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로마가톨릭교회에 묻는다
저는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다만 한국 가톨릭이 지난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에 기여한 공덕에 고마워하고, 가톨릭 내부 일부의 매우 보수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낮은 곳으로 임하여 ‘힘들고 어려운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분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으로 보여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톨릭프레스를 통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한국 가톨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몇 가지 의문을 떨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으로 몇 차례로 나누어 가톨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궁금한 것을 조심스럽게 드리는 질문에 대해 혹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고, ‘관심과 애정’으로 받아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1. ‘로마 가톨릭은 제국인가?’
첫 번째 의문은, ‘제국(帝國)은 역시 제국이다’는 느낌을 가톨릭에서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로마제국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그 로마제국의 유산인 로마가톨릭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가톨릭은 제국(帝國)’이라는 이 느낌은 지난 해 프란치스코 교황(또는 교종)의 방한을 맞아서 가톨릭 내부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런 느낌을 뒷받침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대사를 파견하는데, 이 대사가 마치 로마제국의 각 식민지에 보냈던 총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긴 몇 해 전 서울대교구 일부 사제들이 주한 교황청대사의 문제를 거론하는 연판장을 돌린 적도 있더군요. (식민지에서 본국 정부에 ‘총독의 월권과 권력 남용’을 이유로 소환을 청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서도 “아, 한국 가톨릭이 이제 제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구나!” 하며 안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니던가요? 이왕 이 말씀이 나왔으니,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분이 누구이죠? 서울대교장인 염수정 추기경인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은 그저 로마에서 임명한 서울대교구의 수장일 뿐이죠. 세속 정치에 빗대어 말씀드리면, 일제 강점기 식민지 본국에서 임명한 ‘경성부사’에 해당되지 않던가요?
아니면,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주교인가요? 쉽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바깥세상에 빗대 말하면, ‘주교회의 의장’이란 자리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본국에서 임명된 지사(知事)들의 협의체 대표쯤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한국 가톨릭의 각 교구 수장은 한국 가톨릭의 사제‧수녀와 평신도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모두 (과거의 식민 지배 시절처럼) 로마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로마에서 적임자를 선정하여 임명을 하는 나름의 절차와 방식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는 세속에서 모르는 나름의 원칙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소중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대든, 현재의 주교(대주교와 추기경 포함) 선정과 임명 방식이 로마제국의 유산으로 이제는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2. ‘집안의 민주화가 선결과제는 아닌가?’
두 번째 의문은, ‘정치 참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천주교 사제들이 선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1980년대까지 인권과 통일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한국 가톨릭이 보수화되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던 ‘이웃 종교인’의 입장에서 최근 ‘자유와 민주주의’를 앞세우며 정치 참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천주교 사제와 평신도들이 움직임은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분들께서 바깥세상의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먼저 해결해주었으면 싶은 것이 있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교 내부의 의사 결정에 사제, 수사, 수녀와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교구장이나 추기경 임명에 평신도는 아예 말도 못 붙이고, 심지어 사제들의 참여를 원천 봉쇄하는데 어찌 바깥세상의 정치에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바깥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충정을 십분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혹 말이죠, 과거 일제 강점기 일본 “천황(天皇)폐하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덕을 입었다”고 “성은(聖恩)이 망극하다”며 엎드려 울었던 이완용 등과 같은 식민지 조선의 작위 소지자들처럼, 주교 임명이나 추기경 선임이라는 로마의 결정에 감읍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런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가요?
또 한 가지, 가톨릭 내부에서 수녀를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관행에 대해서도, “이것은 전통이라 어쩔 수 없다.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거나, “로마 때문에 …”라면서 핑계를 대지 말고 그 잘못을 고쳐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최근에 ‘개혁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또는 교종]께서도 여성 사제 서임에 대해서는 완고한 입장이라는 외신 보도도 있었습니다만, 지금 사제와 수녀님들 그리고 의식을 갖춘 평신도 여러분들이 바깥 세상에 보여주는 ‘용기’를 안으로 돌리면 안에서도 얼마든지 ‘변화와 개혁’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3. 로마에 대한 재정 기여가 너무 크지 않은가?
스스로 제국(帝國)의 신민(臣民)이 되어 인정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거나, 그 대열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무슨 말로 자신을 포장하든 결코 자주적이 되어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제국의 당당한 시민인 줄로 착각하고,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이웃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일에 앞장 설 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언론을 통해서 한국 가톨릭이 로마에 바치는 재정기여에 있어 전 세계에서 여덟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라 경제가 어려웠습니다. 거대기업 중에서도 무너지는 곳이 있었지만, 중산층과 서민층의 생활은 힘들다는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로마에 내는 부담금이 그리 많았다면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러고서도 민주와 인권 그리고 정의를 거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디 한 번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납득할 만하면, 저부터 앞장서서 “가톨릭의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고 변호하고 옹호해드릴 것입니다.
사소한 문제라고 대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외환관리법 규정에 어긋난 일은 없었는지도 궁금합니다.
4. 한국 가톨릭, 토착화가 가능할까?
한국 가톨릭 일부에서 아주 오랜 동안 토착화를 고민하며 다양한 시도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당에 ‘한복 입고 갓을 쓴 예수님 상’을 모시기도 하고, 찬송가 반주를 국악으로 해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노력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으로 박수를 쳐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코 가톨릭이 토착화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왜 그럴까요?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로마에서 일방적으로 거의 종신직으로 임명하는 주교[대주교와 추기경]라는 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나 도전을 하지 않고서는 토착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5. 순교성지 조성보다 앞서 해야 할 일
요즈음 한국 가톨릭은 특정 교구를 가릴 것 없이 경쟁적으로 순교 성지 조성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삶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 땅의 ‘하느님 백성들’에게 가장 긴요한 일이며 그들에게 희망이 되는 일일까요?
그에 앞서 프랑스 군대를 보내서 조선 땅을 짓밟아달라고 했던 조선시대의 일부 사제와 평신도들의 잘못, 고종(高宗)이 프랑스선교사들의 활동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위를 부여하면서 제주도 등지에서 천주교신도들이 저질렀던 만행으로 1901년에는 이른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던 일, 살인자라는 이유로 안중근 의사를 파문하고 안 의사 처형 직전 종신 의식을 해주신 신부님을 추방했으며 안 의사 동생 안명근 등이 데라우찌 총독을 처결하려던 계획을 일제 정보기관에 밀고하여 신민회원 105명이 투옥되었던 일 등등 과거 조선교구와 교구장 뮈텔 주교의 행위를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제의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조선교구의 행태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으셔도 잘 아실 것입니다.
저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 원래 그 땅의 주인들을 학살하고 이교도라는 이유로 탄압했던 가톨릭 선교사들이 지은 죄악을 참회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또 유럽에서 마녀 심판과 종교재판 등을 통해 순진한 사람들과 지성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프로테스탄트와의 갈등 상황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고 역사의 흐름을 막았는지요? 가톨릭에서는 듣기 싫은 이야기이지만, ‘성지 예루살렘 해방’을 명분으로 십자군전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쟁으로 중동지역뿐 아니라 숱한 유럽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대해서는 뭐라 하시겠습니까?
파시즘과 나치의 도움으로 독립국가가 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로마의 지휘를 받는 전 세계 가톨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태리‧일본의 이른바 추축국(樞軸國)을 옹호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또 어찌 설명하시렵니까? 그냥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며 대충 넘어가버릴 수 있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6. 정치권의 지나친 공손을 당연하다고 여기는가?
옛날에 ‘공손도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만, 요즈음 한국 가톨릭에 대한 정치권의 몸짓이 너무 과하게 비굴하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상하관계가 뚜렷한 자식이 부모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군대나 경찰의 하급자가 상급자에게도 공손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예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종교인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척하고,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예가 아닌 차원을 넘어 예의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기념미사에서 대통령 축하 메시지를 장관이 읽고, 염수정 추기경 서임 결정 뒤 축하 화분을 보내는 ‘있을 수 있는 예의’의 수준을 넘어 국무총리까지 명동성당으로 찾아가고 로마에서 열리는 추기경 서임식에 정부 사절단을 파견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서울에서 열리는 감사 행사에 또 다시 고위급 인사가 참석해 축사를 하며,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서임식에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찾아가서 대통령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고,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정부에서 엄청난 행정‧재정 지원을 하고 “교통 불편과 경호 상 어려움이 있으니 시복식을 광화문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주셨으면 좋겠다”며 장관급 인사가 추기경을 여러 차례 찾아가 사정을 하는, 이런 것들이 정치권의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하십니까?
혹 그 뒤에 한국 가톨릭을 세속화시키고 타락시키려는 숨은 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7. 성지 조성에 너무 열성적이지 않은가?
전국 곳곳에 천주교 순교성지를 조성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서울 서소문 밖의 조선시대 사형터를 천주교만의 단독 순교성지로 조성하기 위해서 중앙정부와 지자체를 압박해 결국 예산을 반영하였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일반 여론이 좋지 않아서, 최근에는 ‘서소문 사업이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강변하는 인물도 있습니다만)
개혁교황으로 평가받고, 가톨릭교도뿐 아니라 전 세계의 시민들에게 환영받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한하였을 때 발을 밟았던 곳들(충남 서산시 해미읍성 등)을 성지로 만들어 관광객 유치에 앞장서겠다는 각 교구의 태도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방침과 맞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8월 23일 광화문광장에서는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밟았던 자리에 ‘가로 1.7m, 세로 1m 크기의 바닥돌’을 단단하게 묻고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고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추진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쪽에서는 “작년 교황집전으로 시복 미사가 봉헌된 광화문 일대는 지난날 천주교 선조들이 순교했던 포도청, 의금부, 전옥서 등이 위치했던 장소. 이곳이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순례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다고도 합니다.
고개를 가로젓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런 일들이 왜 계속해서 벌어지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존경하는 한국 가톨릭의 신부, 수녀님과 정의를 일으켜 세우고자 힘든 길을 가고 있는 평신도 여러분께 버릇없이 긴 말씀을 주저리주저리 드린 데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가톨릭에 무지하면서도, 관심과 애정만으로 만용을 부려 드리는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쓴이: 옮겨오는 과정에서 실수로 저자 이름을 놓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