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양현혜 (이화여대)
1. 들어가면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파주의, 성장제일주의, 개교회주의가 한국 개신교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다. 특히 개교회주의와 성장제일주의를 체질화한 결과 일어난 현상이 세계 어디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대형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 교회는 한국교회 5만 중에 몇 %나 될까. 실제로 한국교회를 보면, 양적 규모로 성공을 거둔 대형 교회를 1000명 이상이라고 할 때, 이러한 대형 교회는 전체 교회수의 불과 2%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60%는 50명 미만의 영세한 교회들이다. 그런데도 소수의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를 모든 교회들이 선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성공한 목회, 올바른 목회의 기준을 대형화에다 두다 보니, 교회와 기업을 혼동하게 되는 일이 생겨났다.
이러할 때, 탈교회주의·탈성장·탈교단·탈성직을 주장했던 무교회주의의 모델을 살펴보는 것은 적지 않은 시사점과 통찰력을 제공할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1901년 일본에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국에는 김교신 등에 의해 도입되었다. 김교신은 1927년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이후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등에서 약 15년간 교사로서 근무했다. 그리고 1927년 7월부터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1930년 5월 제16호부터는 주필로서 1942년 3월 폐간될 때까지 총 158호를 발간해 내는 한편, '경성성서연구회'라는 무교회 모임을 인도했다.
2. 무교회주의의 신앙 이해와 교회관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앙이란 신과의 살아 있는 교제라고 보았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 즉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이때 '나'라는 신앙자의 존재는 '너'라는 신의 존재 안에 완전히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자기를 신에게 맡기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신 자신의 생명에 참가하여 그가 자기의 정신과 인격을 지배하게 하는 활동 원리였다. 따라서 신앙은 우치무라에게 있어 생활과 분리되어서 생각될 수 없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산 신앙에 의해 증명되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에게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내면성의 종교였던 것이다.
우치무라가 기성 교회를 거부하는 것은 교회의 부패성에도 원인이 있으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서 교회는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치무라에게 기성 교회의 오류는 그리스도와 생활 속에서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것을 버리고, 그것을 하나의 기관과 그것에 부수하는 조직, 교의, 예배 형식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서 2차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무교회는 기독교인의 생활 그 자체를 부단한 예배 행위로 보고 모든 활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봉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예배 행위와 일상생활의 구분이 없다. 기독교인은 전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김교신에게도 분명했다. 그는 "복음이니 신앙이니 하면서 불교도의 규율도 좇지 못하고 유가의 역행도 본받지 못하고 한갓 방종 안일의 생애를 일삼음으로써 복음의 진수를 파악한 듯이 자변(自辯)·자위하는 무리가 적지 않은 것은 실로 한심한 일이라. … 형제자매여, 원컨대 하루라도 정진 없는 죽은 날을 두지 마사이다" 하며 "신앙의 대로의 생활"을 자신의 최대의 욕심으로 삼았다.
이렇게 신앙을 일상성 속에서의 삶으로 본 그는 전도에 대해서도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전도는 아름다운 언사나 문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실과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다. 특히 현대와 같이 기독교의 껍데기만 길가에 뒹구는 세대에 있어서 그러하다. 지금은 설교로 또는 소위 문서 전도로써 복음을 증거할 시대가 아니요, 신도의 전 존재 그것으로써 입증해야 할 때를 당하였다." 신자의 모든 생활의 장에서 자기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증거로 화하는 증인이 되는 '존재의 전도'만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전도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무교회인들의 이러한 강렬한 신앙적 실천성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특별히 사회적·정치적인 영역을 신앙적 책임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전 삶의 영역 안에서 관철시키려 했을 때, 그들은 인간의 삶에서 특별히 종교적인 영역과 비종교적인 영역을 구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일상성이 바로 종교적인 영역이고 바로 그 안에서 신앙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치무라는 성서의 말씀이 인류 역사의 지향점과 일치한다는 확신 아래 성서의 말씀에 현실 역사를 조응시켜 현실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예언자적 실천을 대단히 중시했다. 그는 기독교의 복음이 예언과 분리될 수 없는 상호 공속적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을 해방하여 참 주체로 세우는 기독교의 복음은, 피조물적 존재이면서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인간을 억압하려는 모든 의식이나 제도에 비판, 항거하며 신적 공의의 공동체를 대망하는 예언과 늘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었다.
예언과 복음의 상호 공속성은 그의 제자 김교신이나 함석헌에게도 무교회적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특질의 하나로 계승되었다. 김교신은 "신앙생활이라 하여 복술자처럼 길흉화복을 예측하거나 특별한 청탁으로써 하나님의 총애를 편취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술이 아니라 천하의 대도, 공의를 활보하는 생활입니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써"라고 하면서, 기독교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그러나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신앙을 실천하는 자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정치·사회적인 공적 영역에서 예언자적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양보할 수 없는 신앙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막 12:17에 의거하여 그는, 시민의 공익에 봉사하는 임무를 신으로부터 위임받고 세워진 국가가 그 한계를 벗어나 신적인 영광과 존경을 받기 위해 인간을 억압할 때, 그것은 이미 진리에 대항하는 '강대한 괴물'이라고 보았다. 천황과 국가를 신격화하며 국민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국가는 "일본 국민이 당면한 진리의 '최대의 적'이자 심히 '강대한 괴물'"이 된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불의한 국가'라는 괴물에게 선전포고하고 "순교의 피를 뿌려야만 진리의 종교를 판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교신의 이러한 예언자적 비판의 사정거리는 국내 문제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제국주의라는 자신의 시대는 "힘이 정의라는 허망한 미몽에 취해 있는 시대"이고 국가와 민족의 죄악을 미화하고 칭송하는 집단이기주의의 시대라고 보았다. 집단적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힘이라는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는 신적 공의에 반하는 질서라고 보았다. 이러한 불의한 국제 질서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국가의 도덕적인 표준에 차이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민족 또는 국가의 범죄를 한층 엄혹하게 상세하게 심판하여 세계 역사상에 이 뚜렷이 제시"함으로써 신의 공의를 향해 세계사를 다시 변혁시켜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교신이 1930년대 '조선적 기독교'를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던 반선교사·친일이라는 파행적인 역사의식 속에 함몰되지 않고,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연속성과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반서구·반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예언과 복음의 공속성이라는 신앙적 신념 때문이었다.
한편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그리스도와 일상의 삶 속에서의 일치로 이해한 무교회는 교회의 제도주의와 성례전주의를 거부한다. 그들은 기독교인은 중개자 없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살아 있는 관계를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교회의 계급주의에 반대했다. 그리고 신 자신의 생명에 참가하는 신앙을 고정된 제도나 형식에 가두려고 하고, 일정한 교파적 신조와 관행이 구원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주의나 그에 부수되는 종교적 배타주의와 불관용주의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세례·성만찬 등의 성례전에 대해서도 특별한 태도를 갖는다. 우치무라는 세례는 사람의 죄를 정화시키는 마술적 힘이 있는 의식도 아니고 교회에 들어가는 입문 의식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의 의미로,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세례를 신앙의 중요한 상징으로서 인정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시행했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성례전주의에 대해서는 '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없다'며 단호히 반대했다.
우치무라의 이러한 태도는 성만찬에 대해서도 동일했다. 성만찬은 우치무라에게 단지 유대교의 유월절 대신에 축하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축하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의 몸과 피로 되는 성스러운 만찬이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은 매일매일 우리들의 영적 생활을 보양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성서를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성만찬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표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의 살과 피가 될 정도로 진실로 믿어야 함을 말하는 상징인 것이다. 나아가 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하나의 형제자매 됨을 상징한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인 이상, 그 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생활 안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때문에 성만찬을 교회의 외적 표현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제도주의화 되고 나아가 개인의 신앙적 결단에서 완전히 분리됨으로써 오해된다. 그 경우, 성만찬은 쉽게 일종의 율법이 되고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무교회인들이 비판하는 것은 성례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 보고 구원을 위한 불가결의 요소로 보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의 성례전주의와 그에 부수되는 교회의 계급주의였다. 무교회인들에게 사실 성례전 문제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여 자신의 일상의 삶에서 산 신앙을 증명하는 것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관심이었다. 따라서 우치무라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나에게 교회 없고 그러나 그리스도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도 역시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는 나의 교회가 된다." 그에게는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원칙은 타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그리스도 밖에 구원 없다'는 신앙적 현실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치열하게 신앙과 생활을 결합시키는 정신적 중심과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교회는 그것을 성서 연구에서 구한다. 무교회 운동에서는 성서가 기독교 생활의 중심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미 우치무라가 그 집회를 '성서연구회'라고 명명한 것은 극히 시사적이다. 그것은 그의 집회가 다른 형태의 교회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원시 기독교의 신앙적 현실로 되돌아가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만남을 가지기 위한 유일의 방법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치무라는 성서를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과 대화하는 일대일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의 성서의 권위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나 편협한 성서주의자와는 다르다. 그의 성서 연구 방법은 진보적이고, 역사 문헌학적 연구나 래디컬한 학문적 비판의 성과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그는 사도행전에 대하여 그것은 역사이고 따라서 그 기사를 영구불변한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성서는 하나로서 영구불변하지만, 성령이 신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다. … 사실과 진리를 혼동하는 자가 세상에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들은 이 두 개를 엄밀하게 구분해서 처음부터 성서 해석에서 오류를 없게 하고, 또 신앙생활에서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우치무라는 과학과 종교, 학문과 성서가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신앙이 신앙으로서 그 권위를 갖는 동안은 성서의 비평, 해부에 의해서 그 기초가 동요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한 종교를 동요시키고 파괴하는 것을 신은 원한다고 보았다. 사실 성서의 경전성은 그 무오류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신을 증거 하는 성서의 증언 능력에 있는 것이었다.
성서의 자기 증언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무교회인들은 성서를 자유로운 입장에서 학문적으로 분석한다. 이 자유롭게 열려진 정신에 의해서 무교회 운동은 섹트 운동에 늘 부수되는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또 과도하게 개인주의적인 성서 해석의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무교회 운동은 리더의 지휘 아래, 성서를 무교회 집회 안에서 다른 신앙적 동료들과 함께 읽기 때문이다. 한편 무교회의 성서 독해는 이러한 객관성과 더불어 주체성을 요구한다. 성서를 통해 그들은 신 앞에 서서 일상의 지침을 얻으며 그것을 실천할 힘을 얻는다. 따라서 성서의 진리에 자신의 삶 전체를 투여할 주체적·실존적 결단이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사는 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교회의 성서 독해법에는 '주체성과 객관성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무교회의 집회 방식과 교회관을 살펴보자. 그 집회는 만인사제주의에 근거하여 안수받은 목사를 두지 않고, 완전히 평신도에 의해 지도된다. 그 리더는 많은 경우,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매 주일마다 혹은 그 이외의 자유 시간을 복음 전도를 위해 쓰고,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선교 활동에만 전문으로 종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매 일요일마다 행하는 성서 강해와 또 그 월간 전도지를 통해서 집회를 지도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인격적인 신앙적 결단에 이르게 하고 사회에서 신앙에 입각한 책임 있는 태도 결정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집회를 가지는 장소는 많은 경우 임대한 회장, 개인 집, 대학 내지 공장 등이다. 집회에는 우치무라의 집회를 모델로 하여 관행화된 일정한 형식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기독교인이라면 필수적으로 소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된 제도는 없다. 역으로 무교회의 집회에 참가하는 것, 그것만으로 이미 참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교회주의는 어떠한 에클레시아관을 가지고 있을까. 우치무라는 에클레시아(ecclesia)와 교회(church)를 구분한다. 어원적으로 보면 '에클레시아'는 보통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교회'는 성직자, 예전, 신조, 그리고 어떠한 식으로든지 교회 조직에 속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데 불가결하다고 하는 배타성 요구를 가지고 자기의 역사적 연속성을 보증하려고 하는 종교 시설이다. 우치무라에 의하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 즉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다. 그것을 대신할 '진정한 교회'를 우치무라는 만들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 진정한 교회의 고유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2인 혹은 3인이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이고 그 한가운데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영적 단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친교를 통해 생활에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불러 모아진 모임이다. 그리스도에 직결해 있고 그리스도와 생활에서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연대를 우치무라는 에클레시아로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그 수장을 그리스도로 한 에클레시아는, 구성원 각자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등에 대한 신뢰에 근거를 둔 정신적 공동체였다.
한편 같은 이유로 우치무라는 자신의 사후 월간 잡지의 폐간과 성서연구회의 해산을 희망했다. 그는 한 집단의 계승 문제를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를 결여한 교회와 교회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의 만년의 최대 관심은 자신의 사업의 계승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우치무라는 1930년에 세상을 떠났다. 600~800명이 모이는, 당시 일본에서 성서연구를 위해 모인 가장 커다란 집회였던 그의 집회는 그의 유언대로 해산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신에게로부터 받았던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고 이 세상을 떠났다. 우치무라는 이렇게 후계자 문제에 대해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후계자 문제 그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형식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이후 무교회 운동의 리더는 우치무라의 모범에 따라,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자신의 집회를 해산하고 잡지를 폐간하고 세상을 떠난다. 리더가 떠난 그룹의 남은 멤버들은 이제 둘 혹은 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거해 그들 자신의 집회를 새롭게 시작하든지, 아니면 다른 집회를 찾아 가게 된다. 새롭게 시작되는 집회는 결코 이전의 집회의 연속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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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라는 제도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그것을 파괴하면서, 객관성과 주체성이 통일된 성서 연구와 이에 근거한 기독교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신앙고백과 증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감 있는 태도 결정을 통해, 기독교를 증거하고 있는 무교회를 양현혜 교수는 소개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
마지막으로 무교회의 기성 교회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자. 우치무라는 전통적인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재래의 교회의 자유와 평화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또한 무교회 운동을 교회 안에서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무교회 운동은 재래의 교회와 정면에서 경쟁하고 대립하려고 하는 안티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교회는 인간의 구원이 율법의 업적에 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한다는 신앙적 귀결로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데 무교회가 기성 교회와 그 예전을 부정하면서, 부정 그 자체를 고정적인 형식으로 절대화하고, 자기 자신을 순수한 교회로서 정당화한다면 스스로도 교회주의의 정통성의 주장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치무라는 신에게만 의지하고 인간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하는 신앙이야 말로 제1차적인 것이었고 무교회주의는 제2차, 제3차의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교회는 부패해도 … 나는 그 안에 머무르고 계시는 성령 때문에 교회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교회를 성령이 머무는 곳으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교회의 폐지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었다.
이 점은 김교신에게도 동일했다. 그는 성서 연구 집회라는 집회 형식을 기독교 신앙과 구원을 보장하는 유일한 교회 형식으로 단언하는 주장이 있다면, 이것은 무교회가 비판해 마지않았던 '교회주의'로 무교회 자체를 퇴행시키는, 가장 커다란 함정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교회도 기성교회도 신앙과 구원을 관리하고 보장하는 조직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과 구원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도록 늘 깨어 자기 점검하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었다. 성직자, 성례전, 조직 등의 매개를 가진 기성 교회도 신앙과 구원을 증거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참된 교회이고, 매개 없이 이것을 추구하는 무교회도 이것을 증거하지 못하면 거짓된 교회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 문제에 대해 "만일 네 심정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교회원이 되는 전적 자격"으로 하는 교회라면 어느 교회든지 "나의 심정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참가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3. 나가면서
오늘날 무교회는 교회라는 제도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그것을 파괴하면서, 객관성과 주체성이 통일된 성서 연구와 이에 근거한 기독교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신앙고백과 증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감 있는 태도 결정을 통해, 기독교를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제도적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상운동으로서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양현혜 교수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