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 안수에 관하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개혁정론 (2015. 10. 5.)의 소개 글] 지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제64회 총회 시 유안 건으로 넘긴 "부산노회장 제인출 목사가 발의한 여성안수(장로, 권사)에 대한 질의를 신학위원회가 여성안수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간 연구하여 보고하기로" 결의한 것에 대하여 제65회 총회에서는 신학위원회가 여성안수 연구위원회(오세우, 곽상봉, 이한의, 김성복, 신민범, 정영호)를 구성하여 신대원 교수회에 연구를 의뢰하여 신대원 교수회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음을 보고하였고, 신대원 교수회의 연구보고서를 그대로 받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http://reformedjr.com/xe/7516 의 기사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에는 그 보고서의 전문을 싣는다.
2015년 6월 29일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신학위원회 제출 연구보고서
권사 안수에 관하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서론
고신교회의 헌법에 따르면 권사는 준항존 직원이며(교회정치 31조 2항) 45세 이상 65세의 여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5년을 경과한 자로 개체교회에 등록한 지 2년 이상이 되어야 권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교회정치 85조 1항, 4항). 권사로 피택되면 당회의 지도로 6개월 이상 교육을 받고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개체교회에서 안수 없이 임직한다(교회정치 88조 1항) 고신 헌법에 따르면 권사는 여자만 될 수 있고 안수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다른 몇몇 교단의 경우(예: 통합이나 기장) 권사를 항존직으로 규정하고 안수도 시행하고 있다. 타 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온 권사들이 고신교회에서 시무권사로 봉사하게 될 때 안수권사와 비안수 권사의 묘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권사에 대한 안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고신 교회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권사에게 안수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판단하기 위해 성경에서 안수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A. 구약에서의 안수
구약 성경에서 안수는 크게 제의적 배경에서 사용되는 경우와 그 외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안수는 창세기 48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동사 ‘사막’과 명사 ‘야드’로 표현되고 있다. 동사 ‘사막’은 ‘비스듬히 올리다’, ‘지지하다’ 등을 의미하며, 손을 뜻하는 ‘야드’와 함께 사용될 때의 기본적인 의미는 안수할 대상에게 ‘손을 올려 가리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제의적 배경에서 사용될 때에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제의(祭儀)에서 사용된 안수
구약 성경에서 안수는 상당수가 제의를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위임식과 제의의 제물을 바칠 때 안수를 시행한다.
1) 출애굽기 29장은 제사장의 위임식 규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사용할 제물에 안수를 하게 한다. 여기에서 안수는 제물이 안수하는 제사장에게 속한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제물과 제사장을 동일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출 29:10, 15, 19).1)
2) 번제와 화목제에서 안수는 제물이 바치는 사람에게 속하거나 그 사람의 소유를 나타내는 표시 역할을 한다(레 1:3; 3:2, 8, 13).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3장의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다. 안수는 제물 바치는 자가 자신이 제물의 소유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안수가 바치는 자의 마음을 담는 의미가 있는지는 구약 성경에서 확인할 수 없다.
3) 레위기 4장에 의하면, 속죄제를 드릴 때에도 제물 바치는 사람이 제물에 안수를 하였다(레 4:4, 15, 24, 29, 33). 속죄제에서 안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레위기 4장에서 명확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레위기 16:21에서 대속죄일에 속죄의 목적으로 사용된 아사셀 염소에게 안수하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죄하기 위해 죄를 고하는 행동은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에게 행한 안수는 죄의 전가를 의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레 16:21). 이 경우 안수는 죄의 전가를 의미한다.
2. 제의 밖에서 안수
제의를 제외한 경우 구약 성경에서 안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 예들은 다음과 같다.
1) 민수기 20:23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지도력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게 하며,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도록 시킨다. 이에 모세는 대제사장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한다. 이 경우 안수는 모세의 지도력을 넘겨주어 공동체의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의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신명기 34:9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 세우게 하면서 그에게 안수하도록 시킨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을 때, 안수의 결과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였다고 말한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는 이러한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3) 시편 139:5는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였나이다”라고 하며, 이것은 주 하나님께서 시인을 자기의 소유물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4) 레위기 24:14에서는 하나님을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 머리에 안수하고 있으며, 이 때 안수는 특정한 사실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과 증거를 공인하는 역할을 한다.
5) 민수기 8:10-16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에게 안수하여 자신들을 대신하여 대표로 여호와께 제의에서 봉사하게 한다.
6) 창세기 48:14, 17, 18에서는 동사 ‘심’, 또는 ‘시트’를 사용하여 안수 행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경우 야곱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특정한 사람(에브라임)에게 임하기를 소망하며 안수하고 있다.
3. 소결론
구약에서 살펴볼 때 권사의 안수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사법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폐지되었기 때문에 제의적인 의미로 안수는 더 이상 오늘날 적용이 되지 않는다. 여호수아의 안수에서와 같이 안수가 지도력의 이양을 의미한다면 여자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한 권사의 안수도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구약에서는 여자에게 안수를 실시한 예가 없기 때문에 권사에 대한 안수는 구약적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B. 신약에서의 안수
신약에서는 구약보다 안수라는 단어가 훨씬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신약에서 ‘안수’란 기본적으로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을 가리키며 주로 ‘올려놓다’, ‘위에 두다’, ‘얹다’를 뜻하는 ‘에피티떼미’(ἐπιτίθημι)와 ‘손’을 뜻하는 ‘케이르’(χείρ)를 함께 사용한다. 이런 동사 형태(‘안수하다’)는 신약성경에 20번 나온다(마 9:18; 19:13, 15; 막 5:23; 6:5; 7:32; 8:23, 25; 10:16; 16:18; 눅 4:40; 13:13; 행 6:6; 8:17, 19; 9:17; 13:3; 19:6; 18:8; 딤전 5:22). 명사는 ‘손들의 얹음’(ἐπίθεσις τῶν χειρῶν)이라는 속격 표현으로 4번 나온다(행 8:18; 히 6:2; 딤전 4:14; 딤후 1:6). 이 구문에서 속격 ‘손들의’(χειρῶν, ‘케이론’)는 목적어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손들의 얹음’이라는 표현은 ‘손들을 얹음’(= ‘안수’)으로 이해해야 한다.
1. 치유와 축복과 관련된 안수
복음서에서 안수는 주로 치유와 축복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예수님은 안수함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막 6:5; 8:23; 눅 4:40; 13:13). 맹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셨고(막 8:23, 25), 온갖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셨다(눅 4:40).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을 펴지 못하는 여인에게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선언하면서 안수하여 고쳐주셨다(눅 13:13). 또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함으로 축복하셨다(막 10:16; 마 19:13-15).
사도행전에서도 안수는 치유와 관련하여 두 번 언급된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서 사울(바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였고(행 9:12, 17), 사도 바울은 로마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상륙한 멜리데에서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안수하여 열병과 이질을 낫게 하였다(행 28:8).
2. 성령 받음과 관련된 안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유형은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마리아와 에베소에서 일어났다.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사역을 통해 복음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사마리아를 방문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자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였다(행 8:17). 다음으로, 에베소에서 요한의 세례만 받은 열두 사람을 만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어서 바울이 열두 사람에게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므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행 19:6). 이 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사마리아와 에베소에 도달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이 신약교회에 가입하였음을 보여준다.
3. 직분의 위임과 관련된 안수
신약 성경에서 안수 행위는 치유 다음으로 직분의 위임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언급된다. 모두 다섯 차례 나오는데,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의 임명과 관련해서,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바울)의 선교사 파송과 관련하여 나오며(행 6:6; 13:3), 목회서신에서는 디모데와 관련해서 세 번 나온다(딤전 4:14; 5:22; 딤후 1:6).
3.1 사도행전
예루살렘 교회는 매일 구제의 대상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누락되자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였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구제 사역을 위임하고 그것을 행할 권위를 주었다(행 6:1-6). 일곱 사람이 위임받은 구제 사역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의 디아코니아, 즉 집사의 직무였다.2) 다음으로,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였다. 이런 절차를 통해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 선교사역의 소명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행 13:1-3).
3.2 목회서신
3.2.1 디모데전서 4장 14절
먼저,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서 디모데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은 사실을 언급한다. 그는 이렇게 디모데에게 권고한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이 본문 자체는 디모데가 어디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안수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바울의 2차 전도사역 초기에 루스드라에서 안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때 디모데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였다(행 16:2).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지시를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선교 사역을 위해 따로 세웠던 것처럼 루스드라 교회도 검증을 거친 디모데를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따로 세우고 안수하여 보낸 것이다.3)
이 본문에서 ‘장로의 회’라고 번역한 ‘프레스뷔테리온’(πρεσβυτέριον)은 다른 본문에서 유대인 장로들의 모임을 가리키지만(눅 22:66; 행 22:5), 여기서는 루스드라 교회와 이고니온 교회의 장로들 전체를 포함하는 장로회를 의미한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의 교회 장로들이 디모데를 안수했고, 바울 자신도 이 일에 동참하였다(딤후 1:6). 안수식에서 디모데는 사역에 필요한 은사를 성령님으로부터 충만하게 받았다.4)
3.2.2 디모데후서 1장 6절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6절에서 다시 디모데의 안수를 언급한다. 그는 디모데가 안수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붙게 하려고 한다(“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안수와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서 언급한 안수는 같은 시기에 받은 동일한 것이다. 디모데는 단지 바울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루스드라 교회 공동체의 결정으로 사역자의 직무를 받았음에 틀림없다(칼빈은 디모데가 ‘목사의 직분’을 받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 교회들의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에서 바울이 ‘나의 안수’(ἐπιθέσεως τῶν χειρῶν μου, ‘에피떼세오스 톤 케이론 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안수식의 주관자였기 때문이다. 또는 칼빈이 주장하는 대로, 바울이 장로들을 대표해서 혼자 디모데의 머리에 손을 얹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5)
이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안수를 성령님의 은사를 부여받는 수단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안수는 마술적인 것이 아니다. 디모데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안수라는 수단 자체가 부여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는 안수 받기 이전에 성령님으로부터 탁월한 은사를 부여 받았다. 안수는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인정하고 확증하는 ‘신실한 표’였다. 그렇다고 해서 디모데가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은사들을 주시거나 또는 과거에 주신 것보다 더 많은 은사를 허락하셨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안수 의식은 “사람들 앞에서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고안된 세속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합법적인 성별 행위였다.”6)
3.2.3 디모데전서 5장 22절
마지막으로, 디모데전서 5장 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아무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일부 주석가들은 여기서 바울이 출교당한 죄인을 회복하는 안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으라”(딤전 5:20)는 권고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오는 문맥과 잘 맞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경솔하게 죄인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그들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7)
그러나 출교당한 죄인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안수하는 것은 훨씬 후대에 시행되었다. 이런 예는 목회서신이 기록된 지 백년 이상이 지난 뒤에야 나타난다. 목회서신 기록 당시에는 이런 유형의 안수가 없었다. 반면에 직분자를 세우는 안수는 사도 시대에 교회 안에서 시행된 것이다(딤전 4:14; 참조. 딤후 1:6; 행 13:3). 목회서신에서 바울은 출교 당한 참회자의 회복이 아니라 사역자의 임명과 관련하여 안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8) 디모데전서 5장 22절에서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는 구절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안수하면 그 사람이 짓는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함을 뜻한다.9) 만일 디모데가 자격이 없는 사람을 임명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가 짓는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10) 이 본문에서 바울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직분자로 안수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11)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고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는데 안수의 방법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직분 임명이나 특별한 사명을 위해 사람들에게 안수하신 예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열두 사도들의 임명에 관한 복음서 기사들에서도 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마 10:1-4; 막 3:13-19; 눅 6:12-16). 또한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세우는 사도행전 본문에도 안수에 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행 1:15-26).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장로나 집사를 세울 때 반드시 안수하라고 명령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안수는 직분 임명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 하지만 일곱 “집사들”을 안수하여 세운 것,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안수한 것, 그리고 장로의 회에서 디모데를 안수한 사실은 사도 시대에 안수가 교회 직분을 임명하는데 일반적으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 직분 임명을 위한 안수가 성경적이면서 유익한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안수는 부름 받은 자가 합법적 절차를 따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요구되는 은사들을 소유하며 그런 자로서 교회에 의해 수용되고, 인정되며 존경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단지 하나님과 그의 교회 앞에서 엄숙하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13)
C. 한국교회에서의 권사제도
성경에 없는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권사직은 한국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직분 중 하나이다. ‘권사’(exhorter)라는 용어는 미국 감리회에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서 감리교회에서 ‘권고하도록’ 허가를 받고, 또한 공식적인 임명 절차를 거친 평신도 직원 또는 권고자를 지칭했다. 그러나 1939년에 미국 남북감리교가 연합되었을 때 권사의 직책과 직무가 장정에서 삭제되어 버렸다.14) 이 제도는 본래 로마서 12장 8절에 나오는 ‘위로하는 자’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의 권사제도는 1885년 조선에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초기에 권사를 견습 또는 전도사 등으로 불렀다.
한편 한국장로교회, 특히 평양지방의 장로교회는 심방과 개인전도, 성경공부와 교회봉사 등 전도부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교역자들을 권사라고 불렀다. 그 후 교회 헌법에 여교역자를 전도사라는 직명으로 제정하면서 교회봉사를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며, 지도력이 있는 여집사 중에서 여교역자를 대신하여 봉사할 수 있는 직임을 맡도록 당회가 임명한 임시직을 권사라고 불렀다.
한국장로회 총회는 1930년대부터 상정된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여자 장로를 허락하지 않는 대신 권사제도의 신설을 결의하였다. 권사는 안수집사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선거하고 임직하되, 안수하지 않는 종신직으로 규정되었다. 남녀유별이 엄격한 시절에 가난하거나 신앙이 어린 여자 교인들을 돌보아야 할 필요에 따라 권사제도를 신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감리교가 남자교인과 여자 교인 모두에게 권사직을 허용하는 반면, 장로교는 여자 교인에게만 허용하였다(오늘날 기독교장로회는 남녀 교인 모두에게 허용함). 한편, 장로교 통합 측은 1971년 판 헌법에서 권사를 항존 직원으로 규정하였다(제4장 제20조). 처음에는 권사를 서약과 공포로만 임직하였으나, 1999년에 개최된 84회 총회에서 공포 시행된 헌법에서부터 권사 안수를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장로교에서 권사를 항존 직원으로 규정한 것도, 안수 임직하는 것도 모두 통합 측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권사제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자 고신교회에서도 권사제도를 두자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고신 교회는 21회 총회에서 권사제도를 두지 않기로 가결하였으나(1971년), 6년 뒤인 27회 총회의 결정에 따라 권사제도를 수용하였다(1977년). 49회 총회에서 권사직을 항존 직원에 삽입하자는 청원이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1999년). 그런데 2011년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서는 권사를 다음과 같이 ‘준 항존 직원’으로 규정하였다.15) “교회의 항존직에 준하는 직원으로 여성도 중에서 권사를 둔다”(제4장 31조 2항). 이와 같이 고신 교회가 권사를 준 항존 직원으로 규정한 것은 성경에 없는 직분이라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 권사를 안수로 임직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에 근거할 때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안수로 임직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면 고신교회가 ‘준 항존 직원’으로 규정한 권사는 어떠한가? 권사도 ‘항존 직원’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같이 안수로 임직할 수 있는가?
종신직과 종종 혼동되는 항존직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교회에서 항상 있어야 하는 직분을 가리킨다. 이 직분 외에 다른 새로운 직분을 교회는 세울 권한이 없다. 이 권한은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권사는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제도로 특정한 시점부터 시작되었을 뿐이다.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우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필요에 따라 직분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는 개혁된 교회는 성경에서 명시한 직분(목사, 장로, 집사)만을 항존직으로 인정한다. 이 점에서 권사는 항존직이라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여자를 안수하여 직분을 위임하거나 특정 사명을 맡긴 사례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본문도 없다. 브리스길라와 뵈뵈와 같은 여성이 특정 사역이나 임무를 맡았지만 안수를 받고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없다. 게다가 권사라는 직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여성들만을 위한 교회의 직분이 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권사의 안수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즉, 권사 직분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권사의 성경적 근거를 로마서 12장 8절에 나오는 ‘위로하는 자’(또는 ‘권면하는 자’)에서 찾지만, 그것을 권사의 항존직에 관한 근거로 보기에는 매우 불분명하고 빈약하다. 사실상, 권사를 항존직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 없더라도 교회가 필요에 따라서 어떤 직책은 제정할 수는 있다. 문제는 교회가 세운 직책을 교회의 건설을 위해서 그리스도(또는 성령님)께서 항구적으로 세우신 항존 직분과 같이 간주하는 것이다. 권사는 특별한 한국적 상황에서 병자, 궁핍한 자, 환난당한 자, 연약한 자 중에 여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위해 교회가 제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가 권사를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같은 ‘항존 직원’으로 규정한 것은 사람이 제정한 제도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권사를 ‘준 항존 직원’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사람이 제정한 것을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처럼 만들 위험이 있다.
결론적으로, 권사의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래한 것도, 사도들의 예를 따라 교회 안에 제정된 것도 아니므로 항존직에 포함시킬 수 없으며 안수로 임직할 수 없다. 성경에 없는 권사를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같이 안수로 임명하는 것은 성경적이지도 않으며 오직 성경의 원리를 따르는 헌법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신 교회는 권사 안수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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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사장 위임식에서 안수한 송아지의 용도는 속죄제이며, 이 속죄제의 피를 제단 뿔들에 바르고 나머지는 모두 제단 밑에 쏟게 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성막을 대표하는 번제단의 뿔에 안수한 제물의 피를 발라 번제단과 번제단에서 사역할 제사장들을 서로 묶는데 있다. 이러한 제사장 위임식의 특징을 고려할 때 제사장 위임식 용 송아지에 대한 안수는 제사장과 제물을 동일시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2)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박태현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406-9.
3) William D. Mounce, Pastoral Epistles (Nashville: Thomas Nelson, 2000), 71.
4) 헨드릭슨, 『목회서신』, 216-17.
5) 칼빈, 『고린도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545.
6) 칼빈, 『고린도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546. 가이 워터스(Guy P. Waters)는 맥길과 맥퍼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안수를 이렇게 규정한다. “손을 얹는다는 것은 ‘승인한다는 행동’, 즉 안수 받는 자가 이 특별한 사역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필수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그 안수 당사자 개인 안에 현재 부여되었음을 믿는 믿음의 한 표현’이다.” 가이 워터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윤재석 옮김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14), 215-16.
7) A. T. Hanson, The Pastoral Epistles (London: Marshall, Morgan &Scott Pub, 1982), 103.
8) I. H. Marshall, The Pastoral Epistles (Edinburgh: T&T Clark, 1999), 621-22.
9)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 107.
10)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06), 375.
11) 칼빈, 『고린도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509-10.
12)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개혁파는 안수가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고 따라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생각했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451.
13)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452.
14) 임택진, 『장로교정치해설(신학연구도서시리즈 17)』(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10), 164-5.
15)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헌법해설』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2014),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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