믿을만하다고 당연시한다. 법칙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연역한 다음 외부 대상에 돌려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법칙은 “대상으로부터 연유하고 연역된 것으로 정신에 새겨진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방법은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또한 사용될 수 있다. 자연이 과학자들의 소관(所關)이라면, 성경은 신학자들의 소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믿음의 법칙’, 어떠한 ‘객관적 계시’와도 모순될 수 없는 자명한 (즉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제일 진리’를 새겨 놓으셨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개념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핫지는 성경적인 사고를 보여주었다.
자연과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하나님 및 우리와 그 분과의 관계에 관해 계시된 모든 것은 성경은 내포되어 있으며 또한 인증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도들의 신조이다. 신학자들이 일종의 과학으로 환원시킨 진리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외부 세계에, 우리 본성의 구조 속에, 그리고 신자들의 종교적 경험 속에 각각 부분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외부 세계로부터 추론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이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계시를 그의 말씀 속에서 소유한다.
신학자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 체계를 성경의 모든 사실로부터 끌어낼 때만이 이단을 모면할 수 있다. 혼란을 제거하는 길은 우리의 철학에 의해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을 성경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이론이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이론을 결정한다. 이것을 무시하면 신학은 사변의 잡동사니로 전락하고 만다.
성경의 사실들은 인간의 직관적 진리와 성령의 가르침을 인증한다. 성경은 항상 자명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 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을 범할 수 없는 분으로, 우리로 본성의 구조에 의해 어떤 사실을 믿게 해놓고선 성경 속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믿도록 명령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핫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참된 방법은 귀납으로, 성경이 신학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사실 혹은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마치 자연의 사실들이 자연 과학의 내용이듯이 말이다. 또한 귀납은 이러한 성경적 사실들의 상호 관계와 그것들에 연루되어 있는 원리들, 그리고 그것들을 결정짓는 법칙들이 사실 자체 속에 있으며, 또한 사실들로부터 연역된다. 마치 자연 법칙이 자연의 사실들로부터 연역되듯이 말이다. 원리들은 정신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며 사실과 별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원리와 법칙들은 사실들로부터 연역된 것이며 정신에 의해 인식된 것이다."
한편, 핫지는 신학에 적용시키는 귀납적 방법에 의해 성경을 “사실들이 모여 있는 객관적인 창고”라고 본다. 그는 인간이 가견적인 물질과 불가견적인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지고, 이와 동일한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을 통해서 주관은 이성을 이용하여 사실들을 모으고 이성은 제공된 증거를 판단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의 지식뿐만 아니라 신앙의 지식도 인간의 정신에 보여진 증거들 위에서 인식된다고 하였다. 결국 핫지는 단순히 이성적인 논증에 호소하는 방법이 아닌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에 호소하여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영감론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저자이며,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며,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다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핫지에 따르면, 영감이란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이 오류가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영감은 완전 영감이지 부분 영감이 아니다.
핫지는 영감의 영향과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영감이란 성경의 저자들이 진리를 오류가 없이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 둘째, 영감된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는 작업에 한해서만 무오하다. 셋째, 영감은 성경 저자의 의식을 파괴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경 저자들을 기계처럼 사용하였다는 기계적 영감론을 부인한다. 넷째, 성령의 지도는 성경 저자의 사상 그 이상이다.
핫지는 주장하기를, 영감은 완전하기 때문에 영감은 성경 전체에 미치며, ‘도덕적 종교적 진리’뿐만 아니라 ‘과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지리적이든 간에 사실들의 진술’에까지도 미친다고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과 관념뿐만 아니라 단어에까지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영감은 성경의 원본에만 해당된다.
위에서 고찰한 것처럼 핫지는 자신의 책 「조직신학」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깔고 그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귀납주의와 성경 영감론이라는 상호 의존적인 두 가지 방법론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전자는 후자 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핫지는,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를 위한 과학적인 체계적 지반으로서 또한 성경의 최상적인 권위를 설명하기 위한 완전한 자료로서 ‘인간은 누구나 실재 세계를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상식철학의 기본 입장을 채택하여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확신이며, 그 확신은 반드시 이성적 기반 위에서 서 있다고 보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3. 프린스턴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관계
3.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턴 신학에 접목되기까지의 역사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턴 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었지만 1955년 시드니 알쉬트롬(Sydney Ahlstrom)이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을 출판할 때까지는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후 구프린스턴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상당한, 심지어 독특하게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서론 부분에서 대략 다루었으므로 상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그렇다면 구프린스톤은 어떻게 해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빚을 지게 되었는가?
시드니 알쉬트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구프린스턴에 영향을 미친 것은 스코틀랜드의 영향력 있는 목사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 1768년 고향을 떠나 프린스턴의 전신인 뉴저지(New Jersey) 대학의 학장이 되면서이다. 위더스푼은 학생들을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확신을 갖고 훈련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계보는 윌리암 그래함(William Graham)을 거쳐 프린스턴신학교의 첫 교수인 아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에게 전수되었다. 그래함이 알렉산더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의 체험적 신앙을 옹호한 나머지 습득한 권위를 신뢰하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곧 그래함의 교훈을 넘어 역사적 칼빈주의의 중요한 표현을 포용하였다.
그래함 밑에서 연구를 하면서 위더스푼이 프란시스 헛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과 토마스 리드(Thomas Reid, 1710-1796) 같은 스코틀랜드 사상가들로부터 빌려온 원리들 중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이들 철학자들은 아이삭 뉴톤(Isaac Newton)과 존 로크(John Locke)의 영국 ‘온건파’ 계몽주의를 데이빗 흄(David Hume)의 회의주의와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관념주의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알렉산더가 이들의 입장을 표현하게 되면서 그들은 “보편 상식”은 “도덕 의식”과 같이 육체적 의식과 직관의 전달을 입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신학교의 초기 강연들과 사후에 책으로 출판된 그의 노년의 강연에서 예시되었듯이 알렉산더가 이 ‘보편상식’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 계시의 실체에 관한 확고한 변증학적 초석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위더스푼, 그래함 그리고 그들의 스코틀랜드 스승들과 같이, 알렉산더는 경험주의와 귀납적 방법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의 방법들은 모방하는 면밀한 탐구는 마치 위대한 뉴톤이 물리적 세계를 연구하듯이 윤리학과 신학을 성공적으로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와, 젊은 시절 자신의 목사이며 자신이 프린스톤에서 연구를 시작하던 1812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이 된 애쉬벨 그린(Ashbel Green)으로부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그린의 중요한 교육적 변화란 대학생들을 위한 주 교재로 위더스푼의 도덕철학 강의를 다시 채택한 것이었다. 알스트롬은 “핫지의 윤리학의 기초와 자연 신학의 개념은 ...칼빈주의라기보다는 스코틀랜드적이다”고 주장한다. 핫지가 스코틀랜드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그는 교의학 체계의 구성을 과학적 탐구와 연계시켰다. “성경과 신학자와의 관계는 자연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똑같다. 성경은 사실의 보고(寶庫)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과 똑같다.”
한편, 찰스 핫지의 후계자인 워필드(B. B. Warfield)는 스코틀랜드 철학을 스코틀랜드 철학 체계의 최후의 변호자인 제임스 맥코쉬(James McCosh)로부터 배웠다. 제임스 맥코쉬는 위더스푼이 1세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18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프린스톤의 학장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워필드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대량의 지성적인 횡령을 포함하여 알렉산더나 핫지 당시와는 다른 형태의 도전에 직면하여, 역사적 기독교의 현대적 변형의 오류를 반대하여 수백 개의 논문과 수천 개의 서평을 썼다. 그의 지성은 식별력이 있었으며 그의 가슴은 역사적 칼빈주의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구프린스톤의 마지막 주자요 신프린스톤 태동의 산 증인인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에게까지 미쳤다.
3.2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란 무엇인가?
3.2.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태동 배경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성한 후 스코틀랜드를 장로교 국가로 만들었다.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고립된 채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1707년 스코틀랜드가 영국과 연합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에 유럽의 새로운 사상, 특별히 계몽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스코틀랜드 교회에 소개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유럽과 영국에서는 종교개혁 시대가 지나면서 이성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톤에 의해 발달된 과학적인 방법이 합리주의의 발흥을 촉진시켰고,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전통적인 통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철학은 단순히 사상의 영역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존 로크는 뉴톤의 과학적인 방법을 인간 지성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그의 개념은 보편상식론의 개념을 발달시켰다. 과학적 합리주의적 접근은 그의 “기독교적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에 잘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히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두 조류의 집단을 형성시켰다. 첫재는, 구칼빈주의를 고수하려는 복음주의자들과 둘째는, 자연 신학을 강조하는 좀더 합리적인 중도파였다. 상식철학은 중도파에서 발생한 것이다. 자연히 이 둘은 대립과 주도권의 다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결과 중도파가 승리하였고, 이들이 스코틀랜드의 대학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상식철학은 계몽주의와 18세기의 스코틀랜드 르네상스에서 꽃피운 철학”이었으며, 중도파가 기성의 스코틀랜드 교회를 장악하면서 발전되었던 철학 사조였다.
3.2.2 토마스 리드(Thomas Reid)와 상식철학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가장 뛰어난 인물은 토마스 리드(Thomas Reid)였다. 그는 「보편상식의 원리에 대한 인간 지성의 연구」(An Inquiry into the Human Mind on the Principles of Common Sense)라는 책을 통해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를 비판하였다. 흄은 이성과 경험 양자 모두에 의한 어떤 종류의 인식 가능성도 부정했다. 리드는 흄의 가정(假定)인 관념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것도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 속에 있는 것 이외에는 지각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외부에 있는 것들을 정말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정신 속에 새겨진 그것들의 어떤 영상(影像)이나 심상(心像)을 지각할 따름이요, 우리는 이것들을 인상(印象)과 관념(觀念)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리드는 위의 책을 통해 흄의 회의주의를 공격하면서 실재론적 인식론을 주장하였다. 즉 경험과 이성에 의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지각은 감각이 가진 것 전부를 가졌고 또 그 이상의 것을 가졌다. 그것이 감각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대상을 직접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앞에 가지고 있으며, 이 대상을 통하여 정신 활동은 일어나는 것이다. 대상은 여기서 추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소여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 외부에 있는, 그리고 그 존재가 결코 우리의 정신에 의존해 있지 않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그리고 또 우리가 외부 세계 안에 있는 어떤 물건들을 지각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 외부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얼마를 안다. 그리고 이 지식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리드는 인식론적 상식을 강조하고 당시의 조류에 따라 베이컨과 뉴튼의 과학적 경험적 인식론을 수용한다. 알스트롬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적 및 도덕적 능력을 물리적인 용어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인간 기능의 특성을 분류함으로 인간의 경험을 내향화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드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자들은 인간의 기능 혹은 인간의 참된 능력을 발견한다. 첫째는, 합리주의적 자유, 둘째는 자증적 도덕 직관을 가능케 하는 능력, 더 나아가 경험보다 선험적인 원리를 발견하여 인간은 사상적인 중재 없이도 객관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리드에 따르면, 상식철학은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인식론적 보편 상식이다. 인식론적 보편상식이란 우리의 지각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밝혀준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성과 경험에 의한 어떤 지식의 가능성도 부정하는 흄의 회의주의를 ‘인식론적 보편실재론’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공격하였다. 리드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보편상식의 첫 번째 원리로서 필수적인 진리였다. 우리가 지각한 것은 정확하게 우리의 지각의 대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또한 리드는 일종의 언어적인 인식론과 세계관을 주장한다. 우리의 지성의 모든 활동 작용은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어는 단순히 실체에 대한 관찰자의 반응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둘째는 방법론적 보편 상식이다. 이 사상은 세계와 종교에 관한 진리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오는 엄격한 과학적인 귀납법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모든 진리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윤리적인 보편 상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간 존재는 직관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세계의 기초적인 실체를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떤 도덕성의 근본적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리드의 이러한 상식철학은 에딘버러 대학의 도덕 철학 교수였던 그의 수제자 두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에게 전수되어 두루 영향을 미쳤다.
3.3 프린스턴 신학(핫지의 신학)에서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분명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먼저 진리란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이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오직 한 가지 메시지만 전달한다고 보았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계시되었든 자연에서 계시되었든 간에 영원한 진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진리가 귀납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베이컨적 사상은 당대의 미국 과학계를 지배하였는데, 이런 사상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글에서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베이컨적 원리를 따라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사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것이 과학의 적절한 기능이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과학과 신학의 유추를 통해 신학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신학 작업을 가장 확연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이다.
만약 자연과학이 자연의 사실 및 법칙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신학은 성서의 사실 및 원칙에 관련에 것이다. 전자가 외부 세계의 사실들을 정리하여 체계화시켜 그렇게 적용하는 법칙들을 찾는 것이라면, 후자는 성서의 사실들을 체계화시켜 이같은 사실들이 작용하는 원칙과 일반적인 진리를 알아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두 번째 원리, 곧 “방법론적인 보편상식”을 볼 수 있다. 프린스톤 신학은 이성을 하나의 방법론적으로 볼 때 자의적(自意的)인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샌딘(Sande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칸트의 사고의 영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서의 자료는 신학자가 원칙과 일반적 진리를 차출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서처럼 외부 세계의 사실로부터 어떤 법칙을 차출해 내는 것과 같은 원리를 적용시킨 것이다. 사실은 인간 지성이 인식하는 범주를 그 위에 적용시킨 다음에야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칸트의 이성 비판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성서의 ‘사실’에 적용시킬 경우 이성은 결론을 차출하며 일반적인 원칙을 형성하며 또 의미와 암시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방법론적인 보편상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한편, 1857년에 쓴 어느 논문에서 찰스 핫지는, 앞에서 이미 개관한 대로, 영감론이 성경 저자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까지 확대된다고 보았다.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하셨기 때문에 성령은 기록의 정확성을 보장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기록된 성경의 모든 사실은 진리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A. A. 핫지와 워필드의 공동 작품인 “영감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이런 그의 영감론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첫 번째 원리 곧 “인식론적 보편상식”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우리의 지각은 외부세계의 관념(idea)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물체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상식철학자들은 보았기 때문에, 핫지를 위시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이런 사상을 수용하여 성경을 “과거 자체의 무오한 반영”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적인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으로부터 받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영향은 완전하지도 않았고 충분히 이해되지도 않았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인식론적 및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몇 가지 유보 사항을 은닉했으며, 또한 그들은 중요한 교리에서 상식철학을 세 번째 원리인 윤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마크 놀(Mark Noll)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당대의 뉴잉글랜드의 신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은 사실상, 팍(E.A. Park)의 말을 빌리면 “인간 신앙의 근본율”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을 변경시켰다. 많은 교회의 선열들이 과소평가하여 온 “윤리적인 원리”는 “보편상식 철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한 칼빈주의 신앙을 압도하거나 이따금 밝혀지지 않은 “성경의 선언들”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확신과 대치시킬 만큼 승리감에 도취되지는 않았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에 관한 스코틀랜드 신앙을, 인간의 도덕성에 미친 타락의 결과 및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한 개혁주의 확신과 서투르게 혼합시켜 윤리의 일차적인 원리를 논함으로써 물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대한 프린스턴 신학의 영향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마크 놀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
프린스턴 개혁주의 확신에 이 18세기 철학적 입장이 첨가되면서 그 결과는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의식의 전달을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직관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다. 일련의 변증적인 추론(reasoning)은 탐구자의 도덕적 선결 조건과 탐구의 목적에 대한 선결 전제가 없이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순진하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칼빈주의는 반대 방향을 지적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철학적 충심은 때때로 과학적 실증주의자들과 비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받은 상식철학의 영향은 테일러(N.W. Taylor)가 그랬던 것과 같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데까지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전통적 개혁주의 신앙에다 상식철학 철학을 첨가시킨 것이다. 그 결과 테일러의 뉴헤이븐 신학(예일대 신학부)보다는 내적으로 더 강하고 방법론적으로는 덜 엄격한 체계를 만들었다.
3.4 본론 : 프린스턴과 미국의 계몽주의
조지 마스덴은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Understanding Fundamentalism and Evangelicalism)에서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발흥한 미국 계몽주의와 프린스톤 신학의 관계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는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 배경을 보충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스덴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워필드가 모두 강력한 칼빈주의적 유산을 가진 나라에서 성장했고, 두 사람이 모두 관용과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지한 초기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두 사람이 모두 계몽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혁명의 시대를 겪으면서 변화된 자들이었다는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점이 발견되는 이유를 문제로 제기하면서 그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계몽주의 사상은 17세기 이래 세속주의와 관계되어 왔기 때문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1790년의 화란 혁명을 불란서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고, 따라서 “배교적인” 혁명으로 규정했지만, 미국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과 그들의 복음주의적인 동료들이 미국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계몽사상과 과학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프랑스 혁명 직후 얼마 동안 가장 명망이 높던 예일대학 총장 티모시 드와이트를 위시한 미국의 일부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계몽주의적인 ‘배도’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반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와 같은 드와이트의 입장의 잔재가 그 다음 세기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계몽사상’을 ‘합리주의’ 또는 ‘회의주의’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 때문에 진정한 양상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계몽주의가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에 관하여 보여준 태도에 관한 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계몽사상의 대가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18세기의 관점의 일부 다른 경향에 대하여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조지 마스덴은 미국 안에서 발견되는 계몽주의의 이같은 이중적이지만 긍정적인 관계를 명확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헨리 메이(Henry May)가 제시한 미국 계몽주의의 몇 가지 양상을 소개한다. “메이에 따르면, 미국에 영향을 끼친 유럽의 계몽주의는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질서, 균형, 종교적 타협의 이념들을 중시하는 뉴톤과 로크의 초기 온건한 계몽주의이다. 둘째는 볼테르와 흄으로 대표되는 회의적인 계몽주의이다. 셋째는 루소의 사상에서 자라난 것으로 지상 위에 천상을 이루려고 추구하는 혁명적 계몽주의이다. 넷째로는 회의주의와 혁명은 반대하나 과학, 합리성, 질서,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는 18세기 초의 신념의 정수들을 간직한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분파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 계몽주의가 있다.”
조지 마스덴은 이 네 가지 유형의 계몽주의 가운데 단지 첫째와 넷째만이 미국에 대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프린스톤 신학과 연게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혁명은 주로 아담스와 메디슨 같은 온건한 계몽주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페인과 제퍼슨의 계몽사상과 같은 급진적인 혁명적 사상들은 잠시동안 의미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많은 영향력 있는 단체들은 불란서 혁명과의 연관성과 페인의 회의주의는 미국 문화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교훈적 계몽주의가 종합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원리들에 따라서 미국 사상의 세 가지 흐름들, 곧 현대의 경험적인 과학적 이념들, 미국 혁명의 자증적 원리들, 복음적인 기독교는 조화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조화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는 미국에서 현저하게 살아 남아 19세기의 처음 60, 70년 동안 미국의 학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유럽의 상황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고전적 계몽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살아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보수주의와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은 것은 계몽주의 그 자체에 대한 명시적인 헌신이 아니라 대다수의 18세기 사상가들이 확신을 가지고 외쳤던 경험주의적 기초를 가진 합리성의 근저를 꿰뚫고 흐르던 일반적인 철학적 기초에 대한 헌신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관찰한 바와 같이, 19세기 전반부 동안에 아이삭 뉴톤과 프란시스 베이컨은 복음주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위대한 신앙의 영웅으로 통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전성을 이루던 시대에 있어서 객관적인 과학 사상은 세속주의를 산출해 낸다는 죄를 뒤집어씌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친한 기독교 신앙과 문화의 친구로서 과감하게 찬양을 받았다.
결론
우리는 찰스 핫지로 대변되는 프린스턴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프린스턴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근거하여 성경 완전 무오를 확증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그렇다면, 서론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은 어니스트 샌딘(Earnest Sandeen)이 처음 제시했고, 로저스(Rogers)와 그의 제자 맥킴(McKim)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시했으며,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이 공고히한 것처럼, 과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교리인가? 박용규 교수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글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베이콘주의 사상의 흔적을 그들이 사용한 신학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이 영감의 영향 아래 기록하였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이 무오하다고 보았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무오하다고 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가 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비로소 성경 완전 무오 사상에 귀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던 성경 무오 사상에 대한 확고한 설명을 위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신세를 입은 사실이다. 권성수 교수나 박용규 교수가 내세우고 있듯이, 성경 무오 사상은 프린스톤 신학자들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초대 교부들, 어거스틴(Augustine), 칼빈(Calvin), 청교도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등은 바로 이러한 성경 무오 사상의 확고한 소유자들이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이 사상뿐만 아니라 언어에까지 확대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는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그리고 연대기적인 면에까지 포함된다’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주장은 분명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성경 무오에 대한 보다 발전되고 구체화된 독특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웰스(David Wells)가 핫지에 대해 “그가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논하였지만 칼빈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많은 것을 칼빈의 신학이라고 믿었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인 보편실재론의 이점을 받아들였다. 핫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라고 평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분명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세속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정통 칼빈주의에서 벗어났다. 사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의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이 복음주의 좌파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을 피력함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사용했으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사상적으로 난관에 봉착하면서 자연스레 그 공격의 화살이 이 철학을 사용하여 설명한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을 향했기 때문이다.
왜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이용하면서까지 성경의 무오를 소위 ‘축자영감설’(성경 완전 무오)이라는 교리로 만들었는가? 성경은 분명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성경 자체의 무오성을 말하고 있지만,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대해 마크 놀은 흥미 있는 말을 해주고 있다. “프린스탄 신학자들은 으레히 성경이 일차적으로 교리의 형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다른 개혁파 교회는 비록 교리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경건성을 고취시키고 문화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데 성경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프린스턴 신학이 교회 내로 밀려오는 고등비평의 물결에 대항하기 위해 강도높은 성경 영감론과 무오 사상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이해와 찬사를 동시에 돌려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이용하여 설명한 그들의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하나의 이론(a theory)이지 유일한 이론(the theory)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을 굳게 간직한 채, 성경 무오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늘 개방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좌파가 던지는 문제 제기는 그러한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할 도전이다. 동시에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 우파의 반응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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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nest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 British and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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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der Stelt, Philosophy and Scripture : A Study in Old Princeton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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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렘프레히트, 「서양철학사」, 서울:을지문화사, 1986.
조지 마스덴,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서울:성광문화사, 1992.
제임스 바, 「근본주의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프린스톤 신학」, 서울:엠마오, 1992.
데이빗 웰스, “찰스 핫지,” 「프린스톤 신학」, 서울:엠마오, 1992.
권성수,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 「신학지남」, 1989년 여름호.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제1권,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1986.
김균진,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개념에 대한 연구,” 「신학사상」, 1984년 여름호.
박용규, “프린스톤 신학과 보편실재론,” 「신학지남」, 1994년 가을,겨울호.
글쓴이: 미상 (인터넷 공간에서 옮겨온 글), 자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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