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주의의 부활

by dschoiword posted Apr 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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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주의의 부활


구원은 인간 자유의지의 결단에 달렸는가?




칼빈의 예정론은 틀렸다!

웨슬레가 더 성경적이다!

조봉상 목사


(L.A. 골든벨장로교회)


 

최근 덕정사랑교회 김민선 전도사님을 통해 지옥에서 형벌받고 있는 김정일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죽은 지 아직 두 달도 되지 않는 시점에서 지옥에 있는 김정일을 보여 주신 것은 오늘 지옥을 믿지 않거나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위해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김정일이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의심할 바 없지만 직접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그 목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한 영혼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천국들어가지 못하는 인생들의 종말이 너무도 비참하다는 것을 재삼 생각하게 된다.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김정일을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진노하신 얼굴이 아니라 그 영혼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물 흘리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김정일의 그 영혼까지도 사랑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가 살아 생전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렇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은 김정일같은 무신론자, 극악무도한 살인자, 독재자들까지도 구원시키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김민선 전도사님의 지옥간증은 그래서 우리에게 귀하고 크나큰 비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간증을 통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예정론을 고쳐 나가야 한다.

 

장로교는 칼빈주의를 기초로 해서 세워진 교단이다. 하지만 칼빈주의 예정론을 그대로 믿으면 대단히 위험하다. 왠고하니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하나님이 미리 다 정해 버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유기(버려진 자)된 자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고, 택함받은 자는 아무리 죄를 짓고, 혹은 탕자의 길을 가더라도 결국 구원에 이를 것이니 사람이 노력하거나 애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예정론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다가 지옥에 떨어질 확률이 엄청 높다.

 

한국 교회 60% 이상이 장로교인들임을 감안할 때, 이젠 이 왜곡된 예정론을 뒤집어야 할 때가 분명히 왔다. 칼빈주의 예정론으로도 천국갈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약간의 견해차이 정도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어떤 이론을 믿든지 천국간다면 문제 삼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서울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서울로 가지 않고 부산으로 가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곡된 예정론, 지옥가게 하는 예정론을 믿으면 큰일이다. 칼빈주의의 왜곡된 예정론을 바로 잡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게 생겼다. 나는 30년 이상 칼빈주의를 믿었고, 칼빈주의를 외쳤고, 칼빈주의만이 최고인 줄 알았다. 계속 그렇게 살았다면 나에겐 엄청난 비극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알미니안주의나 웨슬레의 교리는 아예 이단시 하였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하면서, 삶에 부딪치면서 성령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칼빈주의 예정론이 틀렸다는 것이다. 사복음서보다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서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복음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칼빈주의 예정론은 전혀 맞지 않는 교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알미니안주의를 공부해서가 아니다. 성경을 연구해서 얻은 결론이다.

 

나의 평소 주장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교리나 신학에 얽매이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보면, 확실히 칼빈주의 예정론은 맞지 않다. 오히려 웨슬레의 예지예정론이 훨씬더 성경적이다. 물론 웨슬레가 주장하는 것도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주장이 영혼을 살리는 교리이다. 칼빈주의자가 이단으로 정죄된 알미니안주의 편을 드는 것은 일종의 쿠데타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참선지자가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글을 읽고 바른 성경 진리를 깨닫는다면 참 구원에 이르게 될 줄 안다.

 

신학적 논쟁을 하자면 끝이 없는 법이다. 예수님이 오신 후면 몰라도 그 전까지는 신학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왠고하니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기 때문이고, 성경의 진리는 사차원, 오차원, 아니 영원한 세계의 진리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삼층천을 보고 온 바울도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예정론을 어떻게 생각하든 어떤 이론을 받아 들이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칼빈주의를 따라가든 알미니안주의를 따라가든, 웨슬레주의를 따라가든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론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주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따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정론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정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구원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예정론의 이해에 따라서 설교방향도 달라지고, 목회방향, 교회방향도 달라진다. 그러기에 최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호세야서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4:6) 하신 말씀처럼 예정론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음으로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썼기에,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 또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해석이 되어야 한다. 지식과 문법과 학식과 인간세상의 학문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자들이 많았다. 그 결과 그런 신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여 버렸다. 성경은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이 풀 성질의 책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말씀을 풀어야만 살아있는 진리의 지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성질의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보내 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정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속 사정을 깊이 아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1:5).

 

하나님 주시는 지혜를 받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가르침을 받아 예정론을 새롭게 접근할 때, 과거 잘못 알던 예정론을 바로 수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을 좀더 바로 세우고, 천국문으로 들어갈 자들이 더 많아 질 것이 분명하다.

 

1. 성경은 예정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분명히 지지하고 있다. 일을 계획하시고 창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예정이 없이는 그런 큰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33:2)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만 보아도 창조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예정이 어디에도 다 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새 일을 이루어 나가려면 반드시 일을 계획하시고 예정해야만 한다.

 

때문에 예정론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영국의 이신론자(Deism)들처럼 하나님이 한번 만든 이 우주만물은 마치 시계가 돌아가듯 기계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와 서로 교제하고,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인류 전체의 구원으로부터 한 개인의 구원과 사역까지 예정하시는 분이시다. 그것도 만세 전에 그런 계획을 세우셨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우리 각자를 위해 예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29“26)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


이처럼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여 나간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세상에 되는 일이 없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참새 두 마리가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악인들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태어났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이 세상의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종말도 하나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그 알파와 오메가 속에 들어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 들어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살 수 없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하시질 않는가?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 특히,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거대한 사업이 어찌 우연으로 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과 예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하기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예정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필수요소임이 분명하다.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백성 삼으심도 이미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예정이 되어 있었던 부분이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1)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 사람이 계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이고 주도적으로 계획을 하신 것이다. 사람과 상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선택이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것들을 예정하시는가?

 

1)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신다.

 

아담의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 주시기로 예정하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계획 중에 가장 큰 계획이 분명하다. 만약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는데 영생을 예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주기로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때가 차매 이 땅에 보내주실 계획을 세우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 17)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려고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믿는 자는 다 구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에서처럼 하나님이 선택한 자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으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정해 주신 것이다. 만세 전에 벌써 이렇게 하기로 예정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예정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예정이 된 것이다.

 

2) 주의 사역자들을 위해 특별히 예정하신다.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시키려는 예정도 있지만, 그 가운데 주의 일을 할 종들을 예정하시는 일도 하신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선지자나 사도 등 자기 종들을 선택하신다. 모세를 부르시고, 기드온을 부르신다. 이사야를 부르시고, 열 두 제자를 부르신다. 그런 부름은 사역자로 부르는 특별한 부르심이다. 제자들을 택하시는 장면을 보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15:16)

 

여기서 택했다는 것은 구원받을 자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택한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구원의 반열에 든 사람들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이 특별히 쓸 사도로 부르신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예레미야를 보자!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1:5-7).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택하셨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때가 되매 부르시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사역을 위한 특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선택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불순종하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를 사용할 수는 없다.

 

오늘 많은 주의 종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잘못된 주의 종의 길로 갈 때, 그들이 지옥심판을 받고 있지 않는가? 요나와 같이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 치시고 깨닫게 해 주실 때, 빨리 돌아가야지 요나도 계속 불순종했다면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하나님이 요나를 강제로 끌어오는 것처럼 누구든지 예정된 자는 그렇게 하신다고 믿는다.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권면하는데까지 하신다. 기회도 많이 주신다. 그러나 끝내 본인이 싫다고 한다면 하나님도 그를 더 이상 사용하실 수가 없게 된다.

 

바울도 자기를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 택정했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방민족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1:15, 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66:21)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지라.” (21:5)


3) 한 민족을 택하신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민으로 택하셨다. 민족 단위의 택함이었다. 그 선택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조상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택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별하셨다.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14:2)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135:4)


이렇게 민족적으로 선택받은 것은 대단한 복이다. 그 민족에 소속되어 있음으로 구원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을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는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7:6,7)


이 선택 또한 이스라엘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해 주셨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45:4)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이렇게 민족적인 선택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막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방인들, 중다한 잡족들이 구원을 받았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가? 요셉과 결혼한 아내는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다. ‘지역은 태양신 숭배의 중심지였으니 아마도 보디베라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이고, 아스낫은 그 딸이다. 그래도 요셉과 결혼함으로 이스라엘 족속의 한 일원이 되고, 그 자녀들은 자연히 이스라엘 민족과 지파가 된다.


기생 라합은 어떤가? 가나안 여인이었지만, 정탐군을 숨겨 줌으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 합류하게 되고, 그의 가족들도 함께 구원의 반열에 든다.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다. 모압여인 룻 또한 마찬가지다. 출애굽할 당시 중다한 잡족들이 딸아 나왔다. 그들 역시 이스라엘 족속과 함께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민족 중에 이스라엘에 합류하여 사는 자들에게는 할례를 행하게 하였다. 할례는 구약시대에 구원받은 표시가 아닌가?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을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17:12, 13).

 

구약시대에도 벌써 이방민족에게도 얼마든지 구원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만 택하였다는 말은 정확하지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였지만, 이방민족에게도 구원의 문은 열려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았던 자는 다 멸망받아 지옥에 떨어졌다. 그러니 구약 시대에도 선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고 나아가는 자는 다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성도를 택하신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갈 족속들을 택하신다. 왕같은 제사장들을 특별히 구별하신다. 이렇게 선택받은 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선택을 특정인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다 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값없이 주셨는데, 여기에 순종하고 따라 나선 자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 이런 은혜를 무시해 버린 자들은 그 특권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5) 가난한 자를 택하신다

 

마태복음 5장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가난한 자편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부자는 미워하시고 버리시는가? 아니다. 부자도 똑같이 사랑하신다. 다만 문제는 부자들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로 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자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 주고 계신다. 부자청년이 영생얻는 문제를 가지고 왔을 때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계명을 다 지키고, 재산 다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라오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그것은 그 부자청년에게 구원을 주시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지만 그 부자 청년이 돈을 더 사랑하였기에 자기에게 온 구원을 스스로 버려 버렸다.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는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재판을 할 때도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평하게 하라고 하시질 않았는가?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의지할 것이 하나님밖에 안 계시기 때문이다. 가난이 자랑이 아니다. 구원받을 자격 대상도 아니다. 가난한 자들을 택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2:5)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6) 왕을 선택하신다.

 

예수님의 만왕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 왕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신다. 아무리 불신자 왕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폐하신다. 사울왕을 누가 선택하셨는가? 백성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삼상 10:24)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나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0, 12)

 

이렇게 하나님이 왕을 선택하신다. 그러나 사울왕처럼 하나님께 불복종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다. 후회라는 부분은 예정론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또한 후회할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다.”(삼상 15:26)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이 부분도 하나님이 미리 버릴 것을 작정하시고 사울왕을 세웠다고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시다. 믿을 수 없게 한 것은 사울왕이다. 사울왕이 말씀을 버렸기에 하나님도 그를 버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그를 버려야 한다는 그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버려지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영영한 왕위를 잇게 해 줄 계획을 세우셨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하나님은 사울왕을 선택하실 때, 그가 겸손했던 것이 그 이유이다. 그를 세우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줄 아셨다. 그런데 그 기대를 져버렸다. 교만해 졌다. 불순종했다. 그러니 결국에는 그가 버림을 당하고 만 것이다.

 

7) ‘남은자를 선택하셨다.

 

엘리사가 이세벨에게 쫓길 때, 자기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였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우상숭배 하지 않은 자 7천을 남겨 두었다고 하셨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1: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7천명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이 무릎을 꿇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에 그 7천명을 택했는지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 택했기 때문에 그들이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그들의 자유의지나 선택은 무엇이 되는가? 그렇게 하나님께 로봇처럼 조종당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겠는가? 소위 말하는 꼭두각시 노름이라는 것을 보라! 인형을 만들어서 위에서 줄을 만들어 사람들이 댕기는대로 인형들이 움직인다. 그들이 꼭두각시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주의 백성들이 꼭두각시처럼 하나님이 예정하고 조종하는대로 움직인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칼빈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바알에게 무릎 꿇고 안 꿇고는 전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그 결정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다 꿇어 버리고 겨우 7천명만이 무릎을 꿇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시고 남겨 두신 것이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9:27, 28)

이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남겨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인내했기 때문에 남은자의 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8) 약속의 자녀를 선택하신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1)

 

야곱은 선택받고 에서는 버림받는 것이 본인들의 선택이나 행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라는 바울의 주장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9:14-18)

 

이 부분을 언뜻 보면 칼빈주의 예정론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주권은 분명히 절대적이다. 이 모든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까지 지으신 분이신데 어찌 그 분의 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바울의 이러한 신본주의적인 주장은 우리가 반드시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인간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그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한이 그 하나님께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9:21-23)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의한 자들이요,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를 뿐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문제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이니 믿음생활 더 철저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은 바로왕이 처음부터 강퍅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악역을 맡은 배우인 것처럼 설명한다. 그 마음을 강퍅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그럼 하나님이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케 해서 악을 행하도록 만드는 조종자인가? 여기서 우리는 큰 혼동을 하게 된다. 칼빈주의자들의 해석으로 보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왜냐하면 바로왕은 유기된 자,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자로 하나님이 예정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하나님은 바로왕조차도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그가 돌이켜 그 큰 능력을 보고 회개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지옥 간증자의 증언을 빌리면, 바로왕에게 능력을 보여 주심은 그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바로왕을 이해할 때, 그가 강퍅케 된 것은 자기 권력욕 때문이요,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이집트의 신, 사단 마귀가 그렇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출애굽할 당시 바로왕의 발악을 할 때, 사단 마귀는 어디가 있었겠는가? 바로왕 속에서 역사한 것이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와 강퍅케 할 자들을 하나님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처럼 보이나 본 뜻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했지만 사단의 공격을 받아 마음이 더 강퍅하여졌고, 강퍅했기에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긍휼히 여김받을 받은 자들은 그만큼 믿음생활을 잘 했기에 긍휼히 여겨 주신 것이다.

 

노아의 사적도 그렇다. 그는 당대의 의인이다. 그 가족 외엔 구원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나머지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 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즉시로 심판해 버리지 왜 120년이란 세월을 주셨겠는가?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했다면, 그리고 하나님도 그들을 이미 버렸다고 했다면 노아는 왜 전도하고 다녔겠는가?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노아가 120년간 배를 지으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의를 전파하고 다녔다. 전도하고 다녔다. 회개를 외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했다. 결국 노아 가족만 선택받아 구원함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바로 이해하자! 선택도 바로 이해하자! 운명론에 빠지게 하는 칼빈주의를 따라가지 말라! 다 죽는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성경이 말씀하시는대로 따라가면 산다. 영생에 이른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아무리 의를 행하다가도 죽을 죄를 지으면 그 의가 무효가 되고, 구원이 취소가 되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그러나 아무리 죽을 죄인이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켜 새사람이 되면 구원함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되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참구원에 이르는 자들이 되라!

 

3. 영생이 예정된 자들은 무조건 다 영생을 얻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과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상호관련 되는지를 결정짓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무조건 다 이루어진다고 믿어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계획한 것은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거짓말이고, 또 있다면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으시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것을 못한다고 한다면 전능한 하나님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하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를 한번 보자!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선택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져버리니까 결국 죽임을 당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른 자들을 하나님이 죽이시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칼빈주의 예정론에 의하면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아니면 그들은 처음부터 예정된 자가 아니라고 봐야 하는데, 그렇게 보기엔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예정해 버렸다. 예정을 했더라도 그들의 행위나 결정이 잘못될 때는 하나님도 그들을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들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제단에서 나온 불에 타서 즉사하였다. 칼빈주의식으로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것을 두고서도 나답과 아비후가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버림을 당했다고 구차하게 변명할 것인가?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무조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우리 인간의 의지는 개입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에 일종의 숙명론 같은 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을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인간의 의지나 결정, 판단, 행동에 상관없이 이루어나간다고 한다면, 우리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숙제가 남는다. 하나님이 다 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우리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해서 그저 의지가 없는 어떤 물건처럼 다루어지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도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셨더라도 우리 인간이 거기에 불순종하고 나올 때, 그 예정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베드로가 권면하고 있는 대상은 이미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요, 택함을 입은 성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더 힘쓰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의지나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나아갈 때는 하나님의 예정도 택하심도 구원도 다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이 맞다면 베드로가 이렇게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힘쓰고 애쓰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들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대로라면 성경을 다시 쓰든지 아예 많은 부분 삭제해 버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택함 받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할 때는 버림받게 된다. 고라와 250명의 족장들이 그 예이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250인을 소멸하였더라.”(16:2, 33, 35)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 해도 인간의 결정에 따라 그 예정은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려 할 때, ‘언약을 세우신다. 그 언약은 일방적이지 않다. 한 쪽이 약속을 어기면 그 언약은 깨어지게 된다. 우리의 구원도 언약이다. 예정이다. 예정은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것이다.

 

모세도 광야에서 반석을 두 번 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어떻게 되었는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모세도 가나안에 들여 보내는 것이었지만, 중간에 그의 잘못으로 인해 그 계획이 변경된 것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그를 통해 사도직을 주어서 주의 일을 할 예정을 세우셨다. 하지만 그가 마귀에게 넘어가 예수님을 팔고 자살해 버렸기에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빈자리를 맛디아를 세워 감당하게 하셨다.

천국 체험자들의 간증에 의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중간에 배신한 자들은 예수님이 천국에 있는 지어지던 그 집을 예수 더 잘 믿는 종들에게 준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라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획의 변경은 구원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는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까지 아니하시리라.”(11:20 -22)

 

이사야 5장에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하나님의 실망이 나온다. 하나님의 기대는 좋은 포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허물어 버리신다. 아무리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셨더라도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면 하나님도 그 구원을 취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에서 양과 염소는 모두가 믿는 자들이다. 그런데 양들은 구원받고, 염소들은 지옥에 들어간다. 그 심판의 기준은 행함이다. 불쌍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심방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이들을 다 구원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셨지만, 각자의 행위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의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25:41-43)

 

그러므로 구원이 예정되었다고 안심할 수 없다. 예정된 그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때문에 구원받았더라도 다시 죄를 짓게 되면 천국을 잃게 된다. 주님은 그것을 염려해서 얼마나 죄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는지 모른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9:43)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 30)


아무리 주님이 제자로 불러 주셨더라도 이 땅에 것들을 버리는 결단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돌아가 버린다면, 그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서 그 예정이 얼마든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면서 치여죽은 자들이 있었을 때, “너희도 이와 같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망하리라하셨다. 아무리 하나님이 계획하셨더라도 죄를 짓고 마귀를 따라간다면 그 구원에 대한 예정은 취소됨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3:16)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4:48-51)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리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25:28-30)

 

4. 하나님은 지옥에 던질 자들도 택하시는 분이신가?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구원받을 자만 택하는 것이 아니고 버릴 자들도 하나님이 택하신다는 이중예정교리를 믿는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처음으로 주장했고 칼빈이 교리화 한 것이다. 이것을 무서운 결정’(deretum horribile)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 자신만이 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나쁜 분이 되고 만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3).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에서 야곱과 에서를 그들의 행위나 선택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이해한다. 언뜻 보면 에서는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출애굽해서 가나안 들어가는 노중에 하나님은 에돔 족속을 손대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은 에돔 족속도 사랑하신 것이다

 

흔히 가나안 족속들은 버림 받은 자들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저주받고 지옥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말인데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쁜 분이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어떻게 아는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려고 하실 때, 가나안 족속들도 거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의 죄는 너무도 더럽고 추악하다. 우상숭배, 동성연애, 율법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죄가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죄였다.


그래서 그것을 본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그 율법을 주신 것이다.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바로 줄 수도 있었지만 그땐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들의 죄가 아직 관영하지 않았고, 하늘에까지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가 차기까지 4대가 걸릴 것을 아브라함에게 예시해 주셨다. 만약 그 중에 가나안백성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다면 그들은 땅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죄가 4대만에 하늘에까지 찼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심판을 이스라엘 손에, 여호수아의 손에 맡기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던 그런 시각을 벗어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누군 사랑하고 누군 미워하는 분이 아니다. 물론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부분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모든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나가야 한다. 그렇다 해서 죄를 지어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회개치 않을 때는 무서운 진노와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라. 거기에 수많은 나라의 심판들에 대해서 나온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 두로, 시돈, 니느웨 등등... 왜 이런 나라에 대해 죄를 물으시고 심판한다고 하시는가? 어차피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민족이고 망할 민족인데 그냥 쓸어 버리면 되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게 하시는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게 하신 것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들 역시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경고 없이 그냥 심판하면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여! 나만 구원받았고, 우리 교회만 구원받았고, 미국만 구원받고 선택받은 종족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지금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신다.

 

가룟 유다를 택한 것도 하나님이 그를 배반하도록 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서 그를 선택했다고 본다. 그런 해석은 맞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에서가 장자권을 팔도록 하나님이 택하셨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에서가 장자권을 자기 의지로 팔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지하신 것이지 예정하신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돈에 눈이 어두워서 팔 것을 아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작정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조장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에서가 버림받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의지요 결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이 구절을 칼빈주의자들은 창세 전에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하나님이 그 뜻대로 선택해 놓았다고 해석한다. 그러니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타고 난 자들도 있다는 말이 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길 원하시지 한 영혼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심지어 지옥에 떨어진 김일성, 김정일, 모택동, 스탈린 같은 자도 주님은 사랑하셨다.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 자녀들과 마귀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임의로 구별해 놓았다고 믿는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6:70)


언뜻 보기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절을 잘 읽어 보라!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다. , 하나님이 지옥가도록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이 의를 행치 않는 것이 아니라, 의를 행치 않기 때문에 마귀에게 속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을 모두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 가룟 유다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예수님 팔 생각을 넣었기에 그는 예수님의 사도에서 마귀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13:48)


이 구절 역시 칼빈주의 예정론을 뒷받침 해 주는 구절로 보인다. 왜냐하면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라는 말이 마치 하나님이 영생얻을 자들을 미리 정해 놓았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택자와 불택자가 있는데, 복음을 전하면 택자는 믿을 것이고 불택자는 믿지 않는다고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양으로 예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양으로 삼으시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심은 특정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자들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를 때, 누구든지 오는 양들은 예수님의 양으로 선택하시는 것이다.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말씀이다. 다만 순종하고 주께로 나오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이고, 영생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이 유기시킬 자’ ‘지옥 보낼 자도 예정하셨다는 것은 잘못된 이론이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고, 모든 자를에게 다 기회를 주고 계신다. 때문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그 은혜의 구원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게 된다.


5.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는?

 

칼빈주의 예정론은 자유의지는 죽었다고 본다. 선을 택할만한 자유의지가 죄인은 인간에겐 없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에 자기의 의지로 선을 택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해서 구원해서 천국 들어가는 것까지 다 책임지신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웨슬레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기 인생의 운명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은 우리의 책임을 요구한다. 책임을 요구한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하나님은 복음제시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여신다. 그러나 그 구원을 선택하고 안하고는 사람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원함으로 따라오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때 시몬베드로가 대답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68)


예수님을 따르고 안 따르고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는 없다. 때문에 자력구원설은 맞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을 받아 들이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결단을 내려야 할 부분이다.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다 한다면 우리는 로봇이나 의지가 없는 짐승, 혹은 물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기 때문에 강제로 막지 않으신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가지 지켜 보고 계신다. 스스로 안 따먹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의지로 죄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의지로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시고,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12:2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6:16-19)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히 살 길을 제시하셨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거부했다.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모으려 함 같이 여러 번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시키려 했지만, 끝내 거부했다. 그랬기에 예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예정이 되어 있더라도 우리의 자유의지로 생명의 길로 선택해야 한다. 천국 들어가는 그날까지 우리의 의지로 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4:11)

 

놋뱀 사건을 보라! 누구든지 놋뱀을 보면 살 수 있다. 하지만 놋뱀을 보지 않는 자는 살 수 없다. 결과는 어떠한가? 광야로 나가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본 자는 살았고, 나가지 않은 자는 죽었다. 이것이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은 것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단해서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죽었다혹은 루터가 말하는 노예의지는 틀린 말이다.

 

6.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마귀가 개입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예정을 방해할 수도 있고, 취소하게도 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계획을 마귀가 직접 방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불순종하게 만들고, 죄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이 구원을 주고, 영생을 주기로 작정해 놓았더라도,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마귀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비록 선택된 자라 할지라도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마귀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말은 맞지 않다.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고 예정하고 선택하지만, 마귀는 구원받은 자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계획하고, 작전을 세운다.

 

어디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나의 녹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리라.” 하셨다. 마귀가 생명책에 이름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가 사람들을 범죄케 함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우게는 할 수 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13:2)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를 팔도록 뒤에서 조종한 자가 바로 마귀이다. 마귀는 사람을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바꾸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귀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예정에 마귀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방해해야 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4:27)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1)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2:10)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사단은 또한 잘못된 예정설을 믿게 해서 잘못된 안심을 하게 만든다. 이것이 소위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이 하는 일이다. 칼빈은 지옥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의 예정설은 사단이 개입해서 만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칼빈주의 예정설을 믿게 해서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가는데 마귀는 그동안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성공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지옥으로 떨어진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천국에 반드시 들어갈 자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그럼 누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 바리새인들이다. 왜냐? 사단이 그들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민사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하거나 혼동시켜서 진리의 지식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만약 택한 자는 사단이 헤치거나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없다면 사단은 성도들을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공격해 봐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예정된 자를 공격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사단이 공격해 오는 것은 얼마든지 성도들을 지옥으로 끌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에 이미 넘어간 자들도 있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24:24)

 

사단은 표적과 기사까지 일으켜서 택하신 자들이라도 미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마귀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칼빈주의 예정론은 마귀가 공격해 온다는 그 변수를 빼버렸다. 왜냐하면 그 이론을 만든 자가 사단 마귀이기 때문이다.

 

7. 예정의 대상은 소수의 사람들인가? 모든 사람들인가?

 

이 문제는 예정론을 푸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일부만을 선택하였는가? 아니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디도서 2:11)

 

하나님이 구원하실 대상자는 모든 사람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하기를 예정된 모든 자라고 구차한 변명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자이다. 거기엔 살인자도 포함되고, 히틀러도 포함된다. 전인류를 다 선택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그렇다고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면에서 모든 사람이지, 그들이 다 구원을 받게 한다는 말씀은 아니다. 절대로 만인이 다 구원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천국의 좁은 길로 가는 자들보다 지옥의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구원받을 기회만큼은 모든 자에게 주셨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칼빈의 제한속죄론은 성경을 왜곡하는 이론이다.

 

만약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버린다고 한다면 하나님도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 강제로 구원의 길로 끌고가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칼빈주의자들은 흔히 이런 비유를 한다. 감옥에 사형수들이 가득 있는데 그 가운데 몇 명만 대통령 특사를 받아 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로 인해 죽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몇 명을 구원시키기로 택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사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기로 한 것이다. 때문에 그 감옥의 문을 열어 놓고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나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비유가 될 것이다. 언제 생명샘으로 선택된 자만 오라 했는가? 누구든지 오라 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22:17)

 

하나님은 모든 자에게 구원의 문을 다 열어 놓으셨고, 그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말하는 선택교리에 더 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칼빈주의 예정론은 틀렸다. 알미니안주의가 이단이 아니라 칼빈주의는 이단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 젖어있는 것처럼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착각속에 살고 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선택된 자만 구원받고, 그들만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면, 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전도하시고,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셨는가? 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받게 하셨는가? 유대인들이 개취급하던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에디오피아의 내시 간다게도, 이탈리아의 군대 백부장도 모두가 다 구원의 대상이었다. 김일성 같은 독재자들, 히틀러같은 자들, 뭇솔리니, 스탈린 같은 자들도 다 구원의 예정에 포함되어 있다. 다만 그들이 예수를 배척했기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시키기로 예정하였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마태복음 22장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거기서 천국이 어떤 곳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어떤 사람이 선택받아 구원에 이르고, 어떤 사람이 버림받아 지옥에 가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칼빈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은 분명히 이 말씀을 읽고 머리 속에 잘못 들어 있는 칼빈주의를 씻어내 버리기를 바란다.

 

<마태복음 22>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손님들을 초대했지만 오지 않았다. 재차 종들을 보내어 손님들을 청했지만 자기 일들이 바쁘다고 오질 않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 종을 잡아 능욕하고 죽여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군대를 보내서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먼저 선택받은 유대민족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다. 수많은 민족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특권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였다.

 

심지어 예수님을 못박아 죽여 버리는 장본인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갈 구원을 취소시키고, 그 구원을 전세계 민족에게로 확대시켰다. 그것이 9절에 나온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느라고 한 것은 이제 유대민족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민족, 누구나가 올 수 있도록 길을 여신 것이다. 그래서 종들이 나가서 만나는대로 닥치는대로 다 데리고 왔다. 거기엔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고, 누구든지 데리고 왔다. 앞에서는 임금이 특별히 선택된 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서 오라 했다.


그러나 뒤에 오라고 할 때는 초청장도 없다. 닥치는대로 오라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원 얻을 수 있는 범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였다는 말씀이다.

 

문제는 그 초청에 응하고 응하지 않는 인간의 응답의 문제이다. 아무리 초청해도 오지 않는데는 하나님도 별 수 없다. 그러나 온 사람들은 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다만 청해서 오긴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자가 있었는데, 그 자는 다시 쫓겨났다. 이 사람 역시 예정함을 입어 교회에 들어온 자였지만, 믿음의 준비를 못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고 하셨다.

 

여기서도 주님은 분명히 택함이라는 단어를 쓰셨다. 그러나 이 택함은 칼빈주의자들이 택함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미리 택했기 때문에 그 후속 조치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여기서 택함이라 함은 모든 사람을 다 초청하고, 구원하기로 예정했을 때 그 초청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따라온 자들만이 택함을 입은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예정하고, 다 택해서 천국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얼마는 세상일이 바빠서 돌아가 버리고, 그 가운데 얼마만 순종하고 따라왔으니 그들만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은 틀렸다. 하나님은 절대로 얼마는 선택하고 얼마는 버리지 않았다. 다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 만약 전 인류가 다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간다면 하나님은 전인류를 다 선택하여 천국에 데리고 가실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전인류가 순종하지 않고 그 가운데 겨우 소수만이 순종하고 따라가니 주님은 가슴 아프게도 소수만을 선택해서 천국에 데리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버려지는 것이지 하나님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보시고 주님이 우시겠는가?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 주님은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보고 절대 울지 않으실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1,000명 중에 한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순종하고 따라오니 그 잃어버린 영혼들, 지옥가는 영혼들 때문에 얼마나 가슴아파 하고 계신지를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자비롭고 사랑많으신 하나님을 왜 칼빈주의자들은 몹쓸 하나님, 차별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그 칼빈주의자들을 뒤에서 움직인 자가 누구인가? 사단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어리석은 칼빈주의자들! 이 글을 읽고 돌이키라! 그리고 바른 복음을 전하라!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라! 그 여인은 이방여인, 가나안 여인이다. 저주받은 민족 아닌가? 유대인들은 그런 자를 개취급하였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런 자들에겐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달려들 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예수님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돌아서셨다. 그렇지만 그 여인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먹고 산다는 말에 감동을 받으시고 감탄하시면서 귀신 들린 그의 딸을 고쳐 주셨다. 그 여인과 그 딸은 육신의 구원만 아니라 영혼 구원까지 받은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이 택정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기에 선택을 받은 것이다.

 

제발 정신차리고 이 사실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택정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에 믿고 순종하고 나가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무리 예정을 해 놓았더라도 가룟 유다를 보라! 자기가 배신하고 돌아서니까 지옥이지 않는가? 칼빈주의자들의 말처럼 가룟 유다는 예정을 받지 못했으니까 배신했고 지옥갔다는 어리석은 말을 되풀이 할 것인가? 성경에 어디 가룟 유다가 택함을 받지 못했다고 나와 있는가? 예수님이 분명히 열 둘을 택하셨다고 했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고 하셨다. 그렇게 택해 주었지만 자기가 싫다고 떠나는데야 예수님도 어떻게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틀렸다. 그런 예정론은 오히려 구원을 가로막는 독소이다. 사단이 쳐놓은 함정이다. 거기에 빠지면 다 죽는다. 돌이켜라! 돌이켜라! 칼빈주의 예정론에서 돌이켜라!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교훈으로 돌아가라! 예수님이 칼빈보다 훨씬 나으신 분이다. 칼빈은 피조물이요,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다. 이 성경을 친히 말씀하시고 쓰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반복되는 내용을 언급하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과 반대되는 예정을 이해해 왔다.

 

하나님이 먼저 백성을 삼아 주셨으니까 택정을 받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어 진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들이 피동적으로, 마지 못해, 억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순종함으로 나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강제로 끌어가는 법은 없다. 칼빈주의의 견인교리는 맞지 않다.

 

신명기에 보라! “내가 너의 앞에 두 길을 둔다. 하나는 생명의 길, 하나는 사망의 길, 선택은 네가 해라!”고 하질 않는가? 신명기 3015절 이하 말씀이다.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구원받기로 예정된 민족 아닌가? 그렇게 예정이 되어 있다면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뭐 있겠는가? 칼빈주의 예정론에서처럼 하나님이 견인해서 구원에 이끌어 주실 것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그들의 선택에 맡기신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강제로 선택하게 하지 않는다. 선택은 너희들이 하라는 것이다. ‘생명사망’ ‘를 이스라엘 앞에 두셨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두셨던 것처럼 말이다. 따먹고 안먹고는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아담의 의지요 선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길을 택하든 사망의 길을 택하든 그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의 몫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사망의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이 망하고 죽을 자는 죽고 나머지는 다 포로로 끌려가 버렸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했지만 불순종하니까 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예정론이 맞다고 우기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선민사상에 젖어 있다가 망하려는가?

 

하나님은 비록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불순종하고, 예정의 뜻을 거스릴 때는 어쩔 수 없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천국은 불순종하는 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다 예정함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 예정도 순종치 않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말았다.

 

오늘 인류는 예수님의 예정을 다 입고 있다. 구원의 기회를 다 주고 있다. 그 기회를 붙잡고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유로 삼으신다. 그렇지 않는 자는 아무리 예정함을 입었더라도 버리움을 당한다.

 

만약 이렇지가 않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구원받을 자와 버릴 자를 선택해 놓았다면, 이건 인간을 완전 로봇이나 물건혹은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갓난 아기처럼 취급해 버렸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우리를 천사들보다 더 귀한 존재로 여기신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시고 왕같은 제사장이라 불러 주시는가? 그런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의지도 없고 자기 판단도 못하는 물건이나 짐승처럼 만들었단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자! 하나님이 가인을 일방적으로 미워하였는가? 아벨만 사랑하였는가? 아니다! 둘 다 사랑하셨다. 문제는 가인이다. 그의 속에 죄가 숨어 있었고, 자기 제사가 올라가지 않자 그 분풀이를 아벨에게 한 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가서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고 경고해 주셨다. 이것은 가인에 대한 사랑이고,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크게 배려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가인이 버림받은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말라!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말라기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1:2, 3)라고 말씀하고 있다. 칼빈주의 예정론에서 보면, 너무도 완벽한 말씀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고, 에서는 무조건 미워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하나님은 에서도 사랑하셨다. 하지만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무참히 밟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한 불신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증거다. 나중에 그 장자권을 위해서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가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지만 에서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워하신 것이다. 야곱이 사랑받은 것은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야곱이 큰 자가 되고 에서는 잘못될 것을 미리 아시고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예지’(미리 안다는 뜻)라 그런다. 하나님이 예지하신다 해서 예정하신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지와 예정을 혼동하고 있다.

 

8. 선택되었기에 믿는 것인가? 믿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인가?

 

하나님편에서 볼 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선택했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과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이 선택을 해서 믿음을 주어도 끝내 거부한다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러니 주님은 모든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했지만 믿고 따라오는 자들, 순종하는 자들만 선택해서 천국에 데려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인간편에서 본다면 믿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의의 길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열어준 구원의 길을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책임이다. 믿는다면 구원에 이를 것이고, 안 믿는다면 저주에 이를 것이다. 이것까지 하나님의 영역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3:20)

 

아무리 택함을 받고 교회를 다니고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돌이켜 악을 행하면 이미 행한 그 의는 무효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정론자들의 말이 전혀 맞지 않음을 말해 준다.

 

또한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돌이켜면 과거의 모든 죄를 없애주고 구원에 들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론자들의 말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더욱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되고,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늘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들은 바 말씀에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1,2)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6:6)

 

9. 예정과 성도의 열매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정은 어디까지나 예정이다. 구원하기를 예정하신 것이지, 그 예정이 구원은 아니다. 그 예정이 구원으로 완성되려면, 성도의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열매가 잘못되면 다 잘못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6:7,8)

 

믿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다. 하지만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최종적인 기준은 얼마나 열매를 맺었느냐에 달려 있다. 행위를 부정하는 칼빈주의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져진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고, 구원의 길이 열린 상태에서는 더욱 힘써 열매를 맺어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흔히 성화는 구원과 관계 없다고 말하는데 잘못이다. 성화를 온전히 이루지 못하면 구원에서 떨어진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받고 저주받고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예정을 믿고 나는 구원받겠지하고 대충 살다간 큰 일 난다. 말씀대로 안 살아도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예정은 어디까지나 예정이다. 예정이 실제로 옮겨져야 실제가 되는 것이다.

 

예정되었다고 믿어진다면 열매를 맺어서 그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열매로 증거하지 못하면 누가 그 사람을 예정받은 사람이라, 택함받은 사람이라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칼빈주의에 서 있는 자들은 택함을 입은 그 감격과 은혜 때문에 더 힘써 전도하고, 봉사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 모두가 하나님의 예정을 입었지만 삶을 통해 엉겅퀴 인생을 살게 되면 그 구원은 취소되고 지옥에 던져져서 불사름이 된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으면 천국에 들어간다.

 



10. 결론

 

예정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잘못된 지식은 사람을 죽인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게 한다. 지옥에 떨어져서 내가 잘못 알아서 그렇게 했다고 할 것인가? 칼빈의 예정론은 잘못된 이론이다. 칼빈주의자들이 만든 5대교리는 성경적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교리임을 경고해 둔다. 루시퍼는 예정론을 선택했다. 칼빈을 사용하여 루시퍼는 자신의 예정론을 교회에 퍼뜨렸다. 그로 인해 루시퍼는 너무도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었고 앞으로도 끌고 갈 것이다. 주의 종들도 성도들도 예정론에 속아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다.

 

왜 루시퍼에게 속으면서도 모르는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누구든지 이 땅에 있을 때 기도하고 말씀보면 영안이 열린다.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님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고 하질 않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지식의 은혜도 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 대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아무리 나쁜 자들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이 받아 주신다. 아무리 믿음생활 잘 하던 자들도 죄에 빠지고 믿음에서 떠나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들을 하나님이 견인교리로 구원시켜 준다고 하는데 아니다. 구원의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셨다. 또한 성령을 보내서 구원얻을 자들을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순종하고 따라가는 자들이 성령이 보증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예정을 거부한다면 구원에서 탈락한다. 하나님이 그를 위해 구원을 계획해 놓았지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가 마귀 사단 루시퍼이다. 이들은 구원받은 자라 할찌라도 지옥에 끌고가는 것이 목적이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옥으로 끌고간다. 안타까운 사실은 성도들만 아니라 목사님들까지도 지옥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예정론을 깨달아서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의 친백성들이 되기를 힘써야 할 줄 믿는다.

 

오직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분이십니다!

 

bongsang9@hotmail.com