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 (수영로교회, 2015.12.04)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는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역설한다. “믿음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이론에 결함이 있다고 본다.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칭의론이 종교개혁을 완성할 복음이라고 한다. 이른바 '유보적 칭의론'을 그리스도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의의 열매와 관련시켜 소개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한 말을 언론사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유보적 칭의론 구도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다. 죽을 때까지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거나 헛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론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김세윤은 500년 전에 외쳤던 마르틴 루터의 의문을 떠올린다. "기독인이 어느 정도로 의의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김세윤에 따르면 믿음만으로는 의롭다는 칭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과 함께 의의 열매를 맺어야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면서 외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는, 김세윤에게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1. 새 관점
김세윤이 저술한 <칭의와 성화>(서울: 두란노서원, 2013)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바울의 칭의론은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제한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자 샌더스는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의 유대교를 연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의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율법을 주셨다. 율법으로 그들의 선택을 지탱시켰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다. 순종하면 상 또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벌을 준다. 율법은 속죄의 수단들이다. 속죄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회복시켜 준다. 율법에 대한 순종, 속죄, 또는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 안에 들어온 자들은 종국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샌더스가 제시한 위 명제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진입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 속에 머무는 종교이다. 유대교는 은혜언약이 율법준수를 요구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교를 오해했다고 한다. 바울은 배타주의 구원론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자, 독자적인 칭의론을 전개하면서 유대교를 비방했다. 바울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인 유대교를 의도적으로 ‘율법주의적 공로종교’로 왜곡시킨 결과라고 한다.
바울연구가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론을 이방선교의 맥락에서, 이방인들의 믿음을 정당화 하려는 동기와 선교라는 차원에서 전개한 구원 교리라고 본다. 이들의 새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저질러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고 있고,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유대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유대인들을 환대하려는 시대정신의 결과이다.
김세윤은 위 새 관점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거의 기저에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축소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위 이론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현대 위 학자들의 노력으로 유대교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큰 틀을 새로운 칭의론 구축에 제공했다고 본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에, 우리는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말론적 유보 곧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칭의와 성화 곧 칭의와 윤리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한다.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은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에 집착한 탓으로 법정적 의미를 무시한다. 동시에 전통적인 칭의론은 지나치게 법정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김세윤은 이 두 관점의 통합을 시도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톰 라이트의 통합 방식에 동의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김세윤은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개념을 바울의 칭의론에 적용하고, 두 관점을 통합하는 길을 찾는다. 칭의를 의인이 되었다는 법정적, 선언적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관점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71-72, 74, 81).
2. 유보적 칭의론
김세윤에게 칭의는 무죄선언 곧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이다. 슈바이쳐가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에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전통적 칭의론만 붙든 탓이라고 본다. 전통적 구원론은 칭의의 현재적 의미를 망각하고, 윤리 또는 의로운 삶을 무시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김세윤은 이러한 구도에서 칭의가 종말 때까지 유보되었다고 강조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로 전이되었음을 뜻한다. 칭의는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관계 곧 순종 안에 있기를 요구한다.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다(칭의와 성화, 172-173). 성화는 하나님께 바쳐지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기, 현재 단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의 핵심 전제는 예수 믿는 자,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이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라도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칭의의 현재 요소는 성화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탈락한다. 과거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롬 10:9-10), 종말의 칭의 또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고 주장한다(칭의와 성화, 192, 264).
김세윤의 신학에는 성령의 내주동행 역사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의 믿음을 끝까지 구원받는 단계까지 유지시켜 준다는 진리를 사실상 거부한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세윤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지, 받지 못할지 알 수 없다. 심판대에 설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유보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 합당한 의의 열매와 선한 행위를 가진 자만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수반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점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칭의를 무시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교리처럼 구원의 전 과정으로 본다(칭의와 성화, 177).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열매 곧 행위의 합작품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하던 구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를 구원에 합당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입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김세윤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 구도와 불일치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은혜’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개인의 성화나 공덕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른다.
3. 나무와 열매
전통적 구원론, 칭의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 시점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죄 용서받음과 더불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 그 때, 기독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관계에 진입하고, 천국시민이 된다. 예수 믿는 자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록에 기록된다. 천국 시민권은 믿을 때 받는다. 시민은 국가의 호적부에 이름이 등재된 자이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한다.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다.
칭의는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믿을 때 발생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 믿음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선언한다. 칭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미래의 죄들을 용서받을 법적 근거이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죽은 자를 일으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엡 2: 1-10). 믿을 그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신다(시 103:12).
그리스도를 믿고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진입한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의 나라 시민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유지시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 사역을 중단하지 않는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진정한 기독인은 열매를 맺는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지만, 구분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법적, 단회적 사건이다.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뜻한다.
성화는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칭한 자를 동시에 성화로 인도한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진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성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독인은 믿음과 구원이 확실한 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4. 질문
김세윤에게 묻고 싶다. 첫째, 비기독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여 개종, 회심하도록 인도해 본 적이 있는가? 복음을 제시하여 몇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했는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가정하자. 그 회심자, 개종자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구원을 받을 지 받지 못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구원은 유보되어 있습니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예수 믿는 자 곧 기독인이 어느 정도의 의의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자신의 의의 열매나 선행이나 윤리의 실천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셋째, 김세윤이 말하는 칭의의 조건은 결과적으로 성화 곧 윤리적 행위인가? 선행 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 아닌가?
칭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선고할 판결을 현재의 우리에게 앞당겨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의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당당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오늘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나님의 구원과 칭의는 현재 완료형 사건이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는 자 가운데 의의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구원받는 참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칭의를 선물로 받지 못한 탓이다. 심리적 현상, 분위기 탓, 망상, 오해, 마귀의 궤계, 환경,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예수 믿는 자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봄이 옳다.
김세윤이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지난 500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정수로 존중되어 왔다. ‘율법에 부합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강조해 왔다.
김세윤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이 가져온 신앙의 왜곡에 대한 거친 반발, 지나친 반발이었다고 한다. 의의 열매 곧 선한 행위를 가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신의 칭의론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완성해야 한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처럼,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교인들을 방종과 나태에 빠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무율법적인 혼란을 야기하므로, 우리 시대의 칭의론은 종교개혁 시대의 칭의론과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에 행함이 부족한 현실은 개탄스럽지만,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과 칭의를 인간 행위의 대가로 전락시키는 김세윤의 주장은 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격이 될 수 있다. 성화의 결여나 결핍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칭의 진리를 뒤바꾸면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바꾸는 것이 되고만다.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1조와 벨직신앙고백서 제2조에 표현된 전통적 칭의 교리가 강하게 외쳐지는 곳마다 교회가 생명력 있게 왕성해지고 성장하고 부흥했다. 칭의 교리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대속 진리, 은혜의 복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윤리적 결함은 칭의 교리가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진리와 전통적 칭의론을 확실하게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우리를 구원한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지 우리가 맺은 의의 열매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한 것은 인간의 율법준수와 행위 때문이 아니다.
5. 나의 신앙고백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빌 2:12)라고 말한다.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다투는 자들을 향한 권면이다(빌 2:14-15).
야고보서는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약 2:14,17, 26)라고 한다.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지적인 신앙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형제자매에 대한 관심" 촉구 맥락의 메시지이다(약 2:15-16). 열매없이 살아가는 믿는 자들의 실천을 강조한 말씀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여러 면에서 유감스럽다. 기독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 없이 생기 없이 열정 없이 살아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복음전도자의 열정을 앗아간다. 교회부흥의 동력을 축소시킨다. 성령의 사역인 성도의 견인 진리를 팽개친다.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해석하려고 한다. 윤리와 실천을 구원과 칭의의 열쇠로 보는 그릇된 확신을 확대시킨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유보적 칭의론을 거부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5:1)고 선언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엡 2: 1, 5)고 한다.
나의 신앙을 짧게 고백하고 싶다. 나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죄인이다. 의인이기도 하고 죄인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숨을 거두어도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확신한다. 내가 맺은 의의 열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전가시킨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 때문이다. 나는 의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들, 나의 의, 의의 열매, 선행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눈 높이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겠는가?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의와 선한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사역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하나님이 내가 믿을 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성령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심판 날까지 굳건하게 지켜 줄 것이라 믿는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단절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내게 구원을 선물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 글이 김세윤의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기 바란다. 소모적인 논쟁, 논의는 사양한다.
최덕성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 교의학 석좌교수이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위 글은 <크리스천투데이> (2015.10.23.)에도 게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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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자구 수정)
왜 바울만 갖고 티격태격하는지
1. "믿음으로 의롭게 여긴다" 소위 바울의 칭의론이 뭔지, 또한 신자의 거룩한 삶이 요구된다는 성화론이 뭔지,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 저의 바울의 칭의론 공부는 몇 년 전에 멈춘 상태라 더욱 그렇습니다.
2. 김세윤 교수님의 저서들과 그외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몇몇 주요 학자들의 책들은 신대원 시절 여러권 원서로 정독한 적이 있었기에 아직도 주요 논점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후 <바울의 새관점>도 선교지에서 읽었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지요.
3. 몇년 전부터 중심이 톰 라이트이더군요. 구약 공부하느라 밀려서 개인적으로 톰 라이트 공부는 이제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주장은 샌더스와 제임스 던의 주장을 대단히 정교하게 완성시킨 사람으로 보이네요. 현재 대충은 알지만 아직 확실히는 모르니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4. 톰 라이트의 주장의 핵심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칭의 = 구원은 아니며, 더불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아니라는 논지로 받아들여집니다.
5. 구약에서도 이게 난해한 문제이긴 합니다. 언약과 율법의 관계의 문제인데, 복잡하니 이 내용은 나중에 올려드립니다.
6. 쉽게 말하면, 율법의 준수가 언약 백성을 확증하는 조건이었느냐 아니면 율법과 상관없이 언약 백성으로서 자격이 확증된 것이냐는 논쟁이죠.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행위없이 구원이 주어진 것이나 아니면 행위가 조건으로 달린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7. 결론만 말씀드리면, 구약의 언약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다 나타납니다. 무조건적인 일방의 언약(아브라함)과 조건적인 쌍방의 언약(시내산) 이 두 가지가 말이죠.
8. 순종여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통해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선언적 약속을 하시는가 하면, "너희가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라면서 율법 순종의 조건을 명시하십니다.
9. 언약과 율법의 관계에서 이 두 가지 양상이 모두 나타나니 혼동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
10.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면서 일방적 구원이 부각되고, 동시에 바울의 이신칭의의 근거가 바로 이미 할례나 율법을 준수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확신한 그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죠.
11. 반대로 시내산 언약은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그러나 조건부 구원의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12. 전통적으로 루터 이후의 개혁파는 아브라함 언약에 시내산 언약을 수렴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조건부" 언약처럼 보이는 시내산 언약도 종국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방적인 최종적 성취를 내다보고 있다는 겁니다.
13. 즉, 루터 이후의 주장에 의하면, 그 율법의 조건들은 구원의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죠. 다시 말해 율법은 구원 테스트를 하려는 시험지가 아니었습니다.
14. 즉, 율법은 90점 맞으면 합격, 그 이하는 낙제, 혹은 70점이면 합격 아니면 불합격시키는 그런 일종의 시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단 합격한 사람들(구원 얻은 사람들)의 생활규범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15. 그러나 행위와 순종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시내산 언약의 그 '조건성'에 초점을 맞추지요.
16. 저는 전자에 서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이고, 인간에게는 단지 '믿음'의 반응이 요구됩니다.
17. 바울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그의 칭의에 그 어떤 일조를 한 바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여기서 바울이 그 행위에 할례라는 제의적 행위만이 아닌 인간의 업적을 분명히 포함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20. 그리고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구원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분명히 믿음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습니다.
21.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하나님이 판단하신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내가 확신하면서 내 편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2. 그건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의 믿음을 보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의 진정성은 오직 하나님이 판단합니다.
23. 그에 따른 구원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믿고 구원받았다는 스스로의 선언은 어떤 점에서 인간의 교만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24. 물론 "나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사람 편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는, 나아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는지는 하나님 만이 아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기독인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가?)
25. 그러니 우리는 "믿습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나의 구원의 문제를 내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해서 구원이 무조건 주어진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6. 바로 이로 인하여 신자의 삶은 긴장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신학의 틀인 <이미와 아직>의 구도와는 약간 다른 방식의 긴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 바로 이점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뻔뻔하게 단정지으며 사실은 멋대로 죄짓고 살아도 되는 <구원파>와 우리와의 근본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28. 우리는 그저 우리의 구원은 주인의 처분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익한 죄인입니다. 주여 용서하소서"라는 겸손한 고백을 죽을 때까지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29.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시켜 준 사람은(우리가 건방지게 확정할 수 없으나) 결코 그 구원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철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30. 반복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판정하신 것, 즉 그렇게 결정하신 구원이지 인간 편에서 판단을 내리는 구원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의 한번 구원 = 영원한 구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31. 바로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하니, 한번 구원 = 영원한 구원 가지고 맞니 틀리니 싸움이 벌어지고, 칭의 = 구원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32.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증거를 바울이 아리까리하게 말해서 정확히 찾기가 혼동스럽다면, 다른 성경을 들여다 보시면 명확해 집니다. 왜 바울만 갖고 싸움질 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33. 요한복음 3:5-8 보십시오.
34. "3:5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5.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36. 첫째, 예수님은 "거듭남"이 순간의 사건임을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이 새사람으로의 영적인 탄생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코 여기서 사람의 행위나 노력이 아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십니다.
36. 둘째, 성령으로 난 사람은 마치 바람소리는 들어도 바람의 실체를 알 수 없듯이 어떤 체험의 과정을 통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듭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생의 체험은 바람과 같은 분명한 실제 사건인데, 구원의 구체적 시점과 양상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37. 그건 강풍이 불어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한 뜨거운 극적 체험일 수도, 아니면 약풍이 불어 별 감흥이 없는 이슬비를 맞는 듯한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38. 예수께서는 우리는 바람의 실체를 볼 수 없듯이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사건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이건 물과 성령에 의한 중생의 "순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이가 태어났다가 취소되어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듯이 한번 중생은 결코 철회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39. 이 설명에 이은 예수님의 선언은 가장 유명합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0. 두말할 것도 없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선언의 요한복음 버전입니다. 양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41.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건대 그 믿음은 내가 측정하고 판단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확인되듯, 하나님께서 보시고 판단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의해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죠.
42.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믿음과 신앙 생활은 최종결과를 하나님께 의탁한 긴장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그것을 점검해볼 기준, 즉 그 믿음의 척도를 바로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합격 판정 내리시는 참된 믿음은 열매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4. 분명히 아무런 열매가 없는 가운데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이 확증됩니다. 예수님 옆에 매달린 강도가 "믿는다"고 고백할 때의 바로 그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살면서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참 믿음입니다.
45. 그러니 중생 순간의 믿음을 열매맺는 믿음으로 측정해선 안되는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확신하고 그 순간 죽으면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열매를 맺는 믿음이니 살아가면서는 우리 삶에서 참 믿음이 열매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46.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과 야고보고가 강조한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행위의 열매가 우리의 믿음을 측정하는 유효한 저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 둘 다 필수적인 것입니다.
47. 이 긴장 속에서 그저 우리는 엎드려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기쁨의 확신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는 두려운 고백을 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48. 한번 구원 = 영원한 구원이라는 "칭의론"과 "구원론"이 잘못되어 한국 교회가 엉망진창이라는 김세윤 교수님의 논지에 대해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