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회의 법정 소송 견해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교회사)
서론
1952년 9월 조직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 즉 고신교회는 첫 10년 어간 이중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외적으로는 고신교회를 분파주의자, 분열주의자, 독선주의자들, 혹은 바리새파라는 비난을 받았고 이단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1951년 9월 4일 회집한 제53회 경남노회에서와 1952년 3월 4일 회집된 제54회 경남노회에서 고신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총회에 건의하기로 한 바 있다.(1)
고려신학교나 고신교회를 지지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떠나도록 요구되거나 징계를 받기도 했다. 즉 대구 서문교회에 출석하던 김주오, 박복달, 신경순, 서옥련, 김계초, 서경애 등 6명은 고려신학교 측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1951년 8월 19일 제명당했고, 재명된 이들은 8월 20일 김주오, 오병식, 김인식 등 3장로와 손만윤, 최만술, 오상용,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제씨들이 시작한 교회가 대구경북지방 최초의 고신교회로 발전한 서문로교회이다. 부산에서도 1951년 7월 구포교회서 열린 낙동연안 지역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에서 심문태 목사는 광고를 통해 “총회가 결정한 일이니 발표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떠나도록 총회가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포교회에 출석하던 김순연, 배진택, 이정자(한정교 목사의 부인), 정금이, 최수남 등 6명의 집사들과 고려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한동석 신학생은 구포교회를 나와 1951년 8월 13일 시작한 교회가 지금의 구포제일교회(시온성교회)로 발전했다. 경남노회 제54회 정기 회의록에 보면, 구포교회를 포함하여 “진동, 남산, 사상, 통영읍, 생초, 의령 신안교회에서는 소수가 분열해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2) 이처럼 고신교회는 교회를 분리시키고 분열하는 집단이라는 외부적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고신교회가 처한 내부적 위기는 교회당쟁탈과 법적 소송에 대한 의견대립이었다. 교회 분리 혹은 분열은 필연적으로 재산권 문제를 야기하였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신교회 내부에는 심각한 불일치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대립이 공개적으로 대두된 때가 1956년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지 10년, 고신교단이 조직된 지 4년 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고신교회는 법정 소송 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 글에서는 이 질문에 답해 보고자 한다. 고신교회에서 법적 소송 건에 대해서는 두 차례의 논쟁이 있었다. 그 첫 번째 경우가 1956년 이후 1960년 박윤선의 고신철수로 이어지는 제1 논쟁기, 1973년 한상동을 축으로 한 부산노회와 송상석을 축으로 한 경남노회와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1978(?)년의 교단 분여로 마감하는 제2논쟁기로 양분된다. 이 글에서는 이상의 두 경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교회의 내분과 이로 인한 교회당 쟁탈, 그리고 교회 재산을 둘러싼 법정 소송문제는 현재에도 한국교회에 심각한 현안이 되어 있다. 현재 한국의 1천여 교회가 이와 유사한 법정 소송 중에 있고,(3) 심각한 대립을 노정하고 있다. 서울 광성교회의 대립은 근년에 발생한 가장 대표적인 분쟁이었다. 이런 교회당 쟁탈이나 교회재산을 둘러싼 법적 소송과 대립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있어왔고, 교회 분열이 이루어지는 1950년대 한국교회의 심각한 현안이기도 했다. 이런 문제로 현재 법정 투쟁중인 교회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고신교회에서 이 문제는 어떤 논의를 거쳐 왔으며 이런 문제가 고신교회역사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1. 제1논쟁기: 예배당 쟁탈과 법정 소송 문제
명도요구
한상동 목사가 초량교회 목회자로 일하고 있을 당시인 1951년 경남노회 유지재단으로부터 명도(明渡) 요청을 받고 교회 재산 일체를 포기하고 빈손으로 나온 일은 교회당 쟁탈을 둘러싼 대립의 과정서 아름다운 사례로 회자되어 왔고, 이 사건이 한상동 목사를 칭송하는 구체적인 일례로 제시되어 왔다. 동시에 이 사건이 그 후 전개된 교회재산을 둘러선 법적 소송건 논쟁의 시원이 된다.
해방 후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한상동 목사는 부산으로 와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육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러나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고 1946년 7월 30일 초량교회 제6대 목사로 위임을 받아 1951년 10월까지 5년 3개월간 시무했다. 그런데 전란 중인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속개된 제36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은 총회에서 제명하였고, 이로부터 3개월 후인 1951년 9월 8일 경남노회 유지재단과 총회는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는 초량교회를 비롯하여 마산문창교회(송상석 목사 시무), 영도교회(현 영도제일교회), 거창읍교회, 진주교회 등 고려신학교를 지지하거나 경남법통노회에 속한 경남지방의 5개 교회에 대하여 명도(明渡) 소송을 제기하였다.(4) 이상의 5개 교회는 경남노회 유지재단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경남노회와 무관한 교회는 건물을 양도하라는 요구였다. 경남노회 유지제단은 시범적으로 5개 교회를 선택하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51년 9월 8일 주일 아침에는 예배당 접수위원 9인이 초량교회로 와 강단을 점령하였다.(5) 이때 노회를 지지하는 측과 한상동을 지지하는 교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고 양측은 강단을 점령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 폭력직전까지 갔다. 이런 모습을 본 한상동 목사는 성도간의 대립이 덕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교회를 물러 나가로 경심했다. 당시 한상동 목사는 전체 350여 신도 중 9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교회의 화평과 건덕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1951년 10월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나와 10월 14일 주영문 장로 집 틀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삼일교회를 설립하였다.
법정소송에 대한 견해
그렇다면 고신교회의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법정소송을 어떻게 생각했을가? 비록 한상동 목사는 교회의 화평과 건덕을 위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가 법정소송 자체를 반대하는 ‘반 고소’입장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6)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회를 사임한 한상동 목사의 처신은 상당한 존경을 받았으나, 교회재산을 조건 없이 양도하거나 포기한다면 교회 재산을 누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하는 위기감이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송상석(마산문창교회) 박손혁(영도교회) 황철도(진주교회) 등은 예배당을 순수히 양도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7) 이들은 법정 소송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고신교의 입장도 이와 동일했다. 즉 경남지역의 5개 교회에 대한 명도 요구가 있었을 때, 1951년 11월 16일 소집된 경남법통노회 제55회 임시노회는 “그 교회 형편대로 처사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것은 교회를 조건 없이 양도하던지, 아니면 법적 대처를 통해 명도요구에 대항하던지 개 교회가 판단할 문제라는 결의였다. 즉 교회는 교회당 소유권을 둘러싼 재산권 행사에 있어서 일관된 입장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법정 소송을 거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입장은 1953년 9월 8일 회집된 경남법통노회 제59회 정기노회에서도 재확인되었다.(8)
송상석과 문창교회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교회당 재산을 쟁취를 위한 대립이나 소송이 정당하다고 본 대표적인 인물이 송상석 목사였다. 1948년 12월 27일에는 이약신, 황철도 목사의 뒤를 이어 마산문창교회 위임목사가 된 송상석은 교회 재산은 교인 총유(總有)의 것이라는 입장에서 교회 재산에 대한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가 부임하고 3년이 지난 1951년부터 총회측을 지지하는 측과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하는 측의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한 교회 안에 두 교회가 병립하게 되었고, 송상석은 백리언(1951.7-1952.8)과 김석찬(1952.9-1972.4) 목사와 싸우며 소송은 15년간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이때의 법적 대결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흔치 않는 전대미문의 법정투쟁이었다. 그런데 이런 법적 소송과 대립이 장기화 되자 조수옥 주경순 집사 등이 교회를 떠나 제2문창교회를 세웠고, 후에는 정홍석, 박수종, 신수도 집사 등이 교회를 나와 오동동교회(마산 동광교회)로 분립하였고, 어떤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결국 문창교회에서 송상석 지지세는 약화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재산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된 것이다. 결국 법원의 중재로 교회재산을 분할함으로써 법적 대립은 종결되었다. 그를 통해 교회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이라는 점이 대법원 판례가 되었다. 마산 문창교회의 분쟁은 교회재산 확보를 위한 소송의 첫 사례가 된다.(9)
박윤선의 이의 제기
문창교회로 대표되는 교회당쟁탈전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특히 교회 쇄신을 주창하며 시작된 고신 교회가 재산권 문제에 관여하여 법적인 대립을 불사하는 일은 건덕상 유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총회측으로부터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악제였다. 이를 통분히 여긴 인물이 박윤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고신교회가 이 점에 대해 침묵하는 일에 대해 내신 불만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1953년 노회 임사부에서 신자가 부득이 한 경우 불신자를 걸어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나, 신자가 신자를 걸어 소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10)
그래서 그는 고려신학교 설립 10주년이 되는 해이자 총로회로 출발한 고신교회가 총회를 구성하는 1956년 9월 20일 총회 개최 앞서 진행된 ‘개혁운동 10주년 기념집회’에서 박윤선은 “우리 진영에 교정하여야 할 몇 가지 과오”를 지적하면서 이를 시정하지 못하면 교회가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법적 투쟁까지 불사하는 교회쟁탈전이었다.(11) 부흥 집회 후 제6회 총회가 개회되었을 때 박윤선은 총대권 탈퇴를 선언했다. 부산노회 총대였던 그가 총회에서 탈퇴는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지적에 따라 취소하게 되지만 다음날(9월 21일) 총회 석상에서, “우리 총회가 개혁운동 10주년을 맞아 총회로 출발함에 있어서 과거 10년을 회고하면서 잘못된 것을 시장하자”고 말하고 4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예배당 쟁탈문제, 교회질서에 대한 문제, 기독교보에 대한 문제, 신학교에 대한(재정)문제가 그것이다.(12)
그가 문제시 한 교회 질서의 문제는 교회조직과 질서의 합리성 결여였다. 고려신학교가 교회 직영은 아니었으나 직영에 유사했으나 실제로는 사설학교에 불과했다.(13) 다수의 이사가 교수 혹은 강사를 겸하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설립자이자 이사장이었고 교수였다. 박윤선 자신은 교장이었으나 이사는 아니었음으로 교장직 행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정문제 또한 원만치 못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교회당 쟁탈과 소송 문제는 비성경적인 처사로 보았다. 당시 교단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한상동 목사마져도 박윤선의 주장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14) 박윤선 목사는 고신에서의 철수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총회 개회 벽두에 탈퇴선언을 했던 것을 보면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교단의 입장에 대해 매우 불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박윤선은 1957년 2월경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표면적으로는 주석집필에 전념한다는 이유였다. 이 무렵에 쓴 글인 “우리의 갈길,”과 “나의 걸어가는 길”(16)을 보면 교회당 쟁탈이나 소송은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신덕(信德)을 잃는 일이며, 고린도전서 6장 1-7을 어긴 일인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신덕으로 일관하여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 주장은 진리문제 이외엔 덕을 손상치 않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많이 양보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실상 회개운동자들이 취할 노선입니다. 남들과 싸우며 소송하면서 어떻게 남들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까? ... 예배당 건물을 파수하기 위해서 신덕에서 손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 혹설에 예배당 건물 때문에 소송에 가담하는 것이 교리에 위반된 사항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단정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 예배당 건물 안내어 주겠다고 소송까지 가담하면 신덕을 잃으며 성경말씀 고전 6:1-7을 어긴 것이라고 불초는 생각합니다. (17)
그가 고려신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한 이면에는 소송건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 외에 다른 문제도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지난 10여년간 고려신학을 주도했던 그의 사직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서울로 간 박윤선은 그해 4월 원효로 원성교회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개혁신학원’을 설립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려신학교는 3월 학기가 시작되었으나 박윤선 없는 신학교는 빈집과 같았다. 곧 조직신학을 교수하던 이상근 교수도 박윤선을 따라 서울로 갔고, 5월에는 한부선 선교사마저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세 교수가 없는 고려신학교는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사회는 다시 박윤선을 모셔오기 위해 그의 송사불가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고려신학교 이사회는 1957년 9월 13일 교수회와 합동으로 “교회 쟁탈전과 소송은 하지 않기로 하는 교육이념으로 교육한다.”는 결의서를 제시하였고,(18)고려신학교 대표 한상동 목사와 개혁신학원 대표 박윤선 목사는 양교 합동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협상은 일단락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개혁신학원의 고려신학교와의 합동이란 명분으로 이상근 교수와 함께 다시 고려신학교로 복귀한 것이다. 그 때가 1957년 9월 말, 고신을 떠난지 9개월만이었다.
박윤선과 송상석의 대립
이런 와중에서 박윤선과 송상석은 법정 소송건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했다. 박윤선은 <파수군> 제61호(1957.3)에 기고한 “우리가 걸어갈 길,” “그리고 나의 걸어갈 길”이라는 논설에서 “신덕(信德)으로 일관하여 진리 문제 이외엔 덕을 손상치 않기 위하여 남들에게 양보해야 한다.”(19)는 취지의 송사불가론을 주장하며 송상석의 송사정당론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박윤선과 송상석의 토론의 시작이 된다.
송상석은 <파수군> 63호(1957. 6, 49-53쪽), 64호(1957. 7, 31-50쪽)에 “교회소송사건 재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교회헌법은 소송을 금하고 있지 않으며, 소송은 국법에 따라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거나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교회사, 헌법, 신앙고백문서를 인용하면서 소송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는 예배당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殿)을 향한 열심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파수군> 65호(1957. 8, 21-30쪽)에 송상석의 논문에 대한 반론을 게재하고 자신의 소송 반대는 교인이나 교회간의 소송이라고 말하면서 예배당 건물을 위한 소송은 고신의 회개운동을 무력하게 하고 부덕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송상석 목사는 다시 <파수군> 66호(1957. 9)에 “교회소송문제 재검토” 라는 세 번째 글을 기고하여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동시에 박윤선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송상석은 한국에서의 소송사례와 서양교회 역사의 경우를 들어 소송정당론을 피력했다. 이런 논쟁 과정에서 평양신학교 29회(1934) 동창생인 박윤선과 송상석은 첨예한 견해차를 노정했고, 이런 대립의 후일 상호 반감의 내인이 되어, 박윤선의 고신 철수의 내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리하면, 건덕론을 말하는 한상동, 소송 불가론을 말하는 박윤선과는 달리 송상석은 건덕의 문제와 예배당 명도건은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여 송사정당론을 주창했다. 한부선, 이인재, 백영희 등은 교회 쟁탈전을 비난했으나, 박손혁은 부분적으로 황철도는 전폭적으로 송상석의 입장을 지지했다. 오종덕 목사도 송상석 목사가 고려고등성경학교 재산문제 처리에 도움을 준 일로 심정적으로 가까웠다. 이들은 만일 문창교회를 거져 내어주면 경남일대의 다른 교회들도 다 내어주는 결과가 되고 그렇게 된다면 교단이 존립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랜 법적 대립으로 송상석은 교단 내외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송상석은 교단의 재산을 지키는 일에 기여하였다고 남영환은 평가하고 있다.
경기노회의 행정보류와 탈퇴
이 무렵 교회재단 쟁취를 위한 고소 반대의견은 치리회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서울과 경기지방 교회를 관할하던 경기노회가 이 문제를 제기했다. 박윤선이 교단의 4대 문제점을 제기했던 총회(1956년 9월)에 참석했던 경기노회원 4인(이학인, 전칠흥 목사와 사광욱, 최재성 장로)은 법정소송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보고 전원이 총회장을 떠났다. 이듬해인 1957년 9월 17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된 고신 제7회 총회에 경기노회 고흥봉 목사가 허의한 “예배당 쟁탈전은 비성경적이므로 중지시켜 달라”는 청원에 대해 논의했다. 이 건에 대해 정치부는 “현하 예배당 건물 소송문제는 지금까지 되어 진 결과를 보아 피차 덕 되지 못하니 이 문제를 믿는 형제끼리 적극 해결하기 위하여 위원 5인을 공천부에 맡겨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했다.(20) 이 건과 관련하여 박윤선 목사의 연구 논문을 듣고 소송 당사자인 송상석 목사의 답변도 들은 후 많은 토론이 있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언론을 중지하고 투표한 결과 72대 3표로 정치부의 원안을 그대로 받았다. 즉 “예배당 쟁탈전은 비성경적이므로 중지시켜 달라”는 청원이 받아드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기노회는 총회와의 행정 보류를 선언했다. 이들은 결국 고신교회를 떠났다.
종합적 판단
종합적으로 볼 때 교회당 쟁탈이나 불신 법정 소송 문제를 처음 제기하며 일관되게 반대한 이는 박윤선이었다. 그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양도하더라도 말씀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고, 교회의 덕을 위해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경기노회가 행정보류를 결행하도록 영향을 준 이도 박윤선이었다.(21) 한상동 목사는 초량교회 명도를 요구받았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빈손으로 교회를 나왔으나 소송불가론자는 아니었다. 초량교회 명도 요구에 조건 없이 응한 것은 ‘건덕론’에 근거한 것이었지 신학적 확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영향 하에 있는 치리회에서 한 번도 소송불가론을 제기한 일이 없고, 1970년대 고신교단 내분이 일어나 그가 중심이 된 부산노회와 송상석 목사가 중심이 된 경남노회가 대립했을 때, 부산노회 중심으로 송상석 목사를 불신 법정에 고소했으나 한상동 목사는 이를 반대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가 소송불가론자가 아님을 증거한다. 그러나 박윤선은 일관되게 소송 불가론을 지지했고 따라서 교회당이나 교회 재산 쟁취를 위한 법적 대응을 반대했다. 이 문제는 결국 박윤선의 고신 철수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다.
2. 제2 논쟁기: 경남노회와 부산노회의 대결
1970년대 초 고신교회에는 또 다시 법정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고신교회에서 일어난 내분과 대립, 교권싸움은 법정 소송으로 비화되었고, 불신법정소송을 정당화기에 이르렀다. 이유나 정당성의 문제는 차치하고 박윤선 없는 고신에서 소송불가론은 힘을 잃었다. 일부의 소송 반대론자들이 있었으나 교권적 대세에 밀려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소송정당성이 제기되었고, 송상석 목사에 대한 면직 파동은 결국 고신교회교단 분열을 초래한 비극적인 현실로 나타났다. 이때의 싸움은 따지고 보면 경남노회를 축으로 한 송상석 세력과 부산노회를 배경으로 하여 조성된 한상동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 두 지도자 간의 대립은 인간적 호,불호와 더불어 성격과 인성, 현실인식과 이해관계, 지역구도와 인맥, 그리고 교단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배태되었고, 1970년대 초 이 불화의 내인(內因)은 현실적 대결로 노정되었다. 이로서 고신교회는 석원태 등에 의해 ‘고소파’라는 실명을 얻게 된다.
배경
고신교회가 합동(1960)과 한원(1963)으로 아직 교단의 분위기가 쇄신되지 못하고 있을 때 고려신학교와 이사, 그리고 교수단 안에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인가’건, 고려신학교의 문교부 인가건을 둘러싸고 심각한 다툼이 일어났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946년 설립된 이래 18년간 사설신학교로 있던 고려신학교는 1964년 9월 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되었고, 1955년 이래로 칼빈학원으로 있던 학부과정의 교육기관은 1964년 3월 학기부터 고려신학교에 편입되어 ‘대학부’로 불리기 시작했다. 1965년 9월 6일에는 총회유지재단을 구성했다. 이사장은 한상동 목사였다. 이렇게 되자 총회가 이사회를 통해 신학교를 운영 관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부흥하여 대학 인가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상동 이사장은 1966년 제16회 총회에 고려신학교가 대학령에 의한 대학인가를 받도록 총회유지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명의변경하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총회는 이 청원을 이사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총회에서 이사들이 교체되었는데, 송상석 목사가 유지재단 이사장에 선임되었다.(22)
그러나 고려신학교측은 송상석 목사가 유지재단을 학교재단으로 변경하는 일에 소극적이라고 판단하고,(23) 이사장(송상석)이나 이사회와 사전 협의 없이 당국의 인가를 얻기 위한 편법을 사용하였다. 즉 당시 사무처장 도군삼을 통해 가(假) 이사회를 조직했다. 이사장 한상동, 이사 홍반식 도군삼 주경효 김진경, 감사 오병세 이근삼으로 조직하여 인가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학교법인 인가를 받기위해서는 총회유지재단 명의의 재산을 학교법인에 양도하는 법적과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이사회 회록을 허위로 작성하고 이사장과 이사들의 인장을 무단 사용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1967년 5월 17일 학교법인 고려학원이 인가를 받았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송상석 이사장은 이 거짓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즉각 송상석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를 문제시했다. 이것이 ‘소위 사조(私造)이사회’ 사건이다. 허순길을 이를 두고 “학교당국은 학교법인 인가를 위한 선한 목적을 위해서 편법을 사용했다”고 하여 방법은 편법이었으나 동기는 선했다고 판단하지만,(24) 이것은 명백한 부정이었다. 이 사건은 한상동 측은 송상석을 배제하고자 했고, 송상석측은 한상동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송상석은 이 ‘사조 이사회’ 사건을 총회 재산을 사유화하기 위한 계략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상동 목사를 중심한 당시 고려신학교 교직원들이 교단소속 기관(고려신학교 복음병원 복음간호학교) 등이 운영권 및 총회소유재산을 사유화 하기 위하여 소위 사조이사회를 구성하여, 총회 및 재단 이사장 송상석 목사도 모르는 사이에 총회 재산을 사조이사회에 기부하였다는 허위 이사회 회의록을 작성하여 당시 총회 유지재단의 주무 감독청인 부산시 교육위원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 등록한 것인데, 이 사실이 뒤늦게 발각된 것이다.” (25)
이 사건이 확대되어 송상석은 이사장직을 한상동은 이사직에서 물러났고, 한상동 측은 총회 앞에 사과함으로 일단락되었다.(26) 1967년 7월 10일 개최된 이사회에서는 윤봉기 목사를 새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편법사건은 일단 마무리 되었으나 송상석 한상동 간의 불신의 벽은 더욱 견고해 졌고 이런 두 사람 간의 대립이 그 이후의 고려신학교 역사에서 재연되었다. 이 사건은 송상석과 한상동의 상호 대립과 불신의 중요한 사례였다. 필자는 이런 사안들은 고신성(高神性)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27)
1968년에는 고려신학교 교수 음주사건이 터졌다. 이사건 처리과정에서도 송상석과 한상동은 대립했다. 이 점에 대해 허순길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건 저변에는 “송 목사가 배경이 된 경남노회측과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교 측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심한 불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28) 1968년 12에는 학교법인의 정 변경 시 ‘고등교육’을 삭제했다는 이유로 고려신학교 대학부 교수들은 송상석 목사를 공격했다. 이사장 퇴임을 요구한 것이다. 교수들은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사건은 확대되었다. 결국 교수들은 송상석 목사의 명예를 훼손한 일에 대하여 사과 성명을 내고, 홍반식 교장과 신학부 교수들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전국교회 앞에 사과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여기서 종료되지 않았다. 고려신학교 교수들은 1969년 새학기를 앞두고 송상석 이사장 퇴임을 주장하며 총사퇴로 맞섰다. 오직 오병세 교수만이 동참하지 않았다. 1969년 3월 12일 소집횐 이사회는 홍반식의 교장 사임서는 받되, 홍방식 이근삼의 사퇴는 반려했으나 대학부 5명의 사퇴서를 수리했다. 이렇게 되어 김진경 김영재 등은 고신을 떠났다. 이런 난국에 한상동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학은 한 달 미뤄져 4월 8일 학기를 시작했다. 이런 위기를 몰고 온 근본 원인은 송상석과 한상동 간의 대립이었다.(29)
송상석과 한상동의 대립이 송상석 목사의 양해 아래 한상동 목사가 1969년 3월 27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완화되는 듯 했으나 곧 다시 재현되었다. 그것이 1973년 초 법정 소송이라는 극단으로 발전하고 결국 교회 분열을 겪게 된다.
이사장의 임기문제
불행한 대립과 분열로 치닫게 되는 사건의 발단은 1972년 9월에 모인 제22회 총회였다. 총회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이사를 개편했다. 15명의 이사를 선출하였고,(30) 1968년 9월부터 이사로 선임되어 4년이 경과한 송상석 목사 대신 김희도 목사가 새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송상석 이사장은 자신의 이사장 임기가 잔여하다고 주장하고 인수인계를 거부했다. 문제는 총회가 정한 임기와 문교부에 등록된 임기가 달랐다는 점이다. 송상석의 경우 문교부가 인정한 정관에 의하면 1971년 9월 30일 이사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1975년 9월 29일까지였다. 따라서 자신이 합법적인 이사장이라고 주장했다. 이사장 임기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송상석은 1972년 11월 3일자로 문교부에 ‘이사장 임기에 관한 질의’를 했고, 문교부는 “귀 법인 이사장의 임기를 71.9.30-75.9.29까지로 결정하고 취임을 승인한바 있으므로 동 이사장의 임기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귀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곤란하여 반려하오니 양지하시기를 바랍니다.”고 답변했다.(31)
송상석은 감독기관인 문교부로부터 임기보장을 받은 샘이다. 따라서 그가 물러갈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를 근거로 김희도 이사장에게 사임을 요구하여, 김희도 이사장은 12월 20일자로 총회장에게 이사장 사임서를 제출했다. “사임서, 본인은 거(去) 22회 총회시 고려재단 및 학교법인 이사장 임직에 대하여 본 교단 평화를 위하여 이사장직을 사면하나이다.” 김희도 목사는 덕성을 지닌 목회자로서 교단 평화를 위해 사임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로 김희도는 이를 번복하였다. 결국 교회법이 인준한 김희도 측과 사회법이 인정한 송상석 측은 대립하게 되었다. 송상석은 문교부 공문에 근거하여 1973년 1월 2일 법인 산하 기관에 “송상석의 이사장직이 계속되니 사무 처리에 참고하라”는 공문을 하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상동으로 대표되는 부산노회 측은 송상석에게 이사장 사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김희도 이사장을 지지했다. 송상석 목사 편에서 볼 때 의도적으로 이사장을 교체하려는 것으로 인식했다. 허순길은 송상석 목사가 이사장 직을 고집한 것을 “신학교 신축의 영예를 같이 누리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해석했다.(32) 송상석은 “이사장 쟁탈전”이라고 부르면서 화란 원조금 관리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의도로 해석했다.(33) 류윤욱 목사는 송상석의 이사 임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이 이사장 임기만 제기하는 것은 숨은 ‘속사정’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이사장 쟁탈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34)
당시 학장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화란 캄펜신학교 교수회의 초청을 받고 1972년 3월 화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정홍권 교수의 수고로 급하게 제작된 것이 <고신학보>(1972.3)라는 홍보물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화란에 약 두 달간 체류하였고, 화란31조파 교회에 미화 25만불에 해당하는 약 90만 길더의 고려신학대학 교사 신축 기금을 요청하였다. 화란교회는 이를 이해하고 전 교회가 헌금하여 이를 후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금을 어느 개인에게로가 아니라 이사장 명의로 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장이 누구냐 하는 것은 주요한 문제였다. 이것이 이사장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보는 속사정이었다고 보는 이들의 증언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한상동과 부산노회 측에서 송상석을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불신법정 고소
이런 상황에서 송상석은 자신을 지지하는 학교법인 이사 수를 확보하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사건이 드러났다. 송상석은 자신과 이기진 이사, 곧 두 사람이 모였으나 불참한 두 사람, 곧 류윤욱과 지득용 이사가 참석한 것처럼 하여 최영구 목사와 김해룡 장로를 새 이사로 선임하여 이사회록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이사승인 신청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한상동 측의 사조이사회 사건의 재현이었다. 이번의 사문서 위조는 송상석의 명백한 부정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어떻게 해서든 송상석을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기회를 엿보던 부산노회 측은 호기를 잡았고, 1973년 6월 9일 김희도 목사 명의로 송상석을 사문서 위조혐의로 부산지방 검찰청에 고발했다. 이로부터 12일 후에는 송상석의 이사장직무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이것이 고신교회를 지리한 전투장으로 만들어갔던 추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부산노회와 경남노회 대립은 다시 재현하였다.
이때의 소송은 1950년대의 법정고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1950년대 말의 소송은 교회당을 확보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으나, 이때의 소송은 교권싸움이었고, 전자는 다른 교단과의 싸움이었으나 이때의 싸움은 형제와의 내분이었다. 전자는 민사소송이었으나 이번에는 형사 소송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권력연장을 위해 국민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있었고, 다른 교단은 일만교회 운동, 백만성도 운동을 벌이고 있었을 때, 우리는 니사아활(你死我活)의 대립으로 교계신문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난무하는 성명서는 고신의 선명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추태였다. 그래서 필자는 교단이 조직된지 불과 20년이 못되어 고신성(高神性)의 변화가 두렷이 나타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소의 정당성 주장
두 노회를 배경으로 송상석, 한상동 두 지도자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고려신학대학 교수회 이름으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이 1973년 6월 13일 발표되었다. 집필자는 오병세 교수였다. 이 논문에서 신자간의 법정 소송이 가한다고 판단했다. 이 논문은 신구약성경, 특히 로마서 13장과 고린도전서 6장, 그리고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전통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성도간의 사회법정 소송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바울은 오직 광적인 소송을 금지했을 뿐이고, 공의를 세우려고 하는 한 법의 보호를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하나님의 대리자인 국가 위정자들을 통해서 범법자를 징벌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소송은 불기피하다는 입장이었다.(35)이 논지는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한 박윤선의 해석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고소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 논문은 고려신학대학 경건회 석상에서 낭독되던 일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이 논문은 이사들에게 전달되었고 그해 9월 총회 전에 총대 전원에게 발송되었다. 이 논문은 송상석 목사 고소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확인받으려는 의도였고, 각 총대들에게 발송한 것은 그해 총회에서 고소불가론을 잠재우기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려신학대학원 3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최갑종 전도사는 <고신대학교>1973년 7월호에 “소송문제에 대한 주석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여 소송 자체가 절대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 그해 <고신대학보> 9월호에 게재한 “개혁주의 성경관”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변호했다.(36) 또 고려신학대학 교수회 이름으로 성도 간의 법정소송이 가능하다는 논문이 은밀하게 배포되고 있을 때 서울에서 경향교회를 개척하고 있던 석원태 목사는 “고려파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과 소송 건”(1973.9)이라는 소로을 발표하고 소성불가론을 주장하며 송상석 목사에 대한 고소 건은 취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고소문제에 대한 총회의 결의
그렇다면 고소문제에 대해 고신교회 총회는 어떤 결의를 했는가? 1973년 9월 20일 고신교회 제23회 총회가 마산의 제일문창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이 총회에는 경남법통노회가 상정한 소송금지 긴급건과 경동노회가 해명을 요구한 김희도 윤은조 제시가 송상석 류윤욱 두 사람에 대한 형사고소 및 민사 소송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해답 건이 상정되어 있었다.(38) 이 총회는 송상석 목사에 대한 형사소송 건으로 논란이 일어났고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총회장은 비상 전회를 선언했다. 그해 12월 17일 속회된 총회는 불신법정 고소는 불가하다고 결의하고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는 총회 앞에서 사과하게 했다. 이 건은 김경래 박은팔 류윤욱 손명복 이경석 등 5인에게 일임하여 결의문을 작성하여 보고케 했다. 5인 위원회는 이건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 총회에 보고하여 원안대로 가결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도와 성도간의 소송 문제에 있어서 신학적 해석이나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주장을 투표로 결정짓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성질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성도간의 소송 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원인 여하에 고사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소망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기본 정신에 따라 금번 소송 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교단의 평화와 단결을 위하여 또한 건덕을 위하여 총회 앞에서 유감의 뜻을 표하기로 하고, 이를 사랑의 박수로 환영함으로써 이 문제와 노회장 회의가 총회에 보고한 관련 건을 일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결의 동의한다.”
소송 불가론을 확인한 것이다. 동시에 소송에 관여했던 당사자가 총회 앞에 사과하고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1974년 9월 19일 부산남교회당에서 소집된 제24회 총회에서는 이 건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는다는 전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재론했다. 즉 경북노회장 한학수 목사는 송상석 목사 비행에 대한 처리건과 함께 소송에 관한 결이 시정건의안을 제출하였는데,(39) 본회는 가74, 부 25, 기권 1표로 재론을 가결했다. 이때 “소송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를 “소송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로 수정 결의했다.(40)이전 해의 소송 불가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이 결의에 불복하고 경남법통노회 총대 20명은 퇴장했다. 경동노회도 이 결의가 시정될 때까지 조건부로 행정 보류를 선언하고 퇴장했다.(41) 2년 후인 제26회 총회(1976)에서는 이 전의 결의를 약간 수정하여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송하지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로 재결의 했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에 대한 명시적 지침이 없으므로 소송 불가론의 입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이것이 현재의 고신교회의 입장이다.
송상석 목사 제명과 교회의 분열
송상석 목사건은 논란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1974년 9월에 모인 제24회 총회에서 경북노회장 한학수 목사는 ‘송상석 목사 비행에 관한 처리건’을 상정했고, 총회는 특별재판국을 설치했다. 국원은 민영완(국장) 신현국(서기), 강호준 시군식 박은팔 목사와 김기복 변종수 손기흥 조인태 장로 등 9명이었다. 이들은 3개월이 지난 1974년 12월 4일 ‘목사면직’이라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기소위원은 전성도와 한학수 목사였다. 당시 78세였던 송상석에게 교회 치리회의 가장 무거운 형벌이 내려졌다. 주문과 판결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문
경남노회 목사 송상석씨는 1) 총회 결정 불순종, 2)문서 위조, 3) 거짓증거, 4) 공금유용죄의 충분한 증거가 들어났으므로 본 특별 재판국은 심사한 결과 송상석씨는 그리스도교회의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이 천부당만부당한 줄로 확인하는 고로 송상석씨의 목사직을 파면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하노라.
판결 이유
1. 피고 송상석씨는 총회 결정에 불순종한 사실과
2. 문서 위조를 함으로써 제9계명을 범한 일과
3. 거짓 증거를 되풀이 함므로써 제9계명을 범한 일과
4. 공금을 유용함므로써 제8계명을 범한 사실 때문임.
5. 적용 법조문
신앙고백 제31장 3항, 정치 13장 61조, 64조, 65조, 정치문답 조례 185문, 420문, 421 문, 424문, 428문, 429문, 435문, 대요리문답 제145문, 대요리문답 제142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극단적인 치리는 반발을 불러왔다. 경남노회는 재판국 지시를 거부하고(1974.12.26) 특별재판국의 위법성을 주장했다. 곧 행정보류를 하게 되자 총회는 경남노회 행정의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총회의 지시에 순응하는 이들로 소위 ‘정화노회’를 조직했다.
이런 어간에 하찬권 목사는 『기독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연구』(1973. 3)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불신법정 소송은 비성경적일고 주장했다. 경기노회의 성도간의 불신법정소송에 대한 연구위원회(위원장 하찬권, 위원 박성호 석원태 정승벽 김만우) 또한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에 대한 연구위원 보고”(1975.9)를 통해 불신법정 소송이 성경적이 않다는 점을 주장했다.
1975년 9월에 소집된 제25회 총회가 경남노회 총대를 거부하자 이들은 9월 26일 행정보류 결의문을 내고 총회를 떠났다. 고신 교회의 분열이었다. 경남노회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약 70여 교회가 가담하여 소위 반고소(反告訴) 고신교회로 출발했다. 석원태 목사를 비롯한 경기노회 일부도 합류했다. 이들은 ‘반고소’라는 이름으로 분열하였지만 그것이 분열의 진정한 동기라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할 것이다. 분열된 반고소측은 서울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별도의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시작했으나 곧 자체 분열되어 경기노회측(석원태 목사 중심)과 경남노회측으로 재 분열되었다.
결론
이상에서 소송 건이 고신역사에서 어떻게 취급되어 왔던가를 고찰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현재 고신의 입장은 소송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일뿐 소송을 금하지 않고 있다. 고신 교회에서의 소송 문제는 소송건 그 자체의 문제이기 보다는 교회 내분, 분열과 대립 파벌, 주도권 장악 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또 교회의 문제는 고려신학교(고신대학)와 복음병원(고신의료원)을 둘러싼 내분과 갈등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분열과 대립의 현장이었다. 지도자들 간의 반목, 총회와 이사회 구성에 있어서 노출되었던 잡음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간의 문제들이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완수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가, 우리에게는 다른 교회와 다른 그 무엇이 있는가? 신사참배 거부?, 순교신앙? 코람 데오? 우리의 지난 역사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확인시켜주었을 뿐이다.
각주
(1) 해당 회기 경남노회록 참고, 1956년 3월 20일 회집한 제62회 경남노회에서도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명칭을 타 교파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총회에 건의키로” 하였다. 당시 회록서기는 구포교회 교역자였던 김두만 목사였다. 여기서 말하는 ‘타교파’란 고신을 의미했다.
(2) 부산노회 회의록 편찬위원회, 『부산노회회의록』(부산노회, 1980), 23.
(3) 2013년 10월 15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기독교화해사역세미나에서 오세창 변호사는 “이제 세상법정으로 가지 맙시다”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한국교회 10대 순위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과 1천여개 교회가 법정 소송 중에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4)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1056), 159; 신재철,『불의한 자 앞에서 송사하느냐?』(쿰란출판사, 2007), 69; 이상규,『한상동과 그의 시대』(SFC 2006), 61.
(5)접수위원 9인은, 노진현 이수필 강주선 목사와 우덕준 양성봉 장로 등이었다.
(6)신재철, “불신법정 송사문제에 대한 한상동의 견해와 대응,” 『부경교회사연구』제6호(2007. 11), 54.
(7)남영환, 『한국교회와 교단』(소망사, 1988), 281-282.
(8)1953년 9월 8일부터 11일까지 부산제일영도교회에서 모인 경남(법통)노회에서는 “전 노회에서 결의한 개 교회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기로 결의한 것을 재확인하고” 단지 이 건에 대하여 비난, 공격, 분열, 선동을 엄금하기로 했을 뿐이다, 걍남(법통)노회, 『경남(법통)노회 역사자료집, 1916-2010』, 88.
(9)김영재, 『박윤선』(살림, 2007), 124. (10)박윤선, “교회 소송 문제 재검토” <파수군> 65호(1957. 8), ??.
(11)박윤선, “나의 걸어갈 길,” <파수군> 61(1957.3), 15.
(12)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록(제1회-제10호), 90.
(13)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2002), 419.
(14)김영재, 128.
(15)<파수군> 61호(1957. 3), 5-11.
(16)<파수군> 61호(1957. 3), 12-14.
(17)<파수군> 61호(1957. 3), 6-7.
(18)허순길, 421. (19)<파수군> 61호(1957. 3), 6.
(20)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록(제1회-제10호), 41.
(21)김영재, 127.
(22)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50년사』, 181. 이사회 서기는 남영환, 회개는 지득용이었고, 이사는 윤봉기 박손혁 유윤욱 장정실 이재술(이상 4년조), 손명복 한학수 유선호 김은도 박갑수 박승문(이상 2년조)였다, 실행이사는 송상석 한상동 박손혁 지득용 총무처장 도군삼이었다. (23)이것은 남영환의 해석이지만, 허순길, 182.
(24)그러면서도 허순길은, “학교법인을 설립하고자 한 목적은 선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정당하지 못했다. ... 주님의 교회 건설을 위해 이런 편법을 사용한 것은 큰 불행이었다. ...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으로 교역자 양성’을 학 위해 설립된 신학교의 아름다운 이념이 편법의 사용을 통해 흐려지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더욱 이 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목사가 이 편법 사용에 관련된 것은 큰 불행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허순길, 184.
(25)송상석, 『법적 소송과 종교재판』, 78.
(26)제17회 총회회록(1967.9), 184,, 고려(반고소)역사편찬위원회, 『고려25년사』, 66.
(27)이상규, “고신대학 40년사, 1946-1986,” 『논문집』14(고신대학, 1986), 14.
(28)허순길, 186.
(29)허순길, 190.
(30)선임된 이사는 김희도(이사장) 권성문(서기) 김경래 주영문(회개) 김주어 박찬규 박현찬 서영태 이기진 조규태 최만술 최영구 현기택 등이었다.
(31)송상석, 109.
(32)허순길, 211.
(33)송상석, 106. 류윤욱,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94.
(34)류윤욱, 94-95.
(35)신재철 박사와의 대화에서, 이 논문의 집필자인 오병세 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했다고 들었다. (36)그러나 최갑종(현 백석대학교 총장)은 <기독교보> 1066호(2013. 3. 30)에 기고한 “성도 간의 고소 고발 유감”이라는 논설에서 “소송문제가 교단과 학교의 주요이슈가 되었을 때 고린도전서6:1-11에 관한 설익은 논문을 통해 마치 성경이 특수한 경우에 한하여 성도간의 문제를 사회법정에 고발 및 소송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 신학교 시절소송 문제와 관련하여 발표했던 사려 깊지 못한 글을 깊이 반성한다.”고 썼다.
(37)신재철은 자신의『불의한자 앞에서 소송하느냐』(2014. 2), 232-35에서 석원태는 진정한 의미의 소송 반대론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38)제23회 총회록, 17. 류윤욱 목사를 증거도 없이 공금유용죄로 고발한 사건이 무혐의 처분되자 고소당사자인 윤은조 장로는 총회 앞에서 사과했다고 한다. 류윤욱, 57. (39)제24회 총회록, 12.
(40)제24회 총회록, 23. 이때 결의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23회 총회결의(회의록 31페이지) 98항 ‘성도와 성도간의 소송문제에 있어 이의 신학적 해석이냐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주장은 투표로 결정짓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성질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원인 여하에 고사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소망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기본정신에 따라 금번 소송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교단의 평화와 단결을 위하여 또한 건덕을 위하여 총회 앞에서 유감의 뜻을 표하기로 하고 이를 사랑의 박수로 환영함으로써 이 문제와 노회장 회의가 총회에 보고한 관련 건을 일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결의 동의 한다.’를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라고 수정하자는 동의가 성립되어 가부로 투표로 하기로 하고 투표하니 가 72표 부 7표 기권 1표로 동의가 가결되다. 본건에 대하여 경남노회 총대 정재영 외 20명이 본건에 한하여 결의를 거부하고 항의서를 제출하고 총퇴장하다.”
(41)그러나 이때의 경동노회의 행정보류 선언이 총회록에 누락되어 있어 경동노회 제25회 정기노회에 이 점이 보고되었고, 노회는 이보고를 채택 확정했다고 한다. 류윤욱, 98. 참고 경동노회, 『경동노회40년사』(2003),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