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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기독교여성들의 친일논리와 행태/ 양미강

- 1937년 - 1945년을 중심으로-


양미강(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상임운영위원장)


Ⅰ. 시작하면서
 
Ⅱ. 1920년대 기독교여성운동의 이념과 지도층의 형성
  1. 기독교여성운동의 이념적 지형: 모범적 주부상
  2. 기독교여성운동의 지도층 형성

Ⅲ. 1930-40년대 기독교여성의 시국인식과 친일행태
  1. 대세순응론
  2. 황민화논리 : 열등의식의 내재화  
  3. 총후가정(銃後家庭) : 황국신민의 양성자
  4. 가정보국 : 정신과 생활개조운동

Ⅳ. 친일여성단체와 기독교여성지도자
1. 1937-1940년
2. 1940년대 이후

Ⅴ. 여성들의 친일논리의 양면성 : 국가의 이중적 젠더 전략
  1. 징병의 독려자인 여성 : 군국의 어머니
  2. 징병의 대상자인 여성 : 일본군 위안부

Ⅵ. 마치면서  

Ⅰ. 시작하면서

본 논문은 여성사의 관점에서 일제 말기 여성들의 친일논리와 친일행태를 분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성사의 관점이라 함은, 우선 연구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측면과, 연구의 관점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란 역사전개상 남성중심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남성/여성의 젠더이원론이나 그러한 이원론으로 은폐되었던 계급, 인종, 성적지향, 문화의 다양한 차이를 부상시킨다.

남성중심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여성이 위치지워 있으며, 여성들은 어떤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았으며, 또 가부장적인 사회에 어떻게 대응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사는 가부장적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며, 동시에 여성의 유산을 기반으로 여성의 역사를 재건하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동안 한국의 여성사 연구는 일본이나 서구에 비해 매우 부진한 상황이다. 한국의 여성사 연구는 역사학보다는 여성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진 경향이 있다. 따라서 역사학에서 여성사에 관한 연구는 극히 미약하다. 여성사적인 접근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시기는 한말 이후 근대화 과정에 집중되어 있고 일제 말기에 관한 연구는 최근 윤정란의 기독교여성운동 연구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두가지다.

하나는 일제의 입과 발이 되었던 여성지도자들의 시국인식과 논리를 규명하여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공/사의 논리가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 그리고 국가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또 하나는 여성지도자들의 친일논리와 행태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희생양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결국 이 두 가지의 목적은 오늘날의 여성운동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 가야할 역사적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논문의 연구시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까지로 삼았다.  이 시기는 일제의 전시체제 하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국가적 전략이 노골적으로 표출된 시기이며, 따라서 여성지도자들의 친일논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연구의 대상은 일제 말기 여성 운동 전반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기독교여성운동에 제한하였다. 그것은 일제시대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흐름이 기독교여성운동이었고, 당시 여성지도층을 형성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여성지도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독교여성지도자라고 칭하는 것은 개신교 여학교나 여자대학, 그리고 개신교를 배경으로 한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을 의미한다. 주된 연구방법은 문헌학적인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1차 사료인 1930년-40년대의 신문이나 잡지, 영문잡지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관련 연구논문을 참고하였다.

논문의 구성은 2장에서 기독교여성운동의 이념적 지형을 살펴볼 것이다. 이는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들의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3장에서는 이들의 시국인식과 친일행태를 네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현실타협 속에서 철저한 내선일체, 황민화 논리를 추종하고, 그것은 곧 총후가정과 가정보국이라는 친일행태로 드러날 것이다.

4장은 친일여성단체들과 여기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을 다루었다.

5장은 여성들의 친일논리의 양면성을 다루어 일제의 젠더 전략이 어떤식으로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동원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여성들은 필요에 따라 징병의 독려자들로 또는 징병의 대상자들로 설정되고 있었다.  



Ⅱ. 1920년대 기독교여성운동의 이념과 지도층의 형성

기독교는 선교 초기 철저한 유교의 가부장제에 억눌려 살고 있던 여성들에게 해방의 빛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남녀평등적인 이념과 한글사용으로 거의 문맹상태에 있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귀중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동시에 가정이라는 차단된 공간에서 탈출하여 교회와 사회라는 공적기관에서 봉사함으로써 해방감을 주었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초기 치중했던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으로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담당했던 기여도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아실현을 위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민족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동참함으로써 민족적 고난을 함께 하는 교회로 자리잡았다. 선교초기부터 3.1운동이 일어날 당시까지 한민족의 과제는 근대화와 민족해방이라는 양대과제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양대과제 속에서 기독교는 3.1운동까지는 비교적 충실하게 이 과제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국채보상운동, 송죽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3.1운동시 기독교여성의 참여 등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20대 이후 나타난 사상적 분화과정에서 기독교여성운동도 일반 기독교운동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사상의 흐름 속에서 계몽적 차원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기독교여성운동은 여자야학, 여자토론회, 순회강연 등의 교육계몽운동을 통해 교육을 통한 실력향상으로 남녀가 동등해지고 민족해방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1. 기독교여성운동의 이념적 지형: 모범적 주부상

여성교육의 중요성은 이 시기에 특히 강조되고 있다. 교육은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힘과 함께 여성해방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다는 생각에서 여성이 해방되려면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의 목적이 결혼을 위한 신분상승 수단이라면 그것은 반 여성해방적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교육을 통해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교육계몽운동은 소박하게는 독서장려로부터 적극적으로는 여자교육회설립과 여자대학의 필요성까지 진전되고 있다.

기독교여성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바로 이것은 여성운동의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결국 기독교여성들의 교육받은 학교의 교육목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기독교여성교육의 센터라 할 수 있는 이화나 배화 등을 통해 기독교 여학교의 교육목적을 통해 살펴보자. 이화학당의 경우, 초대교장인 스크랜튼은 교육방침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우리의 목표는 여아들을 외국인의 생활,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데 있지 않다. 이따금 본토(미국)에서 와 또는 현지에서 우리 학생들의 생활전부를 뒤바꾸어 놓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듦으로써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

스크랜트의 교육목표는 보다 나은 한국인을 만들려는데 있다. 보다 나은 한국인은 모든 것을 서구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화의 교육목표는 로드와일러의 말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2대 학장인 로드와일러(L.C.Rothweiler)도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교육목적은 한국여성으로 하여금 참된 가정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조력자가 되고 우리 학교의 교사가 되며, 기숙학교의 조수가 되고 의료사업에 있어 간호원이나 조수가 되게 하는데 있다...그들은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자기 몸과 집안을 깨끗이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모두 한국식으로 해야 하는데 단지 그들을 동포와 유리되지 않게 하고 자기 환경에 대하여 불만을 품게 하지 않으며 학교를 떠나간 뒤에 만족시킬 수 없는 요구를 갖지 않도록 하는 정도에서 개량할 점은 개량하면서 한국실정에 맞도록 가르쳐야 한다...한국의 예의범절을 우리는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나은 한국사람을 만들려는 것이요, 외국인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로드와일러가 말한 교육목표는 참된 가정의 조력자, 학교의 조력자를 육성하는 것이며, 개량을 통해 보다 나은 한국인을 만드는 데 있었다.

길모어(G.W.Gilmore)는 이화의 교육방침을 부언하여 한국여아를 그들이 생활을 영위하여야 하는 조건 밑에서 모범적 주부를 만드는 동시에 그들의 친척과 동료 사이의 기독교 선교자가 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했다.

기독교계 여학교의 교육방침을 보면, 서양사람의 생활, 풍습보다 한국의 실정과 생활환경에 알맞은 교육을 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한국의 재래의 전통과 고유 문화를 무시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를 개량하려는 점진정책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 초기에 이 나라를 찾아온 미국의 선교사들은 국가범위로 확대된 서구형의 기독교회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에서 자기들 나라의 정책과 제휴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계 여학교의 교육이상은 "보다 나은 한국인"이라는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다 나은 한국인을 만들려는 교육이념은 그당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한국여성이 처했던 가부장적인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히 여성해방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파악한 보다 나은 한국인이란 뜻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말은 로드와일러가 "개량할 것은 개량하면서 한국실정에 맞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점을 볼 때 조금 더 분명해진다.

한국의 실정을 무시하지 않고, 개량할 것은 개량하겠다는 것은 한국의 전통적 방식에 서구의 방식을 절충하겠다는 의미이다. 이를 요약하면 길모어의 말을 빌리면, 모범적 주부상이요, 로드와일러의 말에 의하면 참된 가정의 유지자이다. 결국 한국여성의 교육이념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배화나 숭의의 경우는 이화보다 훨씬 더 동양적인 풍습을 강조하였다. 배화학당의 캠블  (J.P.Camble)교장은 한국여성을 교육하는데 동양적인 규례와 풍속을 강조하였다. 캠블 스스로 동양인 못지 않은 엄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 학당 문안에 들어가는 날부터 학생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금지시키며 철저한 남녀7세 부동사상을 강조하고 주일날 학생들에게 쓰개치마를 씌워 예배에 참석케 했다. 숭의학당의 배귀례(Miss Best) 초대교장도 학생들에게 엄격한 부도를 가르쳤으며 일체의 외부와의 접촉을 못하게 감독하여 자유행동이 허락되지 않아 숭의감옥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보다 나은 한국 기독교여성을 만들려는 기독교 여학교의 교육이념은 관립여학교나 민간인이 설립한 여학교의 교육이념인 현모양처 양성보다는 이념적으로는 한발짝 앞섰지만 그 역시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진 성별분업(남자는 밖, 여자는 안)과 내외법 등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닌 것이었다. 

1920년대의 여성해방 논리가 가정으로부터의 해방과 가정을 단위로 개혁해야 된다는 것으로 전개되는 것은 "가정은 사회제도의 기초이며 2세 국민의 양성소"라는 논리에 기초한다. 자녀교육과 가정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둔 이러한 여성관은 기독교여성운동의 핵심이라고 말 할 수 있으며 이는 1920년대 민족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남성들의 논리와도 부합되는 것이라 하겠다.

기독교여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인 김활란은 "...가르치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가정교육인데 조선에는 아녀자 교육이 발달하지 못하여 가정의 주부가 아무것도 모름으로 가정교육이 말이 못된다. 여성에게 보통교육 강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중략)...이리하여 개인이 완전하면 사회가 완전할 것이요 사회가 완전하면 국가가 완전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여성들의 여성관, 즉 가정의 역할 강조는 일제 말기 군국주의와 맞물려 가정보국운동, 군국의 어머니 찬양 등으로 굴절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2. 기독교여성운동의 지도층 형성

여성운동을 이끌어 간 지도층은 1898년 찬양회 운동이나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서 대부분 양반여성들이 중심계층을 이룬 것이 비해 1910년 이후에는 점차 기독교계 학교를 졸업한 근대 지식인 여성들로 옮겨간다. 기독교여성들이 여성운동의 지도층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이후 기독교학교 졸업생들이 각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것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그당시 지식인 여성이 거의 없었을 시기에 설립된 많은 학교 중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지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여성들이 운동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을 박용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구한말 입국한 선교사들의 교육중심의 선교정책과 선교사가 후원하는 학교는 재정적으로 풍부하여 일제의 사립학교령에 따른 재정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탱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운동은 대중조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독교여성운동은 기존의 조직인 학교나 교회조직을 사용할 수 있었던 점, 세째,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남녀평등 사상은 항일운동의 주체로 여성을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기독교여성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재정적인 면과 조직에서 다른 운동보다 기독교여성운동이 견고한 점도 있었지만 기독교가 보여준 남녀평등적 이념이 여성운동에 있어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1920년대 기독교여성운동의 특징은 그동안 개별적인 단체활동에서 벗어나 단일한 연합조직을 가진 운동을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여자교육협회(1920), YWCA(1922), 대한기독교절제연합회(1923) 등의 설립은 기독교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전국조직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기독교여성운동은 한국 YWCA와 절제회 양대산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기독교여성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첫째 성경공부와 교양강좌, 둘째 지방단체마다 금주회를 조직하여 금주계몽하는 일, 세째 공창제도 폐지운동 등이었다.

1920년대의 기독교여성운동은 민족주의 사상의 범주 속에서 민족계몽적 차원의 운동방식을 택하였다. 그 주된 운동이 여성교육 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면서 여성들의 인식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운동의 이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과 개량주의적 운동방식은 일제말기 폭압 속에서 또 다른 형태로 굴절되어 일제에 이용당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여성들의 좌우합작 단체인 근우회가 기독교여성들이 중심이 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이러한 이념적인 지형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해체됨으로써 그 한계성을 보여준다. 



Ⅲ. 1930-40년대 기독교여성의 시국인식과 친일행태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해방운동의 고조와 세계의 경제공항으로 인해 국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하자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하였다. 1931년 만주침략,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그들이 패전할 때까지 한반도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수탈지였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부터 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고 이에 따른 한민족 말살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민족말살 정책이란 한민족에 대한 지배를 전시체제에 준하여 개편하는 것으로 물적, 인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동원체제를 생활화하고 정신생활까지 통제한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1936년 7대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크고 작은 민족해방운동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보다 효율적인 대륙전쟁을 치루고 한반도를 유용하게 사용하려면 식민지에서의 반일운동을 그 뿌리조차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미나미 총독은 반일적인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말살시켜 일본국민으로 동화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황민화(皇民化) 대원칙과 조선의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 정책을 2대 정책으로 천명하였다. 이것은 황민화 교육의 필요성, 전쟁자원의 최대수탈 촉구, 조선의 모든 행정력이 국가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러한 황민화 논리는 조선교육령 개정, 육군지원병제도 창설, 창씨 개명 실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결성, 경찰서와 주재서를 중심으로 한 각종 시국좌담회 개최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결성하여 그들의 손과 발을 대신하도록 하였으며 이중의 하나가 바로 기독교였다.


1. 대세순응론

3.1운동 이후 일제는 기독교에 대해 큰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일본의 천황 신앙이 서로 상치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3.1운동 당시 민족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투옥된 여성들 중 대부분이 기독교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가진 신념체계와 민족운동의 참여도 등은 일본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일본은 기독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신사참배 강요가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일본의 신사가 분명히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로 하여금 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일본의 내선일체에 순응하는 기독교가 되든지, 아니면 일본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처벌을 받든지 하는 양자택일을 택하도록 하였다. 계속되는 물리적 압력과 사상공작 앞에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느냐, 생명을 지키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한국기독교는 초기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1938년을 고비로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의 반포로 미션계 학교들이 폐교를 하던가 신사참배를 하기 시작했고, 그해 6월 YMCA, YWCA가 일본의 YMCA, YWCA에 합류하였다. 7월에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창립하였고 9월에는 장로교가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12월에는 주일학교 연합회가 미연합회에서 탈퇴하여 일본주일학교 연합회에 가입하였다. 1938년에 연이어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굴복은 곧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하수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지도자들의 친일행태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기독교여성운동을 주도한 YWCA 회장 김활란은 일본 YWCA에 합류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당시 한국Y의 입장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 다음 글에서 보이는 대세순응론은 그야말로 기독교가 취한 입장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여자청년들은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시국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 동맹을 탈퇴하고 동경에 있는 기독교여자청년회에 가입하게 되었읍니다...(중략)...모든 것이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니 금번 우리 청년회가 제네바에 있는 여자 기청연합을 탈퇴하고 일본 여자기독연맹에 가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세에 순응하는 기독교여성은 비단 김활란 만은 아니다.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이름은 친일적인 각종 강연회나 단체를 설립하는 데 있어 빠짐없이 나오는 것을 볼 때 거의 다수의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이 일본에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은 1938년 이전부터 미나미 총독이 추진하는 어용단체에 협력하고 있었다. 어용단체에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로는 고황경, 김활란, 이숙종, 조기홍 등 당시 내노라하는 여성지도자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여성들이었다. 이들의 역할은 강연회의 강사로 초빙되어 일제의 발과 입이 되는 일을 자처하였다. 이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 것은 대세에 순응하는 일이며, 이것의 내용은 내선일체, 황국신민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2. 황민화 논리: 열등의식의 내재화

황민화 정책의 특징은 일본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內鮮一體論을 강조하여 한국인의 일본인화를 꾀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것을 주요골자로 한다. 즉 "한국민족은 일본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민족의 일부이며, 소위 興亞的 민족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라고 말함으로 일본과 한국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지배국과 피지배국 사이의 모순을 은폐하고 한국을 철저히 일본의 하수인의 역할을 하도록 교묘한 논리를 만들고 있다.

황민화 논리는 일본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이에 협력하는 한국인에 의해 보다 본격화된다. 임전보국단부인대 간사장인 임효정의 글은 황민화, 내선일체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拾數萬의 장병이 저-支那대륙에서 임이 日本의 꽃이 되여 흣터젔고 太平津海戰에서도 忠勇無雙한 우리 일본의 비행대는 불이 활활붓는 魚雷를 두 가삼에 안고서 천황폐하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불으면서 적의 함대로 달녀 들어 몸을 불살라 바리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수없는 皇軍의 피와 살이 흣허지고 있을 것입니다......(중략).....그들이 왜 죽습니가? 왜, 저, 英米人과 싸홈을 하다가 죽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 半島人은 여기에 느끼는 바가 있고 깨닷는 바가 없어서는 아니 될 줄 앎니다. 이 大東亞戰에 있어 皇軍에 감사할 줄을 알고 또 미안히 생각지 않어서는 아니 될 줄 앎니다....(중략)....그럼으로 우리의 급선무는 日本의 혼을 갔는 日本人이 되는 그것입니다. 천황폐하의 적자란 자각과 실천이 제일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중략)....朝鮮人은 日本人이 되는 오직 그곳에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진정으로 朝鮮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당한 판단력을 가진 자라면 반듯이 천황폐하의 충성된 신민이 되는 그 속에만 朝鮮사람의 번영의 생명이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중략).... 황공한 말슴이나 우리들이 천황폐하가 우리 임금님이란 생각이 철저하게 되면 日本의 흥망이 달녀있는 이 大東亞戰에 단연히 결사전사로 나설 각오와 결의가 생길 것입니다.

철저한 일본인이 되는 길이 바로 한국인에게 요구되었다. 전쟁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철저한 일본인으로 각인되기 위해서, 조선은 긴박한 시국의 인식을 재무장하도록 강요되었다. "국책의 진의를 체득하야 국가총동원의 깃발아래 일치 협력하는 길만이 있는 것"이었다. 비상시국의 인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 뒤따랐고, 전시 중 물자부족에 대해 불평이 아닌, 생활자숙과 긴축정신을 가질 것을 요구받았다. 조선은 이러한 비상시국에 대한 인식이 완전하게 보급되지 못하였으나, 가일층 새로운 결의를 다져 제일선에서 몸으로 전쟁을 하는 장병들의 충정을 십분 인식하고 총후의 생활을 일사분란하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종종 조선인의 열등의식으로 나타난다. 이 열등의식은 내지인 일본인 여성보다 조선여성들이 시국인식이 부족하고, 따라서 총후보국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식의 논조로 나타난다. 시국인식 당시 경기여고 교장(감)이었던 손정규는 "내지 부인들은 지금 실 보무라지, 헌겁쪼각, 머리카락 이런 것을 그릇에 따로잡고 한오리 한오리 모읍니다. 그러나 조선부인은 한아 모으는 것을 보지 못했읍니다....(중략).... 개인의 독립생활을 하거나 단체 생활을 하거나를 물론하고 조선부인은 감정의 융화성이 없읍니다. 또 서울여성은 농촌여성보다 오히려 시국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철저한 시국인식이란 무엇인가? 이념적으로는 황민화정책을 충실히 따르는 철저한 일본인이 되는 일이며, 동시에 생활적으로는 긴박한 전쟁상황에 발맞추어 절약과 긴축을 통해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후방에 있는 사람들의 애국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총후보국(銃後報國)이다.


3. 총후가정(銃後家庭): 황국신민의 양성자

총후보국이란 무엇인가? 이는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지는 못하나, 총대 뒤에서 나라에 다하는" 것이다. 총을 들고 군대에 나가 싸운 사람들이 아무 염려가 없도록 국가와 가정이 최선을 다하는 것, 바로 그것이 총후부인들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1940년대 《매일신보》의 기사제목을 보면, 총후의 여인부대, 총후봉사의 귀감, 총후보급전, 총후처녀의 봉공 등이 숱하게 나온다. 결국 총후라는 말은 꼭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전쟁수행을 위한 일체의 애국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총후보국이란 대체로 여성들이 활동하는 장, 즉 가정을 둘러싼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로 총후보국과 가정보국은 같은 용어의 양면이다.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는 비상시국에 있어서 여성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국가가 여성의 힘을 강조하면 할 수록 그것은 비상시국임을 반증한다. 평상시 국가는 여성을 강조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난국을 헤쳐나갈 길은 결국 총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 특히 가정을 유지하고 지키고 있는 어머니들을 총후부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키고 독려하는 일밖에 없는 것이다. 총후부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여성들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국가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가정을 전시체제로 재편하여 가정은 전시를 준비하는 장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된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유지자요, 자녀교육의 담당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다. 전시 시국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적자원의 문제, 즉 황국신민의 육성과 직결된다. 이 일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충성스러운 어머니의 역할은 충성스러운 군인을 길러내는 자녀양육에 있으며, 여성에게 부여되는 위대한 힘이란 바로 황국신민의 양육자라는데 있다. 이것은 대동아건설의 주역이 될 총후의 어린이를 양육하는 일이며, 이는 충실한 일본국민을 육성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장래가 걸려있는 중차대한 일임을 재삼재사 강조한다. 여성의 위대성은 가정안에서 발휘되며, 이는 자녀양육이라는 황국신민 프로젝트에 의해 조정된다. 여성의 존재가치는 자녀를 통해 드러내고,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받는다.

그렇다고 여성의 역할이 비상시국에서 가정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유지자로서의 여성은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정 밖에서 요구되는 노동력에의 요청도 충실히 담당해야만 한다. 여성들은 가정 밖에서의 노동력 제공과 가정 안에서의 자녀양육이라는 양자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일제는 근로보국 정신함양이라는 명목으로 여성노동력을 수탈해갔다. 근로보국대를 조직하여 남녀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름방학시 근로봉사로 하게 했으며 농번기 때는 탁아소를 증설하여 부녀자들의 옥외작업을 장려하였다.
 
"만약 가정의 어머니된 사람들으로서 집을 잃고 박았의 활동에만 마음을 빼앗기운다면 그 나라의 국민의 불행처럼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총후의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의 노력과 자녀를 염두에 두고 국가유용의 재료로 만드는 것은 남자들의 출정에 결코 지지 않는 국가에의 최대봉공이다".

국가는 총후여성을 위대한 여성이라는 허울좋은 가면을 씌우고 있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 평상시에는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자녀양육자요, 가정 내조자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다가, 긴급상황에서는 여성들은 언제든지 산업예비군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나 긴급상황 속에서도 여성이 전적으로 맡은 자녀양육은 한시의 과오도 인정받을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이다. 국가의 장래를 결정짓는 황국신민의 양육자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전담자요, 자녀양육자요, 노동자 1인 3역을 담당한 그야말로 슈퍼우먼인 총후보국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여성은 철저히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었다. 공적인 영역에 여성들이 참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적인 영역인 가정생활의 연장선으로 취급받았을 뿐이다.


4. 가정보국 : 정신과 생활개조운동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국민총훈련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대동아건설을 이루기 위해 국민들의 정신과 사상을 각성시키고, 생활이나 의식 전 영역에 걸쳐서 국민을 개조시키는 운동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 운동은 가정보국운동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바로 총후보국의 내조역할을 의미한다. 계속되는 전쟁의 장기항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부엌살림으로부터의 개혁과 부인들의 각오가 새로워지지 않고는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에 내조의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정보국운동이란 구습을 타파하고 근로보국정신을 함양하여 의식주를 개선하는 운동으로 살림살이 긴축을 통한 보국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이 한국여성들에게 파급되기 위해서는 여성지도자들을 동원한 각종 강연회와 좌담회가 필수적이었고 이때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은 각종 연사로 초빙되어 한국여성들을 대상으로 가정보국운동을 보급시켰다.
《매일신보》는 1938년 1월 4일 신년도 첫 지면에서 "비상시의 가정경제 - 총후의 후방수호"라는 제호로 12명의 여성필자들을 동원하여 대서특필하고 있다.

    서은숙(배화여고 교장) "大戰시 歐洲 부녀들의 苦行을 본떠 실천하자"
    손정규(경성여고 교장) "행동에 반영되는 마음의 긴장"
    모윤숙(시인) "기분내는 생활로 후회하는 때가 많다"
    송금선(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 "조선가정의 생활은 언제든지 비상시"

이상의 제호에서 보이는 여성들에게 요구된 총후보국의 내조의 실체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하여 전쟁물자를 만들어 일본의 승리를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상사태인 현실을 직시하고, 긴장감을 가지고 생활에서 절약과 근검, 그리고 저축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여성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잡지 《여성》은 남녀를 대상으로 좌담회를 다양한 주제로 가지고 시작하였다. 남녀의 정조문제, 식모문제 등 개별적인 사안부터, 전시생활, 생활개선 등의 문제를 1938년부터는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좌담회 참석자들은 유각경, 김선, 강숙렬, 박마리아, 허화백, 박봉애 등 당시 기독교여성들을 포함한 여성지도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생활개량운동은 의식주 전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신의 긴장과 국민체력 향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부각되었다. 1939년 국민정신 총동원위원회는 공사생활을 쇠신하고 전시태세화라는 기본방책을 내놓고 그 첫 단계로 학생의 금주, 일정한 장소에서의 금주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또한 체력향상에 관한 기본방침으로 금주, 금연, 절주, 절초의 려행을 내놓았다. 이같은 금주운동은 쌀의 감소와 쌀 절약의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1년에 약 400만석 쌀을 사용한 주조를 50%를 감소시켜 나머지는 식량으로 대치하였다. 자연스럽게 절주와 금주로 이어진 것이다. 

갈수록 식량난이 심해지자, 의식주 문제 중에서 먹거리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939년부터 흰쌀밥이 전면 금지되고, 혼식이 장려되었고 7분도미나 콩찌게미, 팥, 보리, 야채 등을 섞어 먹도록 되었다. 또한 의복 문제는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의복이 강조되었다. 한복을 개량하여 짧은 치마와 단추를 이용한 작업복 중심의 개량한복, 흰색보다는 염색을 한 채색옷이 장려되었다. 1940년부터 국민복은 전 국민의 생활복이 되었는데, 국민총력조선연맹은 국민복령에 의해 전국 각도에 국민복을 입도록 하였다. 1941년에 들어오면서 청년부, 소년부, 여자부 제복을 제정하였으며, 여자부 제복은 국방색 와이셔츠 칼라에 여러가지 마크를 붙인 것으로 다른 제복에 비해 아름다움을 가미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한옥의 부엌과 화장실 개량문제는 여성들의 능률을 향상시키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특히 비위생적인 재래식 변소와 부엌과 방이 단절되어 있는 한옥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 대두되었다.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긴축재정, 절약운동과 함께 증세(增稅), 채권, 저축운동이 강조되었다. 막대한 전쟁자금이 필요하자 일제는 세금을 대폭 증액하였고, 이는 곧 일반국민들을 더욱 쥐어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같은 긴축재정은 가정용 연로 및 식량 등 생산과 소비를 규정하는 필수품 통제 칙령으로 이어졌고, 국가채권의 매입독려 정책을 통해 일제의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의 가정생활을 어떠했는가? 당시 일반가정의 가계부를 조사한 설문내용을 보면 매월 생활비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고 식량이나 주택, 그리고 공채와 저축과 세금의 비율을 파악할 수 있다. 자료에는 누구를 대상으로 선정했는지 기준이 나와 있지 않으나, 대체로 한달 월급은 113원에서 200원 정도이다. 월급에서 매월 공채와 저축, 세금의 비율을 묻는 물음에 응답자들은 10%∼65%정도가 공채, 저축, 세금으로 사용한다고 대답했다. 적게는 15원부터 많게는 62원까지 공채를 비롯하여 저축하고 있었다.
가정보국운동은 결국 궁핍한 가정살림을 더욱 궁핍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은 가정보국, 생업보국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위한 보조자로 이용당했고,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은 바로 가정보국운동을 독려하는 시국강연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일본의 손과 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Ⅳ. 친일여성단체와 기독교여성지도자


1. 1937-1940년

1937년 1월에 창립된 방송선전협의회는 내선일체의 선각자들을 총동원하여 사회교화의 일선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세워 방송강좌를 개최하였다. 이때의 강좌는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를 나뉘어졌는데 부인강좌의 강사진은 주로 저명한 여류인사, 즉 기독교여성지도자들로 구성되었고, 고황경, 김활란, 이숙종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어 1937년 8월에 창립된 애국금차회가 황군을 환송, 환영하고 銃後가정을 위문, 격려, 조문하며 국방비를 헌납한다는 목적으로 전국의 유력한 부인들을 모아 만들어졌다. 여기에도 고황경, 유각경, 김활란, 조기홍 등이 간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 당시 조직된 친일어용단체에 여성들은 간사 등 실무적인 차원에서 종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연회의 강사로 초청되어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를 대변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1938년에 들어오면서 일제는 명망가의 부인이나 여성지도자 중심의 활동보다는 전시체제 하에서 한국여성들을 의식화시키기 위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발족시킨다. 이 연구회는 향후 한국여성들을 가정보국운동의 주역으로 만들어 전시체제의 후방부대로 만들기 위한 사상적 기반을 제시하는 가정보국운동으로서 국민생활 기본양식을 제정하기도 한다.

그 이후 총독부는 여성들을 각 계층별로 치밀하게 조직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20사단 산하 20개 단체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국방부인본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 학생 400명을 중심으로 한 애국자녀단, 20년대부터 명맥을 유지해온 애국부인회, 경성에 있는 16개 여고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총후부인부대등이다. 이외에도 여성단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1920년대부터 활동해온 여자기독청년회, 기독교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토론회 등을 개최하는 직업부인협회, YWCA에 소속된 직업여성구락부, 역시 YWCA 소녀들로 구성된 봉오리구락부, 당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 정동모 후원모임으로 시작한 동유회(東遊會), 경성에 있는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재경여성단체연합친목회, 친교중심인 가정부인협회 등이다.


2. 1940년대 이후

일제는 여성조직들을 각 계층별로, 지역별로 조직하여 전시체제에 알맞게 재정비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보다 적극적인 전쟁태세에 돌입하면서 간접자원이 아닌 직접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모든 조직들을 단일체제화하여 내선일체를 철저하게 하고 모든 강연의 초점을 징병제 독려에 둠으로써 남자 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전쟁의 후방부대가 아닌 최전선지대에 배치하여 노동력을 최대한 수탈하였다. 그 결과 1939년 국민징용령, 1943년 학도동원령, 1944년 징병령, 여자정신대 근무령이 내려졌다.

1940년 이후에 조직된 단체들과 기독교여성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0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되었는데, 이 단체는 일제가 내선일체의 철저화 및 황국신민화, 神道의 실천, 職域奉公에 의한 高度國防體制를 확립시키기 위한 전위부대였다. 고도국방체제란 사상통일, 국민총훈련, 생산력 확충으로 조선의 청년 530만 명을 강제동원하여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의 총받이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저명인사들을 총동원하여 임원진을 구성하고 이에 기독교여성들인 고황경, 김활란, 이숙종, 황신덕 등도 참여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의 모든 단체들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단일한 체제로 개편하고 조선임전보국단을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전쟁에 임하기 위한 단체로써 임전보국단의 강령은 물질근무 공출의 철저화, 국민생활의 최저생활화, 戰時奉公의 義勇化였다. 일제는 국민들을 최저수준으로 생계유지만 하게 하고 나머지는 전쟁물자로 모두 공출한 것이었다. 교회당에서 울려퍼지는 쇠종도, 집에서 먹는 놋숟갈도 모두 전쟁물자가 되었다.

이 단체가 조직되자 마자 전국적으로 대강연회가 지역마다 열리기 시작했고 산하기관으로 임전보국단 부인회가 조직되었다. 임전보국단 부인회에는 지도위원으로 고황경,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인덕, 임영신, 황신덕 등 기독교여성지도자들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부인회가 하는 역할이란 전국을 대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여 전쟁에 임하는 어머니의 자세를 의식화시키는 일이었다.

특히 1941- 1942년 어간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가 대규모로 전국 곳곳에서 열린 사실은 징병을 황국신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합법화하기 위해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의 힘을 빌리기 위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임전대책협의회의 대강연시(1941년 9월4일) 박인덕은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라는 제호로 강연을 하고 이것이 끝나자 시내 11개 장소에 70여 명이 채권을 들고 "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는 슬로건을 외치고 가두행진을 벌이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이때 종로통에는 박인덕과 모윤숙이, 서대문통에는 고황경이, 명치정에는 이숙종 등이 참여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의 대연설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는 1941년 9월 전위여성 격려대강연회, 부인층 궐기 촉구 강연회가 열렸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시국부인 대강연회,부인생활정의 강연회가 각 각 열렸다. 기독교교여성들의 참여도만을 따로 뽑아서 보면 다음과 같다.

그당시 부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의 연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참여가 눈에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여성운동의 지도부층이 거의 기독교여성인 것에도 기인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한국기독교가 친일적 성향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고 역시 기독교여성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Ⅴ. 여성들의 친일논리의 양면성 : 국가의 이중적 젠더 전략

영국의 페미니스트 연구자인 유발 데이비스(Yubal Davis)은 다양한 국가론이나 역사학에서 늘 은폐되었던 여성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생물학적, 문화적, 상징적 의미에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은 관료도 지식인도 아니라 사실은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은 다양한 민족주의 문제에서 늘 은폐되었던 것은 왜일까?"

그의 문제제기는 공사(公私)이원론에 대한 정확한 핵심을 찌른다. 애초부터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은 철저히 사적인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 국가는 공적인 영역이며 남성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하나, 실제 그것은 여성을 표면적인 질서에서 배제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은 국가형성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배분받고 있으며 실행하고 있으나, 여성은 사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유발 데이비스가 규정했던 사적 존재라는 규정에 은폐되어 있던 국가의 여성전략 네가지 측면을 일제의 젠더 전략 속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의 재생산을 위한 생식의 역할이다. 인구의 증가는 국력의 상징이 된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전쟁이 정당화되고 우생학적인 종(種)의 신화가 여성에게 강요된다. 일제가 모성을 강조하고, 그 모성은 철저히 황국민을 출산하는 역할 속에서, 그리고 완전한 황국민, 우수한 국민을 출산하는 것 속에서 그 역할을 인정받는다. 

둘째 문화적 재생산자의 역할이다. 전쟁과 생산에 매진하는 남성의 뒤에서 여성은 언어, 제사, 문화의 전승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다음 세대에 그것을 전하는 교육적 역할을 한다. 가족애, 향토애에 뿌리를 둔 애국심, 민족주의 재생산은 여성이 담당한다. 일제가 총후가정의 담지자인 여성들에게 부여한 임무는 제대로 된 황군을 키워내는 일이며, 이들은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어 가는 미래의 주역들인 셈이다. 가정교육을 강조한 이유는 개별 가정에서의 교육에 강조점이 있기 보다는 국가의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적인 틀에 있다.

셋째 상징적 역할이다. 국가는 국민이 탄생하고 자라나는 땅을 기반으로 하는, 흔히 여성의 이미지로 언급된다. 남성이 전쟁에서 싸우고 부의 획득을 위해 애쓰는 것은 그들에게 지켜야할 고향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할 존재인 여성을 후방에 두고 남성들은 안심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약탈행위나 침략전쟁으로 향한다. 여성들은 그러한 남성들의 폭력적 행위를 고무하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들의 기억을 간직해나간다.

여성들은 철저하게 총후를 책임지는 또 하나의 군대이다. 총후가정, 총후보국을 수행하는 일사분란하고 헌신적인 행위를 통해 여성은 국가의 보은에 보답한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간 남편과 아들의 명예스런 출정을 기억하며 기다린다. 

넷째 노동자의 역할이다. 평상시에 여성은 노동시장 주변에서 남성노동자의 보조역할을 한다. 그러나 비상시에 전쟁터로 가는 남성대신 중노동에 동원된다. 그러나 여성노동은 여성존재의 사적정의 때문에 공적노동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저임금 악조건의 노동환경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신과 생활의식 개선운동인 가정보국운동의 주역은 총후여성이다. 여성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금과 저축을 통해 국가의 전쟁기금을 마련해야 했다. 간편한 복장, 탁아소 마련 등은 여성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여성의 노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학 연구자인 오오고시 아이코는 유발 데이비스가 제시한 국가의 젠더전략 네 가지 이외에 한가지를 더 첨부한다. 바로 여성의 성적 역할이다. 오오고시 아이코는 국가의 젠더 정책, 섹슈얼리티 정책을 분석하면서 국가는 여성의 분열정책을 취해왔음을 이야기한다. 여성에게 우수한 종의 재생산을 요구하는 한편, 남성의 성적 욕망을 처리하기 위한 역할을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오오고시의 이러한 분석은 일본의 전후여성운동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흐름속에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일본여성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책임의 가해자이며 공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식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라는 의식으로 가해자임을 은폐해온 전후 여성운동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제국의 페미니즘으로 명명했다.

일본 여성학자들의 이러한 분석은 일제 말기 여성들의 친일논리가 갖는 양면적 성격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일제는 젠더 전략을 두가지로 구사하였는데, 하나는 어머니상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매춘부상이다. 일제 말기 전쟁이 가속화될 수록 젠더 전략은 구체성을 띄게 된다. 어머니상으로서의 여성은 군국의 어머니, 황국의 어머니로 미화 묘사되면서 강조되었고, 또 다른 매춘부상은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러한 여성상은 여성지도자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유지되었다. 여성지도자들, 특히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강연회에서 군국의 어머니를 찬양하면서 징병을 독려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징병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징병의 대상자로서 일본군 위안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일제의 젠더 전략은 여성을 분열시키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여성 스스로 여성의 분열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어머니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남성국민의 어머니임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반면, 또 다른 여성들은 국가적인 매춘제도인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통해 남성국민의 성적욕망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한 성적도구로 자리매김 되었다.


1. 징병의 독려자인 여성 : 군국의 어머니

이미 위에서 총후가정, 가정보국운동을 통해 일제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친일여성단체와 친일행태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친일행태를 가능케 하는 친일논리는 무엇인가? 강연내용을 통해 어떻게 여성지도자들이 국가의 젠더 전략을 수행해왔는지, 그리고 그 젠더 전략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여성지도자들이 행한 강연의 내용은 주로 징병제 독려에 관한 것으로 어머니의 위대한 힘에 의해 자식들을 황군에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대표적 여성지도자인 김활란은 《신세대》1942년 12월호에 기고한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중략)...지금까지 우리 반도여성은 그저 내 아들, 내 집이라는 범위에서 떠나보지 못하였다...(중략)...그러나 반도여성에게 애국적 정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중략)...이제는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와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중략)...우리는 내지 여성(일본여성: 필자 주)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우리 일본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원인의 하나가 일본여성의 숨은 힘이라고 한다. 말없이 참고 나가는 그들의 힘은 강한 사람의 힘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이점을 배워야 한다...(중략)... 즉 국가를 위해서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최후의 내 생명까지 국가에 속한 것임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또 김활란은 "여자도 남자에 지지안케 큰 결의를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여자들도 총후의 굳은 각오만 가지고 있으면 반도학생들에게 열려진 軍門을 향한 광명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이화여전은 장래의 훌륭한 군국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자 남자학도에 지지않게 신체를 연성하고 싸워야 할 기백을 양성하기에 힘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김활란이 말하는 남자에 지지않는 여자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식민지체제에 남자에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어머니, 즉 군국의 어머니됨을 말하는 것이다. 황국신민의 지름길이 되는 징병에 아들들을 보내어 영광스런 군국의 어머니가 되라는 말이다.

이같은 강연 속에서 적극적으로 부각되는 군국의 어머니상에는 가정과 국가, 어머니가 상호연결됨으로써 모성찬양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모성찬양은 일본의 군국주의 찬양에로 까지 발전한다. 여성의 모성애를 중심으로 한 모성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군국의 어머니를 찬양하면서 자녀들을 징병에 보내도록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모성이데올로기가 철저하게 일제의 군국주의 논리 속에서 이용당하고 있다.

YWCA 총무를 지낸 유각경은 당신들도 우리도라는 글에서 "징병제 실시에 있어 어머니로서 나도 아들 하나를 나라를 위해 바치게 된 것을 광명으로 생각합니다...(중략)...어머니된 우리로는 지성으로 아들의 장래와 국가를 위해 강하게 길러 국가에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박인덕은 황군의 어머니로서 가져야 할 자질과 사명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첫째, 자녀를 건강하게 키워야 하는 이유는 아들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천황폐하의 적자요, 국가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아들들이 원만한  명예스러운 군인이 되어 멸사불공하는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어머니 스스로 군국의 어머니가 되는 수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성논리는 강연회의 강사들인 기독교여성지도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부각되었고 일제는 이 모성찬양을 바탕으로 여성들을 군국주의의 일선에 나서게 했다.

여성들의 모성찬양은 유일한 기독교계 신문인 《기독교신문》에서도 사설을 통해 전폭적으로 지원된다. "무훈을 세우는데는 반드시 어머니가 있으며, 용감한 군인정신은 조국의 어머니의 마음과 통한다. 따라서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국가에서 요구할 때에 돌려야 하며 이것을 다할 때 그 명예는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써 마치 어머니가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있는 냥 모성을 찬양하고 있다.

일제 말기 젠더 전략의 핵심은 바로 군국의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역할은 여성들이 수행하고 있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체제에서 군국의 어머니로 부각되면서, 전쟁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하는 간접적인 주체로 다시 자리를 잡는 것이다. 국가에 의해 의도화된 모성찬양이다. 

이상과 같이 1940년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연의 내용이나 신문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본 결과, 여성의 모성은 일제의 천황제가 만들어낸 군국주의, 더 좁게 말한다면 징병제 독려라는 틀 속에서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었다. 곧 건강한 황군, 멸사봉공할 황군을 키워내기 위해서 어머니가 중요하다는 논리는 일제뿐 아니라 독일 나찌즘 하에서도 있었다. 전쟁을 치루는데 있어 어머니로서 국가나 민족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모성이데올로기는 지배자로서 충분히 그 이용가치가 있으며, 언제든지 위기상황에 있어 허위이데올로기로 조작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2. 징병의 대상자인 여성 : 일본군 위안부

강연회를 통한 모성찬양, 군국의 어머니 강조는 1943년 이후에 훨씬 강화된다. 기존에 있는 학교들을 청년연성소로 개편하여 남학교는 군사훈련을 시키고 여학교는 군국의 아내가 될 자질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교과과정을 전면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숙명여전과 이화여전이 교과목을 수련, 국예, 가사, 작업 등 4가지 항목을 1년간 교육시켜 도시와 시골로 순회강연할 지도자를 양성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여자특별연성소 개설에 대해 항간에서는 젊은 여성들을 징병해 간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여성들이 조혼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학교를 자퇴하고 호적에서 이름을 정리하여 정신대에서 피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당국은 여성특별연성소설치가 황국여성을 길러내자는 취지일 뿐이라고 강력하게 변호하였으나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이 내려짐으로써 그 진실은 밝혀지게 되었다.

일본은 전쟁 말기 한국여성들을 징병의 독려자(군국의 어머니)가 아닌, 징병대상자(일본군 위안부)로 선정하였다. 여자정신대령이 내려진 이후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강연은 변함없이 징병을 권유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진다.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권유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대에 지원하여 일제의 성적놀이개와 노동력을 착취당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는 약 15만명에서 20만명으로 추산된다. 아직까지 일본에 의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며, 피해자 중 상당부분이 한국 국적(남북 포함)일 것이라고 예상된다. 피해지역도 한국을 비롯하여 북한,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이사, 버마, 태국 등 일제의 침략한 아시아 지역 전반에 걸쳐있다. 위안부 피해자로 끌려갈 당시의 나이는 적게는 11세부터 30세까지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해 정확한 정보는 생존피해자 203명의 증언 및 면접자료를 통계화한 《증언통계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 개인의 인적 상황을 살펴본 결과, 생존자들의 출생연도가 1910년부터 1934년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고, 이중 1921-1930년 출생자가 77.1%(148명)을 차지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장기간에 걸쳐서 행해졌다는 것과, 1920년대에 태어난 생존자들이 10대에서 20대의 나이가 되는 1930년, 1940년대에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생존자들의 출생지 역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 출신의 생존자가 전체의 55.7%(106명), 전라도 출신이 18.8%(36명)인 것으로 보아 경상도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극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존자들의 학력은 무학 41%(79명), 야학 4.2%(8명) 등으로 전반적으로 학력수준이 낮다.

우리가 주목할 일은 일본군 위안부 동원시기가 1930년부터 1945년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1937년을 시점으로 하여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비율이 급격히 높아졌으며, 1937년부터 1944년간의 동원이 전체 생존자의 85.4%(168명)을 차지할 정도로 이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 1937년을 계기로 집중된 것은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개인업자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체계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군 위안부제도의 본질을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사가인 스즈끼 유우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는 국가 공인의 매매춘 제도장치인 근대공창제도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천황제국가의 근본적인 젠더정책이나 장치는 말할 것 없이 가제도(家制度)인데, 이 가제도와 공창제는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이 두개의 장치 아래 여성의 성은 이분화된다. 가제도하의 여성은 모성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종속과 통제, 관리를 당하고, 한편으로 공창제하의 여성은 남성들의 성의 쾌락이나 통제때문에 국가가 관리하였다. 바로 그들이 성노예로서 철저하게 천대받았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천황의 황군에 의한 전쟁터에서의 강간의 일상화, 제도화라고 정의내린다. 실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전쟁터나 점령지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강간행위와 성노예제는 연속성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후지메 유끼 역시 일본의 공창제도와 연결하여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언급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국가의 젠더전략 중의 중심적인 한 축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제는 침략전쟁 수행함에 있어 남성국민, 황군의 전사들을 위한 안전한 성욕받이가 필요했으며, 남성군인들의 성병방지, 군대를 보호하는 기제가 필요했다. 대동아성전을 위해 전쟁을 수행중인 거룩한 임무를 지닌 황군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은 천황의 선물로 주어졌다. 일본군인들은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자신들의 행위가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강간이며 성폭행이란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가해병사의 증언을 청취하고 분석한 이노우에에 의하면, "그들은 타자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강간하던지, 죽이던지 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감정조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아소오 테츠오 군의관의 보고서대로 천황의 선물로 주어진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본군인에게 있어서 위생적인 공중변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면서

이상에서 일제 말기 여성의 친일논리와 친일 행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논문의 주관심은 일제 말기 여성들이 행한 친일 논리와 친일 행태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를 살피는 데 있었다.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던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이념이 어떤 형태로 형성되어 왔는가를 기독교여학교의 교육이념으로부터 이끌어냈다. 이화나 숭의 등 기독교여학교들의 졸업생들 대부분이 여성지도자들로 활동했으며, 따라서 학교의 교육이념은 이들의 사상적 뿌리를 찾는데 중요하다. 대체로 기독교여학교의 교육이념은 보다 나은 한국인을 만드는 일에 있었으며, 이는 모범적 주부상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강연이나 글을 분석한 결과, 철저히 사적인 영역, 즉 가정이라는 영역 속에서 여성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여성들의 사적인 영역이 때론 공적인 영역, 즉 노동의 영역까지 개입하도록 요구받았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여성 스스로 사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수용되었다.

일제 말기 여성들의 친일논리는 일제가 구사한 젠더 전략과 맞닿아 있다. 유발 데이비스가 규정했던 사적 존재라는 규정에 은폐되어 있던 국가의 여성전략의 네가지 측면, 국민의 재생산 역할, 문화적 재생산 역할, 상징적 역할, 노동자의 역할 이외에 성적 역할이 일제 말기 젠더 전략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제 말기 여성들은 모성과 매춘부라는 대비된 두가지 이미지를 통해 여성들은 거룩한 군국의 어머니로, 황군에게 봉사하는 일본군 위안부로 상징화되었다.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등 모든 인적, 물적인 자원을 남김없이 수탈했다. 이때 여성들은 대동아성전을 충실히 수행하는 황군을 양육하여 전쟁을 성공하게 하는 전쟁의 주체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또 한편 여성들은 남성군인들이 전쟁을 잘 치룰 수 있도록, 안전한 성적 도구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여성은 징병의 독려자인 동시에 징병의 대상자였던 것이다. 

일제 말기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은 일제의 충실한 입과 발이 되었다.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대세순응론에 따라 황민화와 내선일체를 향한 총후 여성들의 궐기를 외치며 침략전쟁의 수행자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은 일제의 젠더전략에 대한 충실한 수행자라는 측면에서 가해자이며, 동시에 식민지여성이라는 점에서 피해자이다. 가해와 피해가 중첩된 일제 말기친일여성들의 친일행위가 정확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논문 요약문]



일제 말기 여성들의 친일논리와 행태

본 논문은 여성사의 관점에서 일제말기 여성들의 친일논리와 행태를 규명했다. 여성사의 관점이라 함은, 우선 연구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측면과, 연구의 관점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란 남성중심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여성이 위치지워 있으며, 여성들은 어떤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았으며, 또 가부장적인 사회에 어떻게 대응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일제말기 여성들, 특히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시국인식을 통해 그들의 인식이 교육적 기반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으며, 일제가 구사했던 젠더전략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의 주관심인 일제 말기 여성들이 행한 친일 논리와 친일 행태를 규명하기 위해서,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이념을 창출한 기독교여학교의 교육이념을 분석하였다. 이화나 숭의 등 기독교여학교들의 졸업생들 대부분이 여성지도자들로 활동했으며, 따라서 학교의 교육이념은 이들의 사상적 뿌리를 찾는데 중요하다. 대체로 기독교여학교의 교육이념은 보다 나은 한국인을 만드는 일에 있었으며, 이는 모범적 주부상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의 강연이나 글을 분석한 결과, 철저히 사적인 영역, 즉 가정이라는 영역 속에서 여성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여성들의 사적인 영역이 때론 공적인 영역, 즉 노동의 영역까지 개입하도록 요구받았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여성 스스로 사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수용되었다.

일제 말기 여성들의 친일논리는 일제가 구사한 젠더 전략과 맞닿아 있다. 유발 데이비스가 규정했던 사적 존재라는 규정에 은폐되어 있던 국가의 여성전략의 네가지 측면, 국민의 재생산 역할, 문화적 재생산 역할, 상징적 역할, 노동자의 역할 이외에 성적 역할이 일제 말기 젠더 전략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제 말기 여성들은 모성과 매춘부라는 대비된 두가지 이미지를 통해 여성들은 거룩한 군국의 어머니로, 황군에게 봉사하는 일본군 위안부로 상징화되었다.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등 모든 인적, 물적인 자원을 남김없이 수탈했다. 이때 여성들은 대동아성전을 충실히 수행하는 황군을 양육하여 전쟁을 성공하게 하는 전쟁의 주체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또 한편 여성들은 남성군인들이 전쟁을 잘 치룰 수 있도록, 안전한 성적 도구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여성은 징병의 독려자인 동시에 징병의 대상자였던 것이다. 

일제 말기 기독교여성지도자들은 일제의 충실한 입과 발이 되었다.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대세순응론에 따라 황민화와 내선일체를 향한 총후 여성들의 궐기를 외치며 침략전쟁의 수행자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은 일제의 젠더전략에 대한 충실한 수행자라는 측면에서 가해자이며, 동시에 식민지여성이라는 점에서 피해자이다. 가해와 피해가 중첩된 일제 말기친일여성들의 친일행위가 정확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역사적으로 여성들이 어떻게 규정되는가를 발견하였다. 평상시 여성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가정생활, 가정교육, 자녀양육의 주체로 여겨지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나 비상시국, 전시체제에 들어가면 여성들은 사적, 공적인 영역 모두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모성은 거룩한 모성으로 미화되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강요당한다. 결국 여성을 규정하는 공사이원론과 이에 기반한 모성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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