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한신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이장식 교수의 글이다. 옮긴이는 이장식이 구원을 받은 기독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구원의 확신이 개인에 달려 있다는 말은 절반만 정답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은 구원론의 심각한 상태를 반영한다. 옮긴이는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단번에(once for all) 우리의 죄책을 그에게 짐지우고 우리에게 칭의, 구원을 주신다고 믿는다. 구원파가 죄의 재범을 육에 속한 것으로 여기고 구원과 분리시키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바른 신학이 아니다. (최덕성)
구원파 신도와 프로테스탄트 신도/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최근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가 신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구원의 확신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교회에서는 한번 회개하거나 죄 용서를 받으면 단번에(once for all) 구원 받는 것이고 죄의 재범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그렇게 믿는 신도들을 순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순진성을 그러한 경신(輕信) 또는 맹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 교회의 그러한 구원의 확신문제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또는 신앙에 대한 설명과 다소 연관이 있는 것이어서 우리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한 번 짚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된다.
루터가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일개 수도자가 신부와 대학 교수의 자격까지 얻었지만 자기 구원의 확신 문제로 계속 고민(anxiety)하며 회의하고 있다가 어느 날 우연하게 로마서 1장 17절을 읽어 내려가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구원받는]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오직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이렇게 믿음으로 인한 확신을 강조했지만 그에게는 죄의식도 강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을 아주 잊어 버릴 수 없음을 비유로서 마치 벽에 박힌 못은 빼버렸지만 못 자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이 말대로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확신을 괴롭히는 것은 옛날 지은 죄의식이 주는 고민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루터의 구원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확신에 대한 고민이 그에게 없지 않다는 말도 되고 또 재범을 경고하는 말도 된다.
칼빈의 구원의 확신 문제는 어떠했을까? 그는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의 예정론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는 듯이 보인다. 그가 이 구원의 결정을 믿는 신앙을 갖도록 가르치는 듯한데 이러한 신학적인 논제 또는 교리에 대하여 칼빈 자신은 100% 확신을 가졌는지는 혹 고민은 없었는지? 칼빈은 루터에 비해 냉철한 지성인으로 간주되지만 그에게도 신앙 문제나 신학 문제에 회의 또는 고민이 없지 않았다.
그가 제네바 교회를 위하여 1536년에 만든 신앙고백과 소요리문답서에는 예정 교리나 예정 신앙 문제를 빼어버렸다. 실로 그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 구원과 은혜의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루터보다 그는 성서나 신앙문제에 있어서 의심스럽고 따라서 고민이 되는 문제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칼빈은 구약의 여호수아서 2장 1절을 주석하면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군을 보냈는데 그가 하나님과 사전에 의논하고 한 일인지 또는 하나님이 지시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회의하였다. 또 칼빈이 성서책은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사람이 받아 썼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가지고 칼빈주의자들 중에는 성서 문자무오설을 주장하여 그것이 정통 칼빈주의인양 주장하고 있다. 성서 축자영감설도 비슷한 논리이다. 그런데 칼빈은 신구약 성서에서 문자적 불일치를 발견하고 고민하였다. 야곱을 따라 애굽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수를 창세기에서는 70인으로 적었고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설교하면서 75인이라고 말한 것을 칼빈이 지적했다. 어느 것이 맞는 숫자일까가 그의 고민이었다.
위에서 루터와 칼빈을 대표적으로 종교 개혁자들의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구원의 확신 문제를 논했지만 신구약 성서에 있는 여러가지 그리고 그 많은 말씀과 함께 신학적 논제거리가 되거나 교회나 신조의 주제가 될만한 것이 많은데 그 어느 한 가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확답이나 확신의 근거를 삼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프로테스탄트 종교에는 많은 교파들이 있는데 이 교파들이 생긴 것은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특정 신학이나 교리나 신조를 표방하고 갈라진 경우가 많고 그리고 신학적, 교리적 배타주의 또는 독선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모든 교파들이 다 상대적이어서 어느 하나도 절대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독점한 것은 없다. 이것은 신도들의 구원의 확신이 어느 교파의 독점 판매와 같은 것이거나 특허픔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교파 이적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존 웨슬리 형제가 미국의 영국 식민지에 선교하러 가던 대서양 해상 여행 중에 심한 풍랑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을 때 보헤미야 교회 교인의 질문: "구원 받았소?"라는 말을 듣고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보헤미야 교회 신자는 풍랑 중에도 태연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웨슬리는 자기에게는 그와 같은 구원의 확신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보헤미야 교회 지역까지 가서 그들의 신앙과 구원 체험을 배우고 성령 운동으로 중생 곧 구원을 받게 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 결국 감리교의 창설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런던의 어느 대학의 교수 자격까지 가졌었으나 그러한 것이 자기의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웨슬리는 중생과 성화로 구원을 얻는 길이 되는 것을 설교했지만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완전한 성화나 중생을 얻기 어렵고 사후에까지 성화의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구원의 확답이나 확신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얻기 어렵다는 말이므로 구원의 확신이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 문제는 어떤 신학이나 교리나 신조나 제도가 해결하거나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 개개인의 믿음 즉 신앙에 달린 것인데 그것을 주관이라고 말하거나 개인적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영어로 "personal"하다는 말이 적합한데 신자 각자의 신심(信心)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에 대하여 고민하거나 회의하기도 하고 또 확신이 생기기도 하면서 믿어가는 신앙의 순례를 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 주어서 그 확실성의 근거를 개인이 아니고 교회가 제도로서 객관적으로 보장한다. 그 교회에서는 7종의 성례(성사) 중에도 영세와 고해성사(고백제도)와 성만찬 의식(예수의 속양의 피와 살이 된 포도주와 떡을 먹고 마신다는 신념)과 함께 그 의식들을 집행하는 신부들의 가진 속죄권을 신자들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러한 객관적인 구원의 보장 제도가 없으므로 구원의 확신에는 불안과 고민이 따른다. 그러나 이것을 오도하여 신도들을 미혹시키면 사교가 되는 것이다. 구원파의 과오와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